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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 전체글ll조회 1418l 2





연애 미각

w.Harvey 
















신맛


신맛은 혀의 바깥 주변부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진다  신맛은 긴장감이 있을 때 미각의 예민도가 저하되는 한편, 긴장감이나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상쾌한 기분이 신맛에 의해 생겨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1.




"자기. 올 때 귤 좀 사다 줘"








벌써 여름이었다. 지난 밤 세차게 내리던 비는 벌써 대낮 쨍쨍한 태양 아래 바짝 말라 있었다. 집 안에는 그 새 습기와 열기가 그득 차올라 있어, 원체 몸에 열이 많은 나로서는 맥을 못추겠는 거다. 부랴부랴 장롱 구석에 쳐박아 놓은 민소매 티를 꺼내 입고, 창문도 활짝 열어놓은 채 지난 여름 열심히 부쳤던 부채를 서랍에서 꺼내들었다. 팔랑 팔랑 납작한 부채끝이 벌써 낡아 있다. 소파에  누워 있는 것도 더워져, 거실 바닥에 냅다 드러 누워 부채질을 하고 있자니, 이 더위에 셔츠를 목까지 꼭꼭 채워 넥타이를 맨 최민호가 떠올랐다. 으 상상만해도 덥다. 최민호를 생각하니, 당장에 얼굴도 보고싶은데 지금 당장 볼 수는 없고, 바닥에 납작 붙어 민호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일하는 최민호. 열심히 날 위해 돈 버는 나의 자기. 








<귤?>



"응. 입이 텁텁해. 날씨도 너무 더우니까 새콤한게 먹고 싶다."



<뭐야. 너 귤 싫어했으면서......너 애가졌냐?>



"최민호 방금 저질 발언이야. 혼날래?"



<마누라 어떻게 혼내게? 서방님을 때릴꺼냐>



"누가 서방님이래. 웃겨. 어쨌든 꼭 사와. 작고 탱글 탱글한 걸로!"








과일은 제철에 먹는게 제 맛이라지만, 문득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귤'이란 단어가 새큼한 맛을 연상시켜 금세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이게 했다. 아 진짜로 먹고 싶어 졌다. 아주 아주 새콤한 것. 민호의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 왔다. 사무실이라 크게 웃지도 못하고 낮게 웃는 데, 그 웃음소리가 그의 모습을 머릿 속으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보고싶다. 웃는 거. 난 네가 웃을 때가 제일 좋은데. 에이. 이럴 땐 화상 전화라도 살 껄 그랬나란 후회도 들었다. 전화통화는 간접적이고 목소리에 기대는 것이 맛이라고 박박 우겼었는 데 지금도 나쁘진 않지만 확실히 아쉽긴 했다.








"자기야, 오늘 일찍 와요-"



<네가 재촉하니까 이거 뭐 나 기다린다는 것보단 귤 기다리는 거 같아서 좀 섭섭한데?>








덩치는 산만해선, 가끔 애같이 잘도 삐친다. 몇 마디 농담으로 긁어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진짜로 삐지면 괴로워지는 건 나니까. 은근히 뒷끝이 있어서 나는 일부러 콧소리까지 내며 앵앵 거리듯 대답했다. 다 큰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게 좋을까 싶지만, 그래도 아직 최민호한텐 먹히는 거니까. 








"에이, 아냐. 당연히 우리 자기 기다리는 거지이."



<알았어. 알았어.. 내가 김기범이니까 알면서도 속아주지.>








여봐. 계속 웃음소리가 새어든다. 네가 웃으면 나도 조금은 기분이 상쾌해진다. 애교라곤 모르게 뚝뚝 대던 때도 있었는데, 어느 새 이만큼이나 늘었다는 게 참 우습기도 하고, 은근히 재밌기도 하고. 최민호한테 이쁨 받는 것도 나쁘진 않다. 나도 가끔 민호가 부리는 애교를 보면 배를 잡고 깔깔 웃어대긴 하지만 아주 쬐끔 진짜 이뻐 보이니까. 








"지금 한 창 바쁘겠네. 자기 열심히 일 해. 돈 많이 많이 벌어 와."



<걱정 마. 아, 너 덥다고 바닥에 엎드려 있지 마. 그러다 배탈난다.>








민호의 말에 뜨끔해, 엎드려 있던 몸을 살짝 일으켜 팔꿈치로 지탱했다. 전에도 너무 더워 찬 곳에 엎드려 잤다가 찬 기운에 탈이 난적이 있었다. 그 때 꽤나 고생해서 앓는 사흘 동안 죽도 제대로 먹지도 못해서 살이 쏙 빠졌었는 데, 민호는 호들갑도 그런 호들갑이 없었다. 내가 죽을 병도 아닌데. 그래도 아플 때 내 옆에서 꼬박 앉아서 간호해주고 손 잡아주고, 아파해주는 거 보니까 가슴이 뭉클했었다. 솔직히, 아파도 나 혼자 아프고 말면 그만인데 내가 아프니까, 민호가 더 아파 하는 것 같아서 쓰리기도 했고. 민호의 당부의 당부를 듣고 나서야 우리는 전화 통화를 끝낼 수 있었다. 




전화기를 내려 놓고, 다시 누워 있자니 텔레비전도 켜지 않은 집 안에 적막이 가득했다. 여전히 창문으로 들어찬 햇살이 따가웠다. 아 그래도, 편하다. 석 달 동안 나를 달달 볶았던 삽화 원고를 이틀 전에 넘겨 놓고 나니, 지금은 천국이 따로 없었다. 물론 이렇게 아무도 없는 이 집안에 혼자 적막함을 즐기는 것은 때때로 쓸쓸하기도 했지만. 바닥을 뒹굴 뒹굴 구르다, 문득 텔레비전 옆에 놓여진 허브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그동안 깜빡 잊고 있었더니 애가 시들 시들 하다. 나는 서둘러 일어나 분무기를 꺼내 왔다. 








