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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XT휴닝카이] 하와이 나이트 | 인스티즈

이왕이면 943 BGM으로 깔아주세용

하와이 나이트


카이의 손목의 무거운 수갑이 손을 옭아매고 있었다. 한 줄로 길게 연결된 수갑은 카이 말고도 많은 사람을 묶었다. 일렬로 서서 사람들은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었다. 커다란 건물 안으로 긴 행렬은 모습을 감췄다. 카이는 뒤를 한 번 돌아보다 꾸물거린다는 이유로 채찍을 맞았다.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채찍을 받아내던 카이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사람들이 멈추지 않고 걸어가자 카이는 손목이 당겨진 채로 바닥에 질질 끌려갔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도와줄 수 없던 게 아니라 도와주지 않았다.

"야! 너!"

"네!"

"너 오늘부터 여기 말고 다른 데로 가."

"네?"

"너 여기 이제 나오지 말라고! 다른 부서로 가게 됐다고!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윽박에도 소녀는 뭐가 좋다고 웃으며 싹싹하게 대답했다. 소녀는 관리자의 안내를 받으며 주방을 나왔다. 소녀는 주방에서 잔심부름 담당이었다. 말이 잔심부름이었지 사실상 하는 일은 제일 많았다. 셰프와 보조 셰프들의 윽박에도 늘 생글생글 웃어야 했고 온갖 갈굼이란 갈굼은 다 받는 곳이었다. 칼이나 오븐에 데이기 일쑤였고 아침 일찍 일어나 제일 먼저 주방에 들어가 청소를 하고 밤늦게까지 남아 제일 마지막까지 주방에서 청소를 했다. 정말 힘든 곳이었지만 그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 해서 그런지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진 않았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는 소녀에게 관리자는 새로운 가방을 건네줬다.

"하실 일은 이 방에 들어가 보시면 압니다. 감사는 키친에서와 같이 주에 한 번 통지 없이 진행될 예정이니 유의해 주시면 됩니다. 혹시 질문 있으십니까."

"저기... 숙소도 바뀌나요?"

"그대로 지내시면 됩니다."

관리자는 친절히 문까지 열어주고 소녀를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소녀는 작게 감사 인사를 건넨 다음 천천히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창문이 아주 작게 달린 방이었다. 커다란 돌들이 울퉁불퉁하게 쌓인 이 방은 어찌 보면 감옥 같기도 했다. 한 쪽 벽에는 난로가 자작거리며 타고 있었고, 한가운데에는 와인색 러그가 깔려있었다. 난로 맞은편에는 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누군가 자고 있었다. 소녀는 그 누군가가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어 러그 위에 앉았다. 빛이라고는 불밖에 없었지만 따뜻했다. 온종일 고생하다 조용하고 따뜻한 곳에 있으니 몸이 노곤해진 소녀는 가방을 베개 삼아 엎어졌다. 그저 저 사람의 시중을 드는 것이 일이겠구나 싶었다.

소녀는 누군가 앓는 소리에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깼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정신을 차리자 침대 위에 누워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가 아픈가 싶은 소녀는 일단 양초에 불부터 붙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초를 촛대에 올려 침대 가까이에 가져가니 남자... 라기보다는 소년이 엎드리고선 끙끙 앓고 있었다. 소녀는 움푹 들어간 벽에 촛대를 올려두고 소년의 이마에 손을 살짝 가져다 대었다. 뜨거웠다. 소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방을 살폈다. '수건이라도 있으면 땀이라도 닦아주든지 할 텐데...!' 좁은 화장실에는 변기와 세면대, 샤워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판사판으로 관리자가 건네준 가방을 열어본 소녀는 그 안에서 커다란 구급상자와 수건, 소년의 옷으로 보이는 티셔츠와 바지 몇 장이 있었다. 급하게 구급상자를 열다 말고 소녀는 일어서서 다시 소년의 상태를 살폈다. 이불을 걷고 다 찢어진 옷 사이로 생긴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상처들이 난무했다. 소녀는 우선 소년의 옷을 벗기고 수건을 물에 적셔 몸을 닦기 시작했다. 기나긴 밤의 시작이었다.

