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널 향긔라 부르겠다."
‘향기1(꽃, 향, 향수 따위에서 나는 좋은 냄새)’(香氣)의 옛말.
"예? 어찌 천한 노비가 감히..."
"왜, 싫으냐? 계집이 네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게 싫은 모양이지 "
"송구하옵니다. 미천하여 어리석은 생각을 하였사옵니다."
"역시 널 놀릴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인 게지?"
"예? 아씨... 혹 저를 놀리시는 것 이옵니까?"
"농이다. 농... 너에게선 늘 꽃 향긔가 난다 너는 모르지 내 널 향긔라 부를 것이야.
이건 농이 아니고 진심이다. 어떠냐 네 이름이 마음이 드느냐"
"예... 아씨"
"내가 더 나이를 먹어 이 집을 떠나기 전에 네게 이름이라도 주어야
내 가는 길 돌아올 때에 널 다시 찾을 수 있지 않겠니"
그녀는 아씨의 애정어린 손길과 알 수 없는 애틋함에 대하여 자신이 어째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도대체 왜 아씨가 주는 손길에 그녀의 몸이 반응하고, 가슴을 쥐락펴락
하며 심장을 조여 오는지 그녀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 누구도 "그 일"이 있고 나서는 그녀에게 주지 않은 손길이었으니.
"홍연이 네가 세자빈 간택 처녀단자에 홍연이 너를 올릴 것이다."
"대감! 그게 무슨... 궐에서 죽어 나가는 처녀들을 못 보셨습니까? 어찌 홍연일..."
"부인은 조용히 계시오! 홍연이 네가 세자빈 간택 명단에 오를 것이니, 그리 알거라."
"아, 안됩니다! 대감 아니 될 일입니다! 홍연이를 어떻게, 어떻게 대감이 그러실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일은 우리 집안의 영화가 홍연이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라는 걸 부인은 모르시겠소?"
"대감께선 홍연이의 안위보다 집안의 영화가 더 중요하시다고 말씀하시고 계신겁니까!"
"그렇소 나는 그게 더 중요하오! 이대로 우리 집안에 무너지길 원하시오? 정녕 그리 생각한단 말이오!!!"
"그리하겠습니다."
"뭐? 홍연아... 그게 무슨... 아니된다!"
"홍연아, 이 애비의 원이다. 그리 하겠느냐"
"예... 그리... 하겠습니다."
대재학 김철학의 첫째 규수 김홍연. 다른 이들은 모두 연홍을 부러워했다. 학문을 물론이요, 빼어난 미모와 그녀의 총명함은 모든 이의 시기는 물론이고, 모두가 연홍을 닮고 싶어할 정도로 연홍은 그런 사람이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은 그저 남 부럽지 않게 자라 양반집 규수로 모든 행복을 다 껴안고 궐에 시집을 간다고, 다른 이에게 비춰진 연홍은 모든것을 다 손에 쥐고 있는 여인이었다. 제 아무리 너무 많이 가졌다고 하여 행복을 다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문영은 생각했다.
제 언니이지만, 너무 답답하고 불쌍하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문영은 알 수 있었다. 홍연의 혼인은 곧 그녀의 불행임을 아마 어렴풋이 문영은 느끼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어른들이 만들어낸 억지 부덕을 연홍이 감당하기엔 아주 어린... 그녀의 나이는 고작 열 아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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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시집을 간다는 것이 문영은 싫었다.
언니의 혼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집으로 모인 연유도, 시끌벅적한 이 집이 싫었다.
그런 그 집을 피해서 갈 곳이라고는 산 속 제일 큰 소나무 위가 문영의 안식처가 되어 줄 수 있는 공간이 되어줄 뿐이었다.
"문영아, 너 여기 있니?"
분명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음에도 물구하고 문영은 아버지의 뜻대로 시집을 가 버리는
홍연이 너무 미워서... 사실은 언니가 밉지 않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밖에 할 수 없는 홍연과, 그런 홍연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너무 미워서 문영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홍연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멈추니
놀란 문영은 얼른 나무 위에서 내려와 주변을 살폈다.
"내가 찾았구나. 내 네가 여기 있을 줄 알았다."
홍연은 늘 이런식으로 문영을 꿰둟어 봤다. 자신을 꿰둟는 그런 홍연이 문영은 싫지 않았다.
"왜 또 나무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은 것이야, 알았다.
아버지께서 학당에 보내주지 않으셔서 화가 난 게로구나"
"아니. 전혀 아니야. 틀렸어"
"그럼... 언니가 미워 이곳에서 혼자 숨어있었던 거냐"
"........."
"대답해 보거라, 그런 것이냐. 응?"
" 언니, 시집 가지 마. 응? 가지 마.
그 집에 가는 궐에 가는 규수들 모두 죽었다. 그리 들었어
언니도 모르는 것은 아니잖아, 아버지와 나눈 대화... 내가 다 들었어
언니가 궐에...!"
"그만, 그만 문영아. 마음 정리가 되는대로 곧장 내려오거라."
언니는 다 알면서 모르는 척, 웃는 얼굴로. 마치 모든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다 되어있다는 듯 구는
언니의 모습에 문영은 알 수 없는 싸한 온기를 느꼈다.
"이 요망한 것"
웬 사내의 목소리가 나무 아래에서 들려왔다.
처음 듣는 사내의 목소리에 너무 놀란 문영은 그만
다리가 풀려 그대로 주저 앉고 말았다.
이 사내는 대체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