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오 - 위잉위잉
편의점 알바생
W. 뽀베
"어서오세, 어? 오랜만이네요."
"아, 네."
오랜만에 들린 편의점이었다. 새벽 알바생은 아직 그대로였는지 나를 보자마자 아는 척을 했다. 떨떠름하게 맞인사를 하고 코너 사이로 쏙 들어갔다. 항상 이 시간에는 전 남자친구와 같이 왔었는데. 그 놈과 헤어진 지는 한 달 정도가 지났다. 그러나 아직 정리할 것도 남아있었고, 품어두었던 응어리들도 많았기에 오늘도 대판 싸우고 오는 길이었다. 며칠간 계속 쌈박질을 하다가 오늘에서야 겨우 끝장을 내기는 했다만, 막상 정말로 관계를 끝내고 오니 씁쓸함이 남았다. 그 새끼에 대해서 감정이 남았다거나 그런 건 절대로 아닌데. 항상 그 놈과 같이 오던 편의점이라 그런가, 왠지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4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닐텐데. 한 순간에 이렇게 깔끔히 긴 시간을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 껄끄러웠다.
기분도 꿀꿀하고, 시원하게 캔맥주나 들이킨 뒤 잠자리에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캔맥주 두 캔과 안주거리로 과자 몇 개를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낯이 익은 알바생이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별로 본 적도 없으면서 왜이리 반가워하는건지. 헤실헤실 웃는 모습이 사회생활은 참 잘할 것 같다. 저렇게 서글서글하게 웃는데 그 누가 낯에 침을 뱉을 수 있겠어. 머릿속으로 별 영양가없는 생각들을 하며 후드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8600원입니다. 뭔 놈의 과자들이 질소밖에 안 들은 주제에 이렇게 비싸다냐. 세상에 말세다, 말세. 혀를 끌끌 차며 돈을 꺼냈다.
"남자친구 분은 안 보이시네요."
"헤어진 지 좀 됐어요."
"아... 죄송해요."
사회생활 잘할 것 같다고 한 거 취소다. 눈치가 좀 없어.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알바생에게 괜찮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봉지를 집어들었다. 그래도 사람이 서비스 정신 하나는 투철하네. 그 놈은 립서비스도 못했는데.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몸을 돌렸다. 손님, 잠시만요! 거스름돈을 적게 줬나.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만 빼꼼히 돌려 카운터에 서 있는 알바생을 쳐다보았다. 뒷통수를 긁적거리며 말을 머뭇거리던 알바생이 입술을 잘근 씹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요, 또 오세요."
"... 네?"
"저 이 타임이니까, 꼭 오세요."
"제가 왜요?"
"보고싶어서요."
"아... 예."
이건 또 무슨 신종 작업멘트람. 제법 진지한 알바생의 얼굴을 보니 차마 대놓고 욕을 할 수는 없고, 그냥 떨떠름한 표정으로 웃어주기만 했다. 얼굴은 완전 고딩처럼 생겼는데. 아니, 어쩌면 진짜로 고딩일지도 모른다. 대답했던 목소리도 은근히 앳된 것이 확실히 어려보였다. 좋았어, 넌 앞으로 고딩이다. 패기가 아주 넘치는 것이, 역시 요새 고딩들이 무섭긴 하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작업이나 걸어주고 말이지. 뭐, 그렇다고 해서 그게 싫다는 소리는 아니다.
새삼 자존감이 상승했다. 그 쓰레기와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작업을 받고. 거 봐, 나 아직 안 죽었잖아. 그런데 어디서 내가 질렸다고 지랄이야. 순간 든 아까 전의 생각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차차, 고딩이 나 보고있지. 급히 표정을 풀었다. 네, 내일 또 올게요. 능글거리는 말투로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자 귀 끝이 빨개지는 고딩이다. 귀여운 놈. 역시 연하가 좋긴 좋은가보다. 기분 좋게 편의점 문을 열고 나왔다. 내일도 올까.
*
"진짜 또 오셨네요."
"오라면서요."
"기억해준 거예요? 와, 감동이다."
