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던가. 너는 나를 사람인양 다뤄주지 않았고 나는 그냥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다. 너의 동그란 눈이 언제부터 이리 차갑고 고독하게 느껴졌던가. 잠에 들기전에 너를 생각하며 이불속에서 발차기를 몇 번이고 하는건 이제 일상이 되었다. 슬프고도 참혹한 현실. 도경수를 붙잡고 ‘그일’ 에 대해서 해명하고 싶은 맘이 절실했지만 적어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라고 느껴서 그러지 않았다. 도경수도 충분히 심란할테니까. 그래서, 몇 개월이 지났더라? 어느덧 6월이였다. 우리는 마지막 방송을 마치고 공백기에 접어들었다. ‘그일’은 4월달에 있었으니 벌써 2개월이나 지난 샘이다.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나는 컴퓨터를 할때면 몰래 내 이름과 도경수의 이름을 나란히 쳐보기도 했다. 딱히 눈길이 가는 글은 없었다. 우리가 붙어있던 적이 있어야 뭐 이렇다 저렇다 할 글이 있겠지. 난 가만히 턱을 괴고 의미없이 나오는 글들을 모조리 읽었다. 우리의 모든 행동들이 사진으로 찍혀 올라와있다. 대포. 걔네들이 찍은거겠지? 나는 내 사진은 대충 넘겨버리고 도경수 위주의 사진들을 보면서 해실해실 웃었다. 눈 진짜 커. 입술... 진짜 도톰해. 뒷통수도 동그랗고 안짱다리를 하고 서있는 폼도 어설퍼. 근데 왜이렇게 귀엽지. 난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뭐, 그 웃음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스크롤을 다 내리고 짧게 달린 코멘트를 읽는 순간 내 모든게 차갑게 식어버린다.
경수 사진엔 하나같이 백현이가 쳐다보고 있네ㅋㅋ
씨발. 도경수의 사진을 그렇게 많이 보면서 정작 나는 인식하지 못했던거다. 난 다급하게 스크롤을 올려서 도경수의 사진을 몇 번이고 다시 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경수를 본게 아니라 도경수 뒤에 있는, 옆에있는 병신같은 나를 본거다. 저것도 나. 저것도 나. 하나같이 도경수 뒷통수를 보고있는 나다. 씨발. 씨발. 창피하기도 하고, 이게 뭐하는가 싶기도 한 일말의 자괴감이 밀려왔다. 난 컴퓨터 전원을 그대로 끄고 마우스를 집어 던졌다. 마우스 커서가 힘없이 떨어져 나간다. 원래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조울증에 걸리나? 기분이 막 좋아졌다가 좆같아지나? 난 주체할수 없는, 말로 설명할수 없는 좆같음에 눈에 띄는 물건들은 모조리 벽으로 집어던졌다. 달력도 던지고, 내 아이리무버도 던지고, 종국엔 장식용 향초와 유리병까지. 모조리. 다. 굉음을 듣고 달려온 박찬열과 매니저형, 그리고 구경꾼처럼 점점 불어나는 멤버들이 나를 향해 호통을 쳤다. 변백현. 변백현! 너 뭐하는거야! 성난 개처럼 눈에 뵈는게 없어보이는 내 모습에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했다. 수납장 위에 올라와있던 모든 물건들이 내 손에 날아가 파편이 되어, 이제 더 이상 던질 물건이 없어질때까지 난 갈갈이 날뛰었다. 헤어스프레이를 마지막으로 난 던질 물건이 없다는걸 인지하고 주저앉았다. 그제서야 모두 날 빙 둘러싸고 웅성인다. 무슨일이야? 변백현. 정신차려봐. 여기봐. 무슨일이야. 응? 다정한 준면이 형의 목소리.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요. 그냥 쉬고싶어요. 자꾸 왜 그랬냐고 추궁하지 마세요. 내가 이 지랄을 떤게 도경수 때문이라는걸 밝힐수 없어요. 도경수도 몇배나 불어난 내 마음을 알아챌까봐 무섭다구요. 나는 속에 담아둔 말들을 내뱉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 뜯었다. 난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다들 내 이런 미친행동을 이해할만한 적절한 이유.