"아빠가 바빠서 정신을 놓고 살았나봐. 애기 물도 안주고 나빴다."








손톱 같이 작고 여린 잎사귀를 가진 레몬타임이었다. 화분에 작은 팻말에 씌인 녀석의 종류였다. 동글 동글하고 귀여운 잎에선 상큼한 레몬 향이 솔솔 묻어났다. 분무기로 바짝 마른 흙이며 잎 위에 물을 뿌렸다. 칙칙, 가벼운 소리와 함께 미세한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번졌다. 이 집으로 이사 온 후로 벌써 다섯 번째 허브 화분이었다. 허브는 꽤나 연약해서 사람 손 많이 타도 죽고, 잠깐 신경을 쓰지 못하면 금세 잎이 까맣게 타들어가곤 했다. 언젠가는 로즈마리를 열심히 키웠었는 데, 무럭무럭 잘도 자라던 녀석이, 공모전 때문에 정신 없어 하던 사이에 죽어버렸던 적이 있었다. 그 땐, 정말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새까맣게 타고, 누른빛에 바삭거리던 잎. 다 내 탓이었다.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온통 나에게 기대어 있다. 내가 물을 주지 않으면, 내가 햇살을 보게 하지 않으면, 내가 사랑해 주지 않으면 그렇게 말라 죽는 것이었다. 로즈마리가 죽었던 그 날 하루 종일, 나는 터진 울음을 멈추기가 힘들었다. 민호는 그런 나를 안고 사람 손 덜 타고 무럭무럭 자라는 생명력 강한 종을 키우자고 했지만 나는 결국 또다시 작고 여린 허브 화분을 사 왔다. 








"너는 무럭 무럭 자라야 돼. 알았지? 그래서 이쁜 꽃도 피워주고. 아빠랑 오래오래 살자."








 레몬타임 잎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다가, 화분 옆에 나란히 올려둔 나와 민호의 사진과 무언가 얼떨떨하게 혼자 서 있는 민호의 사진을 보았다. 화창한 봄 날에 환하게 웃으며 찍은 우리 두 사람의 사진은 어쩌면 내 인생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매듭점이 었다. 물론 이 사진을 찍어주었던 그 날의 누군가도 최민호도 전혀 모르는 얘기었다. 그런 중요하다면 중요한 우리 사진 옆에 나란히 올려놓은 민호의 독사진은, 우리가 만나기 전의, 그리고 만나게 된 가장 첫 번째 사진이었다.   


벌써 두 해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이 집을 구해서 살게 된 것이.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나를 만류했지만 결국은 그들을 뿌리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다 이 사진속 붙박이 된 최민호의 잘난 모습 때문이었다. 질리디 질려도, 이 사람만큼은 늘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꼭, 처음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만들었다. 








"최민호는 복도 참 많은거야. 내가 다 버리고 딱 너만 선택했다는 건."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과 한 사람을 바꾼다는 일은 생각보단 로맨틱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좋으니까. 좋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부터 그가 내 전부와 맞바꾸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었다. 사진을 좋아하던 그와 내가 만난 대학교 동아리, 그를 만나면, 즐겁고, 재밌고, 새롭고, 설레었다. 우리의 관계는 아주 멀찌감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샌가 나는 최민호를 보면 마음 가득 설렘이 흘러 넘쳤다. 그의 이름만 보아도, 들려도, 단지 민호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행복에 겨워 심장이 터질것 같은 기분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 그땐 이미 늦어버린 거였지.








"아. 진짜 덥다."








 나는 낡은 부채를 부쳐댔다. 팔랑 팔랑 소리가 나며 시원한 바람을 일으켰다. 민호가 돌아 오기 전. 텔레비전 위 옆에 놓인 레몬타임 허브에 물을 주고,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책들 중 몇 권을 꺼내 들어 뒤적대었다. 창문을 열고, 햇살과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했다. 집안 가득 여름이 들어차있었다. 그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이제는, 그를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단맛





단맛은 '맛있다'는 뜻과 동의어로 쓰인다.단맛 이외의 맛은 일반적으로 어떤 값을 넘으면 쾌에서 불쾌로 질적인 변화를 나타내는데, 단맛만이 농도에 관계없이 쾌적한 맛인 것이 특이하다. 









2.






"최민호!"



"어?"



"하, 다행이다. 아직 있었네."









그것은 막 첫 눈이 내린 뒤 한층 날이 선 바람이 불던 겨울이었다. 민호를 따라온 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민호의 앞에 섰다. 그의 목에는 낙엽색 목도리가 둘둘 말려 있었지만 워낙 피부색이 하얀 편이라 코끝과 볼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라 굉장히 추워보인다고 민호는 생각했다. 남자는 다행이다 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디서부터인지 민호를 쫓아 꽤 오랫동안 달려온 탓이었다. 민호는 이 익숙한 얼굴이, 자신과 같은 동아리의 부원에, 동갑내기, 같은 학번이라는 사실만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름이, 이름이 뭐였더라. 민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아. 이 거 말야."



"어......"



"네 꺼지? 카메라. 내 꺼랑 바뀌었어."



"진짜?"



"응."








민호는 재빨리 제가 목에 걸고 있는 카메라를 빼어내 여기 저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기종은 같은데 카메라 렌즈가 다르다. 이런 바보. 이제 눈치채냐. 동아리 방에서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가져온 탓이었다. 기범은 멈칫하고 서 있는 민호 앞에서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카메라를 건네주었다. 그의 불그스름한 입술이 벌어지며, 볼 살이 오동통하게 올라왔다. 여자애들처럼 눈웃음을 친다. 민호는 괜시레 머쓱해지는 기분이 들어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 카메라엔 표시 해뒀거든. 요거."









