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로망, 클리셰
W. 백빠
김민석; 선생님 모르겠어요
…휴우. 으리으리한 아파트 앞에 서자마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분명 내가 감당하지 못할 학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거라 확신하고 또 확신했건만 요 아파트에 사는 놈으로 인해 나의 확신은 와장창 깨져버리고 말았다. 엄청 많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꽤 적지 않은, 다양한 또라이들을 맡아본, 그리고 그들을 끝내 개조시켜낸 나로써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 나이 스물 넷. 워낙 엘리트 코스를 밟은 나라 고등학생 때부터 중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수많은 과외생들을 만나와봤더랜다. 기본적으로 꼰대 마인드를 소유한 선생들과는 다른 가르침, 직설적인 말투에 화끈한 성격까지. 학생들은 나를 꽤나 선호했고 얼마 되지 않아 이 근방에서는 학부모가 제일 좋아하는 과외선생 1위로 등극했다. 뭐, 순 꼴통인 놈들도 내게 맡겨만 놓으면 수직상승하는 성적은 물론, 성격까지 싹 바꿔놨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내 화려한 백전백승의 과외경력에 '패'가 한 놈 생기려고 한다는거다. 그 주인공의 이름은 김민석, 나이는 열아홉살. 존내 또라이다. 것도 해결책을 알 수 없는 신종 또라이. 숙제를 안해온다거나, 정말 유전적으로 꼴통 DNA를 갖고 태어나 아무리 노력해도 못한다던가, 음담패설이 심하다던가, 장난끼가 많다던가, 하기 싫어서 침대에 누워만 있는다던가, 뭐 이런 식으로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절대 아니다. (참고로 예시를 든 것들은 다 경험했던 과외 학생들이다. 저 중엔 음담패설 심한 놈이 제일 힘들었다. 시팔놈.) 오히려 김민석은 공부도 잘하고, 숙제도 굉장히 잘해오고, 조용한 학생이다. 차라리 공부나 성격에 문제가 있는 학생이었다면 좋았을텐…. 잠깐만. 지금 몇시야? 헐! 늦었다!
" 안녕하세요! "
" 어머, 선생님!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차가 좀 막혔나부다."
" 네, 아무래도 퇴근 시간이라…. 죄송합니다. "
" 아니에요, 죄송은 무슨. 그나저나 선생님, 감사드려요. 이번에 우리 애 성적이 더 올랐더라구요. 다음달엔 과외비 쪼금 더 올려드릴게요. "
" 네? 아, 아니요, 그러지마세요. 워낙 아드님이 출중하시잖아요.. 지금 방에 있나요? "
" 네, 그럼요.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
성적이 또 올랐다니. 그 미친놈은 대체 거기서 또 뭘 올렸다는거야. 나는 어머님께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출중하신 아드님의 방으로 천천히 향했다. 아주 천천히. …그래, 들어가기 싫어. 들어가기 싫다고오! 그래도 내 뒤에 서서 나의 뒷모습마저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어머님을 두고 저, 하기 싫어요! 하며 도망칠 수가 없어 그냥 쭉 민석의 방까지 스트레이트로 걸어갔다. 그래, 어차피 여기까지 온거 기분 좋게 들어가야지 뭘 어쩌겠어. 나는 그저 나의 할일을 하고 나오면 되는 것이야. 끼이익- 문이 열림과 동시에 책상 앞에 앉아있는… 김민석이 보인다. 이젠 안 놀랄 때도 됐는데 여전히 난 깜짝 놀란다. 흠칫.
" …아오씨. 야, 맨날 책상 앞에 앉아있지 좀 마. 나 무섭다고. "
" 오늘은 좀 늦었네요, 선생님. "
" 새끼, 맨날 동문서답이야. "
" 늦은 만큼 더 해주고 가요. "
시, 싫거든?! 바보처럼 말을 더듬으며 대답하곤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네 옆에 우두커니 놓여있는 푹신한 의자에 앉으니, 오늘도 책상 위에 정갈하게 놓여있는 네 문제집들이 보인다. 토가 나올 것 같다. 아, 그러니까 정갈하게 놓인 문제집이 싫다는 게 아니라 오늘도 마찬가지로 오답 하나 없이 완벽하게 풀이해놓은 네 문제집을 펼쳐 채점을 해야하는 게 토가 나온다는거다.