소녀는 침대에 기대 졸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난로 불은 꺼져 있었고 날이 밝았는지 어스름한 새벽빛이 작은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소녀는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로 세수했다. 정신을 차리려는 모양인지 두 볼을 몇 번 두드리기도 했다. 어젯밤 수건을 다 썼던 탓에 손으로 물을 몇 번 털어낸 여주는 침대 주변을 정리했다. 약병과 붕대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젯밤 열이 떨어지지 않아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 해열제를 한 병이나 먹고 그제서야 열이 떨어졌다. 자칫하면 위험할 뻔했다. 의학적 지식은 거의 없었지만 소녀도 그쯤은 알았다. 이 소년, 극적으로 살아났다.

속옷만 입고 이불에 돌돌 말린 소년은 사실 뭐, 여러분도 이미 진작 눈치챘겠지만 카이였다. 채찍을 심하게 맞고 땅에 끌려오느라 몸에 무리가 많이 갔는지 이 방에 던져지고 곧바로 열이 올랐다. 그리고 딱 타이밍 좋게 소녀가 들어왔던 거였고. 소녀는 방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아플 때 먼지를 들이마시면 좋지 않으니. 옷장에 옷을 가지런히 개어 놓고, 수건은 화장실 장에 가지런히 개어 놓고, 구급상자는 벽난로 위에 올려두고, 난로의 불을 다시 지피고 방을 나섰다. 어젯밤 숙소에 들어가지 않아 언니들이 걱정을 많이 했을 것 같았고, 일단 너무 피곤한 상태였다. 밤 동안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면서 내내 깨어 있었으니 소녀는 숙소로 가는 도중에도 눈이 감겼다. '일단 들어가자마자 좀 자야지... 내가 필요하면 부를 거야...' 소녀는 침대에 몸을 던지면서 생각했다.

카이는 소녀가 아침에 돌아간 뒤로 쭉 잠을 자다 이른 저녁 즈음에 깼다. 침대에 앉아 주위를 좀 살피더니 아무 말 없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조금 갑갑한 느낌에 내려다보니 몸에 붕대가 칭칭 감겨있었다. 얼굴을 만져보니 큼지막한 밴드가 붙어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쑤셔서 카이는 도로 침대에 누웠다. 조심성 없이 확 누웠는데 몸이 저릿한지 인상을 찌푸렸다. 소리를 못 내는 건지 입은 크게 벌어져 있는데 예상되는 앓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느릿느릿 이불을 끌어당겨 덮었다. 한참을 잤는데도 카이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감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색색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점심과 저녁 사이 어중간한 때에 일어났다. 팅팅 부은 얼굴을 찬물로 세수시키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다시 카이의 방으로 향했다. 옷이라고 해봤자 나무 색깔 원피스가 다였다. 상의와 바지는 여자한테 너무 많은 옷감이 든다면서 언젠가부터 원피스를 입기 시작했다. 소녀는 아무렴 상관없었다. 입혀주고, 재워주고, 먹여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으니까. 히고 가는 다리 밑에는 색이 다 바래고 헐어버린 플랫슈즈를 신었다. 긴 머리는 묶지도 않고 이리저리 휘날리면서 방 앞에 도착했다. 방 앞에는 언제 놓고 간 건지 카이 몫의 식사가 있었다. '아 맞다. 나도 밥 먹어야 하는데.' 배식 시간을 놓쳐서 어차피 지금 가도 떨어지는 콩고물 같은 건 없었다. 저녁 배식 때는 시간을 잘 맞춰서 가야 할 듯싶었다. 하루 종일 굶는 건 좀 힘드니까. 쟁반을 들고 끙끙거리면서 문을 열었다. '쟤는 아직도 자고 있네.' 카이의 이마에 손을 대보고 숨을 쉬는지까지 확인한 소녀는 러그 위에 앉았다.