그가 동글게 굽힌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반짝이는 열쇠 모양의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이거, 야광이야. 반짝 반짝 하거든. 민호는 생각했다. 스무 살 먹은 남자가 저런게 어울리나 싶나. 사진을 좋아하는 애들 중엔 가끔 독특한 녀석들이 많다고는 했지만. 어쨌든 지금 자신 앞에 있는 남자도 아마도 그런 부류의, 평범한 자신과는 섞이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다행이다! 나 이 녀석 없으면 사진 하나도 안이뻐서."



"아, 저기 미안한데. 이름이......"



"키"



"어?"



"귀엽지? 내가 붙여줬어. 얘도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난 이 녀석이랑 사랑에 빠졌거든. 사랑에 빠지면 이름은 지어줘야 예의니까."



"아니, 아니 그 카메라가 아니라... 네 이름 말야. 미안. 나 네 이름이 잘 기억 안나서."









민호는 머릿속에 안개가 낀것처럼 가물 가물한 이상한 녀석의 이름을 물어보았지만, 자신이 정의한데로 이상한 녀석은 제 카메라에 대한 이름이나 주절주절 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수다쟁이구나 라고 민호는 또 다시 그 녀석을 정의해 내려갔다. 이제는 그는 제 이름을 기억하는데 자신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미안함 보다 당황스러움이 더 커져있었다. 뭐랄까, 조금은 정신이 없다.









"아....."









왠지모르게 그의 어깨가 축 내려간 것 같기도 했다. 기분 탓인가.









"김기범이야. 김.기.범."



"아, 응."



"미술학과고"



"......"



"사진찍는 거 좋아해. 사람보단 동물들이 좋아. 길거리 돌아다니는 그런 동물들 말야. 사실은 식물이 더 좋지만."



"...그래."



"그치만 제일 좋아하는건 너야."



"어?"








민호는 조잘조잘 잘도 말하던 기범의 입술만 멍하니 쳐다보다, 뜻밖의 말에 순간 멍청하게 기범에게 되 묻고 말았다. 뭐라고? 나? 









"그러니까 잠깐만 지금 그대로 서 있어 봐!"



"뭐, 뭐야."



"자, 김-치"










민호는 기범이 시키는 데로 얼떨결에 그자리 그대로 가만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기범은 재 빠르게 제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더니 셔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뭐야, 사진 찍은 거야?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럽고도 엉뚱해서 민호는 제대로 말 한번 하지 못한채 입만 뻐끔 뻐끔 거릴 뿐이었다. 그와는 상관없이 기범은 그저 마이 페이스였다. 코 끝과 볼은 여전히 빨간 주제에 방긋 방긋 잘도 웃고 있다. 









"진짜 바보같이 나왔다-"



"야 너 진짜 뭐하자는 거야!"



"야 아니고 김기범이라니까."



"그래 김기범 지금 너 뭐하는......"



"그러길래 내 이름 정돈 알고 있었으면 좋았잖아."



"어?"









기범은 렌즈를 빤히 쳐다보며 먼지를 털어내듯 훅훅 몇 번을 불어댔다. 요리 조리 살피는 폼이 부산스럽기도 부산스러워서, 민호는 지금 이 녀석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인지, 갖고 노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괴짜인 것인지 전혀 알 수 없게 되버렸다. 무언가 말을 하는 데는 조금 감정이 실린 것 같기도 하고. 그냥 툭툭 농담처럼 내뱉는 것 같은데도,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있었다.









"아, 뛰어 왔더니 배고프네. 너 수업있어?"



"아니 없는데......"



"우리 그럼 돈까스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어?"









갑자기 기범이 민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물론 기범이 민호보단 키가 조금 작아서 거진 매달린 꼴처럼, 우스워 보이긴 했다. 민호는 묵직하게 매달려오는 기범의 행동에 팔을 떼어내려 했지만, 기범도 남자인지라 힘이 꽤나 세, 아니 무엇보단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어떨결에 기범이 가는데로 질질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기범이 가까이 다가오자 장미 향이 뒤섞인 달짝지근한 설탕 냄새가 가득했다. 진한 건 아니지만, 가까이 딱 붙어 있자니 살갗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향수 향이라고 하기에는 설탕 냄새가 너무 강했다. 민호는 그런 향기가 남자애 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 너랑 가"









민호가 끌려가는 제 몸을 추스리며 툭 내뱉자, 기범이 지지않고 곧잘 대답했다.









"그야, 네가 날 몰랐으니까. 알아가자고. 게다가 나 뛰는거 무지무지 싫어하는 데 네가 뛰게 만들었잖아. 내 실수도 아니었는데......"



"......"








민호는 제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하긴, 카메라를 잘못 집어온 자신 때문에 얽히게 된 것이긴 했다. 기범은 이제 제 팔을 떼 내더니, 또 눈꼬리를 축 쳐지게 만든다. 어쩜 그렇게도 감정의 기복이 심한지 모르겠다. 아까까지만해도 방방 뛰며 수다스럽게 굴던 녀석이 이젠 찌르면 폭 터질 것 같이 제 눈치를 살살 보고 있었다. 민호는 그런 기범을 처치곤란하다고 생각하며 결국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아무래도, 어리고 약한 것들에게는 너무나도 약했던게 분명했다.








"알았어. 가자."



"정말이지?"








기범의 얼굴이 금세, 활짝 폈다. 하늘은 여전히 구름에 가려 우중충 했는 데 왠일인지 기범에게선 따끈 따끈한 봄 햇살이 느껴졌다. 그러나 곧 민호는 고개를 저었다. 봄 햇살은 무슨. 다시 한 번 긴 한숨과 함께 제 팔을 휘적 휘적 젓는 데, 고새 제 왼쪽 손에 따끈 따끈하고 매끈 매끈한-아니 보다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손 잡고 가자 응?"



