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없지만 괜찮아
w.1억
그리가 집 앞에 놀이터 앞에 서서 괜히 고개 숙인 채로 손장난을 하고 있었고..
저 멀리 그리를 보고선 차를 세우고서 차에서 내린 재욱이 그리에게 다가간다.
저 멀리 그리가 재욱을 보고 웃으면, 재욱은 따라 웃지도 못한 채 울컥한 표정을 하며 그리의 앞에 선다.
재욱이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재욱을 올려다보면, 재욱은 그런 그리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한 채 입을 천천히 연다.
"…그때 일은 내가 오해했어."
"……."
"미안해. 이렇게.. 미안하단 한마디로 네가 날 용서할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더 괴로웠을 거잖아."
"……,"
"그래도 다행이다. 이제라도.. 이렇게 알게 돼서.."
"……."
분명 만나면 할 말이 많았던 둘은 서로 마주치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재욱의 말에 그리가 눈을 크게 뜬 채로 재욱을 보았다.
"정말로.. 날 좋아했어?"
"…응."
"……."
"그때 말했잖아. 전학 온 첫날부터 널 좋아했다고. 한순간도 너를 안 좋아했던 적은 없었어."
"…나도. 너와 함께 있었던.."
"……."
"모든 순간이 진심이었어. 내가.. 그렇게 너한테 못 되게 말하고 나서.. 얼마나 미안했는데. 나 때문에 네가 아픈 것 같고.. 나 때문에 가버린 것 같고."
"……"
"그래서.. 그래서 널 찾아갔는데. 네가 살던 곳은 빈집이 됐고."
"……."
"사과할 수가 없었어. 그리고 널 5년만에 만났을 때는.."
"…나 괜찮아."
"……."
"나 괜찮으니까. 이제 편하게 대해줘."
"……"
"너도 내가 엄청 미웠을 거 아니야. 그런 것도 모르고 내가 무작정 너만 미워했어. 자꾸 틱틱거려서 미안해.
너의 입장으로 보면 내가 너무 이해가 가지 않았을 건데.."
"……."
"울어??"
"……."
"재욱아...? 진짜 울어??"
"…너무 미안해서."
"아니야.. 난 정말 괜찮아. 울지 마..!"
"……."
재욱이 한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숨죽여 울었고.. 그리가 울지 말라니까- 하며 덩달아 같이 운다.
둘은 어색하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가만히 허공만 보던 둘.. 결국엔 그리가 먼저 입을 연다.
"완전..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울보네."
"…지는."
"난 뭐 그렇다쳐도.. 네가 우니까 신기해서. 너도 울 줄 아는구나."
"…참나."
"너는.."
"…어?"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
재욱이 고민하는 듯 망설이다가 그리를 바라보며 말한다.
"처음 전학 온 날에."
"진짜?"
"담임이 너 챙겨달라고 할 때는 귀찮고 싫었는데."
"…아."
"끝나고 너 데려다주면서 너네집에 갔잖아. 그때부터."
"왜??"
"피부도 하얗고 머리는 까맣고.. 웃지도 않았던 무서운 애가. 그때 처음 웃어줬잖아. 그때부터 네가 좋았어."
"…아."
"넌 내가 왜 좋냐."
"키도 크고 잘생겼잖아. 인기도 많았고."
"그게 다야?"
"그리고.. 싸가지 없지만 괜찮아."
"…뭐? 싸가지?"
"응 ㅎㅎ. 너 싸가지 없는 건 5년 전에도 유명했고, 지금도 회사에서 유명하던데?"
"…ㅋㅋㅋ너만 괜찮으면 됐지."
"ㅎㅎ응. 그게 매력이야!"
"넌 착한 바보같은데. 바보는 아닌 거. 그게 좋더라."
"무슨 소리야 그게?"
"착한 바보는 맞는데. 할 말은 꼭 다 하고.. 싫은 건 싫다하고, 좋은 건 좋다 하고.. 그게 좋다고."
