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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순이ll조회 1881l 1





"여주야, 넌 연애 안해? "


시발. 또 시작이야.


" 네. 관심 없는데요. "


푸핫, 하고 내 말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리는 같은 알바생 언니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내 말이 웃겨? 어디가 웃긴데.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심산으로 언니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언니는 눈물까지 고였는지 손가락으로 비비작대며 눈을 쓸었다.


" 괜찮아, 여주야. 하고 싶으면 하고 싶다고 말해도 돼. 괜히 관심없다고 포장말구. 그러지말구 언니가 남자 소개시켜줄까?"

" 진짜 관심없어요. "

" 에이~ 왜그래. 모쏠 그거 문제있다? "

" 무슨 문제가 있는데요. "


어... 음. 내 물음에 곰곰히 생각하던 언니가, 하여튼 20살 넘어서까지 연애 못해본 사람이 흔치는 않잖아! 라는 말을 씨부렸다. 논리라곤 하나도 없는 말을 들으며 먹던 밥맛도 다 떨어졌다. 결국 짜장면을 반이나 남기고 먼저 일어날게요, 하고 그릇을 치웠다. 기껏 좋은 자리, 좋은 날짜로 구한 알바였다 싶었는데, 같이 일하는 언니가 존나 맘에 안들어서 기분이 언짢았다.













무로맨틱 로맨스

01













나는 무성애자다. 남자라는 생명체에 대해 관심이 생긴 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사랑한다는 마음은 더더욱 느껴본 적 없다.성욕도 없었으니, 남들 다 초등학교때 떼던 음란물 한 번도 자의적으로본 적 없었다. 로맨스 장르를 싫어하고, 보면 잔다. 내가 누군가랑 껴안고 뽀뽀하는 장면을 잘 상상해본 적도 없을 뿐더러, 생각만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동생이 연애를 하거나, 친구들이 연애를 하는 걸 보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연애하면 무슨 느낌인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연애를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한다는 말이 맞는 거였다. 하고 싶어도 전혀 설렘이 느껴지는 상대가 없었다. 하고 싶단 생각도 별로 안든다.초등학교때부터, 이성에 눈을 뜨고 주위 친구들이 하나둘씩 연애를 할 때, 나는 집에 와서 디지몬 만화를 보는데 더 혈안이었다. 사랑범벅 드라마보단 아빠랑 심야식당 드라마를 더욱 챙겨봤으며, 데이트보다는 놀이터에서 모르는 친구들과 섞여 뛰어 노는 걸 더 좋아했다.


중고등학교때도 나의 그런 성향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좋다며 몇 번 고백했던 남자애들도 있긴 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난 학원숙제를 하기 바빴으며 정해진 일을 다 끝마치려면 친구들과 노는 시간도 부족했다. 연애? 그거 하면 맨날 맨날 만나야 하잖아. 내가 마음도 없는데 그런 사사로운 일에 시간을 왜 투자해야하지? 이성에 대해 별 생각 없던 내가 처음으로 연애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서 거절. 너도 거절. 너도 거절. 그렇게 거절하다보니깐 어느새 모태솔로를 유지하며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놈의 연애에 미친 사회는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중고등학교때야 뭐, 공부하니까 남친없냐는 말해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그런 걸 왜 만들어요. 하면 다들 칭찬해주었다. 하지만 대학교에 올라오자마자,어딜가든 남자친구 없냐고 물어왔다. 명절에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도, 스승의 날 기념으로 찾아간 고등학교 선생님들도, 동창 친구들도, 알바를 시작하면 같이 일하는 언니 오빠들도 모두 내가 남자친구가 없다고, 관심없다고 대답하면 놀라 뒤집어졌다.아니, 왜 여주야. 왜 남자를 안사귀어? 너같이 얼굴 반반하게 생긴 애가. 그거 썩히는 거야. 나는 우스웠다. 고작 얼굴 쓰려고 연애를 해야하나, 이 세상은?


나로썬 도저히 이해가 가지않는 문화였다. 관심없으면 관심없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될 것이지. 남자친구를 한 번도 안사귀었다고 말하면, 무슨 문제있는 사람 취급을 했다. 동기들은 더했다. 왜 너같은 애가 남자를 안 사귀냐며, 사귀면 행복하다고, 나몰래 미팅을 주선하려 하다가 연을 끊을 뻔한 친구도 있었다. 이제 몇년간 학과 생활을 하다보니 나의 이런 반응이 익숙해진 동기들도 있지만, 여전히 나는 학과에서 문제 있는 사람으로 통했다.






" 선배,여주 누나 혹시 남친 있어요? "

" 야, 포기해라. "

" 왜요... ? "

" 김여주 쟤... 고자야. "



소문은 빨랐고, 갈수록 살이 붙어 커져있었다. 김여주 남자 안 만난대. 왜? 몰라. 고자 아냐? 고자래? 미친 김여주 고자래. 예쁘게 생겨서 남자 후리고 다닐 것 같은데. 진짜 고자인 거 아냐? 무슨 문제 있나? 헐. 야 김여주 혹시 여자 좋아하는 거 아냐? 되게 신빙성있는데. 김여주 레즈래! 그렇게 2년 간 고자에, 레즈에 갖가지 섹슈얼한 별명이란 별명은 다 지니게 되었다.


나몰래 뒤에서 저들끼리 쑥덕거리는 걸 들으며 맥주 한 잔을 쭉 원샷했다. 술 맛 떨어지게, 고자가 뭐냐 고자가.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고자라고 하면, 맞다고 인정까지 할 수 있었다. 그것 말고 자신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고 생각했다. 새내기 개강총회. 원래라면 안가고 집에서 뻐팅길 계획이었는데, 오전에 알바하던 언니가 했던 말에 기분이 팍 상해서 홧김에 들렀다. 술도 좋아했고, 술자리 분위기도 좋아했다. 맘에 안드는 건, 저렇게 사람들의 입방정뿐이지.