"......네 마음대로 해."








민호는 이대로 투닥대다간 진만 빠지고 또 이녀석 뜻대로 될 것 같은 불행하고도 정확한 예감에 이제는 될대로 되 라지 란 생각으로 제 손을 희생하듯 내어주었다. 어쨌든 이제 동방엔 자주 가지 말아야겠다라고 다짐하며. 이 김기범이라는 녀석에게 걸렸다가는 제가 또 허둥대다 이 녀석에게 옴팡지게 끌려갈 거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다신, 이 괴짜녀석과는 부딪치지 않겠다고 그렇게 민호는 몇 번이고 곱씹어 생각했다.
















"자기 무슨 생각해?"

"옛날 애인 생각."

"뭐야. 자기 옛날 애인이 나 말고 어딨어. 내가 제일 먼저 찜해서 데리고 왔는데?"

"있어. 마누라 말고도"

"이상한 소리 하지말아. 입이 심심해서 그렇지 너. 이거나 먹어- 자."









기범은 씹으려던 껌을 반 토막 내어 불쑥 민호 앞에 내 밀었다. 포장지에서 꺼내자마자 벌써부터 달짝지근한 설탕 냄새와 장미 향이 코끝에 내려 앉아 있었다. 기범은 은박을 벗겨내어 입 안에 껌을 쏙 집어 넣었다. 기범이 유난히도 좋아하는 껌은 민호에겐 너무 달았다. 제가 단 것을 좋아하긴 했어도, 껌이 단 것은 별로 좋아하질 않아서 쳐다도 보지 않았는 데. 기범은 오물 오물 잘도 씹는다. 기범에게서 나는 설탕 장미 향기는 참 좋다. 물론 하루에 너무 많이 씹으면 턱 관절에 무리가 오니까 항상 시간마다 제가 체크를 하지만. 민호는 반토막 껌과 제 몸집보다 훨씬 큰 캔버스에 집중하고 있는 기범을 번갈아 쳐다보다, 앉아 있던 자리에서 퍼뜩 일어났다.








"기범아."



"왜 불러-"



"나 이거 너무 달아."



"그런데?"



"바꿔 먹게."




민호는 기범의 곁으로 슬금 슬금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기범의 볼을 양 손으로 잡아 꾹, 눌렀다. 꼭, 앙꼬 터진 찐빵 같이, 도톰한 입술이 동그랗게 구겨져 뭐하는 짓이냐라고 말하는 듯한 말들이 어그러지듯 들려왔다. 민호는 그런 기범의 모습에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픽픽,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 소리를 내자 기범의 눈꼬리가 뿔난 것 처럼 가늘어졌다. 








"귀엽다."



"우으"








웅얼웅얼, 볼이 꽉 붙들린 기범이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민호는 개의치 않고 기범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댔다. 아, 역시 달다. 민호는 기범의 입 안 가득 묻어나는 단 맛에 살짝 얼굴을 찌푸렸지만, 말랑 말랑한 입술 감촉에 그 나쁜 기분도 사그러지는 듯 했다. 쪽쪽대는 가벼운 마찰음이 계속 되고 기범의 발버둥이 몇 번이고 지속 되다 비로소 잠잠해졌을 무렵에야, 민호는 제가 잡고 있던 기범에게서 떨어졌다. 기범의 얼굴이 어느새 불그스름해져있다. 민호는 그런 기범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고는 제 손에 들려 있던 껌 조각을 기범의 입 안으로 들이 밀었다. 








"윽. 내 껌 왜 뺏어가. 더럽게......"



"뭐가, 더러워. 마누라껀데. 난 이게 딱 좋다."



"진짜 아저씨 다 됐다. 능글맞어."



"왜. 뭐가 어때서... 좋잖아. 넌 단 거 좋아하니까."



"아씨. 저리 가. 나 이제 진짜 작업할거니까 이제 방해하지마! 자꾸 방해하면 쫓아낼줄알아!"



"어어, 쫓아내진 마라. 마누라. 나 갈데 없다. 이제 안 그럴게."








민호는 기범의 휙휙 떨쳐내는 듯한 손 짓에 처음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를 빼어 자리에 앉았다. 민호는 기범의 이름도 알지 못했던 그 순간들이 아주 아주 먼 옛날이야기인 것 처럼 느껴졌다. 그 때는 자신을 깜짝 깜짝 놀라게도 만들었던 기범이 어느새, 제가 그를 질겁하게 만들 정도로 뻔뻔해 졌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입 안에서 여전히 단 맛이 느껴진다. 잘근 잘근 씹는 동안, 온통 기범에게서 났던 그 단 향기에 젖어, 처음 만났던 그 귀여운 모습이 점점 또렷하게 떠올랐다. 사랑을 하면, 사랑에 빠지면 온통 세상이 뒤바뀌는 듯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사실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만이 변한것이지만. 언젠간 이 달콤한 마법도 사그러질 때가 오겠지 싶었다. 그럼 그냥 질긴 고무처럼 아무맛도 나지 않고, 자꾸만 자신을 괴롭혀올지도 모른다고. 그 달콤했던 사랑을 기억하려고, 애를 쓰며 살게 될지도 몰랐다. 







"이번 컨셉은 뭐야?"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거."



"뭐야, 또 나야?"



"...민호 너 다 알면서 그런다."







다만, 그 때가 되더라도 사랑은 달기만 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자신도 기범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의 눈이 찌푸려질 정도의 단 사랑에 빠져, 그 뒤의 잔향스러운 사랑을 놓치게 된다면, 그 것보다 더 슬픈 일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민호는 믿는다.








"기범아."



"응?"



"사랑한다."



