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초가 독을 품기 위해선 강인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때론 그 목적이 죄 없는 꽃을 죽이기도 하지만 그 꽃은 말이 없다, 아니 말을 할 수 없다. 낮은 위치라면 고개를 조아리고 가련하게 어깨를 떨어야 한다. 그 숙명을 따르며 제 몸에 나무를 꽂아 넣은 사람들은 일제히 말한다.
‘독초를 죽이고 싶어.’
정신이 퍼뜩 들었다. 눈을 뜨고 보인 상처 가득한 책상이 제 색깔로 보이지 않았다. 다급하게 고개를 들자 며칠 전 짧게 자른 구레나룻 밑으로 땀 줄기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내 이목구비 중 하나인 입술이 긴박한 숨을 뱉어내며 침을 삼켰다. 직감적으로 느낀 것은 꿈이 아니라는 것. 습관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짧은 사실을 얻고 싶어서 내가 눈치를 보면 형은 내게 늘 같은 말을 했다.
경수야 당당하게 살아.
손에 있는 볼펜을 꽉 쥐었다. 현재 시각은 오후 9 시, 교실엔 나 말고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가방을 챙기며 자꾸만 닿는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같은 반의 어떤 아이 혹은 베놈치곤 좀 조용한 애 정도로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짙어질수록 손이 빨라졌다. 주둥이를 쫙 벌린 가방이 책만이 아니라 저 시선도 같이 삼켜버렸으면 좋겠다는 내면의 상상이 깊어질수록 마음이 멀리 도망을 갔다. 어차피 무슨 말도 못 할 거면서, 이미 다 채운 지퍼를 힘주어서 단단히 잠그고 어깨에 걸치며 뒷문을 향해 걸었다. 앞꿈치부터 뒤꿈치까지 완벽히 닿게 걷는 강박스러운 발 모양이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형을 닮은 발을 보며 교실을 나가려는데 나를 쳐다만 보던 상대가 기어코 말을 걸어왔다.
“너 자면서 존나 낑낑거리더라.”
개새끼마냥. 자동적으로 돌아간 얼굴이 명찰에 머물렀다. 거친 말과 다른 뽀얀 얼굴 그리고 작은 체구, 지금까지 본 베놈 중에선 외모로만 봤을 때 나와 제일 비슷할 것 같은 얼굴을 가졌다. 변백현, 그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눈이 마주쳤고 얽히는 시선이 두려워서 몸을 돌렸다. 교실에서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심장이 마구 흔들렸다. 이상한 밤, 그 단어로 정의하기엔 난 과하게 들떠있었다. 개새끼마냥.
학교를 나와서 집으로 가는 길은 늘 똑같은 풍경에 똑같은 공기다, 가끔 시커먼 나무들이 흔들거리면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보폭을 조금씩 넓힌다. 곧 무섭다고 여긴 나무의 그림자를 발로 밟고 지나갈 때 이상한 희열을 느끼곤 한다. 허상의 정복감, 그리고 자꾸만 떠오르는 변백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정면을 바라보자 가로등이 깜빡거리다가 환하게 켜졌다. 누군가의 이름이 머릿속에 남는 것은 꽤 오랜만의 일이라 자꾸만 곱씹게 되었다. 손이 아주 예뻤고 하복이 잘 어울렸고 머리카락은 앞머리를 내린 것 같았는데, 변백현의 인상착의를 떠올리며 빠르게 골목을 돌았다. 그리고 금방 깨달은 점은 앞을 바라보면서 걸을 때 닿는 공기는 조금 달다는 사실이었다.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내딛는 발에 속도가 붙질 않았다. 빨리 움직이면 될 것을 이상하게 팽팽한 공기가 내 발을 꽉 잡고 있었다. 그렇게 금방이라도 도달할 것만 같은 방으로 들어가려는 걸음이 형의 목소리에 멈추고 말았다. 현재 시각은 9 시 33 분, 문고리를 잡으려는 손에 힘이 풀렸다.
“경수야 지금이 몇 시인 줄 알아? 9 시 33 분이야 네 원래 하교 시간은 5 시고.”
“죄송해요.”
의미도 모를 사과로 텁텁해진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숙였다. 아래로 바라본 형의 발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쉬고 싶은 마음에 형의 단순한 머리를 외면이라도 하고 싶었다. 사춘기라는 이해를 받아야 할 적극적인 변명을 대고 방에 들어가서 자고 싶었다. 형 오늘따라 가방이 무거운 것 같아요. 그 말을 눈으로 전하지만 형은 자신의 방으로 내 손목을 잡아당길 뿐이었다. 다른 손으로 서랍을 뒤지면서.
다시 그 문 앞에 서서 심판을 받는 기분이었다. 언제고 찾아오는 시간이 익숙할 법도 한데 몸이 싫다고 밀어내는 건 좀처럼 멎을 생각이 없다. 형의 팔을 살짝 쥐고 질문을 던졌다. 단순히 내 떨림을 막기 위한 환기용 질문이었다.
"형, 형한테 나는...”
“경수야 어제처럼 손톱 세우지 마.”