그래서 그런데, 정말로 또 왔다. 오랜만에 야근을 하고 온 탓에 귀가가 늦었기도 했고,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터덜터덜 걸어가다 문득 눈에 띈 편의점은 알바생의 앳된 얼굴을 내게 상기시키기 충분했다. 맞다, 오라 그랬었는데. 마침 배도 출출하니 야식도 사갈 겸 집 가는 길에 들러야겠다. 딸랑, 문에 달린 종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새벽인데 쓸데없이 경쾌하긴. 피곤에 쩔긴 했으나 고딩의 상큼함을 본다면 그나마 괜찮아지겠지. 내가 들어오자 인사를 하려던 고딩의 눈이 동그래진다. 그러고보니까 쟤 카톡개 닮은 것 같아. 결론은 귀엽다고. 다시 찾아온 내게 감동을 먹었는지 입까지 벌리고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거 참, 재밌는 녀석일세.
어깨를 으쓱해보이고 커피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원래 같아서는 에너지 드링크라도 쭉 마셨을텐데, 지금은 얼른 집으로 들어가 침대에 쭉 뻗고 싶었기에 참았다. 그래도 고딩 얼굴은 봐야하니까 커피는 마셔야지. 쓴 커피는 잘 못 마시는 탓에 그나마 제일 달달한 화이트 초코모카를 골랐다. 이런 내 입맛을 볼 때마다 다들 애기 입맛이라고 놀렸었는데. 고딩도 새벽 알바를 하느라 힘들테니 커피나 하나 사줘야겠다. 아, 아니지. 나는 고등학생 때 커피 안 마셨는데. 커피가 뭐 그렇게 좋은 거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우유 코너로 향했다. 저번에 회사 언니가 맛있다면서 열심히 마시던 그 우유가... 저거다, 초코에몽. 손에 커피와 우유를 하나씩 들고가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어, 이거 제꺼예요?"
"네, 먹어요. 피곤할텐데."
내 말에 함박 웃음을 지으며 자연스럽게 커피를 가져가는 고딩이다. 잠깐만, 왜 내 커피를. 급히 커피를 든 손을 저지했다. 그거 내껀데. 담담한 투로 고딩에게 말하니 아,하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내 말에도 빨대를 그냥 꽂길래 아예 빨대까지 꽂아서 내게 주려는 줄 알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제 입으로 가져간다. 자연스레 커피를 마시는 모습에 눈만 껌뻑이며 고딩을 쳐다보았다. 이 고딩, 저번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정말로 패기가 넘친다. 제꺼라니까요. 다시 한 번 말했지만 고딩은 초코에몽을 내게 내밀었다. 뭐, 어쩌라고. 내 앞으로 내밀어진 초코에몽을 불만스럽게 내려다보았다.
"그 쪽은 이게 더 어울려요."
"...?"
"애기같이 생겼잖아요. 애기는 커피 먹는 거 아니랬어요."
대체 뭐라는거야, 이 고딩이. 얼굴은 자기가 더 애같으면서. 그 말을 듣고 멍하니 고딩을 쳐다보다 허,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내 반응을 보지 못했는지 들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고 초코에몽에 손수 빨대를 꽂은 고딩이 싱글벙글 웃으며 초코에몽을 건넸다. 저거, 저... 정말 눈치가 없는건지, 쓸데없이 해맑은건지. 일단 그것을 받아들기는 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나이를 스물 여섯씩이나 먹었음에도 초코에몽이 어울리는 여자, 이 얼마나 멋진 수식어인가. 어쨌든 동안이라는 뜻이니까. 억지로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빨대를 입에 물었다. 한 모금을 쭉 빨아들이자 생각지도 못했던 달콤한 초코맛이 입에 퍼져왔다.
어. 순간 작게 소리를 내며 내 손에 들린 초코에몽을 빤히 쳐다보았다. 회사 언니가 그렇게 찬양을 했던 이유를 알겠다. 진짜로 맛있거든. 원래도 초콜릿을 좋아하긴 했지만 정말 달았다. 기대하지도 않고 마신건데, 뭐라 표현을 하자면... 마치 저 고딩 같은 맛이다. 훅 내게 다가와 달콤하게 여운을 남기는 것이, 정말 완벽한 비유임이 틀림없다. 맛있어요? 아, 내 앞에 얘 있었지. 이 곳이 편의점이라는 것을 잠깐 잊어버렸었다.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아, 귀여워. 내 고갯짓에 고딩이 눈을 호선으로 접고선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뭐가 귀엽지. 뒷목을 긁적였다.
