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는 게. TV나 영화에서는 이 벅찬 감정을 잘도 혼자 삭히던데,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하루라도 더 참으면 감정이 새어나와 터져버리기라도 할 것 같았다.
“ 좋아해, 한빈아. ”
하늘은 파랬고, 바람이 잔잔히 불어오는 예쁜 날이었다.
그 날, 난 고백했다. 김한빈에게. 너를 좋아한다고. 혼자 맞잡은 내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올려다 본 너의 눈동자는 단호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어떤 대답도 없이 너는 나를 뒤로 하고 멀어져갔다. 하얀 내 운동화 발등 위로 벚꽃잎이 앉았다.
그후로도 한동안 나에게 네 목소리를 들을 기회는 없었다. 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네도, 짧은 시선만이 내게 머무를 뿐 너는 입술 한 번 열지 않았다.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면, 나같은건 보지도 못했다는 듯 무심하게 부딪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 너 그 말 들었어? ”
“ 무슨 말? ”
“ 김한빈, 옆 반 전학생이랑 만난다는 소문이 있던데. 진짠진 몰라도 둘이 엄청 붙어다니더라. ”
“ 아...그래? ”
친구가 아무렇지 않게 한빈이의 소식을 전해 왔다. 순간, 너를 좋아하는 내 마음을 네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음이 다행처럼 느껴진다. 내 초라함은 나만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프니까. 너의 무심함이 너무 아프니까.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내가, 혹시 사실이라면 빨리 헤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내가 너무 초라해서.
소문을 듣기 무섭게, 너는 그 여자애와 웃는 얼굴로 학교를 누비고 다녔고 어딜 가나 환영처럼 쫓아다니는 너의 웃는 얼굴 때문에 나는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어쩌다 또 운없게 그 여자애와 함께 있는 너를 마주쳤을 때, 그때도 여전히 같은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며 한빈이가 말했다. ‘비켜.’ 그토록 듣고 싶던 목소리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더니- 하고 혼잣말을 내뱉아 본다. 그래도, 그래도 이렇게 비참할 것까진 없었잖아.
“ 너, 요즘 무슨 일 있어? 말수도 적어지고, 예전처럼 웃지도 않고. ”
짝꿍이 투덜대듯 말을 걸어온다. 김한빈에 대한 내 맘을 아무도 몰랐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내가 힘들다는 걸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하고 바래왔던 맘 탓에 괜히 가슴 한쪽이 찡하다.
“ 아냐, 그냥. 봄이라 싱숭생숭한가봐.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
“ 정신 좀 차려. 갑자기 이런 말 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나 요즘 너 신경쓰여서 수업이 귀에 안들어와. 아무래도 너 좋아하는 것 같... ”
“ 뭐? ”
뜬금없는 짝지의 말에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게 진짜야? 하고 되물을 수 없었다. 그 애의 떨리는 손끝이, 한빈이에게 고백할 때 떨려와 맞잡은 내 두 손을 보는 것 같아서.
그 애를 보면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빈이를 잊고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에게 더 잘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한빈이는 만나는 여자가 있고, 나를 받아주기는커녕 나를 괴롭게만 했으니까. 안될거야, 라는 목소리가 공기를 둥둥 떠다녔지만 그저 잡음이라고 생각해야만 했다. 다른 방법도 없잖아, 어차피 한빈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사실은 그랬다. 학교에서 김한빈과 매일 부딪혀야 하는 이상, 내 인생에서 한빈이를 영영 다시 못보게 되지 않는 이상은 한빈이를 잊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아니, 영영 못보게 되더라도, 자신없었을 정도였으니까. 나는 한빈이를 부정할 수 없었다. 대체 무엇때문인지, 언제부터인지, 너에겐 한없이 주변이기만 한 내 세상의 중심은 니가 되어버렸음을.
그날따라 바람이 불었다. 무슨 행사가 있다며 수업도 일찍 끝났지만 다른 애들보다 늦게 학교 밖으로 나왔다. 한 발짝 뗄 때 마다 눈앞으로 쏴아- 하고 벚꽃이 떨어져내렸다. 벚꽃도 며칠이면 다 떨어지고 없겠구나. 발 앞에 떨어진 벚꽃을 보다 괜히 눈물이 차오른다. 아, 바보같아. 누가 보기라도 할까봐 걸음을 재촉하는데, 누군가 턱- 하고 내 팔을 잡는다.
“ ..김한빈? ”
나를 보는 너의 눈이 다른 사람 같다. 까맣고 단단하던 네 시선이 왠지, 아이같다 느껴지는 건 기분탓일까.
“ 왜 울어. ”
얼마만에 듣는 니 목소리인지, 나는 내가 울고 있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울지마, 하고 달래는 말에 더 눈물이 난다.
내 울음이 잦아들 즈음, 한빈이가 눈을 맞춰온다.
“ ...좋아해, 너 ”
“ ....무슨 말이야, 갑자기.. ”
“ ...무서웠어. 무서워서 그랬어. 니가 하는 한 마디에, 나를 보고 짓는 표정이나 손짓 하나에 흔들리는 내가 낯설어서.. 이렇게 감정에 휘둘리다 상처받을까봐 두려웠어. 니가 나를 미치게 하니까, 괴로워서 너를 괴롭힌거야. 너를 좋아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
너의 눈동자가 이렇게 갈색이었나..? 마주한 두 눈이 햇살 탓인지 밝게 빛난다. 꿈같은 말들을 들으면서 문득, 이 눈동자가 너무 간절했었던 기억이 떠올라 눈가가 시리다.
“ 너 신경 안쓰이는 척, 보여도 안보이는 척, 내 눈에 자꾸 들어오는 너를 무시하는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다른 애 옆에서 웃는 널 보는 것도, 난 그때 진짜... ”
“ ...사랑해 한빈아. ”
너에게 고백했던 날처럼,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져버렸어.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지금 말하지 않으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빈이가 대답했다.
“ 사랑해. 너무 사랑해서 죽을 것 같아. ”
난 여전히 울고 있는지, 네 눈에 보이는 나는 어떤 모습인지,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늘에 가려 너의 표정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한빈이의 주변이 아니라는 것. 내 세상의 중심이 너인 것처럼, 네 세상의 중심도.
그 날, 내 봄은 벚꽃처럼 내 마음위로 쏟아져 내렸다.
+) 두 번째 글!
저번 테마가 겨울이었어서 이번에는 봄 느낌으로 써봤는데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글 써보는게 오랜만이라ㅠㅠ수정을 거듭할수록 망하는 느낌이..
서툰 글이지만 읽어주시는 독자분들 모두 굿밤되세요!(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