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은 무슨 일인지 밖에서 자꾸만 탄소를 피했다. 알게 모르게 예전과는 다른 정국의 태도에
걱정만 늘어가는 탄소였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미지와 정국은 같이 있지 않는다는 거다.
미지가 아무리 정국에게 말을 걸고 애교를 부려도 정국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탄소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거다. 집에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주말이면 정국은
얼마 남지 않은 대회 때문에 체육관에 가서 집에 없었고, 그 외에 등하교 시간도
조금씩 달라져 마주칠 일도 없었다.
"야 너 계속 이렇게 쳐져서 있을 거야?"
"몰라"
"김탄소 답답해 진짜 그냥 가서 불어 좋아한다고 오빠 때문에 힘드니까 정확히 선이라도 그어달라고"
"곧 대회야 힘들게 하기 싫어"
어휴, 저 답답이. 수정이는 가슴을 치며 교실을 나섰고, 탄소는 나가는 수정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언제 잠들었는지 눈을 떠보니 5교시 수업중이였고, 펜을 잡으려 뻗은 손에 차가운 게 닿았다.
그리고 책을 꺼내려던 손에는 부스럭 소리가 나며 봉지가 닿였다. 음료수와 빵이였다.
탄소는 짝인 수정이를 쳐다봤고, 수정이는 누군지 안 가리켜줘 메롱 하며 탄소를 약올렸다.
네가 샀지? 고마워 신경 안 써줘도 되는데...... 탄소의 말에 고개를 절래절래 저은 수정이였다.
"너 야자 할 거야?"
"아니"
"그럼 우리 학원 가자 춤 가리쳐줄게 기분 안 좋을 땐 땀이라도 흘려야지"
수정의 손에 이끌려 가던 탄소는 정국의 뒷모습에 잠시 멈칫했다. 수정은 멈춘 탄소의 발걸음에
의아해하며 탄소의 시선을 쫓았고, 그 끝엔 정국이 있었다. 탄소의 머리를 쥐어박은 수정이
야 가서 말을 걸어 여기서 이러지 말고 하면서 소리쳤고, 그 덕에 정국은 뒤를 돌아보았다.
탄소는 최대한 밝은 척 인사를 했고, 정국이는 웃으며 손을 한 번 흔들어주곤 곧장 뒤돌아서 가버렸다.
"밥 먹었냐고 수업 재밌게 들었냐고 한번이라도 물어봐주지"
"어휴 진짜 답답해 죽겠다"
"김탄소 생각을 해봐 내가 봤을 때 예전엔 쌍방으로 치댔어 엄청나게 그런데 항상 먼저 말 걸고 얘기한 건 선배였어
넌 그거 못하겠어? 선배가 하던 것처럼 먼저 말 걸고 먼저 묻고 못하겠냐고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는거야 그렇게 보고 싶고 못참겠으면 얘기를 해 얘기를"
"아 진짜 답답해 둘 다 뭐하는 거야 진짜 너 현아언니한테 가 지금 동아리실에 있을 거니까 얘기 듣고
연락하던지 집에 가던지 나 늦어서 먼저 가니까 꼭 동아리실로 가 알겠지?"
수정이의 당부를 들은 탄소가 발걸음을 돌려 동아리실로 향했다. 동아리실 문을 열자 현아가 누워서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고, 탄소를 보자 마자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탄소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현아 옆에 앉았고,
현아는 애써 분위기를 풀려 웃으며 탄소에게 말했다.
"그래서 언니한테 연애상담 받으러 오셨죠?"
"왜 대답을 못 해"
"연애......"
"안 사겨도 남녀관계 상담은 다 연애상담인거야"
탄소는 실없이 웃었고 현아는 그런 탄소를 보며 웃었지? 웃으니까 보기 좋잖아 하면서
탄소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문득 탄소는 정국이 생각났고, 피식 웃음이 났다.
나 꽤 오빠를 많이 좋아하고 있었구나.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탄소는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정국이 변해가던 시기가 미지와 그렇게 나간 후라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게 이렇게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다니하는 생각도 한두번 해본게 아니였다.