" 석진아! "

" 야 김석진! 오랜만이다! 반갑네! "


안주거리나 심심하게 뜯던 술자리의 텐션이 갑자기 확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어떤 모르는 남자가 있었다. 문을 열고 조용히 등장한 한 남자가 모자를 벗자, 그를 알던 같은 과 선배들이 모두 모여 반기기 시작했다. 애들아, 인사해라. 처음 보지? 복학생 김석진이야 우리랑 같은 학번이고. 그렇게 그 화려한 등장의 남자를 김석진이라 설명하는 선배의 말에 테이블이 순식간에 술렁였다.






[김석진] 무로맨틱 로맨스 01 | 인스티즈

" 아...안녕하세요. 16학번 김석진이라고 합니다. "


" 반말 써, 임마! 군기 아직도 잡혀있네. "



그렇게 말하며 남자 선배들이 김석진 선배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자신들의 테이블로 돌아가기까지 테이블에 앉아있던 애들은 저마다 눈을 떼지 못했다. 개잘생겼는데? 미친. 복학생은 누가 만나지 말라 그랬어. 나 저 오빠랑 사귀고 만다. 김석진을 보고 난 뒤의 감상이 새내기와 동기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확실히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반반한 얼굴이었다. 제법 키도 크고, 피부도 좋고, 어깨도 딱 벌어졌고, 얼굴도 작았다. 눈코입은 오밀조밀 여백없이 예쁘게 얼굴을 꿰찼다.


김석진이 온지 얼마 안됐는데, 벌써 그의 주위에 남녀노소 할 거 없이 사람이 가득찼다. 언제 왔어? 언제 복학했어? 핸드폰 바꿨는데 번호 좀 줄래? 개중엔 여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김석진과 동기인 여자선배들, 그리고 여자 후배들, 멀리서 흘깃 보는 새내기들까지. 겉으로는 아닌척하며, 그를 신경쓰고 있었다. 그 광경들을 조용히 관람하며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었다. 속히 말해, 좀 웃겼다. 마음에 드는 이성을 발견하고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왔다.


얼핏, 다행이라고까지 생각이 들었다. 새학기로 들어설 때마다, 제 소문이 일파만파 불어나고 있는 시점에서 화제의 뉴페이스의 등장이란 꽤 달가운 일이었다. 저보다 잘난 복학생이 우리 과를 주름잡게 생겼으니, 저에 대한 소문은 확실히 이전보다 가라앉을 것이다.



" 와, 나도 번호 따야겠다. 우리 과에 저렇게 잘 생긴 사람이 있는줄 몰랐는데. 그치 여주야? "

" 응, 그러게."

" 되게 친절한 것 같은데... 나도 저 테이블 가서 번호 여쭤볼까? 같이갈래? "

" 난 됐어. 너 혼자 가. "



치. 차갑기는. 내 옆에 있던 수미는 아까부터 한참동안 김석진 선배를 보는 일에 잔뜩 빠져있었다. 대충 대답을 해주다가, 결국 수미가 못가겠다며 옆에서 찡찡거렸다. 그럴 정도인가. 아무리 봐도 내눈엔 그저 다른 남자애들과 비슷한 정도인데. 다른 남자애들보다야, 훨씬 낫긴 하지만, 역시나 저 얼굴을 봐도 나에겐 아무런 감정따위 들지 않았다.


그러다, 줄곧 테이블에 앉아 사람들의 말을 고분고분 받아주고 있던 김석진 선배가 일어나 테이블 밖으로 나갔다. 수미가 어, 어! 하고 선배의 뒷꽁무늬를 쫓았다. 따라서 몸을 일으킨 수미가 야, 선배 화장실 가나보다, 나 얼른 쫓아갈게! 하고 말하며 달려 나갔다. 옆에서 한참 떠들던 인물이 사라지고 나니, 좀 조용해진 분위기에 다른 테이블에서 얘기하는 목소리가 서서히 들리기 시작했다.





" 군대갔다오고 나서 더 심해진 것 같지 않냐? "

" 누구? 뭐가? "

" 김석진 쟤. 여자 피하는 거 딱 보이지 않냐고. "

" 너도 느꼈냐? 나만 느낀 게 아니었어. "



아까 전과는 상반된 분위기,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환호했던 김석진이었는데, 고작 그가 자리를 비운지 얼마 안돼서 뒷담화의 판이 깔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 시작이네. 사람들의 양면성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된 심정은 언제나 이골이 났고, 질렸다. 그러나그렇게 싫어하는 남의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선배들의 입에서 나온 김석진 선배에 관한 이야기들은 저도 모르게 흥미를 유발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 상철이나 다른 남자애들이 얘기할 땐 아무렇지 않게 웃더니, 내가 오니깐 얼굴 싹 굳고. 좀 소름돋았다니깐? "

" 그러니깐. 1학년땐 그냥 우스갯소리로 고자라고 막 놀렸는데."

" 이제보니깐 김여주때문에 잊고 살았는데, 원조 고자가 따로있었네. "



키득키득 웃는 선배들을 보며 오징어를 씹던 턱질을 멈추고 인상을 팍 구겼다. 거기서 내 얘기가 왜 나와. 더 들을 것도 없어 담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하는데, 계속 이어진 이야기가 내 발목을 잠시 붙잡게 했다. 고자? 김석진이 고자야? 몰랐어? 쟤 1학년때부터 여자 엄청 싫어했어. 남자애들한테는 잘해주는데, 여자애들한테는 쌀쌀맞게 군다니깐? 여자를 싫어한다라니. 진짜일까? 순수한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저와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방면의 모습이었다. 확신했던 것은 한가지였다.저 말이 사실이라면, 저 선배도 소문때문에 오지게 힘들겠다 라는 것.