"최민호 닭살!"



"좋으면서 그런다 또."



"아니거든? 나 진짜 너 쫓아낼꺼야! 저리 가 저리."








바짝 팔까지 걷어붙인 기범의 뒷 모습과, 그리고 일 미터쯤 떨어진 자리에 앉아 바라보는 민호에게 여전히 눈이 부신 햇살이 쏟아져 부서지고 있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담아낼 것처럼. 민호는 지금 이 순간이 그저 사진 처럼 남았으면 좋겠다고 떠올렸다. 내가 가장 사진에 담고 싶은 것은 너와 나의 이런 순간이 아닐까 하고.
















짠맛 


짠맛은 혀의 전면에서 잘 느껴진다.음식 중의 짠맛은 생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체액의 삼투압을 유지시키므로 조미상 필수적인 것이다.온도나 연식(連食)에 의한 영향이 가장 적고, 또 균일하다는 점이 특이하다.맛에는 다른 맛을 증강시켜서 미각으로 느끼게 하는 힘이 있는데, 이것을 대비효과라고 한다. 짠맛이 음식맛의 기본이 되는 것은 이러한 미각에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3.





"뭐하고 있었어?"



"그냥, 이것 저것. 뒹굴거렸지 뭐."








민호가 돌아왔다. 밖이 더운지 그의 이마가 땀에 촉촉히 젖어 있었다. 게다가 가까이 다가온 그의 몸에서 후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이렇게 더운 날에도 양복에 넥타이에, 하여튼 답답할 정도로 꽉 조인 옷을 입고 하루종일 고생했을 민호가 안쓰러워, 나는 오늘은 잔소리는 하지말아야지 라는 기특한 생각까지 했다. 민호의 손 안에 든 가방이며, 제 먹을거라고 잊지 않고 사온 귤 봉지를 받아들었다.  








"피곤하지? 입욕제 풀어줄까?"



"아, 그래주면 좋지."








오늘따라 민호가 수척해보인다. 진짜 뭐라도 해 먹어야 하나 싶다. 보약이라도 지어줄까. 또 식성이 애같아서 쓴건 죽어라 싫어해, 다 먹일 동안 한참 씨름을 해야하긴 하겠지만. 민호는 욕실로 향하면서 뱀 허물처럼 줄줄이 옷을 벗어 던졌다. 나는 그걸 또 쪼르르 쫓아다니며 주워 다니고. 매일 매일 이렇게 벗어두지 말라고 잔소리했는데 정말 습관이란 쉽게 고쳐지는게 아닌걸 알기에 나는 한숨이 폭 새어나왔다. 이럴 때도 꼭 애를 키우는 것 같다니까. 말썽쟁이 못난 남자애같이. 그래도 이게 다 내 몫이거니 해야지 어쩌겠어. 그러니까 미운 놈 떡하나 더 준답시고-








"자기."



"어?"



"오늘도 수고했다고."








막 셔츠의 마지막 단추를 푸르는 민호에게 다가가 냉큼 그의 얼굴을 잡고 입술에 짧게 입술을 부볐다. 그의 풋풋한 땀냄새가 났다. 이왕에 그를 안으며 뽀뽀 한 김에 엉덩이도 한 번 토닥여 주니, '어린애 취급하냐' 라고 퉁박을 준다. 









"땀 때문에 끈적끈적 한데, 더러워."



"뭐가. 더러워. 모든 인간의 페로몬 중에는 땀에도 다량 함유 되 있다고 그랬어."



"어디서 그래?"



"아침 토크쇼에서."



"어이구, 우리 마누라 진짜 아줌마 다 됐다. 그런거 챙겨 봐?"



"그런거라니! 얼마나 유용한데. 그거 엄연히 성 차별 발언이다?"



"알았어. 미안 미안"








결국 내가 졌소 라며 두 손을 드는 민호의 볼을 잔뜩 꼬집어 주고는 그가 들어가기 전 욕실에 먼저 들어가 수돗꼭지를 틀어, 입욕제를 풀었다. 향긋한 냄새가 순식간에 번져든다. 저 번에 반 값 세일 할때 서랍이 꽉 들어찰 정도로 잔뜩 사 두길 잘했지란 생각이 든다. 아, 정말 아줌마같다.








"목욕하고 나와. 밥 먹자."



"우리 오래간만에 같이 할까?"



"싫네요 아저씨. 나 오늘 너무 더워서 세 번이나 목욕 했어."








뻔히 보이는 민호의 속에 낼름 거절하자, 그의 눈매가 뾰족히 올라갔다. 아차. 








"야. 넌 피부도 건조한 애가 그렇게 많이 씻으면 안된다니까. 그러다 아파서 끙끙대면 어쩌려고"



"그래도 더운걸 어떡해."



"내가 그러니까 에어컨은 나두고서라도 하다못해 선풍기라도 사자고 했지. 부채만 쓰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려서는-"



"미안해. 미안. 다 내 잘못. 알았으니까 어서 목욕하고 나와. 나 배고파."








그대로 두다가는 잔소리가 또 잔뜩 길어질 것 같아 대충 대충 맞받아치며 그를 밀어놓은채 욕실 문을 닫아 버렸다. 더운 것도 더운 거지만 내가 목욕하는걸 워낙 좋아하는 데다, 정신이 번잡할때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욕조에서 살이 퉁퉁 부을 때까지 앉아 있다보니, 피부가 금세 건조해 여름에도 살이 자주 트곤 했다. 내 살이 새빨갛게 부어 트면 민호는 연고를 발라주면서 잔소리에 잔소리를 거듭했다. 다 날 위해서 그런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가끔은 귀찮아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곤 했는데 민호가 마음 아파하는 건 나도 싫으니까 고쳐야지 해도, 사람이 어디 쉽게 변하는 것도 아니니까. 








