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amB. 헝거게임]
完 - 결막 3장 ; 진실된 망각
* 암호닉 *
밷배치 / 수박 / 네티 / 일기장 / 준회 / 밥데렐라 / 진지한팀비 / 하리보 / 설렁 / 코카콜라 / 햫기동동 / 알돈나 / 꿀떡 / J / 밤비
리리 / 워후워 / 러버덕 / 다이 / 소묘 / 해피 / 파랑짹쨱이 / 분홍양말 / 으우뜨뚜 / 하늘 / 붕붕 / 헝거밥 / 꿍디꿍디 / 백년가약
오홍홍 / 소녀 / 플플 / 삐악 / 꽃게탕 / 사비 / 버들 / 쀼쀼 / 0618 / 코코몽 / 서채 / 한비니비니 / 뚜기두밥 오뚜기밥 / 뭉뭉이
지원아!죽지뭬!! / 기맘빈과김밥 / 허니콤보 / 마잭박사 / 김한빈츠 / 닭다리 / 우현동자 / 97니니 / 피카츄 / 몰랑이 / 짜라짜라맘비니
똥 / 냐미냐미 / 꿀/ 덴맠우유 / 양양 / 토끼이빨 / Scott / 찌푸 / 대머리독수리4 / 지원이밥 / 감자 / 라임 / 보리차 / 지나니
조으디 / 프엠 / 구닝 / <3기맘빈과김밥<3 / 혜의 / 얼음을 동동 띄운 물을 주네 / 페브리즈 / 옥수수 / 거북이 / 비니비니한비니
진주 / 곰돌이푸 / 허니버터칩 / 기맘빈과김밥 / 민트초코 / 뿌요겨털을낰낰~ / 하누우 / 지원아 / 쿠션 / 갓바비 / 햇님
달여우 / 김밥이랑 / 으우뜨 / 452 / 솔레 / 엽떡 / 한빈아만세 / 뽑뽀 / 바비아이 / 한빈아뿌잉 / 바뱌 / 연결고리
냐미냐미 / 김빱 / 김빱아이 / 동글동글 / 꽁냥꽁냥 / 동동주 / 기맘빈과김밥 / 타코타코 / 개꿈꿨어 / 순회 / 아이엘엪
브금 들으면서 보시길바랍니다. 마지막화니까요. 꼼꼼히 읽으세요, 양 많음주의
※ 급전개주의
누군가 한 번 하고 나면 가장 허무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은, 사랑이였다. 왜냐고 물었다. 사랑은 그 사람도 나도 상처받고 떠나가는 거니까요.
그 사람이 다시 물었다. 그럼 사랑할 때는 허무했냐고. 아니라고 대답했다. 왜냐고 물었다. 그 사람도 나도 서로 사랑하고 있는데 뭐가 허무했을까요. 영원할 줄 알았는데.
그 사람과 사랑을 할 땐 어땠냐고 되물었다. 또 대답이 돌아왔다. 모든 걸 가진 기분이였고 나의 사람이란 것이 신기해서 몇 번이고 확인하고 싶었다고. 사랑할 땐 말야.
사랑을 끝내고나서 뭐가 허무하냐고 물었다. 내 일생에 있던 사람이 없어진 다는 것이 무서웠고 사라졌다는 것이 씁쓸했다고 했다.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실감났다.
그 사람은 널 기억할 거라고 위로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미적미지근한 웃음만 남기고 대답하던 사람은 대답을 거부했다. 기억한다는 게 얼마나 잔인한데요.
같은 공간안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그 사람은 큰 상처이자 한 때의 존재 이유였으니까. 그 상처가 뭐가 됐던간에 그 사람은 날 기억한다면 좋겠어요.
묻던 사람은 다시 물어왔다. 기억한다는 것이 왜 잔인한지 말해달라고 했다. 대답하던 사람은 잠시 망설였다. 이건 뭐랄까, 사랑을 해본 사람만이 안다고. 그 끝을 내는게,
얼마나 화가나고 원망스러운지 모를꺼라고 했다. 서로에게 좋지않은 끝을 주고 그 사람을 내가 기억할 때는 한 때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추억하겠지만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겉으로만 그냥 헤어진 사람. 또는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그만 정말로 아는 것이니까. 입가가 아리다.
사랑은 변하나요. 대답하던 사람이 물어왔다. 묻던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던 사람은 아무래도 좋다는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면 아니였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이렇게 비참하지. 정말로 사랑했었는데. 묻던 사람은 입을 열었다. 비참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 사랑이 변하니까 이렇게 헤어졌을 거 아닌가.
대답하던 사람이 대꾸했다. 묻던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동안 서로를 쳐다보았다. 대답하던 사람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내가 말싸움에서 이긴거네요.
"긴급 속보입니다. 헝거게임에서 마지막 우승 후보였던 11구역과 12구역이 동시에 자살하는 끔찍한 장면이 노출되었습니다."
[김진우 기자, 지금 어떤지 더욱 자세하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러시안 룰렛으로 삶을 결정하던 10대 소년소녀가 결국 자살을 결심하기로 했는데요, 소년이 먼저 쏘고 소녀가 그 다음에 차례로 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강력한 우승후보라고 생각치도 못했던 두 구역의 선두에 캐피톨 국민들은 열광과 환호를 보냈으나, 12구역의 소년이 죽은 후 가장 높은 시청률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헝거게임의 우승자는 한 명뿐이기에 서로를 사랑하는 두 남녀의 애절함이 캐피톨 국민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결국 소녀가..."
"...소년과 소녀는 지금 캐피톨 대병원에 긴급 우송중이며 두 남녀의 건강상태가 최악을 달리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소년은 현재 깨어난 상태지만 인터뷰 거절중입니다."
"소녀는 이번 헝거게임에서 가장 고득점을 받은 후보자였습니다. 스폰서들도 24명의 남녀 중 가장 많았으며 캐피톨 국민들의 관심이 아주 뜨거웠는데요."
"같은 구역 소년과 11구역 소년이 이 소녀를 두고 엄청난 기싸움을 벌였던 사실이 재화제가 되면서 같은 구역 소년의 죽음에 애도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손승완양과 오세훈군에 대한 애도의 물결이 서쪽 지방부터 시작하여 북쪽지방까지 확산되었는데요, 자세한 소식은 잠시 후에 찾아뵙겠습니다."
진환은 병원의 꽤나 높은 높이의 옥상에 있는 중이다. 그는 여전히 담배를 끊지못했고, 술을 좋아했으며 캐피톨을 저주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변화가 있었다.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못해 준 것이 마음에 여전히 걸렸다. 동혁이 위로의 말로 그녀를 위해 중대장의 설득과 여러가지의 일들로 해주었으니 당신은 대단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듣고싶은 말은 그런 가면으로 쌓인 말이 아니였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 그가 듣고싶은 말이다. 깨어났다고 누군가 옥상 문을 열어젖혔으면 좋겠다.
진환은 담배를 입에 물고 필터를 한 번 씹었다. 라이터를 익숙하게 열고, 불을 붙혔다. 회색의 짙은 연기가 그의 얼굴을 한 번 감싸고 공기의 흐름과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많은 기자들과 차량들, 그리고 캐피톨 사람들이 잔뜩 엉켜있었다. 시끄러웠다.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살려내라는 사람들의 원망도 들린다.
기자들은 병원을 찍고 국민들을 찍으며 온갖 기사들을 내보내고 있었다. 병원 측은 문을 절대 열지 않고 있었다. 오로지 병원 관계자들만 출입을 허가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빼내고 입술을 통해 연기를 불었다. 그의 뇌가 정리되는 기분이 일시적으로 들었고, 답답했던 가슴이 가라앉는 느낌이 났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담뱃재가 꼴시렵다. 그는 탁탁 턴 뒤에 다시 입에 물었다. 담배를 핀지도 어느덧 몇 년이 지났지만 도무지 끊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미리 가져왔던 물이 담긴 종이컵을 살짝 옆으로 밀었다. 옥상 전체가 추락방지를 위해 조금 높은 턱의 난간이 있었다. 진환의 가슴팍까지 오는 꽤나 높은 높이였다.