얼굴만 안 잘생겼어도, 벌써 내가 대놓고 욕했을텐데. 끝까지 김석진을 두고 선배들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 네? 지금 뭐라고 하셨... "

" 연락할 이유 없으니깐,앞으로 이런 식으로 화장실 쫓아오면서까지 번호 구걸하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의미가 충분히 전달 안됐나봐. "

" 서, 선배... 저는 그냥 선후배로 지내면서... "

" 진짜 그게 다야? "

" 네! 다,당연하죠...! 저는 그냥 선배랑 친해지고 싶었을 뿐이에요. "



담배를 물고 나가려는데, 이번에는 화장실쪽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자신의 발을 붙잡았다. 저건 분명 수미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앞에 있던 남자는.. 김석진 선배일 것이다. 아무래도 번호를 물어보러 쫓아갔다가 저런 상황에 놓이게 된 것 같았다. 수미가 아까 쫓아간다고 일어났을 땐 별 생각 안들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말렸어야 할 일이었나 싶고.



" 그럼 학과생활하면서 마주칠 일이 있으면, 그때 교환하자. "

" 네? 아..그래도 선배랑 마주칠 일이 잘 없을텐데... 밥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친해지려고.."



[김석진] 무로맨틱 로맨스 01 | 인스티즈

" 마주칠 일이 잘 없을 거니깐, 연락할 이유가 없다는 거야. "

" ... "

" 같이 밥을 먹어? 미안한데, 난 한번도 여자후배한테 밥 사준 적이 없어.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거고. 이렇게 가깝게 지내면 사심갖고 오해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내 선에서 적절히 지키는 거야. 그니까 너도 그렇게 알아줬음 좋겠다. "





발걸음을 붙잡는데 일조한 건, 저 선배의 말투였다. 솔직히 좀 충격적이었다. 아까 인사했을 때까지만 해도 말투에서 유순함이 가득하기만 했었는데, 수미의 말을 단칼에 거절하는 지금 저 선배의 목소리는 날이 바짝 서있었다. 말투는 더 가관이었다. 한싸가지 했던 내가 봐도, 저건 말이 너무 심했다. 굳이 좋게 좋게 돌려 거절해도 될 말을, 일부러 상처주기라도 할 작정인지 구구절절 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선배들과 웃고 떠들던 모습과는 너무 상반되어서, 아까 선배들이 고자니 뭐니 떠들던 얘기를 듣고 직접 목격까지 했는데도 현실성이 없었다.


그냥 나갈까. 저도 모르게 대화를 끝까지 들어버려서 괜히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 담배 말려. 나가야겠다 생각했는데, 훌쩍거리는 수미의 소리가 들리자 또 한 번 걸음을 멈췄다. 아무리 그래도 친구인데, 우는 모습을 보고 그냥 넘어가는 건 내가 생각해도 좀 아닌 것 같았다.




" 저기요, 선배. "

" ... "

"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

" 뭐? "

" 여, 여주야... "




어쩌자고 이 앞으로 걸어왔는지, 저도 잘 모르겠다. 수미가 우는 소리를 듣고 몸을 돌려 화장실 쪽으로 걸어왔는데, 수미는 정말 눈가에 눈물이 잔뜩 고인 상태였다. 김석진 선배가 넌 뭐냐는 식의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수미가 놀라 내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나는 눈하나 깜빡 않고 나보다 선배인 김석진에게 따박따박 대들기 시작했다




" 듣자듣자하니 못들어주겠어서요. 너무 필요이상으로 상처주시는 거 아니에요? "

" ... "

" 그냥, 미안하다 못주겠다 한마디 하면 적절하게 잘 마무리될텐데, 굳이 바락바락 싫다고 별 좋지도 않은 말 다 늘어놓는 게 제 상식에선 이해가 안되서요. "

" 그럼 이해를 하지마. 안하면 되잖아. "



재수없어. 그의 첫마디에 내 속에선여자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재수가 없는 인간이라고 간주되었다.



" 그런 식으로 말하니깐 상처받잖아요. 얘가 선배가 싫다고 욕을 했어요, 아니면 때리려고 겁을 줬어요? 그냥 선배랑 친해지고 싶어서 말 건거잖아요. 저 좋다는 사람한테 왜 그런식으로 상처주지 못해 안달이에요? "

" 이렇게 안하면 못알아들어서 그래. "

" .....뭐라고요? "

" 미안하다 못주겠다 한마디면 잘 마무리가 될 거라고? "



아니. 절대 아니던데? 김석진은 그런 말을 하며, 싸늘한 시선을 남기고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아 진짜, 저게 그냥 가? 빡돌아서 김석진의 팔을 붙잡았다. 저기요. 그때,고개를 돌린 김석진이 인상을 팍 구기며 내 손을 힘껏 뿌리쳤다. 뭐야, 저 눈빛. 나는 김석진의 눈 속에서 쎄함을 감지했다. 기분이 나빴다. 손 한번 잡았다고. 저건 흡사 벌레보는듯한 눈빛이었다.




[김석진] 무로맨틱 로맨스 01 | 인스티즈

" 함부로 손 대지 마. "


할 말이 없어져서 가만히 쏘아보기만 하는데, 김석진이 먼저 나를 피해 화장실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저렇게 대놓고 싸가지 없는 사람은 너무 오랜만에 봐서 3월인데도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여주야, 왜 그랬어. 수미가 여전히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너는, 괜찮아? 내 물음에 수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근데... 학과 사람들한텐 말하지 말아주라. 응? 애원하는 말에 별 걱정을 다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나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애였다.


" 그럴 일 없어. 먼저 들어가. 난 담타 좀. "










수미를 보내고 골목 사이로 들어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 하고 숨을 내쉬자 희뿌연 연기가 공기중으로 흩날렸다. 그리고 김석진이 했던 말이 함께 떠올랐다.미안하다 못주겠다 한마디면 잘 마무리가 될 거라고? 아니. 절대 아니던데?​ 사실 그 말이 어느정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해봐도, 그동안 연락처를 달라며 쫓아온 사람들의 행적을 보면 일정한 선에서 마무리가 된 적이 드물었다. 열 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 그런 말은 대체 누가 만든 건지. 쓸데없이 마른 장작에 불을 지피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아마, 그 선배도 정말 그런 걸 많이 겪었나보다 싶었다. 그러기도 잠시, 왜 갑자기 쓸데없이 그 선배가 겪었을 모르는 일까지 상상하며 걱정해야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연기를 빨아들이느라 기분이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는데,인상은 찡그려졌다.


