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박카스
W. 리플(Riffle)
▶ 박카스 네 병 : 당신은 나의 자양강장제
(부제:도경수나 변백현이나, 도찐개찐)
어푸푸- 무슨 꿈을 그렇게 험하게 꾸는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오물거리며 잠꼬대를 하는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찹쌀떡같은 볼을 만져보다가, 한 품에 안기는 어깨를 끌어당겨 목에 얼굴을 묻어보고.
목덜미에서 달짝지근한 설탕의 향이 밀려온다. 여름의 밤은 꽤나 눅눅하고 덥지만. 아, 여기가 낙원인가 싶다.
잠에 취한 네가 너무 예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못하게 하는 네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붕 뜬다.
동그란 콧망울을 슬쩍 만져보다가 소리 없는 웃음이 흩어진다. 이 밤이 끝나지 않았으면 조심스레 빌어본다.
이대로 물거품이 되어도 괜찮다.
너와 함께 있는 곳이 어디든 천국일테니.
* * *
종강이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나서 완벽한 여름이 찾아오기 전, 전국의 모든 대학생들은 방학을 맞이했다.
백현과 경수 역시 그럭저럭 기말고사를 마치고선 두 달 여간의 휴가를 받은 셈이었다.
어디로 놀러갈지 생각도 못했는데. 강의실을 빠져나오던 경수는 금세 울상이 되었다. 시험 때문에 정신없이 공부를 하고 백현과 얘기할 시간도 많이 갖지 못했는데 이렇게 종강이라니. 곧 헤어진다며 백현을 만나러 자신이 내려갈테니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경수를 한심스럽게 쳐다보던 백현이었다.
뭘 내려와, 내려 오긴.
"그냥 여기 있어. 내가 올라올게"
나도 너 보고싶지. 너, 너만 보고싶겠냐! 괜히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치는 백현을 흐뭇하게 쳐다보다가 경수는 와락 끌어안았다. 아아, 귀여운 새끼.
하지만 괜한 걱정과는 달리 백현은 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사실 미리 전달 받지 못한 공지에 날벼락을 맞은 탓도 있었다.
기숙사에서 짐을 빼라는 걸 왜 진작 듣지 못한 건지. 밤중에 아이스크림을 퍼 먹다가 내일까지 짐을 빼야 한다는 찬열의 말에 백현은 멍청하게 앉아만 있었다.
덕분에 낑낑거리며 새벽 내내 짐을 바리바리 쌌다. 백현은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손톱만 잘근잘근 물었다.
내려가긴 내려갈테데. 예정보다 앞당겨진 터라 당혹감이 밀려왔다.
지금 당장 집에 내려가기는 좀 그렇고, 경수도 볼 겸 여기에 계속 있고 싶고. 백현은 입을 잔뜩 내민 채 고민을 하다가 다짜고짜 경수의 집에 찾아갔다.
붕 뜬 머리를 한 채 가물가물 감기는 눈이 번쩍 뜨이고 경수는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전화도 없이 무슨 일이야? 이 짐은 다 뭐고!
"경수야아…"
기숙사에서 쫓겨났다며, 그냥 여기에 있을 거라며 징징대는 모습에 경수는 싫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싫다기 보단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경수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래 그럼 여기 있어 라며 백현을 토닥였다. 볼을 부비는 경수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는 것은 비밀 아닌 비밀.
"어, 엄마. 나 그냥 친구 집에 있을게. 응? 올라 온다고? 아냐, 아냐. 제일 친한 친구 집이지"
경수의 눈치를 보며 전화를 거는 모습까지 눈에 담다가 경수는 결국 백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은 조금만 참았다가. 더한 건, 이따가 몰아서 해야지.
* * *
말아올라간 옷깃을 잡아내리며 연거푸 한숨을 내쉬는 백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장마라면서, 비는 커녕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는데.
뭐든 극단적인 것은 질색이라며 손을 내젓던 것과 비례하여, 백현은 오늘도 쏟아지는 열기에 맥을 못추린 채 그늘 밑에 주저 앉았다.
"데이트고 나발이고. 불 다 꺼놓고서 선풍기 앞에 눕고 싶다아…"
덜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를 앞에 진짜로 놓아 둔 것처럼 백현은 아아, 우는 소리를 냈다.
이게 다 도경수 때문이야. 목에 축축하게 묻어나는 땀을 닦으며 백현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한낮의 기온이 34도나 된다던 기상캐스터 누나의 목소리는 살 발라 먹었나, 그렇게나 놀러가자며 경수는 어제부터 백현의 팔을 흔들어댔다.
