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버린 그 날로부터 1년, 그리고 몇 개월 후.
" 타십시오. "
익숙한 목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던 시선을 앞으로 돌려 내 앞에 선 J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자동차뒷좌석의 문을 열곤 날 바라보는 J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J가 익숙한 듯 운전석에 앉았다. 자동차는 부드럽게 출발했고 열린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꽃내음에 기분 좋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창문을 조금 더 내리자 운전을 하던 J가 룸미러를 통해 나를 힐끔 바라보곤 말했다.
" 아직 공기가 찹니다. "
" 갑자기 왜 경호원 코스프레에요? "
" 한국이잖습니까. "
" 미국에선 반말도 잘만 해놓구. "
내 말에 J가 피실 웃었다. 미국에 있는 동안 J와 동혁이, 그리고 나. 우리 셋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낯선 곳의 생활을 버텼다. 사실 버텼다고 표현해야 할 만큼 힘든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동혁이가 있어서 즐거웠고, 동혁이의 누나가 있어서 더욱 편했고, J가 있어서 마음이 놓이고.
뭐 어쨌든, 우리 셋은 1년동안 꽤 친하고도 또 친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 바람 타고 꽃향기도 나는 거 같은데. 느껴져요? "
" 네. 길가에 꽃도 피기 시작한 거 같네요. "
짱 좋아요. 봄이야. 내 기분도 봄, 계절도 봄.
노래를 하듯 기분 좋게 흘러나온 내 말에 J가 피식 웃었다. J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창문을 조금 더 아래로 내리고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한글 간판들, 그리고 익숙한 모습의 한국 사람들. 자주 보던 건물들, 창밖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말소리, 그리고 향기마저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 거리. 어느 것 하나 기분 좋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국이다. 그렇게나 오고 싶었던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빠의 사업은 잘 정리되었다. 내가 떠난 후로도 몇 달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하긴 했지만 아빠도, 그리고 나와 우리 가족, 우리 회사를 미워하던 그 사람들도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원만히 해결이 되었다고 했다. 참 다행이었다. 이제는 이유 없는 미움을 받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 때의 일을 발판으로 삼은 WC그룹은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어마어마하게 성장을 한 듯했다. 렌즈, 립글로즈, 넥타이, 셔츠, 정장, 그리고 그 외 많은 것들. 주위의 것들 중에 WC의 흔적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나 또한 미국으로 떠난 뒤 동혁이의 학교에서 다시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려하던 대로 몇 번의 슬럼프도 찾아왔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날 잡아준 건 늘 내 곁에 있어준 J와 동혁이었다.
미국에서의 동혁이를 비교하자면, 음, 100개의 채찍과 1개의 당근이었다. 꿈에 있어서, 미래에 있어서 동혁이는 친구가 아닌 오빠였다. 진심으로 날 걱정하고, 기가 죽은 날 일으켜세우고, 허튼 생각에 빠진 날 혼내는 사람.
그와 반대로 미국에서의 J는 99개의 당근이었다. 당근, 당근, 또 당근. J는 늘 내편이었다. 우울함에 빠지고, 동혁이에게 혼나서 더 시무룩한 날 달래는 건 늘 J였다. J가 날 달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바비.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처럼 머리를 스치는 미국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며 피실 피실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J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바비는 지금 어디래요? "
" 회장님 먼저 안 보실 겁니까. "
잔소리 하듯 들려오는 J의 말에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 일단 바비 어디있냐구요. "
칭얼대듯 물어오는 내 목소리에 J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실 웃으며 답했다. 집에 있습니다.
" 아마 회장님 일정 맞춰서 움직일 준비 하고 있을 겁니다. "
J의 대답에 작게 웃으며 외투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잠금을 풀곤 익숙한 휴대폰 번호를 꾹꾹 눌러 통화 버튼을 누르자, 짧은 통화연결음이 끊어지고 금방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 아빠! "
- 우리 딸! 한국은 잘 도착했어?
" 응. "
아빠는 보이지 않겠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응, 하고 답한 뒤 곧바로 말을 이었다.
" 아빠, 오늘 어디 가요? "
- 김위원 잠깐 만나러 갈 거야.
" 바비랑 가요? "
뭐라고 말을 더 이으려던 아빠를 향해 바비랑 가요? 하고 묻자, 아빠가 내 물음을 예상했다는 듯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 나비랑 갈 거다.
아빠의 답에 배시시 웃으며 알았어요, 하고 답하자 다시 한 번 아빠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 집으로 바로 올 거냐?