그리고, 반대편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는 또 하나의 인형(形)이 보이자, 숨을 멈추고 그곳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김석진이었다.


" ... 후. "

" ... "


팔자좋던 얼굴에 근심걱정이 가득해보였다. 세상 모든 잡생각들을 내보내려는듯, 순한 입술에서 뿜어져 나오는연기들은 그의 표정을 가려낼 정도로 방대했다. 사람 속은 모르는 거라더니. 그 순간 확신했다. 저 선배도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그리고 역으로 그런 발상이 들기 시작했다. 나와 닮은 고민에, 닮은 성향. 비슷한 모습을 하고서 담배를 피우는 우리 둘은 확실히 정상인 사람들 속에서 비정상의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잖아? 어느새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김석진의 앞으로 또 한걸음 다가가고 있었다.



" 또 뭔데. "



고개를 들어올린 김석진이 나를 발견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 어지간히 싫어하시나봐요. 여자. "

" ... "

" 닿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뻑뻑 씻어댄 걸 보면. "



나의 시선이 김석진의 팔에 머물렀다. 아까 내가 손뻗어 붙잡았던 위치였다. 옷이 젖을 이유가 없을텐데, 물로 흥건히 젖어있는 걸 보니, 아까 화장실에 간 이유가 이거였구나 싶었다. 김석진은 그 순간까지 말이 없었다. 그저 어쩌라고 라는 식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부정은 안하는 거 보니깐, 여자 싫어한다는 말이 그저 소문은 아닌가보다 했다.



" 제 별명도 우리 과에서 고자로 통하거든요. 남자에 관심 없다고. "

" ... "

" 거짓말 아니에요. 전 남자든, 여자든 봐도 아무런 생각이 안들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랬고."

" 그래서? "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김석진이 내 말을 잠자코 듣고있다가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 입에서 아직 가시지 않은 담배 연기들이 말할 때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 저랑 사귀어요. "

" 뭐? "



예상대로 아주 구겨진 김석진의 표정이었다. 순간 못들을 걸 들었다는 듯, 의심하며 반문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 괜찮은 조건 아니에요? 선배는 여자 병적으로 싫어하고, 난 연애에 관심없고. 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서로 연애라는 거에 관심없는 건 피차일반이잖아요? 물론 사귄다고 말만 하는거에요. 가짜로.그런 저희가 사귄다 하면 이제 더 이상 주위에서 귀찮게 하는 일따윈 없을 것 같아서요. "




내 말에 김석진이 물던 담배를 검지사이에 끼워 빼고는 하, 하고 한숨을 지었다. 입김인지, 연기인지도 모를 것들이 피어나왔다.아, 그렇다고 선배가 먼저 오해하진 마세요. 저 진짜 선배한테 아무런 감정 없어요. 굳이 감정 따지자면, 선배가 재수없어서 싫은 쪽이에요.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하는 것 같으니깐, 잽싸게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은 진짜였다. 솔직히 김석진은 내 첫인상에서 단번에 탈락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제안을 한 건, 내 말마따나 정말 괜찮은 조건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김석진과 사귄다고 말하면 더이상 미팅나가라, 남소해준다, 남친 왜없냐 이런 귀찮은 질문에 시달릴 일도 없을테고 저로서는 굉장히 좋은 생각이었다.



" 난 싫은데? "

" 왜요? "

" 내가 왜 이름도 잘 모르는 너랑 사귄다고 연기를 해야해. 그게 훨씬 귀찮은 일 아냐?"



아, 제 이름은 김여주에요. 그 틈에 뻔뻔스레 건넨 내 손을 응시하던 김석진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다시 날 봤다. 맞다. 접촉하는 거 싫어하겠구나. 입맛을 다시며 손을 다시 뒤로 가져왔다.



" 선배도 그런 말 귀찮으신 거 아니에요? 고자냐는 둥, 무슨 문제있냐는 둥. "

" 상관없어. "

" 상관 없으셔서 좋겠네요. 난 아닌데. "



물론 믿지는 않았다. 상관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저렇게 고민 가득한 얼굴로 담배를 피워대? 술자리에서 멀쩡한 정신으로 빡빡 피워대는 놈들을 보면 이젠 단번에 뭔 생각으로 피우는지 눈치껏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그는이 자리가 미치도록 지겨운 거다.



" 생각해준 건 고마운데. "

" 네. "

" 싫어. "



김석진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가게로 발걸음했다. 이건좀, 예상을 빗겨갔는데. 그렇게 어이없는 질문이었나?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지만, 그렇게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었다고 결론이 지어졌다. 좌로보나 우로보나 꽤 괜찮은 조건이었는데...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피하는 김석진을 떠올리며 나는 갑자기 제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평생 입에 올린 적도 없던 사귀자는 고백을 저런 재수없는 선배 앞에서 하게 되다니. 그럴 거라고 꿈도 꾸지 못했다. 그리고, 한 번 생각은 해볼 줄 알았던 김석진이 저렇게 단칼에 거절하니, 더 짜증이 났다.








" 너 그새 왜이렇게 많이 마셨어? "

"웅? 여주다아 헤헤 "


돌아왔더니, 어느새 인사불성이 된 수미가 날 보며 잔뜩 풀린 눈으로 웃었다. 옆에 몰아넣은빈 병을 세어보니 숫자가 꽤 되서 놀랐다. 수미는 안그래도 지금껏 지켜본 결과, 그렇게 술이 센 친구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알쓰에 가까웠지. 안주로 나온 떡볶이에 머리를 박으려고 하는 수미의 얼굴을 간신히 붙잡고, 얘는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보내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안그래도 몇몇 사람들이 귀가하려는지 분주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 수미를 보내야할 것 같았다.