더위를 뚫고 돌아다니는 것을 이겨낼 자신이 없다며 그렇게나 반대를 했건만, 잔뜩 풀이 죽어 그럼 집 앞에라도 나가자며 조르길래 마지못해 뒤따라 나온 제 탓이 컸다.
시원한 걸 사온다던 경수는 삼십분이 훌쩍 넘었는데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나는 더위 먹은 개처럼 혀를 내밀고 헥헥 거리고 있는데.
그냥 집에 들어갈까도 생각했지만 백현은 경수를 생각하며 끓어오르는 속을 눌렀다. 다들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지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공원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렇게나 더운데. 곧 경수가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오겠지! 손부채질이 더위를 따라잡지 못한 탓에 등 뒤에는 땀이 흥건했다. 탁탁, 옷자락을 들추는 소리가 끈적한 살과 맞닿았다.
…미련하게 이게 무슨 짓이람. 침에 번들거리는 입술을 훔치고 백현은 다리를 쭉 폈다. 날은 진짜 좋네.
"백현아!"
저만치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득달같이 알아듣고선 백현은 고개를 빼들었다. 어어, 여기!
땀을 비적비적 흘리며 아이스크림을 들고 뛰어오는 모습이 어찌나 예뻐보이는지. 백현은 저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렸다.
풀밭에 털썩 주저앉아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는 경수를 빤히 쳐다보다가 백현은 가까이 붙어 앉았다.
"많이 덥지이…"
답지 않게 말꼬리를 늘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주는 백현의 행동에 경수는 입이 귀에 걸린 것 마냥 웃어보였다.
바로 이 순간이 감덩입니다. 십분은 넘게 편의점에 뛰어갔다온 보람이 여기 있구만. 봉지를 벗겨내 아이스크림을 얼른 입에 집어넣는 모습이 마냥 좋았다.
평소에 해주지도 않던 애교까지 해주고. 아무리 더워봤자 여기가 해수욕장이고 여기가 피서지지, 뭐!
경수는 제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이 녹는 것도 모르고 백현을 쳐다봤다. 더위 먹고 정신 나갔냐며 백현에게 실컷 잔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백현은 유독 표현에 서툴렀다. 경수가 지지 않겠다는 듯이 어르고 달랠 때면 그제서야 얼굴을 붉히며 애교 아닌 애교를 던져주기는 했지만.
경수는 그래도 좋았다. 열에 한번 정도였지만,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것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장족의 발전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뜻대로만 해주면 그저 좋아서 백현을 보며 실실 웃었다.
깨가 쏟아지는 연애는 아니지만 힘이 나는 자양강장제 같은 연애랄까.
그렇다고 저가 먼저 표현을 하는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하거나, 섭섭하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백현아. 자기야"
"으아, 징그럽게 왜 그래. 너 처음에는 그러지도 않았는데 되게 능글 맞아졌어"
박찬열 때문인가봐. 멍청한 거랑 어울리면 다 똑같아 진다더만, 꼭 그 꼴이잖아.
경수는 백현을 밉지 않게 노려보았다. 그러다가도 웃음이 터져나왔다.
미운 말을 해도 좋기만 한데 어떡한담.
백현도 알게 모르게 고민이 많았다. 경수는 표현하고 싶은 대로 어떻게든 표현하는 성격이라 별 거 아니라 생각을 하겠지만 백현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게 애교든, 혀 짧은 소리든, 뭐든. 서로를 향하는 마음의 무게는 같은데 표현의 차이 때문에 혹시나 경수가 오해를 할까 조마조마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도 백현이 용기를 내볼 수 있는 것은 저가 하는 것은 뭐든 좋다며 항상 말을 해주는 경수 덕분이었다.
고마운 마음도 컸다. 낯가림도 심하고 쑥쓰럼도 많이 타는 백현을 받아주는 성격은 많지 않다 생각해왔는데.
경수에게 한정되어 무심하기만한 자신도 애처럼 변해버리고 마는 탓에 혹시나 싶은 것도 있었다.
세심하게 잘 챙겨주고 기념일이든 스케줄이든 자신보다 더 잘 아는 경수에게 의지해 일곱살 떼쟁이가 되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노력을 안하는 건 아니었다. 눈웃음을 한번 쳐보겠다고 남몰래 시도했다가 눈가에 경련이 일어났던 걸 떠올리며 백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긴, 내가 기집애들도 아닌데. 아니 그래도, 표현은 좀 해줘야 할텐데.
