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원이는 냉정하게 뱉은 말과 다르게 내가 해다 바친 김치찌개를 맛있게 비우고, 나를 쫓아내지 않았다.
그냥 투명 인간 취급했을 뿐,
밥 차려 놓으면 본체만체, 말 걸어도 들었으면서 대답안하고, 집에 올 때도 문 따고 들어와서 왔다는 말도 없고
잘 때도 쳐다도 안보고 누워 잠들고,
아, 내가 어떻게 너랑 만났는데 어떻게 여기 얹혀살게 됐는데!! 이렇게는 안 되지!
"불 꺼"
"아, 잠깐만 얘기 좀 하자고요-"
"불 꺼"
"자지마―잠깐만, 어?"
"불, 끄든가 나가든가."
"맨날 나가라는 말밖에 안하지!"
"그러니까 나가든가"
일어나보지도 않고, 대꾸만 건성건성.
야, 나도 자존심 있는 남자거든?
그대로 불을 끄고, 문을 일부러 쫌 세게 닫고 쇼파에 와서 찌그러졌다.
음, 아니, 갈 데는 없으니까…….그래도 자존심 있는 남자니까 tv는 안 켰다.
나도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거 아니라고!
/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따갑게 비치는 햇살,
난 분명 쇼파에 쭈그러져 잡생각을 하다 잠들었는데, 그게 불편했는지 옆으로 누운 채, 쇼파쿠션을 끌어안고 있다.
어깨가 찌뿌둥해서 기지개를 펴며 일어나니 집이 또 썰렁하다.
또또, 모르는 척 하자는 거지. 그럴 거면 나 재워주는 이유는 또 뭔데.
처음부터 다정하게, 애초부터 날 사랑했던 것처럼 다가왔던 호원이여서 그런지 저런 모습은 영 적응이 안 된다.
니가 그렇게 계속 얼음프린스인척하면 난 진짜 자신 없단 말이야…….
쇼파에 앉은 채로 한숨을 좀 쉬다가, 일어났다.
뭐 어떡할 거야.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하지 뭐.
이래서 자꾸 살이 찌나...음…….
부엌으로가 대충 야채 남는 걸 쓸어 넣고 계란으로 감싸 나름 그럴듯한 오므라이스를 만들어먹고,
최근며칠간 계속 그래왔듯이 집안일을 시작했다.
세탁기돌리기도 전기 아까울 만큼 별로 안 나오는 빨래지만, 그래도 매일해야지.
빨랫감을 꺼내 베란다건조대에 널어두고, 청소기를 한번 돌리고, 손걸레로 바닥과 가구들을 싹, 닦아놓으니 벌써 한낮.
오늘 저녁은 뭐해먹지…….
빨래고 청소고 맨날 호원이가 하던 거라서 내가 갑자기하려니 손이 트고 난리가 났다.
설거지를 깔끔히 마친 후,
손에 핸드크림을 처덕처덕하게 바르고 호원이의 옷장을 뒤적여 대충 만만해 보이는 후드짚업을 걸치고 나왔다
그러고 보면 이때도 8년이나 과거인데 호원이도 되게 유행 안탄단 말이야-.
거의 다 모노톤이라서 그런가. 이제 봄인데. 화사하긴커녕 지 성격같이 칙칙하기만 하다.
음, 어쨌든 검은색회색흰색으로 도배된 옷장사이사이에 아이 같은 보라색옷이 유독 많은 건 참 똑같구나…….
또 비가 오려 그러나 싶어 챙겨가려고 아무리 찾아도 3단 우산이 하나도 안보여서 결국 1단 장우산을 끌고 나왔다.
아이씽, 이거 겁나 무거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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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가 행사 중인 거예요?"
"응, 학생- 이게, 원플러스원, 판두부는 부쳐 먹고 순두부는 찌개해먹고,어?"
음....두부....좋아하긴 한다만..순두부찌개나 할까 오랜만에. 안한지 완전 오래됐네 그러고 보니…….
예나 지금이나 미래나 거기서 거기인, 별거 없는 시식용 두부를 하나 쏙 집어먹어보니 나름 고소한 게 괜찮다.
하나 주세요. 하니까 늘 그렇듯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한 봉지를 건네주는 아줌마.
음....그럼 이제 거의 다 산건가. 다 쓴 마늘이랑 파도 샀고...온 김에 주스도 하나 샀고...이걸 다 들고 갈수는 있으려나.
"아, 그니까 이게 더 맛있대도-?"
어딘가 낯이 익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돌아보니, 나보다 조금 큰, 남자아이하나가 커다란 종이박스를 들고 빠르게 걸어간다.