" 아, 진짜 무거워 죽겠네. "


수미의 팔을 한쪽에 끼우고 밖까지 걸어나가는데, 팔이 떨어지는 기분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왜이렇게 다들 술만 먹으면 몸이 무거워질까. 하필 불렀던 택시는 여전히 오지 않아, 근처 편의점 앞에 수미를 앉혀놓았다. 옆에 모여있던 우리과 선배들이 수미 많이 취했네, 하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여주 너도 가려고? 묻는 말에 네. 얘 좀 보내고 나서요. 하고 대답했다. 몇마디 섞다가, 선배의 뒤로 갑자기 보인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김석진이었다.


김석진의 시선이 나를 아주 잠깐 응시했다가, 먼저 피했다. 나도 모르게 콧바람을 흥 불었다. 그래, 얼굴 맞댈 사이는 아니지. 고개를 끄덕이는데, 과 사람들이 저마다 부른 택시가 한꺼번에 우르르 오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호출했던 택시의 번호를 확인하며, 수미의 허리에 손을 감싸고 들어올렸다.


" 어디에 손을 대는 거야!! "


그 순간, 수미가 소리치며 나를 떨어트렸다. 나는 우악스런 수미의 힘에 제대로 밀려 휘청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들어 수미를 올려봤다.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건가? 수미의 표정은 지금 자신이 끔찍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무슨...오늘 다 내가 손만 대면 왜그러는지. 주위에 있던 우리과 사람들도 수미의 억척스런 목소리에 이곳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 야. 이수미. 나야, 김여주. "

" 그래, 수미야. 여주잖아.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

" 그래, 너 김여주우....!!! 내가 모를 줄 알어?! "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게 아니었다. 나를 손가락질 하며 직접 지칭까지 하는 수미를 보며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설마, 하는 감이 번뜩 머리를 세차게 지나갔다.수미는 잔뜩 혀꼬인 말투로 하나둘 말을 꺼냈다. 야, 너! 그동안 내가 의심만 하고 설마 아니겠지 생각했는데! 오늘 하는 거 보니깐... 생각할수록 이건 아닌 것 같아서 말야. 야! 김여주! 너는 몰라도 나는 그런쪽 아니야! 나느은! 나는, 남자 좋아한다고! 내가 김석진 선배한테 가는 거 봤으면 포기해야지, 왜 나를 도와주고 그래?! 왜 은근슬쩍 나 잡냐! 사심 갖고 들러붙지마!난 레즈아니야! 길가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수미의 말은 모두에게 실시간으로 방송되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난 돌덩이처럼 몸이 굳어가는 걸 느꼈다. 자신의 감이 맞았다.아까부터 별, 무슨....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 야, 난 눈깔 없냐? "

" ....뭐라는 거야. "

" 내가 네 말대로 레즈면, 난 눈깔 없냐고. "



일년에 한 번씩은 꼭 이런 일이 터졌다. 이미 무시하기 만렙이 되어있지만, 가끔 여자애들도 괜한 소문을 믿고 자신이 좀만 잘 해주면 지금처럼 오해하고 경멸의 눈으로 쳐다볼 때가 있었다. 나는 그게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내가 동성애자건, 이성애자건, 무성애자건 간에 나도 보는 눈이란 게 있는데. 왜 나서서 착각을 할까.이쯤 되면 진짜 질린다.




" 내가 남자여도, 너랑은 안 사귀어. "

" ... "

" 친구라고 생각해서 잘해준 건데,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하게 됐네. 근데 너도 그렇게 쉽게 착각하지마. 기분 개같으니깐."




택시번호를 확인한 내가유유히 수미 앞을 지나쳐 택시 안으로 들어갔다. 또 한 명의 동성친구를 이렇게 잃었다.










무로맨틱 로맨스










​역시 난, 아무래도 김석진을 다시 꼬드겨야겠다. 어젯밤에 왜그랬지, 하고잠깐 했던 후회가 쏙 들어가는 중이다.





" 응? 누님. 제 말 듣고 있어요? "

" ...어. "





복학했던 건 김석진 뿐만이 아니었는지, 어느새 학식을 먹는 내 앞에 앉아서 밥 먹는 내내 코로 들어가는지 구분도 못하게 쫑알쫑알 대고 있는 복학한 후배였다. 나를 알아보고는, 먼저 친근하게 인사한 것 까진 좋았는데. 내가 좋댄다. 그것도 밥상머리 앞에 앉아서. 살다 살다 학식 먹다가 고백하는 애는 처음 봤다.





" 진짜 어제 누님 너무 멋있었어요. 저 반했어요, 진짜. "

" ....그렇냐. "

" 그래서 말인데요,번호 좀 주실 순 없나요? "






상냥하게 웃으며 말하다 꺼내는 본론에 숟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 저기...복학했다던 후배님? 혹시 성함이. "

[김석진] 무로맨틱 로맨스 01 | 인스티즈

" 아, 저는 정 호석입니다! 하핫 "

" 이거 봐. 난 네 이름도 몰라. 네가 휴학했는지도 모르고 있었어. "





나 이렇게 남한테 관심없는 사람이야. 넌 사람은 좋은 것 같으니깐, 이쯤되면 알아먹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구구절절 거절의 말을 읊는데, 정호석이라는 녀석은 여전히 광대를 올린채로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누님 제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아보네요. 역시, 각막도 참하세요! 아부를 잘 떠는 거 보니, 군대 생활 열심히 한 건 맞네, 싶었다.





" 어제 다 봤으면 알 거 아냐? 나 레즈래잖아, 애들이. "

" 에이. 제가 볼 때, 누님 레즈는 백퍼센트 아니에요. "

" 그렇다고 난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 흠.. 그건 그래보여요. "





그래도 뭐, 어때요! 제가 누님이 이성의 눈을 뜰 수 있게 열심히 해볼게요! 당당히 말하는 호석을 보며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이 상황에서 그 말이 순간 떠오를 게 뭐람. 거절해서 좋게 마무리가 안된다는 김석진의 말이. 그건 정확했다. 확실히 늘, 상황은 이렇게 흘러갔다.