"으쌰"








세탁실에 민호의 옷가지를 집어 넣고, 부엌으로 나와 앞치마를 걸쳤다. 오늘 메뉴는 참치 김치찌개. 요리를 할 줄 아는 갯 수는 정해져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먹는 메뉴지만, 그래도 그 때마다 미묘하게 맛이 달라진다. 요리의 세계란 정말 끝도 없구나 하고. 이 작은 참치 김치찌개에서도 느낄 수 있는 진리이다. 그래도 처음보단 정말 많이 늘었지. 태우기 일쑤에, 간은 어쩜 그렇게도 맞추기 힘든 것인지, 내 요리에 대해선 아무말도 없이 꼬박 꼬박 먹던 민호가 어느 날, 계량컵을 사온 건 그야말로 암묵적 시위와도 같았다. 그렇게 먹느라 배탈도 나고, 우리 민호 고생 많이했지. 본의아니게 생체 실험 대상이 되었을 테니까. 그래서 더 이 악물고 아줌마들 틈에서 요리학원도 다녀보고 블로그 레시피도 열심히 모았던 노력 끝에 손가락 개수 보다 갓 넘는 요리를 할 수 있게 됐다. 








"오늘은 맛있게 됐으려나."








보글 보글 끓는 국을 조금 떠서 맛 접시에 대고 간을 보니, 제법 괜찮다. 밥이랑 먹으면 딱 알맞을 정도의 맛이었다. 이젠, 나 정말 계량컵 없어도 소금 간을 잘 맞출 줄 알게 됐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 미세한 차이에서 맛있고 행복한 저녁식사가 판가름 된다. 아주아주 신기한 일이다. 만약 내가 일찍 그림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쩌면 나는 요리에 푹 빠져살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 솜씨가 썩 출중한 편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김기범표 요리라면 맛있게 먹어줄, 한 사람은 있으니까.















"잘 먹었습니다."



"아, 배불러."








깨끗하게 빈 그릇이며 반찬 접시들을 개수대에 몽땅 쓸어놓고 나는 때마침 민호가 사온 귤들이 생각 나 냉장고에 넣어둔, 귤 봉지를 냉큼 꺼내들었다. 그러자 고무장갑을 한짝을 낀 민호가 나를 힐끗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배부르다며."



"그래도, 이거 먹을 자린 있지."



"너무 많이 먹으면 소화 안되니까 마누라 먹을 만큼 맛있게 먹어. 잘 먹고 살도 포동 포동 쪄야지."



"안그래도 그럴꺼야.자기는 설거지 깨끗이 해."








달그닥거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거실 바닥에 앉아 봉지를 활짝 열어재꼈다. 그러자 내, 두 손 마디만한 작고 탱글한 귤들이 향긋한 향기를 내고 있었다. 사실 귤은 나보다 민호가 더 많이 좋아해서 지난 겨울에는 최민호가, 손 끝이 노랗게 물들어 잘 빠지지 않을 때까지 사 먹었었다. 나는 그 옆에서 몇 개 집어 먹다가, 결국 두 손 두 발 들고 귤이라면 저리 치우라고 고래 고래 소리까지 질렀었지. 귤이라면 신물이 날 정도였는데. 



봉지에서 하나를 꺼내 껍질을 까니 주황빛 속살이 먹음직 스럽게 드러났다. 입 안에 들어차자마자 시큼한 과일즙이 퍼진다. 해가 진 뒤에도 여전히 날씨는 미적지근했다. 한 손에는 부채로 펄럭이며, 새큼 새큼한 귤을 먹고있자니 절로 몸이 나른해 지는 거다. 








"맛있어?"








설거지를 다했는지, 민호는 내 옆에 와서 앉는다. 소파는 의자의 구실을 한다기 보다는 이제 우리 두 사람의 크고 비싼 등받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름엔, 이럴 때마다 이 큰 소파를 멀리 멀리 던져놓고 싶은데, 그렇기엔 이 녀석과도 꽤나 정이 들어서 없으면 우리집이 아닐 것 같은 기분마저도 들것 같았다. 








"겨울엔 그렇게도 안 먹으려고 하더니, 왠 귤이야."



"그냥, 갑자기 생각났는데 너무너무 먹고 싶은거야. 그럴 때 있잖아 아무리 싫어도 한 번쯤은 생각 나는 거."



"마누라  맛있으면 나도 좀 줘 봐."



"거 봐, 배 불러도 들어갈 때가 생긴다니까."



"네네, 우리 마누라 말이 다 옳아요."








한 손으로 열심히 팔랑이던 부채를 민호가 덥썩 뺏어 들더니 자기 한 번 부치고 대부분, 내게로 바람이 오게 부친다. 역시 힘 하난 내가 못따라가게 좋다니까. 내가 부치는 것보다 훨씬 시원하네. 뭐, 내 팔이 안 움직여서 더 그런거겠지만서도. 살랑 살랑 규칙적으로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이마를 간지른다. 민호가 아, 하고 입을 벌리면 나는 깐 귤을 넣어주었다. 








"아휴 큰 애기. 맛있어요?"



"어, 네가 주니까 맛있다."



"그럼. 누가 주는건데. 꼭꼭 씹어 잘 먹어야지."



"넌 오늘 뭐하고 보냈어?"



"그냥, 뒹굴 뒹굴. 진짜 덥더라. 벌써 여름인가봐."



"그러게."








민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렇게 둘이 있으니까 진짜 우리집 같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꽉 차있는 거. 그래서 말을 아낄 수 있는 너와 내 사이는 어쩌면, 이미 열렬한 사랑의 정점은 아니더라도,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 함께 있지 않은 것이 되려 불편하게 느껴졌을 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꼭 이 거실의 소파처럼. 나 대신 부채를 부치고, 그 대신 그에게 귤을 먹여주고 사소한 일들 하나 하나가 우리는 서로가 교차되어 있다. 이제는 어느 것 하나 떼어내기에는 너무 깊이 얽히고 설켜서 이젠 온전히 단 한 덩어리같은 삶이었다.








