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한 자리 수를 맴도는 점수를 들고 선생님을 뵙기가 창피하게 느껴진 게 이유였다. 중학교때까지 축구를 하면서 공부를 놓아버리고 축구에만 올인했더니 축구를 그만 두고서 고등학교에 올라와 공부를 하려니 기초가 없어서 그런지 공부를 안하는 게 버릇이 된건지 도통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아 수업시간에는 늘 수업을 듣는 대신 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했었다. 공부를 하지않아도 어떻게든 먹고 살게 될거라는 막연한 믿음으로부터 나온 행동들이였다. 일단 인터넷을 뒤져 평판이 좋은 수학 문제집을 왕창 사다놓긴 했으나 공부의 'ㄱ'도 모르는 상태로 고2 수학을 시작하려니 막막하기 그지없어 처음엔 하루종일 문제집을 책 읽듯이 읽기만 했다. 그러다 이대로는 진척이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그나마 고등학교 졸업한지 얼마 안됐고 공부를 꽤 했던 막내누나에게 공부를 시작하고싶은데 기초지식이 전혀 없어서 아무 것도 못하겠으니 공부 좀 알려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아마 내 기억으론 내가 누나에게 '공부'에 대해 물어본 건 난생 처음이였던 것 같다. 나는 사놓은 고2 문제집들은 한 귀퉁이에 처박아둔 채로 중학교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워갔다. 그땐 정말 하루종일 공부만 한 듯 하다. 아침 일찍부터 야자 끝날 때까지 종일 인강을 듣고 문제를 풀었고, 집에 와서는 피곤해하는 막내누나를 붙잡고 틀린 문제를 다시 풀었다. 나는 그렇게 여름방학을 바쳐가며 몇 달동안 독하게 공부해서 겨우 고등학교 문제집을 펼칠 수 있었다. 공부를 시작하고 더이상 수업시간에 딴짓을 하지않았다. 수업을 전부 이해할 순 없었지만 들을려고 노력했고 필기도 열심히 하며 새삼 문과를 선택한 걸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수학을 제일 잘하고싶은 마음에 수학을 제일 열심히 했다. 수업에 들어오는 선생님들은 저마다 하루종일 문제집에 파묻혀 사는 내게 열심히 한다며 칭찬해주셨고 차학연은 한 학기만에 어느정도 진도를 따라잡은 날보고 독한 놈이라며 고개를 저었으며 가족들은 내 방 구석에 일주일에 한권꼴로 쌓여가는 문제집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공부를 잘하고싶다는 욕심은 없었다, 그저 내가 생각했을 때 선생님께 내보여도 부끄럽지않은 점수를 받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2학기 중간고사에서 처음으로 수학뿐만 아니라 모든 과목이 50점을 넘었다. 성적은 많이 올랐지만 등급이 그다지 높지도 않았고 높은 점수라고 할 수도 없었지만 내 나름 최선을 다 한 점수였다. 그렇기에 사실 티는 안 냈지만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자랑하고 싶을만큼 뿌듯했다. 점수확인하면서 많이 발전했다며 선생님들께 칭찬을 받는 것도 더할 나위없이 행복했었다. 그래, 행복했었다. 선생님은 성적표를 나눠주시며 내게 그저 "수고했어." 한마디가 전부였다. 솔직히 그 네글자에 상처를 받지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입바른 칭찬을 바란건 아니였지만 선생님한테 잘 보이고싶어서 시작한 공부였고 그렇기때문에 선생님이 알아주길 바랬다. 그래서 한동안 슬럼프였던 것 같다. 이젠 버릇처럼 책상에 앉아 문제집을 펼치긴 했지만 제일 잘 보이고싶던 선생님이 알아주지않는다는 생각에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의욕도 사라졌다. 그런 내가 티가 난 것인지 어느 날 선생님은 등굣길에 내게 베지밀 하나를 건내며 "운아, 공부하기 힘들지? 요새는 의욕을 좀 잃은 거 같네." 라고 하셨다. 사실 그렇게 말하시는 선생님께 모든 게 당신때문이라 외치고 싶었지만 하지못한 채 나는 그저 아무 말없이 손에 쥔 베지밀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사실 그동안 공부 잘하는 애들만 좋아하는 속물 선생님처럼 보이지않으려고 성적이나 공부 열심히 하는 거로 애들한테 칭찬을 안 했거든. 근데 운이는 진짜 잘했어, 이건 성적이 엄청나게 많이 오른 거를 칭찬하는 게 아니라 운이 너 스스로 최선을 다 한 거를 칭찬해주는거야." 가만히 선생님만 바라보는 내게 "뭔 말인지 알지?"하고 물으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그리고 그 미소에 거짓말처럼 그동안 서운했던 감정들이 모두 사라졌고 나는 다시 독하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기말고사에서 나는 거짓말처럼 올3등급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