" 미안. 포기 해야겠다. 이건 내가 봤을 때 거의 병이거든. "

" 그럼 제가 누님의 치료제가 될 순 없는 건가요? "

" 응. 없어. "





요만큼도. 호석의 눈앞에 콩나물 대가리를 들어올렸다. 흠. 콩나물 대가리 치곤 좀 컸나? 아무렴.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마지막 남은 콩나물을 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없이 뒤도는 내가 호석과 멀어졌을 때, 뒤에서 울부짖는 호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님! 난 포기 안할 거에요! 시발. 진짜. 요즘 20대는 n포세대라며.포기 좀 해.















정호석의 말을 곱씹으며, 아 이건 어떻게 떼어내지 궁리를 하면서 상경대 주위를 걸었다. 그러다,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지나가면서 나를 힐끔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게 어떤 눈빛의 의미인 줄 알고 있었다. 개강총회때 있었던 일 때문이겠지. 소문은 아마 또 엉뚱하게 퍼져있을 것이다. 김여주가 이수미를 좋아해서 까대기를 쳤다가 이수미한테 까였다는, 그런식으로. 수미와 오늘 겹치는 강의가 없는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설사 만난다 해도 배쨀 거 없다는 심정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난 잘못한 거 없어.



" 선배, 밥 같이 먹어요, 네? "

" 저희가 살게요! 오랜만에 오셨으니깐, 주위에 바뀐 맛집들도 많거든요. "



강의실로 가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데, 입구에서부터 모여있는 여자애들이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 우뚝 솟은 김석진의 얼굴이 한껏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밥을 먹자고 졸라대는 여자애들 사이에 끼느라 무척 버거워 보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어제는 잘만 거절했으면서, 왜 지금은 아무런 말도 안한담. 아무말 없이 그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헤집던 석진의 눈과 순간 마주쳤다. 찰나에 시선이 묘하게 얽히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석진과 동기들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이다.



" 미안. 나 이미 먹어서. "

" 아쉽다. 그럼 다음에는 꼭 같이 먹어요 선배! "

" 글쎄. 안될 것 같은데. "



오오.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니, 오오는 무슨. 지 성격대로 잘 말한 것 같은데 뭘. 하지만, 어제보다 한껏 누그러진 말투임은 확실했다. 화장실 앞에서 펼쳤던 대치 장면이 떠올랐다. 좋게 좋게 말하면 안되냐는 나의 말. 분명 그런 게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에 제 영향력이 끼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김석진이 저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꺄르르 웃는 여자애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뭐하냐, 나.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주저 없이 타서 빠르게 닫힘 버튼을 눌렀다.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몇몇개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돌아갔다. 어제 일 때문이겠지. 대충 빈자리에 가방을 끼워 넣고 앉자마자, 소근대는 소리들이 귀에 꽂혔다. 1학년때부터 느낀 건데, 쟤들은 정말 저게 안들릴 거라고 생각해서 수근거리는 걸까? 제 귀가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다 들렸다. 야 김여주다, 김여주. 나를 열렬히 반기는 친구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그냥 차라리 크게 대놓고 말하지, 하고 말이 나올 뻔한 걸 꾹 삼켰다.



탁.


불청객이 찾아왔다. 아까전까지만 해도 나를 발견하고는, 슬금슬금 모두 내 옆자리를 피하던 게 내가 본 10분동안의 강의실 풍경이었다. 그런데 뻔히 내 옆자리에 가방을 놓은 이 미련한 작자는 누구일까. 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가방의 주인을 확인하게 됐다.




[김석진] 무로맨틱 로맨스 01 | 인스티즈

" ... "

" ... "



왜 이 사람일까.


김석진이었다. 저 선배도 이 강의를 듣는구나. 왜 하필. 그런 생각도 잠시,김석진은 나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가방을 둔 자리의 옆으로 나와 한 칸 간격을 띄워 앉았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자리가 다 차있었다. 그럼 그렇지.그래도, 꼴에 여자공포증이라고 간격은 철저히 지키는 구나 싶었다.


얼마만큼이나 지루한 시간이 지나갔을까, 잠시 어딜 갔다온다는 교수님의 말씀과 함께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강의실 내부 사람들은 하릴없이 핸드폰을 하거나, 저마다 수다를 떨었다. 친목이 오가는 사이에 나는 홀로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옆에 있던 김석진마저 그에게 말을 걸으러 온 사람들이 좀 있었으니깐. 그러다 문득 수근대는 속삭임 속에 들리던 내 이름에, 그러고 싶지 않으면서도 멋대로 그쪽을 향해 귀를 쫑긋거렸다.




' 너 어제 개총 못와서 못봤지? 장난아니었어. 듣기로는 김여주가 이수미 허리에 손터치해서 수미가 빡쳐가지고 여주한테 화내고, 쟤도 화내서 지 혼자 택시타고 가버리고. '

' 헐, 진짜? 아 나 왜 어제 알바했냐. 완전 드라마 아님? 아, 갈 걸.'

' 진짜 쩔었다니깐. 이쯤되면 진짜 김여주 불쌍해. 나는 솔직히 동성애자가 뭔 죄인가 싶어.'




하. 웃음이 나온다. 지들끼리 멋대로 판단하고,동정하는 꼬라지 하고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전공책으로 시선을 두었다.




" 니네 조용히 좀 해줄래. 목소리가 좀 커서. "




입가에 고여있던 웃음이 멈춘 건 그때였다. 제 옆에서 들리는 낯설지 않은 목소리. 그것이 방금 내 뒷 얘기를 했던 애들을 향한 말임을 알았을 때, 나는 고개를 들어 옆에 있던 김석진을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정확히 몸을 뒤로 돌려 그 친구들을 가리키며 다소 상냥하게 말하는 김석진이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봤다.뒤에 있던 애들은 잔뜩 당황하며, 아, 죄송해요 하고 말했다. 아마, 저들은 사과하면서도 정말 어이없었을 것이다. 강의실 내부는 자기들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애들이 저런 데시벨로 토크를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우리만? 하고 따질법도 한데, 김석진의 말투는 침도 못뱉을 정도로 다정해서 나조차도 순간 그게 나름의 지적이라는 것도 모를 뻔했다.