"언니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야 좋아하면 가서 좋아한다고 해
오빠 때문에 지금 많이 힘들다고 대답은 노 아니면 예스겠지
정국이가 만약 싫다고 하면 넌 마음 정리하는거야
말 그대로 게임 오버 짝사랑 끝내는 거지 그게 오히려 정리하기 더 쉬워
믿었던 당사자한테 직접 듣는 거절이니까 그리고 예스하면 넌 소원 이룬거지
평생 소원이 정국이 여자친구라며"
탄소는 멋쩍게 웃으며 현아를 바라봤다. 현아는 그런 탄소의 어깨를 두드리며
출동! 할 수 있다 하며 탄소를 동아리실 밖으로 밀어냈고, 복도 끝에는 정국이 지민이와 같이 걸어오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정국아 너 똑똑하잖아 누나 말 이해 못한 거 아니지?"
"전 누나가 이럴수록 불편해요 솔직히 말씀드려요? 저번에 전학보낸
걔도 저랑 연락 한 번 한 적 없고 난 나때문에 전학갔다길래
그제서야 이름 들었어요"
"거짓말 하지 마 너네 연락하고 데이트 하고 난리였잖아"
"누나 그거 병이예요 알아요? 누나가 상상한 게
모두 현실이라고 생각하지마요"
"그럼 걔랑은 뭔데?"
"누난 걔 얘기 꺼내지 마요"
"이름이 뭐더라...... 김탄소?"
"건들기만 해요 진짜"
"진짜 뭐 어쩔건데? 우리 정국이 누나한테 어쩌려구?"
"가만히 안 있어요 나"
"조건 하나 걸어 그럼, 내 앞에서 걔랑 있는 거 눈에 보이지마
걔랑 데이트하건 뭘하건 내 귀에 들리지도 내 눈에 보이지도 말고
넌 차인 거야 나한테 알겠어?"
미지가 자리를 뜨고 정국은 머리를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뒤에서 듣고 있던 지민이 나와
정국이의 어깨를 두드렸고, 정국이는 조심스럽게 지민이를 밀어내며 다시 뒷풀이 장소로 들어갔다.
아무렇지 않은 듯 제 옆에 앉아 웃으며 살갑게 대하는 미지가 불편했지만 애써 분위기를 살리려
맞장구를 쳐줬다. 그때 아직 밖에 있던 지민이 휴대폰을 들고 녹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오빠"
"누구 오빠?"
탄소는 지민과 정국을 보고 오빠하고 불렀고, 정국은 그저 탄소를 내려다보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지민은 웃으며 누구 오빠? 하고 되물었고, 탄소는 심호흡을 두어번한 뒤 결심한듯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지민이 탄소의 어깨를 잡아 돌리더니 계단으로 내려갔다, 선배 하고 지민을 불렀지만
지민이는 아무 말 없이 내려와 정국이 안 보일 때 쯤에서 멈춰섰다.
"저 정국이 오빠한테 할 얘기 있는데"
"네가 할 얘기 하고 정국이 대답 듣기 전에 이거부터 들어"
지민은 탄소에게 이어폰과 자신의 폰을 주었고, 탄소가 고개를 갸웃하며 화면을 켜자
녹음파일이 있었다. 이어폰을 연결해 녹음파일을 재생한 탄소가 녹음 내용을 들으면서
놀라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민은 그런 탄소를 일으켜 옆에 있던 의자에 앉혔고,
간단히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당분간은 정국이랑 떨어져서 지내면 좋겠다고,
서로 불편하면 좀 그렇잖아 하면서 탄소에게 달래는 말투로 말하자
탄소는 고개는 끄덕였지만 발길은 이미 정국이 있는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만이라도 제발 모른 척 좀 해 줘, 정국이도 힘들어.
지민의 말에 발걸음을 멈춘 탄소가 지민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반대 방향인 신발장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색이 바랜 실내화가 더욱 초라해보이는 탄소였다.
실내화를 신발장에 넣고 신발을 신고 있는데 신발끈이 풀렸다.
탄소는 한숨을 쉬며 신발끈을 묶으려 손을 뻗었고,
그럴 필요도 없이 탄소의 신발끈은 탄소의 손이 닿기 전에 정갈하게 묶여졌다.
"오빠"
정국이였다.
[점심시간]
"저 수정아"
"네 선배?"
"이거 탄소 좀 갖다줘 요새 계속 밥 안 먹더라"
"아...... 네......"
"부탁해 좀 잘 챙겨주고 바빠서 먼저 갈게"
지민을 만나고 교실로 가던 수정이에게 빵과 음료수를 쥐어준 정국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