" 응. 가고 있어요. "
- 얼굴은 못 보고 나갈 거 같구나. 갔다와서 보자.
" 네. 다녀오세요, 아빠. 사랑해! "
뜬금없는 내 고백에 아빠는 허허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끊긴 휴대폰을 귀에서 떼곤 다시 돌아온 휴대폰 배경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년하고도 몇 달은 전에, 바비와의 마지막 데이트에서 찍었던 그 사진. 화면 위의 바비 얼굴을 손가락으로 괜히 한 번 쓸어보았다.
연락은 자주 했었지만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는 건 거의 일 년 만이었다. 얼굴을 못 볼 만큼 바빴다는 건 핑계였다. 혹시라도, 중간에 바비를 보게 된다면, 모든 걸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와버릴 것만 같았다. 아마 그랬다면 바비도 나도 내 자신에게 실망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걸 포기하는 건, 바비가 말한 대로 아직 덜자란 행동이었다.
보고 싶다. 김지원. 지원 오빠. 아직 내가 한국에 온 걸 모를 바비를 생각하자 피실 피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화면 속의 바비 얼굴 위로 손가락을 꾹꾹 누르며 혼자 중얼거렸다.
" 보고 싶어 죽겠다, 이 얼굴. "
" 네? "
" …에? "
" 뭐라고 하셨습니까, 방금. "
" 아니. 아무 것도 아녜요. "
제게 무슨 말을 한 줄로만 알았던 J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답했다. 그리곤 다시 한 번 열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에 든 휴대폰으로 카메라를 켰다. 그리곤 카메라의 렌즈가 창밖을 향하도록 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의 풍경이 휴대폰 속 사진으로 담겼다. 선명하게 찍히진 않았지만 군데 군데 보이는 한글로 된 간판, 그리고 익숙한 풍경은 누가 봐도 한국의 모습이었다. 만족하는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사진을 바비에게 전송했다. 그리고, 전송된 사진의 뒤로 뭐라고 자판을 두드린 뒤 다시 한 번 전송 버튼을 눌렀다.
'come back home!'
* * *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자 익숙한 우리 집의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그 향기에 절로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우리 집. 정말로 한국에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나자 피실 피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 뒤로 짐을 들고 들어오는 J를 향해 '짐은 내 방에 올려줘요!' 하고 소리치곤 곧바로 신발을 벗고 2층으로 향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가볍게 걸으며 복도를 지나던 그 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걸음을 멈추곤 휴대폰을 꺼내자 화면 위로 익숙한 얼굴과 익숙한 번호, 그리고 익숙한 저장명이 눈에 들어왔다.
「내 남자♡」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곤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대자, 들어도 들어도 자꾸만 듣고 싶은 그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 아가씨.
아가씨, 하고 나를 부르는 바비의 목소리에 괜히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곤 말했다.
"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라니깐. "
- 사진 보낸 거 뭐야.
" 아, 봤어요? "
- 한국이야?
" 응! "
내 말에 정말로? 하고 묻는 바비의 목소리에 네, 하고 대답 하며 조심스레 바비의 방문을 열었다. 열린 방문 틈새로 고개만 내밀어서 안을 배꼼, 바라보자 거울 앞에 서서 양손으로 넥타이를 매고 있는 바비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바지, 하얀 셔츠, 그리고 세우지 않은, 차분히 이마 위를 덮은 앞머리. 거울에 비친 바비의 모습에 자꾸만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스피커 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는 건지 바비가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향해 고개를 돌리곤 말했다.
- 온다는 말 없었잖아.
" 서프라이즈 선물이에요. "
- 그래서 지금은 어디야.
" 어디일 거 같아요? "
내 물음에 바비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 어딘데.
" 오늘 바빠요? 어디 가요? "
대답 대신 물어오는 내 질문에 바비가 잠깐 뜸을 들이곤 답했다. 회장님 약속 있으셔서 같이 갔다가 저녁에나 집으로 돌아올 거야. 바비의 대답에 문을 조금 더 열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더 물으려는 듯 입을 열던 바비는 뒤에 걸린 자켓을 입기 위해 몸을 돌리다가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날 발견한 바비와 눈이 마주치고, 고개만 배꼼 내밀고 있는 채로 배시시 웃으며 안녕! 하고 인사했다. 놀란 듯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 바비의 행동에 피실 피실 웃음을 흘리곤 문을 활짝 열고 바비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쪼르르 걸음을 옮겨 바비의 앞으로 달려가 바비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 그렇게 바보 같은 표정만 짓고 있을 거에요? "
내 말에도 여전히 멈칫하는 바비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나 안 안아줄 거에요?