여기가 뭘 하는 곳인지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 소녀도 대강은 알았다. 여기는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수감하고, 실험하고, 연구하는 곳이다. 이유와 목적과 방법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다. 그냥 이곳은 그럴 목적으로 만들어졌을 뿐이다. 이 커다란 건물은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했다. 소녀는 처음에 이 건물이 세상의 중심에 만들어졌을 때 엄마, 아빠와 행복하게 살던 꼬마였다. 그러다 군인이던 부모님은 갑자기 사라졌다. 곧 돌아온다는 메모 하나만 남기고. 전쟁이 일게 된 건지 아니면 납치가 된 건지 소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모든 건 나만 빼고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에 소녀는 이 건물 안으로 끌려들어 왔다. 그때가 10살이었나, 아무튼 그 나이대였다. 소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건물 안에 살면서 여러 사람들을 봤다. 마나로 연구원들을 죽이는 사람, 마나로 모든 걸 불태우려 했던 사람, 대피하던 소녀를 인질 삼아 위협하던 사람, 마나로 소녀를 치료해준 사람. 그 사람들이 선이든 악이든 상관없이 소녀는 그 사람들이 부러웠다. 힘이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이곳을 나가고 싶다. 세상의 끝으로 가고 싶다.'

소녀는 치마를 툭툭 털어내면서 일어났다. 식기 전에 밥은 먹여야 하니까. 곤히 잠든 소년은 살살 흔들었다. 진짜 예쁘게 잔다. 무언가 바뀐 것 같지만 마치 공주를 잠에서 깨우려는 왕자가 된 것 같았다. 지금 누워있는 곳이 침대가 아니라 장미꽃밭이라면 정말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소년은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앉아있자 어깨에 있던 이불이 떨어져 소년의 맨몸이 적나라하게 다 보였다. 소녀는 허둥대면서 옷장을 열고 짚이는 후드티와 바지를 소년에게 눈도 못 마주치고 건넸다. 옷을 받아들자마자 뒤를 돌았다. 뒤에서 부시럭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게 더 이상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지 소녀의 얼굴은 달아올라있었다.

카이는 소녀가 품에 안겨준 옷을 느릿느릿 입었다. 이 건물에 대해 여러 얘기를 들은 적이 있던 카이는 소녀가 이곳에서 일하는 애 중 하나겠거니 싶었다. 바지까지 입고 몇 걸음 떨어진 소녀의 어깨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소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다급하게 뒤를 돌았다. 카이는 그런 소녀에게 말없이 웃어 보였다. 소녀는 허둥지둥 접이식 책상을 펼치고 쟁반을 올렸다. 카이의 손에 숟가락을 꼭 쥐여주고 본인은 맞은편에 앉아서 땅만 쳐다봤다. 카이는 젓가락을 소녀에게 내밀었다. 쟁반에 담긴 그릇을 소녀 쪽으로 좀 빼주기도 했다. 소녀는 손사래를 쳤다. '저... 이거 먹으면 징계 받아... 요...' 순간 한국어로 대답한 소녀는 말하고 혹시 영어로 말을 해야 하나 살짝 망설였다. 다행히 카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젓가락을 도로 가져갔다. '다행이다... 한국말 할 줄 아는구나...' 소녀는 카이가 밥 먹는 모습을 빤히 쳐다봤고, 카이는 목이 막히지도 않는지 죽을 잘만 먹었다. 그렇게 둘의 첫 번째 대면은 어색하고 숨 막히기 짝이 없었다.

소녀와 카이가 본격적으로 서로 감정을 공유하기 시작한 건 사흘째,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카이가 무언갈 쓰고 싶다는 표시를 해왔기 때문이다. 소녀는 곧장 수첩과 펜 한 자루를 준비해주었다. 카이는 수첩을 받아들고 끄적끄적 무언가를 쓰고 소녀에게 내밀었다. 공용어였다. 소녀도 이 글자가 공용어라는 것쯤은 알았다. 소녀는 수첩을 받아들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카이는 수첩을 다시 가져가더니 이번에는 다른 글자를 공용어 밑에 써서 소녀에게 다시 보여줬다. 한글. 이 글자는 본 지 꽤 됐지만 한글이 틀림없었다. 소녀는 이번에도 난감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저기... 내가 글을 몰라..."