" 야, 너는. 제발 숙제 좀 완벽하게 안 해놓으면 안되냐. "
" 왜요. "
" 그냥, 뭐랄까. 너는 내가 할 게 없어. "
" 그럼 또 새로운거 나가면 되잖아요. "
" 너 솔직하게 말해봐. 선행 다 나갔지, 너. "
" 아닌데요. "
아닌데요, 하며 살짝 웃는 김민석. ...잘생겼군. 큼. 무, 뭐야! 나 지금 무슨 생각을. 제자에게 되도 않는 생각을 해버린 나는 얼른 그 토나오는 정갈한 문제집을 대충 펼쳤다. 숙제가 몇 페이지부터였더라? 하고 묻자 이백구십일페이지요. 대답해준다. 너만큼이나 바르게 쓰여있는 글씨들 위 빨간색의 동그라미들이 쏟아져내리는 페이지를 촤르르 넘겨 이백구십일페이지를 폈다. 아마 오늘도 흑색의 연필로 아주 바르게 풀이가… 되…있…어야하는데… 뭐야. 하나도 안풀었잖아…?
" …야, 너 숙제 안했어? "
" 네. "
" 미쳤냐? 대체 왜?! "
" 아까는 완벽하게 해놓지 말라면서요. "
" 아니, 좀 틀리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고 그러란 소리였지, 누가 하나도 해놓지 말래?!"
" 선생님 반응이 식상해져서 이젠 하기 싫어요. "
" …그건 무슨…. "
" 처음엔 놀라는 표정이 귀여워서 해왔는데, 이젠 별로 놀라질 않아서. "
" …. "
" 그렇다고 지금 선생님이 안 귀엽다는 말은 아니에요. "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꽤나 흥미로운 표정이다. 어이가 없어 죽으려고 하는 날,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하겠지. 나는 한숨을 쉬며, 백지장인 문제집을 민석의 앞으로 내밀었다.
" 지금 풀어. 맨 앞에 대표 유형 문제들만. "
김민석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제집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제 앞에 놓인 샤프를 손에 쥔다. 손도 참 길고 곧네. 하얗… 어머, 어머, 나 미쳤나봐. 뭐래는거야. 학생이 또라이라고 해서 너까지 어떻게 된거 아니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는 민석이가 지금 보고 있는 1번 문제를 바라보았다. …와, 너무 쉽네. 김민석이라면 연필짓 두어번에 나올 문제다, 이건. 대표 유형 문제만 풀고 오늘은 설렁설렁 넘어가야징. 히히.
" ..모르겠어요. "
" …어? "
" 모르겠어요, 선생님. "
" …. "
...대체 뭘 원해. 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건데? 이거 보다 백배 정도는 어려운 문제도 눈 하나 깜빡 안하고 술술 풀어나가면서 대표 유형 문제가 뭐가 어렵다는거야! 그러나 김민석은 몰라요, 진짜. 하며 내게 설명을 요구했다. 근데 지금 웃고 있는 그 미소는 뭐냐. 혹시 나에게 아량을 베푸는건가. 뭐, 니가 과외선생이니까 내게 설명할 기회 한번 정도는 줄게. 그런거야?
" 죽는다, 김민석. 이걸 니가 모를리가 없잖아. "
" 진짜 모르는데. "
" 그럼 다음 거 풀어. "
" 이거 설명해주세요. "
" 어차피 이 유형 시험에 잘 안나와. "
" 시험에 이 유형 나오면 선생님이 책임질거에요? "
" 아, 진짜 안나온다니까? "
" 책임져주면 나야 좋고. "
그래, 김민석 - 끈질김 = 0 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어디서 우김질이야. 설명해줘야지. 어휴, 한숨을 쉬며 김민석 앞에선 설명하기도 민망한 쉬운 개념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여기서 에프 엑스(라팜팜팜 아님)가 쥐 엑스라잖아. 그럼 여기서 쥐 엑스는 뭐가 돼. 어쩌구 저쩌고. 그리고 역시 열심히 침을 튀겨가며 설명하는 나를, 너는 빤히 바라본다. 턱을 괸 채 왠지 모를 적나라한 눈빛으로, 모르겠다던 문제가 아닌 그 문제를 설명하는 내 얼굴을. 넌 항상 이런식이다.