"진짜 애기 같다. 몇 살이에요?"
"스... 스물 여섯. "
"나보다 누나네. 그런데 이렇게 귀엽기 있어요?"
"넌 몇 살인데."
"누나라니까 바로 말 놓는거봐, 완전 매력 있어. 저는 스물 둘이요."
"어, 고딩 아니야?"
"에이, 제가 어딜 봐서 고딩이에요."
여기를 보고, 저기를 봐도 영락없는 고딩인데. 손사레까지 쳐대며 제가 스물 둘임을 주장했다. 뭐야, 그럼 이제 고딩이라고 부르지도 못하잖아. 그를 지칭할 말이 하나 사라짐에 아쉬움이 들었다. 고딩이란 표현이 제일 잘 어울렸는데. 어쩔 수 없이 앞으로는 꼬박꼬박 알바생이라고 불러야겠다. 강아지가 헥헥 대며 먹이를 든 주인을 쳐다보는 것처럼, 딱 그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알바생의 엉덩이에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우리 할머니 댁의 몽구를 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몽구는 성격이 그야말로 개새끼같은데.
"... 아무리 봐도 고딩 같은데."
"이 누나 진짜 안되겠네. 나중에 저랑 술이라도 한 번 마셔요. 상남자가 뭔지 보여줄게요."
"맥주 한 캔 먹고 취할 것 같이 생겼으면서, 상남자는 무슨."
"아, 누나! 자꾸 저 무시할래요?"
"유시할래요. 그럼 간다."
내게 떽떽거리는 알바생을 뒤로 하고 쿨하게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왈왈대는 게 꼭 우리 몽구가 짖는 것 같다. 알바생의 얼굴을 떠올리다 픽 웃어버렸다. 고딩도 아니라는데, 이름이나 물어볼 걸 그랬다. 고딩일까봐 손목이 시려워 참았는데. 편의점 유니폼 조끼에 달려있는 명찰도 보지 못한 내가 한심해졌다. 시력도 1.0이 넘으면서 왜 그건 보지 못했을까. 답답한 마음과 함께 초코에몽을 쭉 들이켰다. 내일 가면 꼭 물어봐야지.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꽤 가벼워졌다. 커피를 먹지 않았는데도 흐릿했던 정신이 맑아졌다. 우유가 달아서 그런건지, 편의점 알바생이 내게 각성 효과를 일으킨건지. 잘 모르겠다.
*
"잘 지냈냐."
"어, 오랜만. 얼굴이 왜이렇게 창백해."
"여자친구랑 싸우고 왔다. 넌 걔랑 헤어졌다며."
"헤어진 지가 언젠데. 그나저나 넌 여자친구랑 싸웠으면서 나 만나도 되는거야?"
"네가 여자냐? 웃기는 소리하네."
"이 새끼가 진짜."
"술이나 마시자."
민윤기 이 새끼를 어떻게 하면 좋지. 안 그래도 허연 얼굴이 더 하얘진 것 같아 걱정을 좀 해줬건만, 돌아오는 말이 저거다. 배은망덕한 새끼. 그러면서 제 여자친구는 또 얼마나 예뻐하는지. 그런 것도 연애 초반이라 그럴 수 있는 거라며 민윤기에게 열변을 토했다. 나처럼 5년 동안 한 개새끼만 주구장창 만나고 있으면 아예 해탈해서 싸우지도 못한다. 한 달 전 쯤에 뜬금없이 연애 중을 올리더니 풋풋하게 연애를 시작한 민윤기가 마냥 부럽기만 했다. 여자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어보였던 녀석인데, 어떤 여자가 이런 민윤기를 바꿔놓았나 궁금하기도 하고. 에라, 모르겠다. 술이나 마셔야지.
