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홍의 기억 속 어린 날의 여제는 언제나 영특하고 똑부러지는 누이였다. 보름달을 닮아 환한 얼굴과 대조되도록 까만 눈동자는 사람을 빨아들일 듯한 포용력을 가지고 반짝였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친다며 그의 어미 앞에서 보양관은 입이 마르도록 그녀를 칭찬했고, 성품 또한 온화해 그를 돌보는 보모상궁은 당연한 일이었고 일개 나인들까지 그 이름을 받들었다. 저의 누이, 공주는 황실의 자랑이었고 또 보물과 같은 존재라고 한 입 모아 말했다.
준홍은 그런 공주가 자신의 누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자신과는 영판 다른 성품이어서 그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겨우 한 살 차이라지만 언제나 의젓하고 꼿꼿한 공주에 비해 준홍은 언제나 하루 일과가 사고, 사고, 사고가 전부였다. 공주는 일찍이 여섯 살 적에 다 외웠다는 천자문을 열 살이 되어서야 겨우 외우고 그 후로도 권유와 회유 끝에 겨우 겨우 정독한 소학 이후로는 영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며 툭하면 강좌 시간에도 몰래 빠져나가곤 했다. 그렇게 나와서는 나인들 치마 들추기랄지, 상의원 앞뜰 빨래터에 널려진 옷가지 몇 개를 다시 구정물에 담가 버린달지. 당하는 사람 복장 터지게 하는 짓은 죄다 하고 다녔다고 준홍 스스로 기억했다.
평생을 당해온 비교질에 질려서 그런 것이라고 또 덧붙여서 해명하기도 했다.
언제나 완벽하고 칭찬만 듣는 제 누이가 자랑스러웠지만, 그럴 수록 죄어오는 제 숨통도 좀 알아주었으면 했다. 공주께서는 저리도 잘 해내시는데, 왕자는 왜 저러시는지 모르겠다고. 그런 꼬리표가 평생을 준홍의 꼬리표로 쫓아다녔다. 그 꼬리표를 떼어내보겠다고 더 열심히 달음질했는데, 오히려 더욱 꽉 조여오는 그것은 준홍의 판단력까지 상실하게 만들었던지 시간이 지날수록 준홍의 삐딱선은 그 정도가 심해져갔었다.
다만 그렇게 왕자 마마! 하는 상궁의 애타는 부름에도 어머니인 여제의 매질에도 아랑곳 않는 준홍이 꼼짝 못하는 것이 있다면 자신을 이리 만들었던 공주였다. 그래서 한 두번의 사건 이후로는 준홍이 사고를 칠 때면 너나 할 것 없이 공주를 가장 먼저 찾아갔다. 준홍은, 또 공주는 알고 있었다. 본인의 의지로 이런 사건들을 벌이는 것이 아님을. 공주는 그런 아우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미안했고 그래서 바로잡고 싶었음이다.
"또 이런 식으로 나올거야?"
"…."
"나와 약속했잖아."
공주는 아닌 척 하지만 준홍은 알고 있었다. 자신을 나무랄 때의 공주의 눈이 얼마나 많은 말을 담고 있는지. 미안함, 자책감, 그리고 뭣 모를 또다른 말들이 섞여있음에 준홍은 차마 그것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런 공주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정말 제 자신이 죄인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너는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것은 난데 네가 왜 그런 눈을 하느냐고. 그렇게 물으며 안고 달래주고 싶었다. 준홍에게 제 누이는 그런 존재였다.
"…미안해."
"…."
"안 그럴게…, 누이."
그렇게 말해야 공주는 웃음지었다. 준홍도 그제야 그를 따라 웃을 수 있었다.
누이가 울면 자신도 울고 싶어지고, 누이가 웃으면 저도 따라 웃게 된다.
그것이 가족으로서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함께해온 누이에게서 느낀, 아주 오래된 감정이었기에.