" …나 그만보고 문제보자, 민석아. "
" 아, 이제 알겠다. 이렇게 하는거 맞죠. "
" …. "
슥슥, 문제 밑에 연필로 순식간에 풀이를 써놓는다. 물론 간단한 유형 문제라고는 하지만, 모른다고 말한 것은 또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 위한 짓이었겠지만, 막상 열심히 설명했던 나로서는 조금 허무했다. 개새끼. 알면서 모른대. 어쩌면, 정말 어쩌면 김민석은 나보다 더 공부를 잘 할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이 아니라 사실인가.
" 너 또 아는 문제 모른다고 할래? "
" 몰랐어요. 선생님이 설명해줘서 안 거에요. "
" …. "
" 설명 잘하네요, 선생님. "
그리곤 능청스럽게 문제집을 가져가 다음 문제를 보는 김민석. 이번엔 샤프를 쥐고는 빠르게 샤사삭 문제를 푼다. 그러더니 끝에 있는 6번 문항까지 별 일 없이 순탄하게 쭉 풀어나간다. 다행이다, 생각하며 민석이가 풀고 있는 문제들을 보는데 뭐랄까. 어딘가 이상하다. 그 찰나 민석이 다 풀었다며 내 쪽으로 문제집을 내민다. 천천히 2번부터 풀이를 체크하는데 이런 씹장생 말미잘 같은 놈. 답을 다 틀려놨다. 그것도 애매하게 기호 하나, 뒷자리 수 하나, 차수 하나.
" …민석아. 선생님 할 거 없을까봐 문제 틀려주는 건 고마운데, 아는 건 일부러 틀리면 안되지. "
" 틀렸어요? "
" …. "
" 진짜 열심히 푼건데요. "
아오, 저 능구렁이 같은 새끼. 진짜 어디 한 군데 쥐어박을 수도 없고. 화가 부글부글 끓다가도, 이런 날이 하루이틀도 아니고 이젠 덤덤해질때도 됐다 싶어 그냥 다 설명해주기로 한다. 내가 할 일은 이것 뿐이고, 제자인 네가 모른다면 설명해줘야하는게 인지상정 아니겠니? 어차피 할당된 과외시간은 채워야하니까 말이야. 나는 문제집을 민석의 앞으로 들이밀고는 2번부터 차근차근 설명해나갔다. 물론 너는 여전히 문제가 아닌,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드디어 30분에 걸친 다섯개의 문제풀이가 끝나갔다. 마지막 6번 문제 풀이가 끝나갈 무렵, 민석이 아직 끝나지 않은 내 말을 뚝 잘라먹고는 나를 불러왔다. 선생님, 하고. 고개를 돌려 민석을 바라보자, 여태까지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마치 그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너는 여전히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내 입술을. 곧 이어 너의 시선은 자연스레 내 눈으로 올라온다.
" 선생님, 그거 알아요? "
" …. "
" 선생님 말 할 때 입술 엄청 오물거려요. "
" …설명 안듣고 남의 입술 보고 있을래? "
" 선생님이 신경쓰이게 하잖아요. 귀엽게. "
…. 하아. 나는 손에 쥔 샤프를 탁 놓고는 한숨을 내리쉬며 김민석을 바라보았다. 얜 뭘까. 날 과외 선생이 아닌, 과외 해주는 여자로 보고 있는걸까. 아니면 그냥 놀리는 걸 좋아하는 학생? 것도 아니면… 진짜 나를 좋아하나. 이 어리디 어린 것에게 농락 당하는 기분을 느껴야한다니. 존나게 비참할 뿐만 아니라 민망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김민석이 조금은 남자라고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을만큼 쪽팔리다. 아무리 그래도 고딩은 아니잖아, 응? …잠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일단 얘를 정신없게 만들어야겠다. 이 문제집에서 가장 어려운 챕터 풀게해야지. 남은 한시간 동안은 다른 곳 볼 틈도 없게.