카이는 꽤 당황한 듯싶었다. 소녀는 카이의 수첩을 들고 '잠깐만,' 한 마디와 함께 방을 나갔다. 카이가 침대에 앉아서 다리를 흔들면서 멍하니 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적지 않게 흐르고 소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방에 들어왔다. 소녀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카이에게 들고 온 걸 내밀었다. 부탁한 책 한 권과 그 수첩. 카이는 이 물건들을 받아들고서 소녀의 표정을 살폈다. 소녀는 싱긋 웃고 있었다. 소녀도 입꼬리를 올리고 일자 눈이 되도록 웃었다.

소녀는 방을 나가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언니를 발이 닳도록 뛰어서 찾아다녔다. 수첩은 이미 손에 꼭 쥐고 있느라 구겨져 있었다. 한참을 뛰어다니다 복도를 지나가는 언니를 붙잡고 헉헉거리며 말없이 수첩을 내밀었다. 언니는 일단 소녀를 걱정하는 말을 하고 수첩을 봤다.

რომანი და ჯულიეტა რომანი არსებობს?

소설로 된 로미오와 줄리엣 책이 여기에 있어?

'거기에 뭐래?' 소녀는 무릎을 짚고 여전히 숨을 가쁘게 고르면서 말했다. '얘 누구야?' 언니는 소녀에게 다짜고짜 그것부터 물었다. '... 친구. 왜?' 소녀는 간신히 허리를 폈다. '아니, 여기서 이런 책을 읽겠다는 애는 처음이라. 그리고, 얘 공용어도 쓸 줄 아네.' 언니는 소녀를 서재로 데려가면서 말했다. '얘 조심해야겠다.' '왜?' 언니는 책장을 이리저리 밀더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공용어를 쓸 줄 안다는 건, 읏차.' 언니는 팔을 뻗어 손가락 끝으로 책을 꺼냈다. '마나를 쓸 줄 안다는 거야. 마나를 사용하는 주문은 몽땅 공용어로 되어 있거든. 그리고 이 책도 공용어로 적힌 책이고. 자, 여기 있다.' 소녀는 언니가 준 책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다시 카이가 있는 방을 향해 힘껏 뛰었다.

소녀는 그날 이후로 언니에게 열심히 글을 배웠다. 카이는 소녀가 글을 읽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최대한 모든 걸 몸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카이는 소녀에게 말하고 싶은 게 많았다. 소녀는 카이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카이는 말을 하지 못한다. 소녀는 글을 읽지 못한다. 그래서 소녀는 글을 배웠다. 이제 한글은 완벽히 뗀 소녀가 카이에게 저 어딘가 처박혀 있던 수첩을 꺼내서 당당히 내밀었다. 접이식 책상에 나란히 앉은 둘은 어깨가 맞닿도록 가까이 붙었다.

"나 이제 글 읽을 수 있어! 이제 너 이름 알려줘! 대신 아직 공용어는 안 배워서 한글로 써줘야 해..."

카이는 펜을 들고 글자를 꾹꾹 눌러 썼다. 카 이 또박또박 적으려고 애를 쓴 게 티가 난 글씨를 소녀가 소리 내어 읽었다. 카이는 밑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는지 펜을 놓지 않았다. 소녀가 수첩을 다시 밀어주자 이름 바로 밑에 물음표가 달린 짤막한 글자들이 소녀의 눈에 들어왔다. 너 는 ? 소녀는 카이가 내밀은 수첩과 펜을 받아들고 신이 나서 삐뚤빼뚤한 글씨를 적었다. 라 니 그리고 그 밑에 마 히 나. 소녀는 펜 뒤쪽으로 라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아빠가 부르던 이름이고,' 이번에는 밑 쪽 마히나를 가리켰다. '이건 엄마가 부르던 이름.' 카이가 펜을 소녀의 손에서 빼간 다음 그 옆에 이 름 이 두 개 야 ? 라는 글씨를 썼다. 카이가 쓴 걸 읽은 소녀는 침대에 기댔다.