사과를 받아낸 김석진이 고개를 돌렸고, 그 사이에 나와 또 한 번 눈이 마주쳤다. 이 선배는 대체 무슨 의중일까.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 뭘 봐.'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빛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떨구고 다시 전공책으로 눈을 돌렸다.













무로맨틱 로맨스








​김석진을 또 마주치게 되는 건 그 일이 있은 후 불과 이틀 뒤였다. 더이상 겹치는 강의도 없었고, 마주치지도 않길래, 조금씩 김석진을 잊고 있었다. 물론 아예 잊는 것은 불가능했다. 김석진은 하루에도 꼬박꼬박 동기들 입 사이에 오르내리는 인물이었으니깐. 언제나 잘생겼다, 라는 말로 시작한다. 하도 옆에서 귀딱지 않게 들으니, 본인은 얼마나 귀찮을 지 감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러다 선배들 입에서 흘러나온 건지, 어느새 김석진이 여자공포증이라는 소문도 차츰 동기들 사이에서도 고개를 내밀기도 했다. 소문이 퍼지는 과정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며, 나는 오늘도 치를 떨었다.

아무튼, 그렇게 내가 김석진과 다시 만나게 된 건 또 이 지긋지긋한 술자리에서였다. 난 나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선배들끼리만 이뤄진 김석진의 복학기념 술자리였고, 내가 나갈 이유는 단 하나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 여주 너도 온다며? 같이 가자. "


쌩하고 내 앞에서 멈춘 차. 그리고어떤 선배가 차창을 열고 대뜸 내게 저렇게 말을 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몰랐다. 그래서 대충 또 별 시덥잖은 오해겠거니 하고 제 갈길을 가려했다.


" 네? 누가 그래요? 저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
" 이상하다. 석진이가 너도 꼭 온다고 했었는데. "


선배의 입에서 김석진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땐, 얘기가 달라지는 거였다. 김석진. 그 선배는 무슨 꿍꿍이길래 그때도 그렇고...

머리가 잔뜩 굴려졌다. 본인의 입도 아닌, 남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니 직접 물을 수도 없고. 이런 것 까지 다 계획한 걸까. 결국 나는 궁금증이 생겨버렸다.

" 아. 맞아요. 저도 가는 거. "
" 그럼 얼른 타. "

대체 무슨 꿍꿍인지 본인 입으로 들어야겠다. 그리고 난 일말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김석진이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는 가능성.












" 말해봐요. 왜 저 부른 거에요? "

술자리에 앉은지 몇 분 안돼서 나왔다. 역시 선배들과 있는 자리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친하다 해도 말이다.아까 나를 차로 태운 선배도 참 단순했다. 어느 후배가 선배들과 있는 자리를 뻔뻔하게 같이 가겠다고 말하나. 담배가 말려서 결국 먼저 나왔다. 나와 꽤 먼 곳에, 남자 선배들 사이에 앉아있던 김석진에게 눈짓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김석진은 내가 담배 한개비를 피운지 얼마 안 돼서 제발로 나왔다. 눈치는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인사 할 거 없이 앞 뒤 다 짜르고 본론만 물었다. 김석진은 담벼락에 기대서 담배를 피는 내 앞에 서서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 생각이 바뀌었어. 네가 말한 제안. "

역시. 김석진의 말에 자연스레 입매가 올라갔다. 그래요? 김석진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생각해볼 만 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하긴. 복학하고, 그 짧은 시간동안 좀 시달린 게 아닐 것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김석진의 맞은 편에 앉아있던 여자 선배 또한 김석진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그 선배도 김석진이 여자를 싫어한다는 것 쯤은 대충 알고 있을 텐데, 김석진이 인간적으로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왜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 말을 걸었을까. 오히려 이성이 아닌 사람으로서 봐도 싸가지 밥말아 먹은 인간이라 가까이 하기 싫은 부류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받아들이기 전에네 계획을 따로 묻고 싶은데."
" 제 계획이요? "


김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잠깐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 사실, 딱히 계획이랄 것도 없었다. 그냥 앞에선 사귄다 대충 둘러대고 뒤에선 쌩까면 되는 거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이 지속되는 걸 보고, 내 뜻을 이미 파악했는지 김석진은 뭐냐는 식으로 나를 쳐다보며 희미하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 뭐, 상관 없어. 차차 정하면 되는 거니깐. "
" 네. 글쵸. "


다 타들어간 담배꽁초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발로 밟아 비벼 껐다. 빨간 불씨가 차츰 사그라들었다. 안펴요? 아까부터 조용했던 김석진에게 넌지시 담배갑을 건넸다.그걸 가만히 보고있던 김석진이 내가 들고있던 담배갑에서 하나를 가져가 입에 물었다. 발소리가 들린 건 바로 다음이었다. 불규칙적인 발걸음이 골목 안까지 다가왔고, 우리는 자연스레 그곳을 향해 시선이 돌려졌다.



" 김석지인... 어? 여주? 둘이 여기서 머해...? "

아까 그 선배다. 석진의 맞은 편에 앉아있던 여자 선배. 어떻게 알고 이 곳까지 왔는지, 이미 정신이 알코올에 반쯤 날아간 선배는 눈을 비비며 우리 둘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그러다 단순히 어리둥절하기만 했던 눈빛이 어느새 의심의 눈초리로 모양을 바꾸기 시작했다. 우리, 지금부터 시작인 거에요?그걸 알아챈 내가 석진에게 조심히 속삭였다. 김석진은 무슨 뜻인지 잠시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입매를 비틀려 올리고 라이터를 켜서 내 담배 위로 불을 붙였다.