"언제까지 쉬는거야?"



"내일부턴, 작업 시작할꺼야. 이틀 동안 쉬었더니 손가락이 벌써 굳는것 같아."



"그럼 또 작업실에 있겠네."



"응. 근데 자기 뭐야, 그 표정......"



"아니 그냥, 또 한 동안 여기 비어있을 걸 생각하니까. 허전하잖아. 너 없는 거."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올리며 말하는 민호의 시선은 제 머리끝으로 향해 있었다. 표정 봐. 꼭 뿔난 어린애라니까. 섭섭한게 다 드러나니까 나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작업실은 이 집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지만,  한 번 작업에 들어가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니, 하루를 꼬박 샐 때도 있고, 어쩔 때는 일주일 내내 쳐박혀서 집에 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물론 그 때 민호는 잔뜩 삐쳐서 퉁퉁거리곤 했었다. 나도, 혼자 있는 이 집이 조금은 위화감이 들 때가 있다. 네가 없으면 나도 그래. 나도 잘 알아.








"내가 작업실 안가면, 너 기다리는 동안 내내 나도 쓸쓸한걸. 그러는건 괜찮아?"



"......아니"



"이 번엔 잊지 않고 집에 올게. 응?"



"알았어."








민호가 다리를 내어 제 무릎을 톡톡 친다. 나는 응석받이 아이처럼 그의 허벅지에 냉큼 머리를 갖다 대어 누었다. 바닥이 서늘했다. 이렇게 있으니까 혼자 있는 것 보다 훨씬 덜 더운 것 같기도 해. 여름이 비켜지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민호는 한 손으론 여전히 부채질을 하면서 한 손으론 내 배를 살살 문질렀다. 








"간지러. 하지마-"



"왜, 살 좀 쪘나 보는거야. 마누라 보약이라도 지어줄까?"



"윽. 됐어 밖에서 일하는 우리 자기나 먹어. 이번 원고료 나온걸로 지어 줄게."



"너 먹으면."



"진짜지?"



"어......아니. 너무 쓸 것 같다."








내가 바보, 라고 입모양을 내자 그의 긴 손가락이 내 입술을 꼬집는다. 결국, 이러다간 몰래 서로 보약 지어와서 먹으라고 협박할 것 같기도 했다. 그의 길고 아름다운 손끝에 쪽 소리 나도록 입술을 부볐다. 그가 내 턱 끝에 입을 맞춘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이렇게 민호와 단 둘이 있을 때면, 지나왔던 과거도 앞으로의 미래도 시간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그에게서 나를, 나에게서 그를 또렷히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민호의 눈에는 그림자처럼 내가 떠올라 있었고, 내 눈에도 그를 바라보고 있을 터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일상이 되고, 서로에게서 자신을 찾는 다는 것은, 정말로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었다.








"자기야 내일은 퇴근하고 작업실로 나 데리러 와야 돼 알겠지?"



"알았어. 가기 싫다고 떼쓰지나 마."



"안 그래. 우리 그리고 외식하자 오래간만에. 자기 좋아하는 거 먹으러 가."



"그래, 그러자."



"내일은 조금 시원했으면 좋겠다."








평온한 하루가, 우리가 함께 하기 때문에 평범해진 하루가 그렇게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쓴맛  



쓴맛은 주로 혀의 깊은 곳[舌根部]에서 느끼며 다른 기본적 맛에 비하면 미각을 느낄 때까지의 시간이 길고, 또한 맛이 오래 남아서 없어지기 어려운 특징이 있다. 쓴맛의 뒷맛을 없애는 데는 단맛이 효과적이다. 반복의 학습효과에 의해 그 좋은 맛을 습득하는 경우가 많다. 맛있다고 느끼는 허용농도폭이 작다. 그러므로 쓴맛의 물질을 사용할 때는 그 사용량에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4.




"기범아. 저 아기 봐 귀엽다."



"어어."



"정말 예쁘다."








요즘 따라 기범은 짜증이 자꾸 자꾸 솟아났다. 무더운 여름이다 보니, 열대야에 잠을 설치는 것도 그렇고 한 동안 집중하고 있던 작업도 배배 꼬여서 요즘엔 손도 못대고 있는 실정이었다. 며칠 전에는 삽화 위탁도 맡게 되어 두 달은 꼼짝 않고 씨름해야 간당 간당 맞춰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도저히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멍하게 앉아 있는 자신이었다. 








"몇 살이나 됐으려나."








그렇게 지쳐 있는 기범이 안쓰러워 데리고 나온 것은 민호였다. 축 쳐져서 방바닥에 바짝 달라붙어 있는 기범을 재촉해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왔다. 꽤 오래간만에 둘이 하는 외출이었다. 현실에 치여 둘이서 여행을 간지도 참 오래됐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이렇게 둘이서 함께 걷는 시간마저 없다면, 현실에 목이 턱턱 메여 제대로 사는 걸까 라는 의심마저 들게 했을 지도 몰랐다. 오늘은 날씨가 참 맑다. 햇살이 꽤나 따갑긴 해도 아름드리 나무 아래 그늘은 제법 선선했다. 



기범은 민호의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대며, 민호의 손을 제 쪽으로 가져가 잡았다. 민호의 시선은 공원 산책로를 뛰어다니는 나폴거리는 어린 아이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오동통한 손이며 볼이, 햇살을 받아 더욱 반짝거렸다. 와 와 거리는 아이의 소란스러움이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저러 다 넘어지겠네."



"민호야."



"어?"