그제서야 정신이 든 건지 바비가 양팔로 나를 제 품에 꽉 안아왔다. 참 익숙한 사람, 그리고 그리웠던 향기. 바비의 품에 안기자 그 동안 쌓였던 그리움이 한번에 다 날아가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흐, 하고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는 나를 꽉 한 번 안은 바비의 목소리가 바로 위에서 들려왔다.
" 뭐야, 너. "
" 뭐긴요. "
" ……. "
" 사랑스러운 여자 친구? "
내 말에 바비가 그제서야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를 품에서 떨어트린 바비와 눈이 마주쳤다. 구석 구석 나를 찬찬히 훑어보던 바비는 웃으며 내 볼으로 손을 뻗었다. 다정한 손길로 내 볼을 쓰다듬은 바비가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 맞네, ---. "
내 이름을 말하는 바비의 목소리에 가슴이 빠르게 쿵쿵대기 시작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바비의 눈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그대로 발을 들어 바비의 입술에 쪽, 하고 뽀뽀를 하곤 떨어졌다. 내 행동에 놀란 듯 날 바라보던 바비는 피실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미치겠다, 하는 말과 함께 바비는 다시 한 번 나를 품에 안았다.
" 진짜 아가씨 맞습니까. "
" 맞아요. 정말로 아가씨 맞아. "
내 말에 바비는 웃으며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바비의 품에서 살짝 떨어져서 이번엔 바비의 볼에 쪽, 하고 떨어지자 바비가 눈이 접히도록 예쁘게 웃었다. 다시 한 번 나를 빤히 바라보는 바비의 시선을 그대로 받으며 말했다.
" 해줘요. "
" 뭘? "
" 내가 듣고 싶었던 말 전부 다. "
내 말에 날 바라보는 바비의 눈이 살짝 떨렸다. 진득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던 바비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한 글자 한 글자에 다정함을 담아 내게 말했다.
" 잘 지냈어? "
" ……. "
" 많이 그리웠어. "
" ……. "
" 보고 싶었어. "
바비의 말이 끝나고 다시 한 번 바비를 끌어안았다. 훅 밀려오는 바비의 향기에 가슴이 규칙적으로 두근거리는 것이 귓가에까지 울려왔다. 나도, 나도. 품에 안겨서 뭔가에 홀린 듯 나온 내 대답에 바비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품에서 그리웠던 바비를 느끼는 것도 잠시, 무언가 떠오른 생각에 바비의 품에서 몸을 떨어트렸다. 오빠, 오빠! 하고 불러오는 내 말에 바비는 웃으며 응, 하고 날 바라보았다. 그런 바비의 한쪽 손을 꼭 잡곤 몸을 돌려 바비를 방 밖으로 이끌었다.
" 이리 와봐요, 보여줄 거 있어. "
뭔데 그래, 하고 물어오는 바비를 향해 오면 알아요, 하고 짧게 답을 한 뒤 내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 손길을 따라 내 방 안으로 이끌려 들어온 바비의 뒤로 내 방 문을 닫았다. 떠날 때와 다름 없는 익숙한 내 방. 내가 뭘 하는 건지 물끄러미 내 행동만 바라보는 바비의 시선을 못 느낀 척, J가 가져다 놓은 내 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캐리어, 큰 상자들, 그리고 한쪽에 세워져 있는 큰 액자 하나.
그 액자를 품에 안아 바비에게로 내밀자 바비가 액자를 받아들곤 날 바라보았다.
" 이게 뭐야? "
" 열어봐요. "
내 말에 바비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액자를 덮고 있던 포장을 벗겼다. 투명한 유리 아래로 보이는 그림 하나. 하얀 바탕 위에 그려진 두 개의 반지. 떠나기 전 바비가 줬던, 같은 디자인의 반지 두 개.
그림을 확인한 바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바비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곤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내 손 위로 올려진 목걸이의 반지 중 큰 반지를 먼저 꺼내 손, 하고 바비를 향해 말하자 바비가 어이가 없단 듯 웃음을 흘렸다.
" 손 줘요, 손. "
내 칭얼거림에 내밀어진 바비의 왼손으로 반지를 끼웠다. 꼭 맞는 반지가 끼워진 바비의 손을 바라보자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 한 번도 한 눈 안 팔았어요. "
" ……. "
" 늘 품고 다녔어요, 이 반지. "
" ……. "
" 오빠도 다른 여자 본 건 아니죠? "
내 물음에 옆의 침대 위로 그림을 내려놓은 바비가 웃으며 내 볼을 쓸었다. 그럴 리가.