“사생이 너무 싫어”
“백현아.”
“다 좆같아”
웅성거림이 잦아든다. 그 순간만은 진심이였다. 사생이 좆나 싫은건 진심이였다. 하지만 ‘다 좆같아’는 거짓이다. 그냥 도경수를 향한 내 마음이 좆같았을 뿐이다. 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씽긋 웃었다.
“미안. 나 좀 쉴게.”
방에서 나가달라는 암묵적인 동의를 구하는 거였다. 나도 참 미친놈이다. 그 지랄을 떨어놓고 바로 쳐웃는 꼴이란. 모순적이기 따로없다. 준면이형은 “나중에 얘기 좀 하자.” 하고 내 어깨를 몇 번 툭툭 치더니 멤버들을 대리고 방을 나갔다. 도경수 빼고. 도경수는 내 지랄에 부숴진 유리 파편을 줍고 정리하고 있었다. 맨손으로 거리낌없이 줍는 모습에 내가 더 놀라서 도경수를 말렸다.
“내가 치울게.”
“저리가.”
도경수의 손목을 잡아오자 도경수는 날 노려보며 손을 잡아 떼어낸다. 순간 구차했다. 얜 아직도 날 싫어하는구나. 몇분전만 해도 니 사진을 보면서 웃던 나는 뭐가 되는거니? 도경수는 내가 망부석처럼 서있든 말든 꿋꿋이 유리조각을 집고 치우는걸 반복한다. 야. 도경수. 내 부름에도 개무시. 툭툭, 어깨를 쳐도 개무시. 난 이런식으로 우리의 관계를 모른척하고 싶었던게 아니다. 도경수. 경수야. 너를 생각하며 수음했던거. 아직도 그게 걸려서 그래? 아직도 수치스러워? 야. 내가 더 수치스러워. 너한테 내 감정을 들켜서 수치스러워. 근데 무의식적으로도 널 좋아하고 있는 내가, 그 잔여물이 인터넷에 좆같이 돌아다닌다는게 더 수치스러워.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게 수치스러워. 남자 도경수를 남자 변백현이 좋아한다는게 좆같이 수치스럽다고. 그런데 넌 나를 모른척해. 2개월동안 우리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했던 나를 자꾸 짓이겨 밟아버리고 이상하게 나를 쳐다보고. 그건 사람대 사람으로서 하면 안될 행동인거 모르냐? 씨발 너 내가 만만해? 왜 무시해. 왜 내 말을 무시해. 왜 사람 마음을 무시해. 잘해줬잖아. 연습생때부터 지금까지 너만 봤잖아. 근데 넌 알면서 모른척하지. 무시하지. 내가 너 좋아하는게 병신같아?
하고싶은 말들을 가까스로 눌렀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야. 도경수. 야. 야. 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도경수를 몇 번이고 불렀다. 도경수는 역시 무시한다. 저 좆같은 유리조각좀 그만 치우라고. 씨발. 내 읇조림에 도경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난 처절했다. 맨손으로 남은 유리조각들을 모조리 쓸어서 주먹쥐었다. 피가 주륵주륵 흘렀다. 경악에 찬 도경수의 얼굴. 난 유리조각을 쥐고있지 않은 손으로 도경수의 손목을 잡았다.
“사람 마음 무시하지 말라고”
“......”
“나쁜년아.”
좆같은 년아. 개 같은 년아. 더 심한말도 있었는데 결국 내뱉는 말은 ‘나쁜년아’ 이 한마디 뿐이다. 난 도경수가 내 손을 쳐내기 전에 내가 먼저 도경수의 손목을 던지듯이 놓고 방을 나가버렸다. 휴지통에 손에 쥐고있던 유리조각을 모조리 털어냈다. 푹 파인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별로 안아팠다. 도경수 때문에 별로 안아팠다. 도경수가 자근자근 밟아놓은 마음이 더 아파서, 앞으로 어떤 고통도 덜하게 느껴질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