좀 틱틱 대고 징징대는 듯 한 특이한 말투에, 강아지 같은 머리에 핏이 딱 맞는 셔츠에 면바지, 뭔가…….
전혀 다른데도 뭔가가 남우현이, 그 꼬맹이 우현이가 떠올라서 몇 걸음 뒷걸음쳐 보니 뒤통수만 보인채로 멀어져간다.
음........아니겠지?
하긴, 우현이가 왜 여기서 장을 보겠냐, 백화점가서 세일 안하는 것만 골라서 사겠지, 치.
키는 컸으려나, 귀엽기도 하고 딱 훈남 비스무리하게 생겨서 그대로만 컸다면 인기는 많을 것 같다만..
힛, 그래도 이호원 만할까, 완전 잘 자란 케이스의 표본이지. 흐하항.
생각난 김에 오랜만에 오뎅탕이나 해먹을까, 하고 오뎅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한 봉지 들고 나왔다.
물가가 너무 차이가나서 아직까지도 물건을 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가격이 LTE급 속도로 오른 건 이천년대 후반이구나…….뭐, 아닐 수도 있고.
어린 난 지금쯤 어디에서 헤매고 있으려나.. 당연히 아직 호원이를 만나려면 몇 년 남았고…….
생각에 빠져서 머릿속으로는 괜히 주판을 튕기며 날짜와 연도를 계산해보는데 뭔가, 잊은 것 같다.
음.....지갑, 있고. 열쇠, 있고. 음...어......아, 우산!
"저, 여기 근처에서 우산하나 못 보셨어요? 이-따만하게 좀 큰 건데……."
"못 봤는데....이거 하나 드셔보실래요?"
"네? 아뇨...감사합니다―"
벌써 1층, 지하매장, 고루고루 두 바퀴는 돈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인다.
분명 마늘 고를 때 까지만 해도 있었는데…….아까 스프링 노트살 때 거기에 놔두고 왔나... 못 찾으면 어떡하지?
아까는 신경도 안 쓰였는데,
이제야 기상캐스터가 비가 내일오전까지 줄창 내릴 예정이며 이상저온현상과 겹쳐 다소 쌀쌀한 예정이니
따뜻하게 입고 우산 챙겨 나가라던 게 기억난다.
아니, 곧 봄인 주제에 춥긴 엄청 추워서 딸랑 얇은 짚업 하나 걸치고 비까지 맞으며 갈 자신이 없다.
장본 것도 들고가야하고……. 그냥 이거 다 제자리에 갖다놓고 집까지 뛰어갈까…….
"학생! 학생!!"
"네? 저, 저요? 어, 두부...저 두부 아까 샀는데.."
"아니아니, 이거, 학생꺼 아니야?"
"어! 내 우산! 어디서 나셨어요?!!"
"아니 아까 학생이 두고 가서- 일단 가지고 있긴 했는데,
그대로 계산하고 갔을까봐 엄청 조마조마했네 호호호. 젊은 애가. 이렇게 큰걸 잊어버리고 가면 어떡해-"
"아, 으하하하, 그러게요. 흐핫,진짜 고맙습니다!"
/
삑, 삑, 삑,
"23600원 나왔습니다 손님-"
"아, 네, 여기요."
괜히 고마운 마음에 두부를 한 세트 더 사고 나오니 비가 엄청 내리고 있다.
아까보다 더 쏟아지네,
이게 어딜 봐서 봄비야...장만 줄 알겠다.
두 봉지에 나눠 담은 짐에, 우산을 어떻게 들지 고민하고 있는데
저-멀리에서 커다란 남자 하나가 우산도 안 쓴 채 막, 전력으로 뛰어온다. 헉, 뭐야.
"......헉. 헉...뭐야...왜,여기있어……."
"....호원이..?"
"왜 여기 있냐고!!!!"
"어..어?...나..저녁 장보러……."
"넌 저녁 장을 세 시간 넘게봐?!!"
"아니 어쩌다보니까……."
갑자기 왜 나한테 성질이래, 나가랄 땐 언제고…….
내가 그렇게 여기 오래있었나…….
체크카드 들고 튈만큼 배짱 있고 뻔뻔한 사람은 아닌데 말이야…….
근데 얘는 뭐 때문에 우산도 안 쓰고 쓰레빠차림으로 뛰어나왔대, 그것도 까만색 파란색 짝짝이.
"그러는 넌, 어디가?"
"어? 나....? 아, 나 학교에 뭘 두고와서……."
"그래? 갔다갈까?"