" 아가씨. "
" 네. "
" --아. "
" 응. "
" 진짜 예뻐서 어떡하냐. "
바비의 말에 피실 피실 웃으며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뽀뽀해 달라는 거야? 하고 되물어오는 바비의 물음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바비가 천천히 내게 닿아왔다. 뽀뽀라고 하기엔 조금은 길게 닿았다 떨어진 바비 덕분에 볼이 붉어진 내가 헤, 하고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자 바비가 내 입술을 엄지로 살짝 문질렀다.
" 아, 맞다. "
" ……. "
" 전에 오빠 농구 졌잖아요. 나 소원권 아직 있는데. "
" 그걸 여태 기억하고 있었어? "
" 그럼! 1년동안 어떻게 참았는데요, 내가. "
내 말에 바비가 웃으며 물었다. 소원이 뭔데. 바비의 물음에 잠깐 바비를 올려다보다가 그대로 발을 들어 쪽, 쪽, 두 번 바비에게 닿았다 떨어지곤 답했다.
" 나랑 결혼해요. "
" 뭐? "
" 결혼하자구요. "
생각치도 못 한 내 말에 바비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런 바비를 향해 결혼해요, 응? 하고 되묻자 바비가 잠깐 날 바라보다가 어이가 없단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웃으며 잠깐을 날 바라보던 바비는 내 손에 아직 쥐고 있던 나머지 반지 하나로 손을 뻗었다. 반지를 가져간 바비는 대답 대신 내 왼손가락에 반지를 조심스레 끼워주었다. 바비의 손에 반지를 끼울 때처럼 꼭 맞는 반지에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바비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 그리고 내 손의 반지.
반지를 내 손에 끼워준 바비는 잠깐동안 내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곤 반지에서 시선을 돌려 날 바라보며 웃었다.
" 하자. "
" ……. "
" 결혼. "
정말로? 늘 그렇듯 거절할 줄로만 알았던 바비가 하자, 하고 답해오자 순간 놀란 눈으로 바비를 올려다보았다. 내 되물음에 바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잡고있던 내 손에 깍지를 낀 바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 일 년 못 봤으면 됐어. "
" ……. "
" 이젠 매일 보자. "
" ……. "
" 같은 비누 향기 풍기고, 같이 잠들고, 같이 일어나고. "
" ……. "
" 뭐든 같이. "
바비의 말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바비만 물끄러미 바라보자 바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나와 잡지 않은 손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헝크러트리며 말했다.
" 아직은 일러. "
" ……. "
"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혼은 너랑 할 거야. "
" …… "
" 나중에 조금 더 멋지게 프로포즈 할게. "
웃음을 감출 수가 없다. 바비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바비가 다정한 눈길로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곤, 꼭 저번과 같이, 처음 연애를 하던 그 때 차 안에서처럼 날 바라보며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같이 살까? "
" …지금도 같이 살고 있는걸. "
" 지금 말고 나중에. "
" ……. "
" 같이 살자, 우리. "
* * *
" 눈은 좀 괜찮아요? "
내 물음에 테이블 위로 차가 담긴 잔을 내려놓은 K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는 대답과 함께 내 맞은편에 앉은 K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 이젠 존댓말 안 해도 돼요. "
" 안 됩니다. "
" 왜요? "
" 그래도 아가씨는 아가씨잖습니까. "
당연하다는 듯 한 K의 말에 피실 웃으며 내 앞에 놓아진 잔을 조심스레 잡았다.
" 바비도 K랑 똑같이 얘기해요, 똑같이. "
" 그렇습니까. "
" 네. 아직도 나 아가씨라고 부른다니까요. "
내 말에 K가 작게 웃었다. 딱딱하고 각진 모습의 전과는 다르게 일을 그만둔 후의 K는 인상도 그렇고 조금은 편해진 듯 했다. 부드럽게 바뀐 인상의 K를 잠깐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잔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달큰하고도 은은하게 풍기는 차의 향기에 마음이 포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차를 한 모금 꼴깍이곤 배시시 웃으며 K를 향해 입을 열었다.