그는 머릿속으로 병원까지 오게 된 자신의 상황을 다시 기억해냈다. 도대체 내가 왜, 아니. 그 아이가 왜 자살을 시도했는지 알 턱이 없다. 미친년. 결국 욕을 내뱉었다.
까맣게 꽁초가 되버린 담배를 종이컵에 던져넣고 옥상 벽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정말 돌아버릴 것같다는 말은 이런 거였어. 그는 정말 머리가 아팠다.
이 곳 저 곳에서 들려오는 간호사들의 긴급호출과 병원사람들의 쑥덕거림, 그리고 의사들의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응급실에 들어간지도 5시간이 지났다.
사실 담배를 입에 댄 건 그가 그의 코치와 헝거게임이 끝나고 나서 피우기 시작했다. 늦지않지만 젊지도 않는 나이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코치는 여자였다.
코치는 진환의 담배에 놀란 얼굴이였지만 곧 피식 웃었다. 너도 결국에는 손에 댔구나. 코치는 담배를 물었다. 어떻게보면 그녀에게서 배웠다고도 할 수 있었다.
진환은 무표정하게 코치를 바라보았었다. 코치는 진환의 시선에 질린 눈치였다. 니 새끼는 참 묘한 놈이라고.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진환에게 욕을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직감했지만 넌 참 피도 눈물도 없는 새낀걸 알았지만 정말로 그럴 줄은 몰랐다. 죄책감 같은건 담지도 않았니? 그녀는 살짝 높은 언성을 냈다.
진환은 잠시 텀을 두고 연기를 입에서 뱉어냈다. 한숨과 함께 뱉어낸 담배연기는 지독할만큼 향기롭다. 진환은 그녀를 좀 비튼 시선으로 올려다봤다.
나도 사람이니까. 진환은 그 때 당시 정말 싸가지가 없었다. 존댓말이라곤 죽어도 안하는 그런 예의없는 놈이였다. 뭐가 무서운지도 몰랐다. 우승자였으니까.
'죄책감이란 게, 한 때 같이 헝거게임을 진행했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거라면...'
'...'
'전 이미 죽고 없었을 거예요. 제일 쓸데없는 걸 가르쳤잖아요, 당신은.'
진환의 싸가지없는 대답에 코치는 웃었다. 그래도 존댓말은 하는구나. 그녀는 담배를 지져끄며 연기섞인 입을 열었다. 내가 그렇게 가르쳤었나? 그녀가 물었다.
진환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않았다. 오히려 자세를 고치며 마찬가지로 담배를 지져껐다. 한참동안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끝내 대답을 포기했다.
아무튼 우승자 축하해. 그녀는 진심어린 말을 건넸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핫이슈타임에서 널 볼 수 있겠구나. 우승자인데 뭐부터 하고싶니?
그는 나른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꼭 그것이 마치 뭐든 것이 흥미없다는 눈초리였다. 우승자라고 해서 뭐가 특별한지 몰랐는데, 그가 운을 뗐다.
아무것도 특별한 게 없어. 그냥 내가 존나 유명한 사람이 된 것이랑, 모든 권력과 부를 쥐었다는 것 자체로도 이 세상은 정말 재미가 없어졌네. 흥미롭지도 않아.
진환다운 대답에 코치는 그럴줄 알았다고 중얼거렸다. 넌 원래 이 쪽 사람이 아니잖니. 그 말에 진환의 눈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맞아, 원래 이 쪽 사람 아니야.
그녀의 말을 똑똑히 기억해뒀었다. 이 쪽 사람이 아니라서 여러모로 참 불편했다. 눈칫밥도 먹었고, 덩치가 작다고 여기저기서 불려가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원래 할 짓없는 새끼들이 더 그런걸 진환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즐겼던 장면은 헝거게임 투표를 진행할 때가 가장 재밌었다.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고 하늘의 신인 것마냥 행동하던 못된 아이들이 투표용지 하나에 벌벌 떨면서 애원하는 장면은 참으로 코미디를 연출하는 것만 같았다.
헝거게임 후보자로 뽑히고 나서 그 아이들의 반응은 좀 재미가 없어졌다고 해야할까. 진환의 눈치를 보고 그가 떠날 때 기차역까지 쫓아오기도 했다. 진환은 어이없었다.
우승자가 되고나서 당당하게 돌아왔다. 그들은 더 이상 진환을 고까워하지 않았고, 지나갈 때마다 몸을 사리며 고개를 숙였다. 말조차 걸지도 못했다.
진환은 그런 반응을 은근 즐겼다. 자신이 약자였을 때와 강자가 되었을 때의 반응 차이라는 것이, 역시 사람은 강해야한다는 것을 실로 실감하게 되는 나날들이였다.
하지만 그는 곧 그런 반응을 오래 즐기진 못했다. 부모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남긴 유언장에는 전에 살던, 아니 원래 그들의 본 국토였던 나라로 돌아가 달라는 부탁이였다.
진환은 부모의 죽음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곧 시장에게 부탁했다. 부탁이 아니라 예고없는 통보였지만. 이 곳이 아니라 전 나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은 아쉬운 눈빛이였지만 흔쾌히 그를 보내주었고 본토를 떠난지 몇 십년이 흘러서야 다시 자신의 본 나라에 돌아온 셈이 되었다. 진환은 코웃음을 치며 발을 디뎠다.
12구역의 사람들은 진환의 부모를 알고 있었기에 진환을 두려워했다. 그는 전과 다르게 조용하게 집안에서 틀어박혀 있었다.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 캐피톨로 떠났다.
캐피톨에서 역대 우승자들과의 파티가 있었다. 진환은 참석을 희망하지 않았지만 12구역의 시장인 앨리스 리라는 여자가 진환을 억지로 이끌고 나왔다.
그 때 만났던 아이가 김동혁이였다. 동혁은 어린 나이에 디자이너 수석으로 졸업 후 천재소리를 듣고있는 중이였다. 진환은 동혁과 꽤 적지않은 동질감을 느꼈다.
'소개할께, 여기는 이번해 우승자 김진환.'
'...'
'김진환, 여기는 우리지역이 낳은 자랑스러운 디자이너가 될 몸인 김동혁이예요.'
'안녕하세요.'
동혁은 그 때 꽤나 풋풋한 외모를 띄고 있었다. 진환보다 작은 키에 살짝 살집이 있는 몸, 그리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았지만 꽤나 부드러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지만 같은구역 출신이고, 우승자라는 사실에 동혁은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진환은 처음으로 그의 두려워하는 반응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김진환. 진환은 짧막하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19살. 그 때 동혁의 나이는 14살이였다. 5살차이에 동혁은 아까보다 밝은 얼굴로 손을 잡았다. 김동혁이예요.
그 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올줄 몰랐다. 그리고 같은 '팀'이라는 것에 소속될 지도 몰랐고. 동혁이 캐피톨에서 이름을 휘날리게 될 것도 어느정돈 예상했었다.
그 사이에 동혁은 꽤나 많이 변했다. 키가 커졌고, 살이 빠졌으며 정신이 성숙해졌다. 솜씨는 날이갈 수록 일취월장이였고 술도 배워갔다. 여자들에게 둘러싸이기도 했다.
진환은 어느새 추억을 되새김질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자조적인 웃음을 띄었다. 좀 초라하고, 보잘것 없어보였다. 그는 차라리 그 때가 나았다고 생각하며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은 검고 뿌옇게 변해있었다. 거무칙칙한 것이 꼭 자신의 기분같았다. 진환은 차라리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꾸덕꾸덕한 날씨는 별로라고.