" 너 숙제 안 해왔으니까 벌로 제일 어려운데 풀게 할거야 "
" 오늘은 좀 쉬어요. 선생님은 너무 수업만 해. "
" 야, 너네 아버지가 힘들게 벌어서 내신 과외빈데 너가 본전은 뽑아드려야지. "
" 시간도 많은데. "
" 시간이 많긴 뭐가 많아! 너 숙제 안해와서 안 그래도 시간표 더 빡빡해지게 생겼는데. "
혼자 여유로운 소리 하는 김민석에게 볼멘 소리로 핀잔을 주며 '난이도 상' 문제들만 모여있는 페이지를 펼쳐들었… 시발. 뭐야, 이건 또! 아니, 젠장할 여긴 왜 또 풀려있는건데! '난이도 상' 문제들이 즐비하는 페이지엔 익숙한 또박또박한 글씨체의 문제 풀이들이 꼼꼼히 빈 공간에 메워놓아져 있었다.
" …뭐야, 여긴 왜 풀었어? "
" 숙제였잖아요. "
" …. "
나는 멍하니 김민석을 바라보다 가방을 뒤져 스케쥴북을 꺼내들었다. '김민석' 이라고 쓰여있는 시간표를 바라보니… 정말 여기가 숙제였잖아. 그럼 아까 나한테 거짓말 한거야? 아오! 또 속아 넘어갔어! 진짜 밟아죽일 미꾸라지 같은 새끼! 스케쥴표를 소리나게 탁- 닫고는 조금 빡친 얼굴로 김민석을 바라보았다. 너는 날 웃으며 바라보다 문제집을 옆 쪽으로 치워버린다. 딱 봐도 이제 놀자는 얼굴이다. 저 또라이를 어쩌면 좋나요.
" 거봐요, 내가 시간 많다고 그랬잖아. "
" 너 혼날래, 진짜...? "
" 어떻게 혼낼 건데요?"
" 너네 엄마한테 확 일러버린다. "
" 뭐라고요, 아드님이 너무 숙제를 잘해온다고? "
" 아씨! 몰라, 나 그만둘거야. 진짜. "
" 엄마가 안 놔줄걸요. 내가 성적 더 올려놨거든. "
그러니까 하는 말인데, 제발 성적 좀 떨어져라. 어? 너가 자꾸 성적을 올려버리니까 내가 그만 둘 수가 없어! 너네 엄마가 날 너무 좋아해! 수업 중간에 자꾸 들어오셔서 화려한 다과상을 내놓으셔! (참다참다 저번주에 말했다. 그래주시지 말라고.. 부담 된다고.. 과외비가 얼만데 휘황찬란한 다과상까지… 범죄 저지르는 기분이었음.) 나는 잔뜩 울상을 지으며 김민석에게 말했, 아니 칭얼댔다. 너 진짜 나한테 왜그래애… 나 좀 그만 괴롭혀라, 어? 성적을 떨어트리던가, 아님 날 농락하질 말던가 응? 그러자 김민석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푸하하, 웃는다. 재밌냐?
" 아, 나 진짜 진지하다고. 너 나한테 왜 이래? 어? "
" 내가 뭘요. "
" 차라리 공부를 못해라. 왜 자꾸 나 놀려, 내가 니 선생인데! "
" 좋아서 그러죠. "
"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제자가 선생님이 좋으면 말을 잘 들어야지! "
" 말 잘 듣잖아요. 숙제도 잘해와, 성적도 잘 올려. 이정도면 훌륭한 제자 아닌가. "
" …그렇기야 하지만… 너 선생님 설명도 잘 안듣잖아. "
또 선생님한테 숙제 안해왔다고 거짓말하고. 자꾸 놀자고하고. 그러면 선생님이 힘들겠어, 안 힘들겠어? 나름 꼰대끼 있는 선생들처럼 가오를 잔뜩 잡고 말했는데 김민석은 오히려 픽, 실소를 내뱉는다. 그러더니 내가 앉은 의자를 제 가까이로 쭈욱 끌어당긴다. 민석이의 얼굴이 아까보다 가까워져왔고, 내 얼굴을 바라보는 네 눈빛은 내 온 몸을 찌릿하게 만든다. 너는 내게 나즈막히 속삭이듯 말했다.
" 말했잖아요. 좋아서 그런다고. "
" …. "
" 좋아해요, 선생님. "
그 말이 너무 진심 같아서, 몰래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네 말이, 선생이 아닌 여자로서 좋아한다는 말 같아서였다. 동시에 심장이 빠르게 콩콩 뛰기 시작한다. 아직 주민등록증 잉크도 안 말랐을 영계에게 고백을 받았다고 가슴이 이렇게 뛸 일인가. 혹시… 나 설마 진짜 얘를 남자로…? 나는 말을 한껏 더듬으며, 괜히 뚱하게 반응했다.