"우리 엄마, 아빠는 하와이에서 오래 있었는데 라니는 하와이 말로 천국이라는 뜻이고, 마히나는 달이라는 뜻이래. 뜻이 다 너무 예뻐서 어떤 걸 이름으로 쓸지 내가 태어날 때까지 못 정하셔서 그냥 두 개로 날 부른다고 했어."

카이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아! 하는 소리를 내면서 카이를 바라봤다. 그 소리에 놀란 건지 카이는 몸을 움찔했다.

"내가 하와이 말을 조금 아는데, 하와이 말로 카이는 바다래. 그래서 라니카이 는 천국의 바다라는 뜻이야. 신기하지?"

그 럼 앞 으 로 라 니 라 고 불 러 야 겠 다 카이는 다시 수첩에 글씨를 꾹꾹 눌렀다. 카이가 적은 글씨를 본 라니는 그 래 ! 라고 그 밑에 다시 글씨를 썼다. 라니는 카이가 앞으로 계속 어깨를 톡톡 두드릴 걸 알았지만 넘어갔다. 언젠가 한 번도 들려주지 않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겠지.

둘은 벌써 수첩 한 권을 다 썼다. 대화는 주로 카이가 쓰고, 라니가 대답하고, 또 카이가 쓰고, 라니가 대답하는 식이었다. 가끔 거기에 라니가 그림을 그려놓기도 했지만 카이의 말만으로도 수첩 하나 꽉 찰 정도로 많은 얘기를 나눴다. 라니는 이제 카이가 왜 말을 하지 않는지 안다. 카이는 이제 라니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안다. 라니는 숙소보다 카이의 방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카이는 혼자 있는 시간보다 라니와 같이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공용어를 이제 더듬더듬 읽을 수 있는 라니는 요 며칠 동안 카이에게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어주고 있다. 로맨스 소설은 처음인 라니는 책 안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에게 속삭이는 달콤한 대사들이 나올 때마다 두 볼이 사과같이 영글었다. 낯짝이 두꺼운 카이는 어쩔 줄 모르는 라니의 눈을 맞추려는 장난을 쳤다. 라니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피하다 결국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라니가 뒤로 넘어가 침대에 넘어지고 책으로 얼굴을 가리면 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니를 보고 웃었다. 라니는 카이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카이는 라니 손을 잡고 다시 일으켜 세웠다. 언제나처럼.

라니는 책갈피 비슷한 걸 만들어왔다. 수첩을 찢어 하트 모양으로 두껍게 접어 책 사이에 끼웠다. 라니는 책을 펼쳤고 카이는 라니의 옆에 앉았다. 라니는 책을 읽기 전에 앞쪽으로 넘겼다. 하트 모양 종이가 접힌 곳에 멈췄다. 라니는 책 표지는 자신의 무릎에, 뒤표지는 카이의 무릎에 올라오도록 옆으로 밀었다. 카이는 라니가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부분을 다시 읽었다. 줄리엣의 집에서 가면무도회가 벌어지고 있는 장면이었다.

"있잖아, 아직도 밖에서 무도회를 해?"

라니는 기대에 찬 눈으로 카이를 바라봤다. 카이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라니의 표정에 실망이 한가득 담겼다. '아~ 나는 아직 무도회를 하면 줄리엣처럼 예쁜 옷이나 입고 가보려고 했지~' 아쉬운 티를 내지 않으려 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게 느껴졌다. '넌 가본 적 있어?' 카이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라니는 작게 중얼거렸다. '나중에 하와이에 가면 가봐야지 하고 있었네...' 라니의 말에 카이는 펜을 들었다. 하 와 이 에 가 고 싶 어 ? 카이가 적은 글을 본 라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는 여기를 꼭 나가서 하와이에서 살 거야. 언니가 그러는데 하와이가 세상의 끝이래. 그래서 하와이에 갈 거야.' 라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카이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라니를 보고 수첩에 다시 무언가를 써서 보였다. 무 도 회 춤 춰 볼 래 ? 라니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응!'