아무도 옥상에 찾아오지 않는 걸 보면 아마도 그녀는 아직도 사경을 헤매는 모양이다. 진환은 그 생각이 들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가 못 깨어났다는 사실이 많이 힘들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물었다. 벌써 몇 번째 피는 건지 셀 수도 없었다. 입 안이 껄끄러웠다. 라이터가 켜지고, 불이 휘날렸다. 연기가 피어올랐고 머리가 정지된다.
그 아이가 깨어난다면 담배를 끊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보면 자살행위라고 볼 수 있는 금연이지만 지금 그는 매우 간절했다. 담배와 뗄 수 없는 인연인데도.
진환은 보이지않는 전 자신의 코치에게 물었다. 당신은 대체 뭘 본거지? 머리가 비상한 여자지만 이런 것도 알았던 것인가. 그는 담배를 들고 있던 손이 떨림을 느꼈다.
그녀는 이미 죽고 없지만 거짓말처럼 우승자시절의 날 비웃기라도 할것마냥 그 아이가 나타날 줄은 몰랐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보면 아닌가보다.
한빈은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서 내려왔다. 자신을 돌보고 있던 동혁이 놀라서 그를 저지했지만 한빈은 거칠게 그를 밀쳤다. 동혁은 조금 잠잠한 눈치로 몸을 떨어뜨렸다.
자신이 눈 뜬것에 이렇게 만감이 교차할 정도는 자신의 인생에서 이번이 가장 영향이 컸다. 왜, 왜 내가 눈을 뜬거지. 헝거게임은 어떻게 됐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방 문을 벌컥 열었다. 지나가던 간호사들이 놀라서 곧바로 의사를 부르러 황급히 뛰어가고 있었다. 일부 간호사들은 진정하라며 다시 침실로 들어가라고 했다.
하지만 한빈은 모든 것을 무시했다. 자신이 눈을 뜨자마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뉴스도, 자신의 몸상태도, 간호사들의 반응도, 다른 사람들의 돌봄도, 헝거게임도 아닌.
바로 그 아이때문이다. 그는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으로 병원을 뛰어다녔다. 여기저기서 그만 서라는 말이 들려왔지만 그는 더욱 속도를 낼 뿐이였다. 응급실, 응급실.
그는 눈으로 응급실을 찾고 있었다. 일반병실을 모조리 뛰어다녔지만 응급실이란 글자가 보이지 않아서 더욱 애가 탈 뿐이였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그는 다시 뛰었다.
층수란을 보니 현재 자신이 머물고 있는 층은 8층이였다. 응급실이란 글자를 황급히 찾아보니 위치한 곳은 다름아닌 6층. 그는 비상구 문을 열고 재빠르게 내려갔다.
거기서세요! 의사의 말이 들려왔다. 계단이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와 여러가지 잡담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한빈은 기도했다. 저들이 쫓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6층이다. 문을 여니 8층과 다르게 조용하다. 사람들은 꽤나 한적했고 한빈은 그 틈을 타서 아무방향이나 틀었다. 자신의 느낌이 가는대로 틀고, 달리고, 틀었다.
빨간 글자로 응급실이라는 조명판이 켜져있었다. 누군가의 수술이 진행되고 있다는 표시였다. 그는 사고회로가 정지되는 기분을 맛보며 홀리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김한빈 님! 여기서 뭐하시는 거예요! 끈질기게 쫓아온 간호사가 한빈의 팔을 잡았다. 그는 자신의 다리가 천천히 그 곳으로 가고 있는 걸 느꼈다. 저 안에 그녀가 있다.
자신도 만신창이가 됐을 법한데 그녀는 어떨까. 마지막으로 눈 감기 전 봤던 그녀가 아른거린다. 피를 비이상적으로 흘리며 자신의 품 안에서 눈을 감던 그 모습을.
이거 놔! 한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팔을 잡고있던 간호사들을 떼어냈다. 남자인 그의 힘에 간호사들은 힘없이 떨어져나갔고, 뒤 쫓아오는 의사들을 피해 응급실로 다가갔다.
문이 잠겨있었다. 한빈은 눈 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을 다시 느끼며 주먹으로 응급실 문을 두들겼다. 쾅, 쾅 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졌고 의사들은 뒤늦게 한빈을 저지했다.
그만하세요! 김한빈 환자, 그만하시라니까요!! 의사들은 한빈의 두 팔을 잡고 어깨를 잡은 채 응급실 문에 바짝 붙어있던 그를 떼어냈다. 이거 놓으라고!!! 이거 안놔?
그는 발악하며 발버둥을 쳤다. 그 중 한 의사가 그에게 충고하듯이 말했다. 김한빈 환자, 지금 당신 몸상태도 성하지 않은데 당신 애인을 신경쓰고 있는 겁니까?
당신 애인, 이라는 말에 한빈의 발버둥이 멈췄다. 그 의사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몸 상태는 최악이였습니다. 저체온증에, 소화불량, 그리고 탈수증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신은 안정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팔 또한 성하지 않고요... 의사는 말을 흐리며 한빈이 총을 쐈던 팔을 흘끔 쳐다보았다.
한빈은 느꼈다. 자신의 팔이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지금와서 다시 문득 느끼자 그는 총을 쐈던 팔을 내려다보았다. 아까부터 꿋꿋하게 붕대로 뒤감겨있는 팔이다.
심장과 가까운 부분이 아니라서 과다출혈은 막을 수 있었지만, 의사는 말을 잠시 끊고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김한빈 환자,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팔이 아까부터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느끼긴 했다. 그런데 의사가 말하고보니 더더욱 그랬다. 그는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팔을 흔들어 보았다. 손목팔이 덜렁덜렁 움직인다. 손목을 움직여보았다. 손목이 움직여지지않는다. 그는 또 다시 헛웃음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의사들이 머리를 숙였다. 정말,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빈은 도무지 자신이 무슨 상황인 건지 이해가 가지않았다. 그는 의사 하나를 일으켜세웠다.
무슨 말인지 똑바로 말해요. 내가 납득갈 수 있게, 지금 나랑 같이왔던 여자애랑 김지원은 어떻게 됐고 뭐가 무슨 상황인지 하나 토씨 빼먹지말고 당장 말하란말야!
"김한빈 환자의 팔은..."
"..."
"신경이... 모두다 끊어졌습니다. 재활치료 마저도 희박한 상태지만 곧 준비할 예정이고..."
"..."
"12구역 남자분은 사망처리로 신청되어 지금 냉동고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
"12구역 여자분은..."
의사는 답답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생존률마저 희박한 상태입니다. 관자놀이를 빗겨나간 것이 천운이였지만 머리에 큰 타격을 준 것은 차마 어쩔수 없는 일입니다."
"...네?"
"그리고 귀가 들리지않을 겁니다. 고막이 찢어지고, 총의 파열음과 총알탄의 소리 때문에 달팽이관이 손상되었어요."
"..."
"머리를 다치셨고, 몸 상태도 최악중의 최악을 달립니다. 조만간 깨어날 것이니 기다리십시오."
의사는 그렇게 말하고나서 한빈의 등을 자연스럽게 쓸어 유도했다. 그는 지금 굉장히 정신이 나갔다는 것을 잘 알고있기에, 의사는 더욱 그가 안쓰러웠다.
한빈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그녀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에 대한 관심 또한 만만치 않다. 병원 앞에는 징그럽게 몰린 사람들이 아우성이라 1층은 아예 폐쇄했다.
그가 무슨 행동을 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무슨 반응을 보일지 누구도 감히 예상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당장 확실한 것은, 극도로 불안하다.
모두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고 있다. 한빈도, 진환도. 그들은 지금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이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앞길이 막막했다.
의사의 손길에 이끌려 다시 병실로 돌아온 한빈을 본 동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였다. 뭐가 그렇게 급해서 병실을 뛰쳐나간거야? 동혁은 짜증어린 말을 했다.
너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아. 잘 알지만, 지금은 냉정해져야해. 헝거게임은 이미 끝났어. 동혁은 냉정하게 말했다. 한빈은 눈을 돌려 동혁을 쳐다봤다.