재욱이 웃자, 그리고 웃어보였다. 둘은 그때의 서로를 떠올렸다.
무심하게 재욱이 '아버지한텐 갔다왔어?'라고 물으면 그리가 '무슨 아버지?'하다가도 그걸 기억하냐며 입을 틀어막는다.
그리고 또 한참 그때의 얘기를 하고 있었을까. 그리가 입을 연다.
"동희랑은.. 이제 끝인 거야?"
"너 가고 끝이었다니까. 끝이고 뭐고 할 게 없어."
"…아."
"걔도 찝찝했겠지. 그래서 나한테 아는 척 못 했겠지. 이해는 해. 근데.. 그때 우리를 갈라놓은 게 너무 싫을 뿐이야."
"…응."
"이그리."
"응?"
그리가 놀란 듯 재욱을 보았고, 재욱은 그리를 바라보다가 곧 작게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어떤데."
"뭐가?"
"나. 지금 애인한테 밀리나? 많이?"
"……."
"계속 좋아해도 되지?"
"……."
"너랑 만나고 싶은데. 계속 너한테 거슬려도 되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
"너무 복잡해."
그리가 고개를 숙이면.. 재욱이 말 없이 그리를 바라보다 다른 곳을 본다.
내가 널 좋아한다는 이유로 너의 행복을 빼앗을 수는 없다. 그래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게 제일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이기적이게 생각하면 기분은 좋았다. 너도 날 좋아했고, 지금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춥다. 가자. 데려다줄게."
너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응? 아무 생각도.."
"난 그리씨 표정만 보면 다 알겠던데. 지금 다른 생각.. 하는 것 같은데 ㅎㅎ."
"……."
"카페 가려고 했는데. 날씨도 안 좋고 하니까.. 그냥 집에 갈까요? 집에서 영화나 봐요, 우리."
"…네! 그래요."
효섭과 그리는 어색했다. 효섭은 그리를 보면 재욱이 떠올라 괴롭고, 그리는 재욱을 떠올리면 효섭이 생각나 미치겠고..
효섭의 집에 도착했을까. 둘은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다. 하지만 그리는 다른 생각을 하느라 다른 곳을 보고 있고.. 효섭은 그런 그리를 힐끔 본다.
"재미 없어요?"
"아뇨. 재밌는데요..!"
"그리씨가 자꾸 다른 생각만 하니까. 나까지 자꾸 다른 생각 하게 되잖아요."
"……."
"그때 봤던 그 친구랑 무슨 일 있는 거 맞죠."
"…네."
그리는 거짓말을 잘 못한다. 그리가 솔직하게 대답을 하면, 효섭이 기다렸다는 듯 바로 입을 연다.
"말해줘요. 대충 나도 그 친구가 그리씨 좋아하는 거 알고 있고.."
"……."
"말하기 힘들면.. 다음에 얘기 할까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뭐가 미안해. 난 그리씨 이해 한다니까."
효섭은 그리를 이해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 까지 이해를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붙잡고 있는 내가 이상한 걸까.
"하이! 인턴! 오늘 늦게 왔네???"
갑자기 뒤에서 우다다 달려와 그리에게 어깨동무를 하는 강준에 놀란 그리가 깊게 숨을 몰아쉬었고.
강준이 왜 이래..? 하며 당황하자, 곧 아니라며 고개를 저으며 웃는다.
점심시간이 되었을까, 해인,강준,소희,그리가 다같이 사무실에서 나왔을까.. 사무실 앞에서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기대어 서있던 재욱에 소희가 '깜짝..!'하며 뒷걸음질을 친다.
그럼 재욱은 그런 소희가 놀라던 말던 그리를 보며 말한다.
"이그리 밥 같이 먹자."
그 말에 놀란 건 그리가 아니었다.
"에? 그리..랑 너랑...? 갑자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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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