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울린 사람을 위해 울지 마요
,라고 김남준은 경고했다. 호박색 술이 반쯤 남겨진 칵테일글라스를 노려보았다. 커다란 손이 잔의 입구를 덮어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다섯 잔도 넘었어요, 그만, 이젠. 금세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나를 어르는 검붉은 입술이 아직 마르지 못한 시야 속에서 물결쳤다. 그는 뭔가 말하려는 듯 달싹이다 곧 포기한 듯 잔을 들어 올려 입구에 묻어있는 희미한 립스틱 자국 위로 정확히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말릴 새도 없이 술은 이제 절반의 반쯤 남겨졌다. 가로로 긴 모자챙이 새롭게 흘러나오기 시작한 느릿한 음악에 맞춰 까딱 까딱 박자를 맞추었다. 낡은 스툴 위에 앉은 구부정한 상체가 움직거릴 때마다 그늘이 잔뜩 진 모자 챙 아래 젖은 입술이 반들반들 빛났다 어두워졌다 했다.
“그딴 새끼를 위해 울다니 말도 안 돼.”
“말이 되게 만들고 있어요, 지금.”
“이건 그냥 분하고 억울해서.”
“뭐가 그렇게 분하고 억울한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랬다면,”
“...거 봐. 결국 처음으로 돌아왔지.”
“처음?”
“우리 처음 만났던 그때 말이에요.”
주방 입구를 가린 천 아래로 사장의 늘어진 두 다리가 보였다. 그때도 저렇게 졸다 깨다 하며 내가 마실 술을 만들어주었다. 애인이, 이제는 헤어졌으니까, 전 애인이 매몰차게 이별을 고한 날이었다. 술을 마시면 쉽게 잠들거나 기억을 잊을 수 있다고 해서 무작정 들이켰다. 자정을 넘기면 그나마 찾아오던 발길도 끊기고 마는 허름한 변두리 술집을 어떻게 찾아 온건 지 너무 취해서 사실 기억도 나질 않았다. 술의 효과였다. 실연과 관련된 억울한 잔상들은 더욱 진하게 몰려왔다. 이것 역시 술의 효과였다. 사장의 코 고는 소리와 그날따라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음악들이 뒤섞여 어지러운 머릿속을 더욱 조여 왔다. 오른쪽 끄트머리 자리에 앉아 있던 나이 든 남자가 바bar 위에 지폐를 올려두고 비틀대며 가게를 빠져나갔다. 새벽 1시. 완벽히 홀로 남겨진 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그러다가 처음, 만났다기보다는 발견했다.
나이 든 남자가 망령 같은 표정을 하고서 들이키던 맥주병 옆에 걸터앉아 바닥으로부터 붕 뜬 기다란 다리를 까딱이며 놀라운 듯 중얼거리던,
- 내가 보이네 당신.
김남준.
“이름이 뭐 그렇게 평범해.”
“맘에 안 들어요?”
“그래! 다아 맘에 안 들어요. 네 이름도! 너도! 모든 게 다!!”
“그럼 울지마.”
안 울면 안 나타나지 나는. 젖은 볼에 단단한 엄지손가락이 닿았다. 가볍게 문지르자 물기가 사라지며 따끔거렸다. 셈을 해 보면 애인과 헤어진 지 한 달이 조금 지났다. 김남준은 술집이든 거리든 침대 옆이든 내가 울기만 하면 불쑥 나타났다. 시답잖은 농담을 하거나 내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거나 말없이 곁에 머무르다가 울음이 잦아든 내가 나도 모르게 잠들거나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면 그사이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그 기묘함에 더 이상 소스라치지도 않게 되었다. 뭐든 상관없었다. 코를 들이마시며 손길을 밀어내었다. 순순히 물러난 남준이 잔을 마저 기울였다. 고개를 뒤로 젖히느라 드러난 뾰족한 턱 아래가 파릇했다. 면도를 하지 않은 날이면 장난스럽게 내 얼굴에 제 턱을 문지르던 애인, 이제 헤어졌으므로, 그 나쁜 새끼가 다시 떠올랐다. 술기운과 눈물로 인한 어지러움이 점점 머리끝으로 올라왔다.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가 내 한쪽 손을 잡아내려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 낮게 조근거리는 목소리가 시끄러운 음악보다 훨씬 선명했다.