"김진환은 옥상에 있어. 앨리스 리는 충격에 지금 입원중이고, 지금 바깥ㅇ,"
"아니."
"..."
"그것보다 난 궁금한게 있어."
한빈의 무미건조한 말에 동혁은 마음에 안드는 눈치로 되물었다. 뭔데. 그러자 한빈은 이불을 꽉 쥐며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답답한 어조로 토해내듯이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난... 진짜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정신 차려보니 그 아이가 쓰러져있었어. 그럼 내가 했던 수고는 모두 수포로 돌아가버린 거잖아!!
미칠것같아. 아니, 이미 미쳤어. 누가 뭐라고 해주길 바래. 수고했다는 말도 아니야. 내가 바라는 말은 그 아이가 무사하다는 것과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인지라고.
김동혁, 너가 나라면 뭐부터 할래? 지금 이 상황이 환각인지 아닌지 확인할래, 아니면 너가 신경쓰고 있던 그 사람한테 억지로라도 다시 갈래. 난 모르겠단 말이야...
한빈은 결국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고 고개를 숙였다. 아아악!!!! 그는 괴로운 비명을 질렀다. 병실이 울릴만큼. 하지만 동혁은 눈 깜짝 안하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마. 동혁은 여전히 시니컬했다. 니 몸상태부터 확인해. 너무 그 아이를 위해 목메지마. 존나 꼴불견이니까. 동혁은 그렇게 말하며 물컵을 건넸다.
"물 마셔."
"..."
"냉수먹고 속 차리라고. 정신나간 놈 아냐, 이거."
"..."
"어지간히 미친 놈인건 알았다만. 니부터 신경써. 그럼 모든게 다시 돌아올꺼야."
한빈은 동혁을 한 번 쳐다보고 컵을 쉽사리 잡지못했다. 하지만 동혁은 억지로 그의 손을잡아 컵을 잡게했고, 한빈은 물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한 입에 털어넣었다.
목 구멍을 타고 차가운 액체가 흘러가는 기분이 그가 진짜 살아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는 썩 기분이 좋지않았다. 이런 사소한 것에 삶을 느끼고 있다니, 한심했다.
동혁은 한빈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기다렸다는 말처럼 말을 건넸다. 재활치료 내일부터 할꺼야. 통보식의 말투였다. 한빈은 그런 동혁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간단히 신경재활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나니까. 그리고 TV틀지마, 괜히 너 정신만 더 날뛰게 해. 연결전선 다 끊어놨으니까 진짜 사실을 알고싶으면 김진환이나 날 불러.
뭐든 적정선에서 다 답해줄꺼니까 우릴 너무 불신하지 말라고. 동혁은 그렇게 말하고나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할말없으면 난 이만 간다. 동혁의 동작이 굼떴다.
한빈은 그의 몸짓을 눈치채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김동혁. 그러자 문고리를 잡고있던 동혁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뒷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빈은 동혁의 등을 노려보았다.
"미루지마."
"뭘 미루지말라는 건데?"
"다 알고있으면서 모르는 척 하지마, 역겨워."
"..."
"말해. 아니, 말해줘."
내가 죽은듯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 한빈은 그렇게 말하며 링거맞은 손을 들어보았다. 차가운 금속이 자신의 손등에 꽂혀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무섭다.
포도당이 뚝뚝 떨어지는 자그맣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만큼 둘 사이의 침묵은 굉장히 간격이 넓었다. 동혁은 무거운 침묵에 천천히 등을 돌렸다. 문을 잠갔다.
한빈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의 병실에는 시계가 없었다. 오로지 침대와 비상약품, 냉장고와 서랍들이 가득차 있었다. 창문 마저도 굳게 잠겨있었다. 초침의 소리가 없다.
동혁은 한빈의 경직된 자세에 김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궁금하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동혁은 다시 한빈 곁에 두었던 간이의자로 다가갔다. 털썩 주저앉고나서야 물었다.
뭐가 궁금한지 고르라고. 첫 번째는 그 아이의 상태. 두 번째는 언론. 세 번째는 한빈의 몸상태. 네 번째는 헝거게임의 결과. 다섯번째는 여론의 반응. 동혁은 영리했다.
한빈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언론, 헝거게임의 결과, 여론의 반응. 그러자 동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입을 열었다. 언론은 말할 것도 없어. 완전 개박살났거든.
"부르셨습니까."
PD는 자신을 부른 방문을 열었다. 구석진 방이였고, 금칠이 벗겨진 꽤나 허름한 곳이였다. 으스스한 기운이 감도는 이 곳에서 대통령이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대통령은 뒤를 돌아 그를 쳐다보았다. 대통령 옆에는 경호원 다섯 명이 서있었고, 중앙에는 무언가가 그의 허리춤까지 솟아오른 것이 있었다. 무언가가 놓여있는 것이다.
PD는 불안한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원래 인간의 촉이란 그렇다. 안 좋은 곳에서만 유독 뛰어난 직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헤어진다던가, 죽었다던가.
PD님. 대통령은 어울리지않게 밝은 목소리였다. 가까이 오세요, 왜 문 가까이 서있으세요? 그 말에 PD는 머뭇거리며 중앙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대통령은 씨익 웃었다.
그는 대통령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큰 키를 가진 위협적인 분위기의 대통령은 쉽사리 뭐라고 할 수조차 없는 그런 사람이였기에 더욱 그랬다.
대통령은 갑자기 박수를 짝짝 쳤다. 경호원들의 표정은 여전히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이였고, PD만 움찔하고 놀랬다. 차가운 공기와 어울리지않는 웃음이 더욱 싸늘했다.
PD님의 안건으로 인해 저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였습니다. 대통령은 그렇게 말하며 발걸음을 떼었다. 덕분에 잘 알았고, 국민들의 생각도 뛰어나다는 것도 알았죠.
PD는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흠칫 놀랬다. 눈에 띄게 놀라는 제스쳐 때문인지 대통령의 웃음은 더욱 깊어져만갔다. 그는 자신 주변에서 압박해오는 것들이 마냥 무서웠다.
이번 헝거게임은 유독 잔인하고, 안타까운 사연들이 넘쳐흘렀죠.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랬기에 국민들도 이번 헝거게임에서 가장 열띤 응원과 동정을 보냈고,
열악한 환경을 주어졌더니 그게 더욱 그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더라고 합니다. 대통령은 웃음을 풀고 무표정으로 변했다. PD의 머리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내가 계획 했던 본 헝거게임과 다르더라구요. 특히나, 대통령은 중앙에 솟아올라있던 것에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뒤에 짤깍 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무언가 나왔다.
이 모든 것이 뒤틀리게 한 건 당신때문이란걸 잘 알았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나에게 말만 안했어도. 대통령은 짜증스러움을 드러내지않았다. 오히려 감추고 있었다.
때문에, 당신은 이 직책에 어울리지않는 사람인것도 알았고요. 탕, 하고 귀를 찢어질 만큼의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순간적으로 PD는 뭔 상황인지 멍청히 서있었다.
하지만 곧 그는 알아챘다. 대통령이 뭘 얘기하고 있고, 자신을 무어라고 압박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 탕, 하는 소리가 무엇인지도 곧 깨달았다. 하...하, 허탈한 웃음뿐이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사실 어떻게보면 꿇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등을 곧게 서 있을 힘조차도 없었다. 이 무력감에, 이 압박감에, 이 폭력적인 분위기에 그는 결국 굴복했다.
모든 일을 자초한 건 당신이야. 대통령은 싸늘하게 말하며 그를 지나쳤다. 처리해. 명령어조로 말하는 것도 잊지않았다. 대통령이 지나간 자리에는 작은 명함이 남겨있었다.
총을 쐈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곧 자신을 둘러싼 경호원들을 보고있자니 자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 싶었다. 고개를 숙였다.