" 저 바비랑 결혼해요. "
" 안 그래도 나비에게 들었습니다. 프로포즈는 받으셨습니까? "
" 아뇨. 그건 아직. "
" ……. "
" 지금 당장 할 것도 아닌데요, 뭐. "
아직은 아빠가 안 된다고 그러니까. 내 말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K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나 1년 전보다는 많이 자란 것 같지 않아요? 아이처럼 물어오는 내 물음에 K가 마시고 있던 잔을 떼서 테이블 위에 내려놓곤 맞은 편의 날 바라보았다. 그리곤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가볍게 헝크러트렸다.
" 그런 것 같기도 하고. "
" 뭐에요, 그건. "
K의 손길이 좋아서 배시시 웃으며 그 손길을 받고 있다가, 마시던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앉은 몸을 일으켜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책장에 가득한 두꺼운 책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진 많은 하얀색 서류들. 구석 구석을 훑어보던 내 눈이 사무실 문에서 멈췄다. 지금은 굳게 닫혀진 검은색 문. 그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닫힌 문을 열고 들어오던 바비, 그리고 첫 눈에 반했던 나.
피실 피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흘리며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때, K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제 바로 집으로 가실 겁니까. "
" 아뇨. 선배 사진전 하는 곳에 좀 들렀다가 가려구요. "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K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 가실 땐 아마 J가 데려다드리지 못 할 것 같습니다. "
" 네? 왜요? "
내 물음에 K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J는 다른 구역 경호를 맡게 되었습니다. "
" 에? 그렇다는 건…. "
" 이제 아가씨 개인 경호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K의 말에 놀란 눈으로 K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말요? 하는 바보 같은 물음을 되물었다.
" 그럼 저 이제 경호원 없어요? "
" 다른 경호원으로 바뀔 것 같습니다. "
" 다른 경호원, 누구요? "
내 물음에 K가 뭐라고 답을 하려던 그 순간,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K를 바라보던 내 시선이 굳게 닫혀진 검은 문으로 향했다. 누구지.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게 웃음 담긴 K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안 그래도 여기로 오기로 했었는데. 벌써 도착했나 봅니다. "
" ……. "
"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무래도 양반은 못 되겠네요. "
웃으며 말하는 K의 말에 순간 예전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손에 들고있던 바비의 정보가 담긴 종이. 그 때도, 쇼파에 앉아서 닫힌 문만 바라보던 나. 문을 두드리던 소리.
'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데. 그쵸? '
' 그러게요. '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K. 그리고 들어와요, 하는 내 말과 함께 문이 열리며 들어오던 바비.
설마, 하는 표정으로 K를 바라보자 K가 나를 바라보곤 작게 미소를 지었다. 다시 닫힌 문으로 고개를 돌리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천천히 열리며 문틈 사이로 검은 정장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자, 그가 웃으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검은 정장을 입은 그는 전처럼 단정히 머리를 올린 채였다. 전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딱딱한 표정이 아닌, 조금 올라간 입꼬리와 함께 보이는 부드러운 표정.
그리고 왼쪽 손의 네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나와 같은 반지 하나.
" 바비입니다. "
" ……. "
" 오늘부터 아가씨 개인 경호를 맡게 되었습니다. "
웃으며 날 내려다보곤 말하는 바비의 목소리에 놀라 멍하니 바비만 바라보자, 바비가 피실 웃으며 제 어깨를 으쓱였다. 이게 지금….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입만 웅얼거리는 나와 바비를 번갈아 보던 K가 쇼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 제 선물입니다. 회장님께 따로 부탁드렸던. "
" …선물이요? "
" 네. "
" ……. "
" 미리 결혼 축하드려요, 아가씨. "
K의 말에 K를 바라보자, 꼭 아빠와 같이 흐뭇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K의 표정에 순간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K를 향해 작게 웃곤 내 앞의 바비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날 내려다보던 바비는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 바비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자, 바비는 내 손을 달라는 건지 내게 내민 손을 흔들어보였다.
바비의 손 위로 내 손을 올리자 바비가 내 손을 아프지 않게 꽉 잡아왔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입을 꾹 다물곤 바비를 바라보자, 바비가 웃으며 속삭이듯 내게 말했다.
"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내 아가씨. "
" …뭐에요, 정말…. "
" 늘 함께하자. "
" …응. "
" 지켜줄게. 언제든. "
바비의 말이 끝나고, 내 손을 잡고 있던 바비의 손을 나도 조금 더 힘을 줘 잡았다. 그리곤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늘 오빠만 믿을게요. 내 말에 바비가 활짝 웃었다.
♡
15년 2월 24일, 아가씨 안녕!
후기는 이 글을 올리고 곧바로 올게요! 모두 감사하고 사랑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