“우리 산책할까요?”
*
사람이 많은 곳은 끔찍하다고 투덜거렸더니 김남준은 그동안 있는 줄도 몰랐던 가게 옆문을 열며 나를 안내했다. 좁은 골목을 지나 넓은 골목을, 그 사이 길 양쪽 담벼락으로 넝쿨들이 우거진 골목을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가로등처럼 빛나는 달 아래 고양이들만이 담 너머에서 생존신고 같은 울음소리만을 내었다. 옆에서 발을 맞추어 걷던 그가 어설프게 고양이 소리를 흉내 내며 나지막히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고요하게 불어드는 찬 공기에 눈에 고인 눈물이 조금씩 증발되어갔다.
“그쪽은 뭐에요?”
“뭐냐뇨?”
“귀신? 도깨비? 괴물?”
“...”
“아님 혹시...저승사자?”
“푸하하”
얼굴을 문지르며 난처한 듯 소리 내어 웃는 남준이 불만스러웠다. 뭔데 자꾸 내 앞에 나타나는 건데, 도대체.
“아니 뭐 천사나 수호신 같은 건 후보에 없어요? 죄다 무서운 것들뿐이야 왜.”
“무슨 천사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멓게 입고 다녀요. 말도 안 돼.”
“인간들은 그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돼.”
“천사에요 진짜?”
“그런 게 그렇게 중요해요? 내가 천사면 뭐가 달라져? 만약 인간이라면?”
“인간이야?! 근데 어떻게 집까지...설마 스토커??”
“글쎄, 난 그렇게 끈질긴 타입은 아니라서.”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로 슬쩍 내 손을 잡는다. 얼어붙어 감각이 없던 손가락 사이사이로 따뜻한 온기가 차올랐다. 이렇게 뜨끈뜨끈한 걸 보면 분명히 귀신이나 뱀파이어는 아닌 것 같은데, 아니 근데 왜 남의 손을 덥석 덥석 잡고 난리야. 구시렁대는데 갑자기 도는 술기운에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속이 불편하거나 괴롭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어지러움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깍지 낀 손을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기는 남준을 밀어내거나 말리지 않았다. 질문을 멈추지도 않았다.
“그럼 뭐야.”
“뭐냐구요”
“나는 바람.”
“바람?”
“응. 당신의 소원을 들어주러 온 바람.”
“소설 쓰네...”
“진짠데. 지금 이 순간 원하는 걸 들어줄게요,”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달빛이 비치지 않는 그늘진 시야 앞에 막다른 골목이 있었다. 어디를 얼마나 걸었는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쯤에서야 들었다. 내내 앞을 보며 걷던 남준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모자챙 아래 겨우 보이는 입술이 움직거렸다.
그 남자에게 돌아가게 해달라는 것만 빼고.
완벽히 말랐다고 생각한 눈가가 다시 뜨거워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의 온기로부터 풀려나간 손가락이 다시 얼어붙기 시작했다. 온몸이 떨려왔다. 나도 알고 있지. 누가 와도 그게 무엇이라도 나를 그 남자에게 돌아가게 만들 수는 없을 거야. 알면서도.
나를 내버려 두고 막다른 벽 앞에 선 김남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림자를 닮은 까맣고 기다란 남자. 사람, 인지 아닌지 모를 무언가. 아마도, 바람. 시선이 흔들거리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파왔다.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렸다. 이젠 그만. 춥다. 누군가가. 좀. 나를.