대통령이 떠나간 자리에 남겨져있던 명함에는 이름이 반짝이고 있었다. PD는 눈을 감고 점점 강도가 높아지는 발길질에 몸을 웅크렸다. 난 곧 죽겠군, 각하. 아니, 구준회.
"...언론에서는 너희 둘을 감싸기 바쁘고, 여기까지가 내가 말한 거 전부야."
"그것밖에 안돼?"
"그것밖에라니? 난 최대한 이 얘기가 새어나가도 타격없는 것만 골라서 말했을 뿐이야."
"..."
"나머지는 걔가 깨어나고 들어. 그 때들어도 늦진않아."
동혁은 그렇게 말하며 재차 몸을 일으켰다. 어디가? 한빈의 물음에 동혁은 대충 대답하고 문을 열었다. 옥상. 쾅 하고 닫힌 자그마한 병실에 한빈은 마른세수를 했다.
적막함이 흐른다. 한빈의 움직임과 숨소리만 들리는 이 곳에서 그 밖에 없다는 사실이 불쾌하다. 더 불쾌한건 그녀가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 신경이 끊어진 팔을 움직여봤다.
덜렁거린다. 예전에는 그래도 따끔거리거나 움직임이 느껴졌는데 정말 의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나보다. 덜렁거림조차 느껴지지가 않았다. 한빈은 반대편 손으로 감싸쥐었다.
절대안정을 취해야한다고? 헝거게임 이후에 상태가 많이 나빠진 건 본인도 잘 알고있다. 자신의 몸인데, 누가 모르겠는가. 악화된 상태를 알면서 꾹 참고 경기를 진행했다.
팔에 총을 쏜 것이 화근이였던걸까. 구멍이 보기 싫게 나 있었고 피는 멈춤을 모르는 것처럼 줄줄 흐른 것이 꼭 한빈의 마음 한켠에서 흘러야했던 눈물이 대신 쏟는 것처럼.
그는 그렇게 끝도없는 생각을 물고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기가 싫어졌다. 그는 조금 딱딱한 병원침대에 몸을 억지로 눕혔다. 쾌쾌한 냄새가 난다.
눈을 감고 있는건지, 아니면 여기가 현실인 건지 분간이 안 간다. 그냥 내가 분간하기 싫은건지 이 세계가 온전치 못한 건지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내가 보지못했던 청명한 남색 하늘과 총총히 박혀있는 별들의 인사였다. 바람은 따스했고, 들판이 넓게 펼쳐져있었다. 풀내음이 풍겨져나왔다.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분홍색과 보라색을 섞어놓은 듯한 아름다운 색이 수평선에 흩뿌려져 있었고, 별들은 촘촘히 박혀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반짝반짝 거린다.
팔을 뻗었다. 마치 별을 손에 쥘 것처럼. 주먹을 쥐어봐도 내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머리카락도 같이 휘날렸다. 이번엔 두 팔을 뻗어 휘적였다.
별들은 떴는데 달은 뜨지않았다. 그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니 달의 흔적도 없었다. 이상한 기분에 걸음을 재촉했다. 언제 가까워질지 모르는 수평선을 향해 걸어갔다.
달, 이라고 생각하니까 누군가가 떠오른다. 기억하기에 너무 가슴아프고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데도 꼭 기억해야만 하는 생각이 들까. 나는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그만둬! 누군가 내 뒤에서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등을 돌렸다. 하늘의 별빛을 받아 그의 얼굴이 뿌옇게보였지만 이목구비는 점점 또렷해져갔다.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목소리가 화가난 목소리였다. 나는 그의 물음에 답해야할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고개를 숙였다. 여기는 너가 올 곳이 아니야, 한참뒤에 와야지.
내 어깨를 잡고 그가 내 눈과 눈을 마주쳤다. 서로의 동공이 얽히자 그가 거친 숨을 가라앉혔다. 나는 입술을 깨물다가 내 어깨에 얹혀있던 그의 손을 감쌌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혀있는 것처럼 초롱초롱했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아서 나는 시선을 회피하고 대신에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매우 차가웠다.
언제부터 여기있었어? 내 질문에 그가 대답한다. 너가 오기 전부터 있었어. 왜 여깄어? 난 원래 여기에 있었으니까. 어제도, 그저께도, 그그저께도, 보름전에도, 한 달전에도.
아마 내일도 있을꺼야.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부스스해지는 머리카락이 여간 나쁘진 않다.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김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바보야."
"..."
"왜... 고백안했어?"
"..."
"고백이라도 했더라면 내가 널 기억했을텐데, 왜 안하고 가만히 지켜봤던거야?"
김지원은 내 질문에 가만히 날 쳐다봤다. 그의 선홍색 두 뺨이 붉어진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고백을 하지 않았냐는 내 질문이 꼭 그에게 타박을 늘어놓는 것같았다.
그는 미소를 띄고 고개를 저었다. 윤형이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가져와. 그게 이유야?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잠시 입을 닫았다. 거짓말하지마, 너 지금 거짓말했어.
그래, 인정. 그가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거짓말이였어. 너한테 고백 안한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야. 난... 안한게 아니라 못한거야. 그가 내 손을 덥썩 잡았다.
이리와, 일단 좀 앉아서 생각해보자. 다리 안아파? 그는 벌써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은채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몸을 천천히 움직여 그 옆에 앉자 별들이 더 가까워졌다.
넌 정말 아름다워. 그가 그렇게 운을 띄웠다. 아름다워서 널 지켜보는 것이 내 유일한 낙이였고 궁금증을 키워만 갔지. 너란 아인 대체 누굴까, 하고 꼬리를 물고 물었어.
그런데 어느새 내가 널 찾고있더라. 알아챘지, 아 난 저 아이를 좋아하는구나. 비록 내가 순백으로 뒤덮힌 아인 아니란 걸 넌 잘 모를꺼야. 난 너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러워.
내가 널 좋아해도 될까. 조바심이 일었어. 그러니까 난 자꾸 타이밍을 늦췄지. 나중에, 정말 나중에 해야겠다. 너랑 안면으로 마주친 적도 있었다? 근데 넌 날 모르더라고.
너 기억은 나는지 모르겠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하듯이 내뱉었다. 2년전에, 여름이였는데... 장마가 끝나고나서 정말 한창 추울 때였어. 난 그때 산에서 내려왔었는데.
누가 쓰러져있는거야. 나무에 기대서. 길에는 사람이라곤 그 사람과 나 뿐이였어. 안색은 당연히 나빴고, 꼭 사경을 헤매는 것같았어. 정신차리라고 흔들어 깨웠어.
다행히 눈은 뜨더라. 내가 그 때 손목을 잡고있었는데, 놓으라고 하고는 내가 건네준 나무를 가지고 먼저 가버렸어. 근데 난 그 때부터 자꾸 잔상이 머릿속에 맴도는거야.
그 때부터였지, 내가 널 좋아한 것은. 김지원은 그렇게 말하며 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의 한 쪽 입꼬리가 비틀어 올라가있었다. 거만한 것도, 텃세를 부리는 것도 아니였다.
기억은 해? 그가 내게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랄 표정을 지을 꺼라고 생각했던 예상과 다르게 그는 무덤덤한 반응이였다. 다행이야, 기억해줘서 다행이야.
널 2년동안 짝사랑해왔어. 스토커처럼, 너를 마주치면 기분이 좋았고 너가 보이지않으면 은근 널 찾게되었어. 이러는 내가 무서울 만도 할 꺼야. 이해해, 나도 날 느끼는데.
안 더러워. 나는 그렇게 말하며 김지원의 손을 꽉 잡았다. 그는 좀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곧 다시 웃는 얼굴을 띄었다. 말만이라도 고마워. 아냐, 정말이야.
누가 누굴 좋아하는데 더럽다고 말하겠어, 고마워해야지. 그게 정말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이상, 좋아한다는 건 자연스럽고 고마워해야하는 거야. 익숙하면 잃어버리거든.