"어디에다가 물어볼 곳도 없고"
어떡하지…. 백현은 손가락에 예쁘게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은색빛이 감도는 둥그런 모양새가 참 예뻤다.
한숨이 튀어나왔다. 답이 안 나온다, 답이.
* * *
백현은 생각했다. 경수는 참 결혼을 잘 할것 같아.
백현은 또 생각했다. 경수는 못하는 게 없으니까 최고의 신랑감이 될거야.
백현은 다시 생각했다. 경수가 결혼을 하면 누구랑 할까.
백현은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그게 꼭 내가 되란 법은 없잖아. 심지어 우리는…
할 일도 없이 멍청하게 앉아있다가 덜컥 겁을 먹고서 백현은 주방으로 뛰어들어왔다. 급하게 의자를 빼내 앉으며 애타게 경수를 불렀다.
"됴, 됴, 경수야, 경수야!"
왜에-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대답처럼 들려오고 백현은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탁탁, 칼질을 끝낸 경수의 손이 흩어져있던 채소를 쓸어모아 작은 볼에 넣었다.
보글보글 끓는 냄비 안에서는 된장찌개의 고소한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백현은 잠시 하려던 말을 멈추고 경수를 쳐다보았다.
방학동안 경수의 자취방에서 눌러 앉아있기로 한 뒤로부터, 늘 밥때가 되면 이렇게 앉아 요리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했다.
경수는 요리를 참 잘했다. 밥도 고슬고슬하게 잘 지었고 국의 간도 잘 맞췄다. 심지어 나물을 무쳐 소담스런 접시에 내오기도 했다.
백현은 숟가락을 쭉쭉 빨며 경수의 동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크지 않은 주방에 들어가 가스레인지와 싱크대를 오가는 게 꽤나 익숙해보였다.
다리를 흔들며 등을 쳐다보다가 밥그릇을 툭툭 쳤다. 경수야. 중얼거림이 크지 않은 소란이 일어나는 주방에 던져졌다.
너는 못하는 게 뭘까.
"요리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나랑 다 반대잖아. 백현은 불만스럽게 말을 툭툭 던졌다. 채소를 씻어내려가는 손길이 점점 느려지고 경수를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식탁 앞에 앉아 혼잣말인지 뭔지, 밥을 달라 시위하는 아이처럼 숟가락을 꼭 쥐고서 앉아있는 백현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엄마와 아빠의 역할이 뒤바뀐 것 같기는 하지만. 경수는 서둘러 물이 흐르고 있는 수도꼭지를 잠그고서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많이 기른 머리를 옆으로 넘기고서 서글서글하게 웃는 모습이 앞에 드리우자 백현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힝, 뭐가 그렇게 또 마음에 안 드는지 입은 댓발이나 나온 채였다.
"요 입은 왜 튀어나온 거야"
응? 백현이 왜 심통이 이렇게나 났어. 고개를 숙여 맞닿은 까만 눈동자의 빛이 짙었다. 경수는 백현의 하얀 목덜미를 가만히 쓸어주었다.
기분이 좋은 지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백현은 배시시 웃어보였다. 왠지 모르게 상기된 표정이었다.
"나, 밥 잘 먹으면 예뻐해줄꺼야?"
"어?"
백현에게선 좀처럼 듣기 힘든 목소리라 경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공에 떠있는 손바닥에 볼을 부비는 모습을 보며 확, 얼굴에 열이 몰렸다.
손바닥에 닿는 말랑거리는 촉감에 백현의 볼을 저도 모르게 만지고 있었지만 경수는 도통 속내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수야 나는 너가 너무 좋아"
"어, 어어"
"그니까"
내가 표현을 잘 못한다고 해서 섭섭해 하거나 그러지 마, 알았지? 잘 나가다가 어물쩡 어물쩡 말을 얼버무리는 백현의 모습을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삐익, 끓어오르는 지 닫아두었던 냄비의 뚜껑이 달싹거리는 소리가 가득이었다.
아, 얘를 진짜 어떡하지. 경수는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백현의 뒷통수를 끌어다가 마구 부볐다. 으으! 야!!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배에 울렸지만 경수는 자꾸는 지어지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백현아"
"왜!"
나도 네가 너무 좋아. 돌이킬 수도 없을만큼 너를 좋아해.
* * *
매일매일 깨가 쏟아지는 연애가 아니면 어떤가.
이렇게나 힘이 나는, 박카스 같은 연애를 하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