그 날은 정말, 제 누이와 약속한 대로 착실하게 책상 앞에 앉아 오늘 목표한 양을 이뤘다. 지루하기만 한 경전을 외우고 서툰 필체로 작문 연습을 마친 후에야 뻣뻣하게 굳었던 몸을 풀 수 있었다. 오늘은 서툰 실력으로나마 지은 제 첫 자작시를 공주에게 들려주려 공주의 침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 날은 정말 준홍의 기분을 대변하듯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파란 색이었고, 햇살도 바람도 따뜻한 봄의 소식을 실은 듯 완벽했다. 요즘따라 부쩍 낮아지고 갈라져대는 목소리 탓에 부끄럽다는 이유로 공주를 피해다녔음인데 오랜만에 그 얼굴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마저 가벼웠다.
아직 공주는 공부를 다 끝내지 못했다고 전해왔다. 깜짝 놀라게 해 줄까, 하고 문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마저 기분이 좋아 히죽대고 있을 무렵 침소 안에서 들려오는 두 남녀의 목소리가 영 거슬렸다. 공주의 목소리에 한껏 기분 좋다는 듯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예쁜 목소리로 꼭 방울 소리 울리듯 까르륵 하며 웃음 소리를 냈다. 뭐가 그리 좋다고. 괜히 드는 꿍한 마음에 입술을 비죽이며 그 대화에 귀를 집중시켰다. 무어라 두 남녀의 대화가 오가고, 이번에는 백성들 이야기였다. 하여간에 재미 없는 이야기만 하네. 한숨을 쉬며 다시금 귀를 뗄 즈음 문득 귀를 울리는 익숙한 이름에 준홍이 몸을 움찔했다.
"준홍이, 말입니다."
"예, 대군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모든 걸 알게 된 후에, 상처 받으면 안 될텐데."
"…본디 태어나자 마자 내쳐질 아이였습니다. 그를 거두신 황제 내외께서 자비로우셨지요."
준홍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영 감이 잡히질 않았다. 분명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었는데, 알게 된다는 '모든 것' 은 무엇이고 또 상처는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몰라 혼란스러운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내쳐진다는 단어 또한 처음 듣는 듯 낯설기만 했다. 그를 바라보는 침전상궁이 곤란하다는 듯 발만 동동 굴렸다.
"그를 낳은 친어미는 궁녀였고, 친아비는 타국에서 큰 사업을 벌이던 무역 상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예…, 모든 것이 밝혀지고 부군의 자리에서 쫓겨나 지금은 그 이름을 올리지 못했습니다만."
멍하니 서있던 준홍이 곧 아, 소리와 함께 곧 입을 앙다물었다. 불과 몇분 전만 해도 설렘으로 반짝이던 눈이 곧 차게 식었다. 지난 10년이 넘는 세월 속 항상 품던 의문의 답을 알 수 있었다. 같은 부모를 통해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닮지 않은 외모며, 언제나 제가 궐을 돌아다닐 때면 그 뒤로 작게 들리던 수군거림, 어미가 자신과 누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다른 것도 전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방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고, 곧 공주의 스승과 그를 배웅하는 공주가 나왔다. 준홍을 아직 채 발견하지 못하고, 스승을 올려보는 공주의 눈이 아까의 자신처럼 반짝임에 준홍은 다시 한 번 박탈감을 느꼈다.
"…스승님, 그럼 오늘…."
"누이,"
공주가 움찔하며 고개를 돌리더니 곧 흰 얼굴이 핏기 없이 사색으로 변했다. 그와 준홍을 번갈아보는 용국의 표정 역시 곤란함으로 물들었다. 전에 없이 표정을 굳힌 준홍에 공주의 얼굴이 곧 울듯 울렁였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준홍아…."
"왜 니가 그런 표정을 짓냐고."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 아래 진노가 가득 담겨있었다. 용국이 공주 앞을 막아서며 침착한 목소리를 내었다. 우선 가라앉히신 다음에 이야기 하시지요. 지금은 대군께서 격한 흥분,
"비켜서라."
"…."
"…핏줄이 왕자가 아니라 천한 중인이라고 이렇게 무시하는건가?"
"준홍아, 그만…!"
용국의 뒤로 가려져있던 공주가 다시금 앞으로 나서며 그를 바라보다 작게 헉 하는 소리를 내더니 그 자리에 멈춰섰다. 준홍의 눈이 배신과 상처로 가득 차있었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날선 눈길에, 또 그 상대가 준홍임에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멈춰 멍하니 준홍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딴 거 필요 없겠네. 제 품에 곱게 접어뒀던 종이를 꺼내든 준홍이 바닥에 그것을 내쳤다. 애처롭게도 구겨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홍이 꼭 그 모습이 본인과 같다 느끼며 곧장 몸을 틀어 공주의 침소를 빠져나왔다.