"어, 아니, 이제 됐어"
"뭐 두고 왔다며- 가져와야지, 음...근데 지금 갈려면 또 창문으로 들어가?"
"나 그때 들어갈 땐 창문으로 안 들어갔거든? 아, 아무튼 됐어 이제, 어....친구가 내일해도 된대."
"아, 그래? 다행이다-"
근데 웬일로 내 말에 대꾸도 해주나, 또 대답도 길-게하고..
학교에 두고 온 게 그렇게 중요한 거였나, 아니면 학교까지 가기가 그렇게 귀찮았나,
뭐 어때, 내가 우산을 펴면서 빙긋, 눈을 접으면서 웃으니까 괜히 정색을 하고 고개를 저편으로 돌린다.
그래도 꼭, 아이 같은 웃음을 살짝.
거봐, 웃으니까 얼마나 좋아. 볼을 꼬집어주고싶다.
"자, 가자! 오뎅탕에 두부김치!!"
들어달라고 징징대서 봉지를 하나 맡기고 우산을 들었다.
내가 너무 작아서 불편할까봐 높-이 들고 있으니 그게 안 돼 보였는지 자기가 우산을 든다.
들어주는 것까진 좋은데 너 혼자 그렇게 빨리 걸어가면 나는 어쩌라고! 이씨, 그게 니꺼냐?....니꺼긴 하지, 그래.
얼른 봉지를 들고 따라가니까 그래도 천천히 걸어준다.
음.. 착해 착해, 흐뭇하게 웃으면서 여기저기 살펴보는데 그러고 보니 얜 왜 반팔로 뛰어나온 거야,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하나도 빠짐없이 쫄딱 젖은 호원이를 좀 뜯어보는데 마트봉지를 든 왼쪽손목에 보이는 선명한 두 줄.
주변에도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있다.
저건...꼭.......
"뭘 그렇게 쳐다봐."
내가 빤히 보는 게 느껴졌는지 나를 쳐다보며 툭, 말을 내뱉더니 그대로 봉지를 바꿔들며 손목을 감춘다.
확실히 고등학생인 호원이는, 잠깐 함께 지낸 걸로도 느낄 만큼 감당하기 어렵다.
어린 애일 때는 마냥 해맑아서 어려웠다면 지금은 너무 어두워서.
둘 다 평소에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모습이라서, 세 시기의 호원이가 모두 다른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다.
내가 아줌마의 죽음만 어떻게든 미뤘어도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하는 괜한 자책감.
사실 이 상황까지 오고 나서부터는 그딴 소원반지, 믿기지도 않지만.
그게 진짜였다면 어떻게든...더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 머릿속에 계속 떠오른다.
/
한숨을 푹푹 쉬다가 그래도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언제나처럼 나 혼자 호원이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집에 도착했다.
자기도 어색하고 심심한 거 되게 싫어하면서 일부러 입 한 번도 안 떼고, 고집쟁이.
짐을 내려놓고, 새로 산 로션을 넣어놓으려는데 보이는 반짇고리안의 여러 종류의 실뭉치.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뭐더라, 소원팔찌였나. 그거면, 손목을 대충 가릴 수 있지 않을까.
호원이가 어떤 색을 좋아하더라…….일단 보라색이랑…….
"뭐해?"
"어? 이거-........아....푸핫."
"뭐야, 왜 웃어, 갑자기."
"아하하하,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뭐하냐는 말에 뭐라 설명을 하려고 말을 고르는데, 느꼈다.
호원이나 나나, 다를 게 없네.
호원이의 뜬금없는 소원드립에 유치하다고 비웃을게 아니었다.
나한테 반지를 줬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날부터 실을 몇 가지 골라내 몰래 쪼물거리기 시작했다.
손목을 눈에 안 띄게 하려면 여덟 줄짜리로 해야 하나..? 열 두 줄..?
하나만하면 안 예쁠 텐데, 각각 하나씩 할까...괜히 기분이 들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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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ㅋㅋㅋㅋㅋㅋ오랜만이네요 일주일만이죠,...잘지내셨나요
이번회는 유독좀 짧죠...?ㅠㅠ....이제까지중에 제일짧았던 1화보다도짧음...
왜냐고여..?ㅠㅠ
더 써두긴했는데 아무래도 더 이상의 전개를 위해서는 호원이이야기번외가 필요할듯해서..
적당히끊으려니 이렇게됐네요....ㅠㅠ...죄송...죄송해요...헝....
번외열심히써서 평일에 들고오도록하겠습니다!_!
늘 읽어주시는 여러분들 사랑해요....s2...
항상 감사합니다 좋은밤되세요 물결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