'근데 너 춤 알아? 무도회 없다면서.'

카이는 어릴 적 몇 번이나 본 신데렐라에서 춤추는 장면을 되살렸다. 정확히는 되살리려고 애썼다. 카이는 라니를 손으로 가리켰다. 양옆 치마를 잡는 시늉을 하고 한 쪽 발을 뒤로 빼어 몸을 살짝 굽혔다. '내가 이렇게 하는 거야?' 라니는 엉성하지만 카이의 액션을 따라 했다. 카이는 오른손을 심장과 어깨 사이에 올리고 왼손을 허리에 올렸다. 역시나 몸을 살짝 굽혔다. '이게 뭐야?' 카이는 수첩을 라니에게 건넸다. 인 사

카이는 라니의 허리를 감았다. 라니는 그만 얼어버렸다. 두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벙하게 있는 모습에 카이는 쿡쿡 웃으면서 한 손은 허리를 감은 쪽 어깨에 올리고 한 손은 카이가 잡았다. 카이가 한 발자국씩 천천히 움직였다. 라니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카이를 따라갔다.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카이는 라니와 눈을 맞추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리를 감싼 손을 푸르고 맞잡은 손을 위로 올려 라니를 한 바퀴 돌렸다. 라니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카이를 바라봤다. 카이는 소리 없는 웃으면서 다시 라니 허리를 감쌌다. 아무 박자도 없는 스텝을 밟았다. 서로를 마주 보면서. 카이는 라니가 익숙해졌다 싶으면 다시 라니를 한 바퀴 돌렸다. 카이보다 키가 한참 작은 라니는 카이의 손에서 빙글빙글 잘도 돌았다.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는데 원피스가 퍼지는 게 이쁘기도 하고 진짜 춤을 추는 것 같아서 라니는 이제 카이에게 돌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카이는 왕자님 표정을 지은 채로 근엄하게 라니를 빙글 돌렸다. 라니는 그 표정을 보고 새침데기 같은 표정을 지었다. 며칠 동안은 책 읽는 것도 읽고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반주도 없는 왈츠를 췄다.

춤을 추지 않기 시작한 건 어느 날 라니의 종아리가 회초리 자국에 퉁퉁 붓기 시작하면서였다. 손을 잡지 않기 시작한 건 어느 날 라니의 손이 회초리 자국에 진물이 나기 시작하면서였다. 책을 읽지 않기 시작한 건 어느 날 라니의 목소리가 전부 쉬어버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기 시작하면서였다. 카이는 물었다. 라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라니가 카이의 방에 와서 하는 일이라곤 카이의 밥을 챙기고, 주변을 정리하고, 카이의 침대에 기절하듯 자는 것 말곤 없었다. 카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라니를 바라보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젠 그마저도 라니가 방에 잘 오지 않아 할 수 없게 되었다. 라니는 이제 방에 자주 오지 않았다.

라니가 오지 않은 날, 카이는 목소리를 다듬었다. 카이의 주변으로 마나가 모여들었다. 카이의 손짓에 마나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깊은숨 한 번에 마나가 빨려 들어갔다. 카이의 주변에 파란빛을 띄는 물결이 만들어졌다.