질문에 답도 아닌 말을 던지고 형은 서랍을 뒤적거렸다.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어릴 적 형이 알려준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달궈지는 얼굴이 볼품없을 것 같아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물건을 찾은 형이 우뚝 서 있는 내 손을 잡아당겼다. 그럼 난 그 방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생각한다. 누가 날 꺼내 줬으면 좋겠다고
매번 보는 형의 천장이 익숙하다. 내 방의 천장은 어떻게 생겼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잠버릇도 없이 편안하게 잠이 든 형을 내려다보다가 이마를 살짝 만지작거렸다. 형이 좋은 꿈을 꿨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야 하지만 형의 뇌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 형은 아마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사람일 거야 제일 추악하고 못생긴 사람.
더 볼 마음이 없어서 몸을 돌리고 이불을 목 바로 밑까지 당겼다. 벌써 오른쪽 팔이 간질간질한 걸 보면 내일은 어깨까지 올라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는 비밀. 오른쪽 팔을 다른 손으로 꾹 눌러 잡으면서 눈을 감았다, 꽃잎들이 내 전신을 휘감는 상상을 하면서.
알람이 형의 방을 채우기 전 먼저 일어나서 머리를 정돈했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침대에 떨어진 동복을 챙겨서 입었다. 흰 와이셔츠에 살이 비치지 않도록 안에 긴 팔까지 챙겨서 입고 몇 번이나 거울을 확인하다가 집을 나섰다. 거울에 비친 나는 갑갑한 동복 속에 갇힌 것 같았다.
밖을 나와서 직접 닿는 공기가 더웠다. 어제와는 확실히 다른 후덥지근한 공기에 일찍 일어난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웠다. 그리고 며칠 전 전국에 폭염이 온다고 가슴을 노출한 아나운서가 막대기를 들고 휘두르던 것이 떠올랐다. 옷을 그렇게 입으니까 내용보다 가슴이 더 먼저 떠오르지.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학교에 도착했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마냥 점점 걸음이 빨라져서 교실 앞에 섰을 때 나는 헉헉거리는 숨을 뱉고 있었다. 물론 아무도 없겠다는 확실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리 봐, 진짜 개새끼네?”
변백현, 그 이름이 다시금 떠올랐다. 현재 시각은 오전 7 시 35 분 느긋하게 와도 될 시점에 당황스럽게도 얼굴을 마주한 건 내가 곱씹고 곱씹었던 인물이었다. 어제는 굳게 닿았던 가방의 지퍼를 열고 내용물을 하나씩 꺼내면서 난 어쩐지 시선을 의식하게 되었다. 책상에 내릴 때 손은 어떻게 보일까 고개를 너무 숙이면 눈이 안 보일까. 그러다가 난 가방의 바닥에 손에 닿는 걸 느끼고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교과서 두 권을 꺼내서 넣으려고 했는데 가방에 있는 모든 것을 꺼낸 후였다. 책상에 수북이 쌓인 짐 중에 필요 없는 것을 다시 가방에 밀어 넣으면서 시선을 변백현에게 돌렸다. 눈이 다시 마주쳤고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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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맞추고 있으니 변백현이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나서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훅 끼치는 향기가 그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고 똑바로 눈을 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이 꽤 웃기는지 헛웃음을 짓던 변백현은 내 턱을 잡아 쥐었다. 자연스레 눈이 다시 맞춰졌고 우습게도 그 눈은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입덧을 시작할 것 같았다. 내가 피스틸이었다면 변백현의 꽃나무를 등에 활짝 피웠겠지
"갖고 싶어."
"뭘?"
멍하니 서 있다가 나도 모르게 본심이 나왔다. 상위 4% 베놈이 피스틸이 되길 바란다는 말은 베놈에게 있어 전례 없는 수치스러운 기록이 될 것 같아서 입을 다시 닫아버렸다. 변백현의 나무를 등에 새기고 싶다는 충동적인 생각을 한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어색함에 시선 둘 곳이 없어서 변백현의 어깨를 노려보았다. 변백현은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턱을 쥔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더 가까이, 뒷머리를 누르는 손이 마음을 덮쳐왔다.
“같은 베놈이랑 섹스를 하고 싶다는 년이 세상에 있을 줄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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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의 두근거림이 더한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변백현이 내쉬고 있는 숨을 전부 모아서 혼자 추억하며 은밀한 짓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들켜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이 머리도 정상이 아니었다. 아니 난 가방을 열면서 변백현을 의식할 때부터 정상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대놓고 다리를 벌리며 엉덩이를 흔들지도 않았는데 내가 꼭 그런 짓을 한 것 같았다.
“여기.”
그리고 여기. 내 머리에 손을 올린 변백현이 이내 내 가슴 정중앙에 손을 올렸다. 타인의 손이 이렇게 기분 좋았던 적이 있었을까, 내 세상은 오직 나와 형 둘이었다. 둘만 서로를 끌어안으며 상처를 핥아주면 되는 그런 작은 세상. 침을 꿀꺽 삼켰다. 더 가까이 오는 얼굴이 내 볼을 스치고 귀로 향했다.
“난 여기에도 꽃을 심을 수 있어.”
아침이어서 더욱 낮게 실린 목소리, 촉촉이 젖은 혀가 내 귓바퀴를 핥았다. 귀에서 들리는 추접스러운 소리가 끊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간지러움을 동반한 설렘이 혓바닥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를 안 좋아할 수 없을걸, 그렇게 새겨넣는 것처럼 변백현의 혀는 내 귀를 농락했다.
어서 써서 얼른 가지고 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