"그렇게 아이가 좋아?"



"뭐, 귀엽잖냐. 조그만한게."








기범은 홧홧하게 올라오는 열기에 현기증이 일 지경이었다. 민호는 어린 아이들을 정말 좋아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막 사귀게 되었을 때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가 사랑스러운 눈으로 아이를 바라볼 때, 그 시선을 기범은 사랑했다. 따뜻하고 포근한 시선은 누가 보아도 쉽게 알 수 있게 했다. 최민호란 사람이 얼마나 따뜻한 남자인가를. 지금도, 그 때도 그 시선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로 옆에 있다.    








"민호야."



"왜"



"자기야"



"응. 듣고 있어."



"아이가 갖고 싶어?"



"어?"



"너 정말 아이 좋아하잖아. 나도 가끔 생각해. 너 닮은 아가가 있으면 네가 얼마나 좋아할까, 얼마나 예쁠까......"








기범은 온 몸에 힘을 쭉 빼 민호에게 기대 있었다. 살랑 살랑 부는 바람이 볼에 닿고 금세 사그러들었다. 여전히 민호의 손을 맞잡은 기범은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민호는 기범의 말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기범은 잘 알고 있었다. 민호가 그리고 자신이 포기했던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얼마나 큰 것인지를. 그리고 포기한 것들은 삶 속에서 쉴 새 없이 저희와 마주쳐야 했고, 하다 못해 이렇게 둘이 집 근처의 가벼운 산책, 벤치에 앉아 있어서도 아프게 부딪쳐 오곤 한다는 것을. 기범의 바짝 말라버린 입 안 가득  씁쓸함을 느꼈다. 충분히, 알고 몇 번이고 다짐했었지만 막상 이렇게 마주하고 나면 힘이 빠지고 마는 것이었다.



가끔은 상상했다. 우리가 각 기 다른 가정에서 한 여자의 남편이되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된다는 꿈을 말이다. 기범은 그러다 민호가 없는 삶 속에서 제 모습이 그려지지 않음을 매 번 깨달았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평등했지만, 우리의 사랑은 평범하지는 않았다. 평범함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사랑만으로도 채울 수 없는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기범아."



"어"


"아이가 있었다면 좋았겠지."



"......"



"하지만, 네가 없는 생활은 도저히 그려지지가 않아."



"......"



"우린 이게 자연스러운 거야."



"다른 사람들은 이런 아픔을 겪진 않잖아."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어. 이 세상에 완벽한게 어딨어. 다만 그 모습이 다른 것 뿐이지."








민호는 기범의 손을 마주잡았다. 서로의 체온은 늘 서로를 위로했다. 기분 나쁜 여름의 더위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따뜻함은 서로를 알게 하는 감정이었다. 








"마누라, 어리광 부리고 싶었구나."  



"그런거 아냐."



"질투하지 마. 가질 수 없는 걸 억지로 욕심 내고 싶진 않아."



"갖을 수 있었지만 나 때문에 포기한거지."



"너 때문에 포기 한거 아냐. 너를 갖기 위해서 내가 조금 덜 필요한 것들을 줘 버린 거지."



"......"



"꽤 시간이 흘러서 괜찮아 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어린애야 김기범."








행복은 영원하지 않다고 했다. 행복과 고통은 항상 시간에 따라 흘러 넘쳤다. 늘 현실은 서로를 관통해갔다. 사랑은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항상 행복하고, 서로를 위하는 것만도 아니었다. 다툼도 있고, 현실에 힘들어하기도 하며, 가끔은 막막한 절망과도 마주쳐야만 했다.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 기범과 민호는 특히, 그 사랑을 다른 평범한 연인들 보다 조금 더 끌어안고, 조금 더 현명한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 이쁜 마누라. 바람 충분히 쐬었으니 이만 집으로 갈까?"



"응."








두 사람은 벤치에서 일어났다. 발 뒤꿈치에 걸린 긴 그림자가 마치 하나처럼 엉겨 있었다.








"오늘 오래간만에 내가 저녁할까"



"저 번처럼 배탈나게 막 다 태울거 아냐?"



"마누라 아마 깜짝 놀랄걸? 기대해."



"좋아. 어디, 두고 보지 뭐."

  

   





기범은 생각했다. 그래, 사랑이니까 때때로 부딪치는 이 소량의 쓴 맛 역시, 사랑해주겠노라고.














미각 



5.




인간의 기본 미각은 단맛, 신맛, 짠맛, 쓴맛의 네 가지로 나누어지며, 혀의 각 부분에 있는 미뢰들은 구조적으로 비슷하나 기본 미각에 대한 감수성이 서로 다르다. 혀의 끝 부분은 단맛, 앞부분은 짠맛, 옆 부분은 신맛, 뒷부분은 쓴맛에 민감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다소 불명확하며, 대부분의 미뢰는 한 가지 이상의 기본 미각에 반응한다.



따라서 나누어져 있는 부분의 생활이더라도 각각의 맛은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 옳다. 부분 부분이 자깁기 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처럼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사랑이 하나의 정의로 묶여 질 수 없고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모든 사람이 사랑의 다각적인 맛을 맛보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동시에 느껴지기 떄문이다.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연애 미각 마침.






 

::

 


 

글잡에도 글좀 올려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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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어후ㅠㅠㅠ 이런 소소한 일상 속 연애의 느낌을 좋아하는데 보면서 달달달달 제가 다 행복했네여ㅜㅠㅠ
11년 전
하비
저도 이런거 좋아여ㅠㅠㅠㅠㅠ 감사합니당
11년 전
독자2
짱이네요ㅠㅠㅠㅠ 달달해요ㅠㅠㅠㅠㅠㅠㅠㅠ
11년 전
하비
감사합니듀ㅎㅎㅎㅎㅎ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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