카이의 손에서 얼음조각이 나오기 시작한 날, 사람들이 방을 들이닥쳤다. 라니 두 손이 묶인 채 방에 끌려들어 와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카이는 침대에 걸터 앉아 라니가 읽어준 부분까지 책을 몇 번이고 돌려보다 사람들을 맞았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관리자가 카이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두 사람이 어떤 작당 모의를 했는지 모르지만 당신은 이곳에 온 지 6개월이 다 되어가도록 단 한 번의 검사도 받지 않았습니다. 저 아이는 문서 조작으로 지하에 내려갈 것이고, 당신은 지금 당장 검사를 받아야겠습니다. 아니면, 조사를 먼저 받으실까요?' 카이는 긴 머리가 짧은 단발로 거칠게 잘린 라니를 보고 관리자를 올려다보았다. 카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카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관리자는 카이에게 조사를 먼저 받자고 결론을 내렸다. 관리자는 한 손에 든 칼을 카이의 목 가까이에 대면서 물었다. 카이는 여전히 재갈을 물고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는 라니를 바라봤다. '당신은 당신의 관리인을 협박하였습니까?' 카이는 책을 덮었다. '당신은 당신의 관리인에게 문서를 조작할 것을 사주하였습니까?' 카이는 책을 이불 위에 올렸다. '당신은 어떠한 이유로 검사를 회피하였습니까?' 카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칼이 따라올라왔다. '이렇게 아무말도 하지 않으면 당신만 불리해집니다. 답을 하세요.' 카이가 숨을 깊게 들이 마셨다. 주변의 공기가 얼기 시작했다. 관리자의 발은 이미 얼음에 뒤덮이고 있었으며 라니를 잡아두던 남자들의 몸도 점점 얼음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라니가 놀란 눈으로 점점 다가오는 카이를 올려봤다. 카이는 라니의 입에서 재갈을 빼냈다.

"너, 너... 이제 괜찮아...?"

"응. 카이는 이제 말할 수 있어. 마나를 다 모았거든."

상황에 맞지 않는 깜찍한 목소리로 카이는 라니의 손을 묶은 수갑을 얼려 부쉈다. 라니와 카이의 입에서 입김이 나왔다. 얼어붙은 문 뒤로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이제 가자.' 카이가 라니를 일으켜 세웠다. 라니가 카이의 팔을 잡고 몸을 지탱했다. 그때 부운 종아리는 아직 다 낫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이는 담요를 라니에게 둘러줬다. '이제 많이 추울거야.' 카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부서졌다. 카이를 잡은 라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카이는 마법진을 그렸다. 파란빛 마법진이 빛났다. 얼음 결정이 쏟아져 내렸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사람들은 날카로운 결정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카이는 끈임없이 마법진을 그렸다. 조금 힘겨워 보이기도 했다. '손.' '응?' 카이가 라니가 잡고 있는 팔을 들어올려 라니 앞에 손 폈다. '손이 필요해.' 라니가 한 손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손을 잡았다. 카이는 새로운 마법진을 그렸다. 조금 더 진한 색으로 빛났다. 사람들은 숨을 쉬지 못하는지 다들 목을 잡고 켁켁 거리면서 쓰러졌다. 카이는 라니 머리 위로 담요를 당겼다. '저런 건 볼 필요 없어용.' 라니는 담요 안에서 눈을 꼭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주변이 고요해졌다. 라니는 고개를 내밀었다. '끝났어?' 라니 앞에 거대한 눈보라가 일고 있었다. 카이는 라니를 당겼다. 반짝반짝한 얼음으로 된 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우와...' 라니의 입김이 퍼졌다.

"진짜 예뻐..."

"내 이름 불러줘."

"진짜 예쁘다 카이야."

"그럼 갈까용?"

"뭐야 말투 왜 그래."

라니는 웃으면서 카이를 따라 얼음길 위로 올라섰다.

"근데 이거 어디로 가는거야?"

"하와이."

"그럼 가서 네 마나로 아이스크림 만들어 먹자."

카이의 웃음소리가 나지막히 울렸다. 이제 간다. 세상의 끝으로.

드디어... 하와이 나이트를 다 썼다...

사실 이 내용은 제가 카이를 맨 처음 보자마자 생각했던 소재였습니당

제가 노래 가사 가지고 글 쓰는 걸 좋아하는데 세상에 마상에 943 가사가 제 감성을 저격한 거 있죵

전 943 카이로 입덕했습니다...소곤...

♪그게 잘 안돼 지금 내겐 니 손이 필요해♪

와 끝에 카이 코러스에 완전 감겨서 943 뮤비 뜬 날 바로 입덕!!

그리고 이 글은 제가 맨 처음 카이 캐해를 해본 글인데 처참히 실패한 거 같지 않습니까...케케..

과묵한 카이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거지...

암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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