" 서, 선생님한테 자꾸 장난치면 못쓴다, 너. "
" …장난? "
" 그래, 장난! "
" …. "
내 대답에 민석이가 흐응, 하며 눈썹을 치켜뜬다. 그러더니 날 보며 묻는다. 내가 장난하는 걸로 보여요? 그 말을 하는 네 목소리가 꽤 낮고, 눈빛이 남자다워서 순간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괜히 쫄아서. 한참 어린 놈한테 쫄았다니, 한심하긴 한데 저런 얼굴이 나올 줄은 몰랐단 말이야. 진짜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거야? 아, 진짜 김민석 감당하기 힘들어 뒈지겠네. 입술을 꾹 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로 꿈뻑꿈뻑 김민석을 바라보니 다시 한번 내게 묻는다.
" 묻잖아요. 장난으로 보이냐고. "
" …당연히 넌 내 제잔데… 장난으로 보이지…. "
" …. "
갑자기 내 두 손목을 잡고는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무방비한 상태였던 나는 엉덩이가 의자에서 떼어졌고 너는 그 틈을 타 더 세게 당겨 나를 네 무릎에 앉게 만든다. 훅, 하고 맞닿은 김민석의 얼굴에 깜짝 놀라 뒤로 빼니 고개를 뺀 만큼 더 내게 다가온다. 입술이 닿을 듯 아슬아슬 하다. 너는 네 두 눈으로, 내 눈, 내 코, 내 입술, 하나하나 훑는다. 낙인이라도 찍어놓는 것 처럼. 네 숨소리마저도 하나하나 귓 속에 들리는 지금, 나는 미칠듯이 뛰어오는 내 심장 소리가 네게 들릴까 걱정이 된다. 나 진짜 미쳤나봐….
" 아직도 장난 같아요? "
" 뭐하는거야, 놔 이거! "
" 대답 먼저 해요. "
" …나는 네 선생님이고 너보다 다섯살이나 많아. 그러, "
" 대답이 틀려도 안 놔줘요. "
진짜 답정너가 따로없네. 나더러 뭘 어떡하라고. 나는 과외선생이고 너보다 다섯살이나 많은데 사귀자고? …. 말 없이 결박당한 두 손목을 빼내려 이리저리 틀어보는데, 도저히 풀어줄 생각을 안한다. 마른 것이 힘은 또 왜 이렇게 센거야.. 비실비실하게 생겨가지곤. …아닌가. 반팔 입었을 때 잔근육이 좀 있었던 것 같기도… 미쳤구나. 나. 이와중에 대체 뭔 생각을. 김민석은 더 단단히 내 손목을 쥐고는 말했다. 대답할 때까지 안놔줄거야. 아, 대체 내가 이상황에서 어떻게 뭘 대답해.
" 일단 놓고 얘기하자. 응? 선생님과 일단 충분한 대화를… "
" 대답 틀려도 안놔준다니까. "
" …야, 김민… 아, 아! 아퍼, 김민석! "
" 아프면 대답해요. "
" 아, 진짜 아퍼! 야! "
김민석이 내 손목을 더 꽉 죄여온다. 아, 존나 아퍼! 진짜! 힘 진짜 장난아니네. 난 결국 너에게 두손 두발 다 들듯, 항복을 외치듯, 너가 원하는 대답을 해줘야만 했다. 알았어, 장난 안 같아! 알겠으니까 이제 좀 놔! 그러자 꽉 쥐었던 힘을 스르르 풀어놓는다. …야, 근데 놔주기로 했잖아. 힘만 풀으면 다야? 아직도 가까운 김민석의 얼굴을 바라보며 손목 풀어줘- 라고 말하려 입을 여는 순간… 네 입술이 내 입술에… 닿는다.
" …으읍. "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입술. 말캉한 혀가 내 입 속으로 밀고 들어온다. 치열을 훑는 네 혀놀림에 살짝 핀트가 나간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어느새 네 손은 내 얼굴을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너 키스는 왜 이렇게 잘하니. 이러면 안되는데, 제잔데, 학생인데… 하면서도 빨리 뛰어재끼는 심장을 제어해내질 못하겠다. 그래, 좋아. 좋다고. 좋아서 밀치지 못하겠는게 문제야… 서로의 혀를 얼마나 섞어냈을까, 김민석이 내 머릿결을 만지작대며 살짝 입술을 떼어낸다. 서로의 타액으로 인해 반들거리는 네 입술이 씨익, 웃는다. 다시 한번 짧게 쪽, 버디키스를 남기곤 속삭인다.