날씨는 완연한 봄이었는데, 준홍은 다시 겨울로 변한 기분이었다.
해조차 제대로 뜨지 않은 새벽녘이었다. 봇짐을 싼 준홍이 곧 화려한 비단옷을 벗고 투박한 옷 위로 단색의 평범한 두루마기를 걸친 뒤 갓까지 써보이며 호위무사를 향해 물었다.제법 평인같아 보이느냐?
준홍의 이야기를 들은 직후부터 어두운 표정을 하던 호위무사가 결국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중하시옵소서, 대군.
그런 호위무사를 바라보던 준홍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너도 이제는 자유의 몸이 아니냐, 운아. 그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어린 아이일 시절부터 보아온 소년이 이제는 모든 것을 알았다며 제 보금자리를 떠나려는 모습을 마냥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세상은 대군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험하고 위험합니다."
"…너도 알지 않느냐, 궐이라고 안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준홍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같이 갈테냐? 그 목소리에 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주인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황제와 여제를 깨우고싶지 않았다. 서툰 솜씨지만 붓을 놀린 서찰을 대전 환관에게 맡기고 언제나 살갑게. 진심으로 칭찬해주시려, 공평하고 진정한 어머니로 남고자 노력했을 제 양어머니와 엄하고 무뚝뚝하면서도 항상 모범의 군주를 보여주었던 양아버지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공주의 침소 앞에서, 아직 꿈나라를 허매고 있을 공주에게도 마음으로나마 인사를 전하고 나오는 길에 마주친 대현에게는 쉿, 하고 입막음을 시키며 조용히 손에 쇠붙이를 하나 쥐어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희락전의 열쇠."
"예?"
악기를 연주하든, 연극을 하든 네 마음껏 해. 단, 공주를 웃게 해줄 때만.
"아니, 그게, 이 무슨…."
"대현이 넌, 음…, 사실 너도 못 미덥긴 한데 그나마 믿을만 한 사람이라고는 너와 업이 뿐이다."
"예?"
"우리 공주전하 잘 부탁해."
"…어디 가십니까?"
"응, 먼 길."
평소와 같이 웃음짓던 준홍이 대현의 어깨를 토닥이자 어리둥절한 얼굴의 대현이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준홍이 웃음 지은 얼굴로 몸을 틀어 궐을 빠져나갔다.
친아비를 찾으러 떠날 것이다.
먼 여정을 향해 오른 배 위에 몸을 실었다. 해가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언젠가 저 햇살과 같은 여제가 될거라 다짐하던 공주의 목소리가 선했다.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상처받았던 눈, 자신의 눈도 그와 비슷하지는 않았을까. 그 기억이 준홍을 아프게 찔렀다.
"생일 축하해, 공주."
생일 선물은 말 많고 탈 많아 그대 앞길에 방해만 될 것 같은 당신 아우의 부재야.
티거예요홓홍홍 |
와우 모바일이야 사실 벌써 이모가 도착하신 거 있죠..? (소곤소곤) 오늘은 읽으시면서 읭?????? 준홍이???????뜬금;;;;;; 하실 수도 있는데 한 번 다루고 싶었어요 원래 힘찬이 이야기도 넣으려 했는데 모바일의 한계..! 비회원분들을 위해 다시 한 번 알리자면 무서운 이모님과의 2주간의 동거로 인해 작가가 컴퓨터 앞에 앉는 시간이 줄어들었어요 (운다) 그래서 연재 텀이 좀 늦어질 것 같습니다ㅠㅠㅠ 아, 초록글 2페이지에 입성했었어요 되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게 모두 천사같은 우리 독자들 덕분이예요 고맙습니다 ♥ 항상 사랑해요 ♥ 워더 / 코난 / 지야 / 메리미 / 마토끼 / 열대야 / 영재꺼 / 리나 / 텐샤/ 토순이 / 밥이 보고싶다/ 화난 새 / 햇반 / 으갸갹 / 소조 / 호빵맨 / 폐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