내 말에 김지원은 새삼 뭔가를 깨달은 얼굴이였다. 그는 서로가 잡고있던 손을 순간적으로 힘을 주어 자신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김지원 쪽으로 넘어갔다.
내가 익숙하다고 느꼈던 향이 다시 느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품에 안겼다. 그는 잡았던 손을 풀고 나를 천천히, 그리고 깊게 껴안았다. 내 뒷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난 대신에 그의 허리춤을 껴안았다. 그는 움찔하다가, 높은 어조로 말했다. 더럽다고 할 줄 알았는데 넌 그런 아이가 아니였어, 역시... 넌 내가 가질 수 없는 사람이구나.
"나한테 거짓말 하나만 해줄래?"
그가 내게 부탁했다. 무슨 거짓말?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거짓말 하나만 해줘. 뭐든 괜찮으니까 돌아가서 날 욕해도 좋아, 그러니까 눈 딱 감고 거짓말해줄래?
나는 그의 반응을 살폈다. 안겨있는 상태였다. 그가 날 껴안은 팔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사랑한다고 해줘. 그는 잠시 숨을 멈췄다. 나는 안겨있는 상태에서 한숨을 몰래쉬었다.
거짓말이니까 내가 착각하면 돼, 너에게는 거짓된 말이고 이 말 한마디면 나는 족할것 같아. 아무것도 아냐, 사랑한다는 말 하나면 난 널 놓을 수 있을거야. 진실이 아니니까.
고작 그런 걸 가지고 어떻게 날 놓아. 난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런 존재였어? 그러자 김지원의 표정이 당황스러움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아니야, 그런게 아니야.
거짓말로도 나는 행복하다는 거였어. 이상한 쪽으로 해석하지마, 널 좋아한 것은 진짜니까. 김지원은 그렇게 말하고나서 살짝 침울한 표정을 짓고 눈꼬리를 떨어뜨렸다.
정말 그 한마디면돼? 나는 재차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한테도 사랑한다는 말 잘 안했거든. 내 말에 김지원은 좀더 우울한 얼굴이 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지원아."
"..."
"사랑해."
내 말에 김지원의 표정이 뒤바꼈다. 순식간에 휙휙 바뀌는 표정이 재밌었다. 미소를 띄우며 그를 쳐다보자 김지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원아, 사랑해.
그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자신이 요구했으면서 자신이 더 당황을 탄다. 꽤 귀여운 반응에 웃음을 터뜨리니 그래도 좋다며. 거짓말이여도 좋댄다.
그가 나와 함께 웃었다. 허전했던 밤 하늘에 뭔가가 밝게 떠올라있었다. 별들도, 구름도, 심지어 수평선 너머의 태양도 아닌 그의 존재가. 언제 떴는지 쥐도새도 모를.
달의 이야기에서 진짜 '달'이였던 김지원이 하늘에 떴다. 노오란 빛과 새하얀 빛이 영롱하게 뒤섞인 그것은 부스스한 빛을 뽐내며 김지원과 나를 비추었다.
사랑해. 그가 내게 말했다. 이건 거짓말이아니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가까이 왔다. 하얀 빛을 받아 그의 얼굴윤곽이 뚜렷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이 반가웠다.
너는 비록 거짓말이였겠지만... 난 진심이거든. 그는 그렇게 말한 뒤에 눈을 감고 얼굴을 가까이 당겼다. 서로의 떨림과 마음이 와닿았다. 공유, 공존의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달이 빛났다.
"...네, 방금들어온 소식입니다. 94회 헝거게임에서 공동우승자로 지목된 11구역 소년과 12구역 소녀가 모두 깨어났다고 병원 측은 전했습니다."
[자세한 소식 부탁드립니다.]
"11구역 소년은 소녀보다 치명상은 입지않아 금방 정신을 차렸으나 소녀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고 병원 측은 덧붙혔습니다. 헝거게임이 끝난지 오늘로써 6일째입니다."
"3일전 오전 11시 30분경 소녀가 머물고 있던 중환자실에 경보가 울렸는데요, 소녀가 깨어났다는 증거였습니다. 하늘이 도운 그녀의 소식에 국민들이 열광하고 있습니다."
"소녀는 오늘 병원에서 몇 가지 지시사항을 받고 비밀리에 퇴원할 계획이라고 전했으며, 12구역에는 며칠 뒤 돌아갈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12구역 소년의 시신은 아직 처리 미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잠시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괜찮아?"
김진환이 물었다. 어느 면에서 괜찮냐고 물어본건데요? 내 질문에 그는 곧바로 대답했다. 네 정신상태랑 몸 상태. 좀 어떤데? 나는 대충 괜찮다고 대답했다.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다. 보호자는 김진환이였고, 의사들이 몰려와서 내게 이것저것 물었다. 다리가 부러지셨던데 응급처치는 잘해놓으셔서 재활만 받으시면 돼요.
응급처치라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헝거게임이 생각났기 때문이였다. 마치 환상을 본 것마냥 기억이 어렴풋이 났지만 전부다 기억해내고 싶진 않았다.
가만히 누워서 치료를 받고 의사가 하라는 것, 먹으라는 것 모두 다 했다. 김진환이 들고오는 소식에 여러모로 반응을 하곤 했지만 공동우승자라는 말이 달갑진 않았다.
차라리 김한빈을 우승자로 시켜주지 그랬어요. 내 말에 김진환의 폭력이 돌아올 줄 알았지만 예상외로 그의 반응은 달랐다. 미안하다고 했다. 원래 그런거잖니, 이 곳은.
12구역의 극적인 소녀라는 타이틀이 붙여지고 캐피톨 국민들의 지지율을 받은 대단한 아이라고 떠들어댄다고 했다. 김한빈과 러브라인을 요구하던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했다.
김한빈은 괜찮아요? 그제서야 나는 그의 상태를 물었다. 김진환은 참 빨리도 물어본다며 타박했다. 너보다 먼저 정신차린 놈이야, 벌써 재활치료받고 있어.
김진환은 병원에 파는 커피매장점에서 산 커피를 홀짝였다. 카페라떼 향이 풍겨져나왔고 맛을 음미하는 그의 표정이 새로웠다. 맨날 담배만 피던 사람이 커피도 마셔요?
내 질문에 김진환은 잔뜩 띠거운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담배끊었어. 엑, 왜요. 담배끊으면 축하해줘야 왜요는 무슨 왜요야? 그는 빈정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담배 이젠 못피겠더라고. 그는 대충 대답하며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금연한지 며칠 됐어. 나는 좀 놀란 표정으로 김진환을 흘낏 쳐다보았다. 금단현상 있을텐데...
흐릿한 내 말을 용케도 들은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금단현상 당연히 있지. 손떨리고, 그냥 몸 전체가 다 불안해. 입안이 심심하니까 커피라도 마시는거야.
그래도 끊기로 한건 잘한 행동이예요, 김진환. 내 말에 김진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에게 좋지않았던 걸 일부러 퍼뜨리고 다녔던 것 같아. 이젠 갖다버려야지.
그리고나서 한참동안 서먹했다. 나는 뭔 말을 먼저 꺼내야할지 몰라서 머뭇거렸고, 김진환은 커피만 마셔대며 멍 하니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병실이 조용해졌다.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은 나는 괜시리 부스럭거리며 이불을 정리했다. 이불을 가슴팍까지 올려 침대에 바싹 기댔는데, 김진환은 때마침 커피를 다 마신 눈치였다.
한참동안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뭔가 골똘히 생각해야 할 것이 있었던 것이다. 난 방금까지 꿨던 꿈 속을 떠올리느라 바빴다.
하늘, 그니까 밤 하늘은 꼭 검은색이 아니라 남색이였다는 점과 별들이 총총 박혀있는 배경이 내가 살아생전 가보지 못한 곳이였음은 틀림없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고,
바람은 따스했으니까. 나는 온기가 가득했던 공기의 움직임이 아직까지도 볼에 닿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링거를 맞고있는 손을 쉽사리 움직이진 못했다.