" 여긴 귀엽기만 한게 아니라 맛도 좋네요. "
" …진짜 미쳤어, 너. "
" 응, 나도 좋아해요. "
" …. "
선생님은요. 물어오는 말에 묵묵히 얼굴만 바라보고 있자, 맘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묻는다. 뭐야, 한번 더 해봐야 알 것 같아요? 아, 아니! 서둘러 대답하자 김민석은 그게 웃기다는 듯 작게 웃는다. …어쩌면 감당하기 힘들었던 건 김민석이 아니라 김민석을 향해 만들어져가는 불순한 내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속으로 젠장… 을 중얼거리며 개미만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 …몰라. "
" 뭘 몰라요. 한번 더 해? "
" 아니! 뭘 자꾸 한번 더 해! 그러니까… 나도…널…. "
" 응, 너도 날. "
" 야, 반말 하지마. 다 취소해버린다. "
" 아아- 알았어요. 그러니까 선생님도 김민석을. "
…조… 좋아했나봐…. 장애가 있는 마냥 심하게 더듬거리는 말투에 아주 신경써서 자세히 들어야 들릴만한 목소리. 그거에도 너는 만족하는지 예쁘게 웃어보인다. 아. 그나저나 망했다. 앞으로 과외는 어떻게 해야하는거야…. 앞으로 제대로 된 과외를 하는 건 힘이 들지 않을까 싶은데. 고백 전에도 대놓고 날 보던 니가 이제는… 아마 폭주 하지 않을까 싶다.
" 선생님이 큰 맘 먹고 받아줬으니까 너 내 말 잘 들어야된다. "
" 어차피 뭘 배우려고 선생님이랑 과외 하는거 아니었어요. "
" …. "
" 선생님 얼굴 보려고 계속 한거지. "
돈 많은 집 자식 마인드는 다 이런건가. 어마어마한 돈지랄이다. 너 나랑 한달 과외하는게 얼만지 알아? 자그마치 백이야, 백…! 일주일에 두번 얼굴 보려고 백을 쓴다고?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니 김민석이 제 옆에 치워져있던 문제집을 탁- 소리나게 닫는다.
" 그러니까, 앞으로 문제 푸는 방법은 됐고. "
" …. "
" 선생님은 어떻게 하면 풀 수 있는 지 그거나 알려줘봐요. "
" …. "
" 그거야말로 모르겠으니까. "
뭘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평소엔 뭘 하는지, 또 누구 과외 하는지, 남자 있는지. 그런거.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댔다. 어린 것이 키스나 어디서 배워와가지구 말이야... 어른을 놀리기나하고.. 궁시렁 궁시렁 대는 내 말이 들렸는지 웃으며 말한다. 좋았으면서. 키스 잘하는 연하 있으면 좋지 뭘 그래요. 당당한 말에 눈을 흘기니 나직하게 말을 덧붙인다.
" 키스만 잘하는 건 아닐걸요. "
…김민석 너 그게 무슨. 키스만 잘하는 건 아니야? 그럼 뭘 더 잘하는데? 뭐, 뭐 키스하면서 목 꺾기 이런거 잘하나보지?! (당황과 민망이란 감정이 과다형성되어 제정신이 아님) 나는 못들은 척 되려 큰 소리로 말했다. 채점하게 문제집 가져와! 순순히 문제집을 내 앞에 가져다준다. 그리곤 하는 말. 하나 맞을 때마다 뽀뽀 한번씩 해줘요. …개새꺄, 너 다 맞을거잖아! 그럼 다섯개 맞을 때마다 키스 한번씩 어때요? 김민석, 너 진짜 문제집으로 맞는다. 응?
그렇게 처음으로 내 화려한 백전백승의 과외 경력에 '패'가 아닌, 사랑이 피어났다. 것도 5살이나 어린 제자놈이랑. ....철컹철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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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Speechless (Vanila Soul Remix)
김민석 같은 제자 있으면 내가 먼저 덮쳤지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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