나는 무릎을 짚고 겨우 일어섰다. 머뭇대던 말을 꺼냈을 때 겹겹이 갈라지는 목소리가 부끄러웠다.
“나랑 자요.”
김남준이 서서히 뒤돌아보았다.
“나랑 자자구요. 그게 지금 내가 원하,”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나는 그가 바라보고 있던 차가운 회색 시멘트벽에 기댄 채로 그의 팔 아래 가두어져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헉,”
“나랑 자고 싶어요?”
놀랄텐데. 나 되게 잘해서. 놀란 내 눈은 아랑곳않고 키득이는 목소리가 장난스러웠다. 눈을 찌푸리자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오른쪽 허리 틈으로 남준이 손을 뻗음과 동시에 다른 손으로 내 등을 끌어안았다. 손가락으로만 느꼈던 체온이 몸 전체로 퍼졌다. 씁쓸하면서도 알싸한 나무 향기 같은 것이 그에게서 풍겼다.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느껴지는 그의 숨결이 내 것과 달리 아주 여유로웠다. 그의 눈과 코를 내내 그늘지게 만들었던 검은 중절모의 기다란 챙이 나에게 다가온 만큼 벗겨졌다. 장난스러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나를 깊숙히 살피고 있었다, 김남준은.
도톰한 입술이 내 젖은 눈가를 슬쩍 머금었다 떨어졌다. 이끌리듯 김남준의 기다란 목에 두 팔을 감고 발뒤꿈치를 들어 먼저 입술을 부딪쳤다.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멈칫하는가 싶더니 서서히 틈을 가르고 들어와 뜨겁게 엉겼다. 다급하게 할딱이는 내 혀를 느긋하게 감아올리고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살살 핥아내었다. 가슴 속 어딘가가 크게 일렁인다. 안달이 나 몸을 더욱 가까이 하자 그가 입술을 내 턱 끝으로, 목덜미로 옮겨 내려갔다. 진득하게 물었다 당겼다 할 때마다 남준의 푸릇한 턱이 살갗에 닿아왔다. 고개를 조금 내려 끝이 뾰족한 귓바퀴를 슬쩍 깨물었다. 그가 목 안으로 낮게 신음하며 고개를 털었다.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그의 모자를 주워 올릴 새도 없이 축축하고 야한 소리들이 골목 안을 울렸다. 나를 울렸던 추억들은 우습게도 서서히 지워지고 그곳에 김남준의 감각과 특유의 향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순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어깨를 세게 쥐었다 놓자 그가 입술을 떼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정적이 흘렀다. 기다랗고 살짝 쳐진 눈매 속에 자리 잡은 검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들거렸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말했다.
“결정해요. 이 다음부터는 안 멈출거니까.”
한 톤 더 낮아진 어쩌면 불안한 목소리가 귓가에 긁히듯 박혀왔다. 잠시 멈춰있던 나는 가만히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허리 틈에 자리하고 있던 그의 손이 움직였다. 철컥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거짓말처럼 들려왔다. 등 뒤가 서늘해지며 우리는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고양이 울음소리조차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아주 고요한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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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밤 씨의 사진이 떴던 날 휴대폰을 붙들고 '이 몽환적인 분위기 이 기럭지...이건 사람이 아니야...!' 하고 부들부들 감격하며 울부짖다가 결국 사람이 아닌 김남준을 만들어내버린(...)촉새입니다..섹시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는데..잘 안 된 것 같아요 흑. 그나저나 모두들 즐거운 설날 보내고 계시지요?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고향 왔다갔다 하시는 분들은 항상 몸 잘 챙기시고, 혹여 친척들에게 본의 아닌 어택을 당하신 분들은 마음 잘 챙기세요ㅠ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암호닉 신청해주신 충전기님, 꾸기님, 벨 님, 나무님, 코코몽님, 목도리님, 모니님, 콩 님 항상 감사합니다 싸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