잠든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딱 그 사이에서 헤매고 있던 내 생사를 김지원이 구해준 것 같았다. 아니, 같다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나를 일깨워 준 거라고 믿었다.
"어떻게 할래."
그가 갑자기 물었다. 뭘 말이예요? 김지원 말이야. 그의 이름이 들려오자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기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빨라졌다. 김진환은 서슴없이 말했다.
김지원 처리를 해야하는데 유가족들이 너한테 맡기고 싶댔거든. 너가 그 아이의 대표가 되어서 진행해줬음 좋겠다고 그 녀석 형이 그러더라. 너는 어떠냐고 물은 거다.
김지원의 가족들은 내가 원망스러울 것이다. 나 때문에 그 아이가 죽었다고 나를 원망해도 모자를 텐데 그 와중에 장례를 내게 맡긴다는 말은 내게있어서 사형이였다.
눈 앞이 캄캄했다. 그 아이의 대표가 되어서 진행해줬으면 좋겠다고. 내가 이성을 잃지않고 날뛰지만 않는다면 당연히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아직 내가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 했는데 그 아이를 위로해 줄 수 있을지. 나는 손톱을 물어뜯다가 꿈 속의 그를 다시 기억해냈다. 달이 빛났었다. 사랑해.
그의 목소리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들려오는데 내가 그를 또 다시 잊을까봐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번만큼 너에게 제대로 된 기회는 없어. 그를 잡아.
너가 하지않는다고 하면 유가족들이 대신 진행할거야. 그는 다리를 반대로 꼬며 말했다. 그렇지만 그들도 썩 하고싶진 않은 눈치였어. 자신의 막내아들을 보낼 수가 없대.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대표자는 내가 되는거다. 너희들의 멘토였고, 너희들의 한 때 책임자였으니까 난 그걸 지킬 필요가 있어. 김진환은 그렇게 말하며 손장난을 쳤다.
너에게 선택권을 주는거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나서 내 침대 위에 올라왔다. 딱히 거부감은 없었기에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대답하지않았다. 재촉하는건 절대 아니야.
그리고나서 그는 내 머리를 쓸어넘겼다. 차근차근, 그리고 천천히 내 머리를 쓸어내리는데 그게 꼭 김지원이 했던 위로같아서 어쩔 수 없이 잔상들이 뿌옇게 변해버렸다.
김, 진환. 나는 목이 메어왔으나 그것을 굳이 숨기지않았다. 오히려 숨기면 더 쌓인다. 쌓이고, 걷잡을 수 없을만큼 축적되어 내 자신을 무너뜨리는 걸 알기에.
내가... 해도 될까요? 그렇게 상처를 줬는데, 그렇게 몰라줬는데 내가 그 애를, 김지원을... 보내도 돼요? 김진환은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고 쓰다듬을 멈추지않았다.
"해도 돼."
"..."
"정말이야. 난 말릴 힘이 없어."
"..."
"김지원이 널 원했잖아. 그걸 너도 잘 알고 있고."
재활치료는 금방끝났다. 김한빈의 신경재활이 뜻대로 풀리지않아서 며칠동안 애를 먹었다. 김진환은 끝내 인내심을 끊어내고 욕을하면서 김한빈에게 화를 냈다.
그럴 수록 더욱 피폐해져가는 건 나인걸 알았다. 자꾸 날이 갈 수록 김지원은 꿈에 나오지않았다. 언제다시 나올까 생각하면서 남은 나날들을 보냈다.
의사들은 이제 퇴원해도 된다고 결정을 내렸고, 곧이어 김한빈도 퇴원절차를 밟았다. 김진환과 김동혁, 앨리스 리는 우리 둘을 데리고 나오면서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그러다가 김진환이 먼저 말을 꺼냈다. 기자회견, 마지막으로 하고 각자 구역으로 돌아가자. 기자회견! 앨리스 리는 뒤늦게 말하며 까먹을 뻔했다고 중얼거렸다.
캐피톨 국민들의 논란 중심이 너희들에게 있으니까 말 잘하렴. 그녀는 나와 김한빈을 토닥이며 자신이 더 아픈 미소를 지었다. 무슨 질문이 나와도 당황하지말고.
김동혁은 내 손을 꽉 잡았다.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꼭 김동혁다웠다. 그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며 떨지말고 잘하고 오라고 나름의 응원을 했다.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기자회견이 준비되어 있었다. 김한빈이 먼저 내렸고, 그다음에 내가 내렸다. 바깥에 나와있던 기자들이 웅성거리며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여기좀 봐주세요!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공동우승자가 된 기분을 말씀해주세요! 김지원과 무슨 관계였죠? 헝거게임에서 가장 무서웠던 것이 뭐였나요?
그 안의 비밀이 숨겨져있나요? 누군가를 죽였을 때 어땠나요? 어떻게 살아남으셨죠? 총에 맞을 때 아프지않았나요? 김한빈씨, 여기 봐주세요! 김한빈씨!
김지원씨와 김한빈씨를 사이에 두고 인기여성이 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죠? 병원에서 무슨 진단을 받으셨나요? 관자놀이에 정확하게 맞은 것이 맞나요?
어디 아프신가요? 김지원씨와 애인관계가 맞으신가요? 오세훈과 손승완에 대해 할 말없으세요? 손승완씨가 눈앞에서 죽어간 기분은 뭐로 표현해주실 수 있나요?
어떻게 11점을 받으신거죠? 손승완씨가 죽은 뒤에 김한빈씨가 나타나셨는데, 그동안 뭐하셨어요? 김지원씨가 눈 앞에서 죽어간 거에 대해 말씀 좀 부탁드릴께요!
기자들의 끊임없는 질문에도 우리는 꿋꿋하게 침묵을 일관했다. 이윽고 기자회견 문이 열리자 미끄러지듯이 들어갔다. 안에는 기자들이 가득했다.
여기저기서 플래쉬 터뜨리는 소리가 났다. 가장 앞에 우리 둘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있었다. 불을 밝게 켜둔 채 사회자가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둘을 발견한 그는 환하게 웃으며 입장하셨다는 말로 마이크를 켰다. 기자들은 웅성거리며 우리 둘은 주시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오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의자에 앉자 눈 앞은 정말 눈이 부실정도로 환했다. 김한빈과 나는 무표정으로 앞을 쳐다봤고, 기자들의 질문타임이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둘은 대꾸하지 않았다.
말씀하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기자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모두들 불평을 터뜨리며 한 마디도 없는게 말이 되냐고 화를 냈다. 김한빈은 한숨을 쉬며 마이크를 켰다.
툭툭, 하고 묵직한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흐르자 기자회견장이 일동정지가 되었다. 김한빈은 물 한모금을 마시고 먹먹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김한빈입니다."
"..."
"많은 분들의 예상과 다르게, 저와 이 아이가 돌아왔습니다. 모두들 방송으로 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친구이자 경쟁상대였던 김지원군이 죽고나서 저희도 곧 자살시도를 했습니다. 서로를 죽이지 못 했기 때문이죠. 저희를 응원해주셨던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
"길고 긴 헝거게임이 끝나고나서 공황장애를 앓았습니다. 팔도 잃었고, 잃을것은 다 잃은 것 같습니다. 이 아이도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김지원군이 죽을 때 저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
"이 아이를 지켜달라고 했습니다. 그 또한 사랑했던 사람이 저와 겹쳤던 걸 기억하실텐데, 바보같이 그 친구는 제게 그녀를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
"그래서 저는 그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 아이를 지킬 것이고,"
"..."
"김지원군 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아이를 사랑할거라고 말입니다."
"이상, 김한빈이였습니다."
김한빈은 자신의 할말을 다 끝낸 눈치였다. 너도 할 말있으면 해. 그는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거절하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지원에게 할 말이 남아있었다.
"...안녕하세요."