" 선배, 불 붙여드릴까요? "


여전히 담배 한개비를 물고 있던 김석진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까치발을 들었다. 석진의 담배 끝에 내가 물던 담뱃불이 옮겨갔다. 처음으로 아주 가까워진 눈을 한 번 마주치다 떨어졌다. 타들어가는 김석진의 하얀 담배. 김석진의 표정이 얼추 봐줄만하게 변했다. 맨날 찡그리기만 하던 눈이 제법 눈에 띌 정도로 커졌으니깐. 여자 선배도 그런 우리 둘을 보고 놀란 건지 도망친지 오래였다.나는 그걸 보면서 마냥 웃었다.



" 왜요? 제 첫번째 계획, 맘에 안들어요? "



그제야 김석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긴다, 너. 낮게 힐난하는 목소리 사이로 희끄무레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김석진] 무로맨틱 로맨스 01 | 인스티즈

" 아니. 좋다고. "




선남선녀가 한 자리에서 담배를 물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 남들이 보면 어쩐지로맨틱한 상황이라고 퍽 오해를 할 수도 있었다. 허나, 그들에겐 지금 이 순간, 로맨틱한 감정 따윈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로맨틱적이었다.






















-


여주는 무로맨틱 에이섹슈얼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로맨틱 끌림을 매우 드물게 느끼거나 아예 경험하지 못하는 인물이고, 석진은 클리셰적으로 많이 다루는 여자공포증 뭐 그런 거에요! 비슷해보이지만, 여주는 사랑을 느끼지 못할 뿐이지, 이성에게 혐오감, 공포감이 느껴지지 않구요, 남녀 모두 공평히 대하겠쥬.. 근데 석진은 여성 한정 공포를 느끼는 거에요. 공포라고 하기엔 석진의 반응이 더 공포같지만..남자친구들과는 잘 지낸답니다 *^^* 문득 이런 둘이 만나면 재밌을 것 같아서 번뜩 생각나서 1화만 끄적끄적.. 대책없이..끄적




첫글과 막글
· [막글] [김석진/정호석] 무로맨틱 로맨스 05  14  5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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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석진] 무로맨틱 로맨스 03  14  10일 전
· [김석진] 무로맨틱 로맨스 02  14  13일 전
· [현재글] [김석진] 무로맨틱 로맨스 01  19  17일 전
· [방탄소년단/김남준] 겨울의 온도 02  6  2년 전
· [방탄소년단/김남준] 겨울의 온도 01  6  2년 전
· [방탄소년단/김남준] 겨울의 온도 P  6  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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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친구 수미가 상처받는게 싫어서 석진한테 쓴소리했는데, 바로 사귀자고 하는 건가요...?
•••답글
집순이
사귀자고 하는 건 진짜 사귀자는 게 아니라 일종의 거래를 뜻해여~ 사귀는 척만 해서 사람들에게 더는 오해 안받고 싶어서요. 수미를 대신해서 화를 내는 장면은 석진이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여주가 쓴소리를 한 게 맞구요! 그러면서 여주는 석진이 진짜 여자를 싫어하는 구나 생각이 들었고 생각해보니깐 자기랑 석진이 사귀면 서로 각자 소문같은 것도 빠르게 줄어들 것 같아서 그런 제안을 홧김에 한 거에요 !!
•••
비회원72.238
와... 이런전개 너무좋은걸요...?

어서 이탄을 가져와두새오 작가님 ㅠㅠ
차가운석진이 매력엄청나다앙 ㅠㅠㅠ

•••답글
비회원245.121
재밌게 잘 봤어요!!!
•••답글
독자2
작가님 스토리구상 진짜 잘하신거 같아요! 빠져들어 봤네여ㅠㅠ 끝날까봐 조마조마 했는데 분량도 아주 좋군여ㅎㅎ 신알신 누르고 갑니다!
•••답글
독자3
헐헐ㅠㅠㅠㅠ진짜 재밌어요 이건 진짜 대작입니다ㅠㅠㅠㅠ다음편이ㅜ너무 궁금해요ㅠㅠㅠ
•••답글
독자4
ㅋㅋ재밌네요
•••답글
독자5
본 순간 느꼈어요 이건 대작이라는 것을...⭐️ 작가님 이런 소재 너무 좋아요ㅠㅠ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넘 궁금하네요ㅠ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둘이 서로 잘 됐으면 좋겠어요
•••답글
독자6
헐...신알신 당장하고 갑니다...
•••답글
독자7
악 신알신하고 갑니다!! 너무 재밌어용ㅠㅠㅠ
•••답글
독자8
신선한 소재의 작품인 것 같아요💜너무 재미있게 봤어요 신알신 하고 갑니다😉
•••답글
독자9
헐 이런거 넘 좋아요 신알신 합니다! 혹시 암호닉 하시면 알려주세요 ㅎ...
•••답글
독자10
와 저 이런 분위기 정말 좋아해요...신알신 누르고 갑니다..
•••답글
독자11
술 먹고 저런말 하는 건 좀 아니다, 그 동안 안좋에 보고있었다는 거 잖아. 석진이랑 여주 사귀는 동안에 좀 생각들 좀 고쳤으면 좋겠다!!!! 작가님 무로맨틱 로맨스라면서요!!!! 그냥 존재자체가 로맨틱로맨틱이야ㅠㅠㅠㅠㅋㅋㅋㅋㅋㅋ처음 보는 건데 너무 재밌어요!!❤️❤️
•••답글
독자12
와 너무재밌는데욬ㅋㅋㅋㅋㅋㅋ보다가 도중에 댓글달러내려왓어요..!!!!!
•••답글
독자13
헉 ㅠㅠㅠ작가님 저는 이제 이 글을 기다리면 되겠네요 ㅠㅠ최고예요 진짜 ㅠㅠㅠㅠㅠ
•••답글
독자14
슼슼 신알신 하고 가용
•••답글
독자15
자까님 필력 엄청나신데요??!! 너무 취향저격 하는 작품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답글
독자16
와 진짜 작가님 첫화부터 엄청난 필력인데요 신알신누르고 갑니닽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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