기자회견장이 술렁거렸다. 그럴만도 하겠지. 나와 김한빈 모두 몸은 성하지 않았으니까. 더군다나 내 모습은 게임을 진행하기 전과 다르게 많이 초라해져있었다.
"살아...돌아왔습니다."
"..."
"약 일주일 동안 갖혀지내면서 극도의 불안감과, 살인, 그리고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렸었습니다."
"..."
"그럴때마다 김한빈군과 김지원군이 저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손승완양도, 오세훈군도 말이죠."
"..."
"김지원군의 진심을 알았습니다. 경기장 마지막 순간에 그가 저에게 해준 말은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
"미안하다고 말하고싶습니다. 그 아이에게... 저는,"
"그 아이에게 저는, 마치 세계와 같다고 여겼죠. 저는 왜 그 진심을 지금 알았는지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
"김한빈군이 앞서 말한 것처럼 저는 김한빈과 앞으로 동행할 것이고,"
"..."
"김지원군을 기억할 것입니다."
"..."
"...그를...잊지않겠습니다."
그렇게 둘의 기자회견은 끝을 지었다. 경호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다시 차량으로 가는 중에도, 기자들의 아우성이 폭발적으로 들려왔지만 모든 것을 무시한채 달렸다.
김한빈과 그녀는 잠시 떨어져있기로 했다. 각자 구역으로 돌아가서 해야할 것이 너무나많았다. 더군다나 김한빈은 정수정의 시신처리를 담당하기로 굳혔다고 했다.
그녀 또한 김지원의 시신처리를 맡았기에 아무말 없이 김진환은 차를 틀어 김한빈을 숙소에 데려다주었다. 김한빈은 그녀와 헤어질 때 무언가를 건넸다.
이게 뭐야? 그녀의 물음에 김한빈은 웃으며 대답했다. 김지원 일기장. 그러자 그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손가락 끝이 덜덜 떨리는 것이 눈에 보일정도였다.
한빈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진환도, 앨리스리도, 동혁도 그 순간만큼은 눈감아 주었다.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눈물이 일기장 표면을 적셔갔다. 노트를 건네받은 그녀의 표정이 점점 망가져갔다. 한빈은 무덤덤하게 그녀를 품 안으로 껴안았고, 그녀를 토닥이며 속삭였다.
12구역가서, 울고싶은 만큼 울어. 그가 목소리를 잔뜩 낮춘채 말했다. 대신, 다시 만날 때는 김지원 얘기가 나와도 울지말아야 돼. 한빈은 머리를 쓸어내리며 그녀를 달랬다.
다시 만날 때는 웃으면서 만나자. 한빈은 천천히 그녀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일기장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김동혁, 김진환, 그리고 앨리스 리. 한빈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잘 부탁할게요. 조만간 봬요. 그의 말에 진환은 아무 말 없이 거울로 그를 응시하다가 끄덕였다.
앨리스 리는 뒤늦게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동혁은 그동안 한빈의 보호자역할로 활동했기에 조금 더 친밀감이 있는 편이였다. 잘 가라, 조만간 보자. 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있으니까 무슨 일 있으면 울지말고, 조만간 캐피톨에서 보자. 한빈은 끝까지 그녀를 걱정하며 쉽사리 발을 떼지못했다. 결국 진환이 성질을 내며 빨리가라고 할 때,
한빈은 떨어지지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냈다. 그가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모습이 멀어져갔고, 차 안에는 침묵만 감돌았다.
앨리스 리가 분위기를 띄우고자 입을 열긴했다. 지금 우리는, 12구역으로 가는 기차를 타러가는거야. 네 짐은 우리가 모두 챙겼어. 우승자인만큼 자랑스러워 해도 된단다.
동혁은 앨리스 리의 옆구리를 세게 찌르고 입 닥치라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그녀는 대충 고개만 주억거리고 멍 하니 바깥을 쳐다보았다. 캐피톨 기차역이 보이고 있었다.
정말 헝거게임이 끝났구나. 그제서야 실감하는 현실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였다. 약 2주전까지만 해도 대역죄인이 된 것처럼 끌려왔던 곳이였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였고, 곧바로 실전에서 정말 사람이 죽어나가는 걸 보고서야 뭔가 잘못됨을 느꼈지만 자신이 살아남을 줄 몰랐다. 그리고 공동우승자도.
잊고 있었던 종대 대신의 자원으로 인해 이런 일을 겪은 자신이, 뭐랄까. 조금 불쌍했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안타깝다고 해야할지 표현을 뭐라고 하기가 그랬다.
기뻐해야하는데 기뻐할 수가 없었다. 완전체 우승이 아닌 반쪽짜리 구역들의 우승이였기 때문이였다. 그토록 우려먹은 김지원의 진심도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12구역으로 가는 기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94회 우승자 12구역 팀께서는 한 걸음 물러서 계셔주길 바랍니다.]
[다시한번 알려드립니다, 지금 12구역으로 가는 기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94회 우승자 12구역 팀께서는 한 걸음 물러서 계셔주길 바랍니다.]
회색으로 단단하게 칠해져있고, 새빨간 큼직막한 글씨로 '12'라고 적힌 기차가 거센 소리를 내며 캐피톨기차역에 진입했다. 12구역으로 가는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진환은 그들의 짐을 화물칸에 옮기느라 왔다갔다 거렸고, 동혁은 진환을 돕고 있었으며 앨리스 리는 배정받은 자리를 먼저 찾기위해 기차에 올라탄 상태였다.
그녀만이 아직도 플랫폼이 있는 땅 위에 있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과 바쁘게 걷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가야하는 구역의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녀는 멍 하니 곧 자신이 탈 기차가 달려가는 방향 쪽을 쳐다보았다. 철로들이 어지럽게 놓여있다. 시끄러운 기차소리들과 안내방송들까지 난잡함의 극치였다.
뭔가가 홀린 건지 모르겠다. 그냥 앞을 쳐다보고 싶었을 뿐이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며 제갈길을 갈 뿐이였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약 2주 전의 자신을 생각했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 아니 이 잔인함을 몸소 느끼기 전이였으니까. 그녀는 김한빈이 건넨 노트를 꾹 쥐었다. 귀가 전보다는 잘 들리지않는다. 불편보다는 편했다.
귀를 잃었지만 왠지 김지원을 몰라줬던 자신에대한 죄라고 생각하며 그러려니했다. 그녀는 귀에대한 재활을 원하지않았고, 병원 측에서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툭툭쳤다. 뒤를 돌아보니 동혁이 서있었다. 뭐해? 가자. 곧 출발할꺼야. 동혁은 그녀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고 기차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동혁에게 끌려가면서 그녀는 여전히 멍 했다. 지옥같았던 캐피톨을 떠난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인원이 다섯 명이 아니라 네 명이라는 것도 익숙치 않다.
그녀는 자꾸만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 누가 있던것마냥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에 동혁은 이상함을 느끼며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누굴 봤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만 시선은 자꾸 뒤로 주는 그녀였다. 귀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청력이 온전했을 때보단 적었지만, 자꾸 그녀의 귀가 무언가를 찾고있었다.
잠시만, 잠시만 동혁아... 그녀는 동혁을 세우기에 노력했다. 무슨 일있어? 동혁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잠시만... 왜, 뭐 놓고왔어? 아니이...
잘가.
익숙한 목소리로 누군가 스쳐지나가듯이 말했다. 그녀는 그제서야 멍 했던 정신이 드는 기분이였다. 스쳐지나갔던 음성에 고개를 돌아보니 그저 사람들만 북적였다.
청력이 반쯤 잃었음에도 온전했을 때만큼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이였던 것은...
나는 너를 찾고 있었던 거였어.
너의 목소리가 들렸던 방향으로 활짝 웃음을 지었다.
잘 가라는 너의 인사를 듣고싶었는데, 아직도 내 곁에 남아줘서 고마워.
지원아, 사랑해.
잠
"
겨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