"독하다, 독해. 취하지도 않아."
"그런 게 한두번이냐."
"너랑 술 마시면 이게 문제야. 집에 가질 못해."
"먼저 쳐 가던가, 그럼. 나한테 지랄."
"헤어져서 많이 예민한가 보다."
"너 개 키우냐? 존나 개소리."
"외롭지는 않냐? 남자 소개 시켜줄까."
"하나도 안 외로워, 시벨롬아."
"벌써 누구 하나 찍은거야?"
"찍긴 뭘 찍어. 네 눈을 찍어줄까."
제법 술이 들어가자 나오는 얘기는 또 전 남자친구의 얘기였다. 저 새끼는 질리지도 않나. 민윤기에게 열심히 전 남자친구를 씹고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지 않은 것은 민윤기도 마찬가지였다. 술은 끔찍히 싫어하면서, 가끔 술을 마실 때면 주량이 그렇게 셌다.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민윤기가 남자라도 소개 시켜줄까,하며 측은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놈에게 약이 바싹 올라 젓가락을 들고 설치다 이마를 철썩 맞았다. 손도 매운 놈이. 아린 이마를 문지르며 민윤기를 노려보았다. 시큰둥하게 술을 마시던 민윤기는 내 말을 듣고서는 호기심이 잔뜩 든 모양이었다. 젠장, 곤란하게 됐다.
무관심인 듯 보여도 유관심한 게 민윤기였다. 민윤기와 친해진 후로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제일 관심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샌가 꼬치꼬치 캐묻는 민윤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흥미가 생겼는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것저것 물어볼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녀석의 입술이 들썩거리는 걸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 한바탕 질문이 쏟아지겠구만. 괜히 예민하게 반응을 했나보다. 닥치고 민윤기의 말을 듣기나 할 걸. 역시 술이 문제다.
"누군데."
"집 근처 편의점 알바생."
"나이는."
"스물 둘이래."
"도둑년이네, 이거. 그런 애가 널 왜 좋아한대?"
"누가 좋아한다 그랬냐?"
"그럼, 네가 좋아하는거야?"
"내가 그렇게 금사빠같냐."
"금사빠 맞잖아. 어쨌든, 걔가 좋아한다고?"
"... 어. 나한테 막 들이대. 연하라 그런가."
"그거 나도 잘 알아. 내 여친도 그랬었어."
"지금은 지가 좋아서 죽는 주제에. 연하가 훅 치고 들어오니까 정신이 없긴 해."
"사귀던지, 그럼."
"이게 연애를 하더니 미쳤나."
"존나 세상이 아름답게 보여. 너도 다시 시작해."
이쯤 되면 거의 언어의 마술사다. 그야말로 답이 없는 민윤기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인 뒤 술잔을 입에 털어넣었다. 아차, 지금 몇시지. 핸드폰 시간을 보니 열두시가 다 되어간다. 이제 알바생 만나러 가야하는데. 생각하기가 무섭게 민윤기가 말을 꺼낸다. 그 알바생 보러가려고? 혹시 독심술사인가. 질린 표정으로 민윤기에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낮은 목소리로 소리를 낸 민윤기가 능글거리며 웃음을 짓는다. 뭐, 뭐. 괜히 찔려서 틱틱댔다. 눈치는 더럽게도 빨라. 언제나 모든 것을 다 알고있다는 눈치인 녀석이었기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폭탄같은 발언을 할 지 몰랐기 때문에.
"너도 걔 맘에 들지."
"미쳤어?"
"맞네, 맞아. 보내줄게, 보러 가."
"가긴 어딜 가, 안 가."
"나도 꼬맹이랑 화해하러 가야돼. 가자."
내 어깨를 잡고 강제로 일으킨 민윤기가 술집 밖으로 나를 끌고 나왔다. 무어라 말을 하려는 내 입을 막고 택시까지 잡아 그 안에 나를 밀어넣는다. 쌍욕을 하며 멀어지는 민윤기의 모습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근데 더 얄미운 게 뭔지 아냐. 문자로 택시 번호를 적어서 보낸 게 더 얄밉다. 도착하면 전화를 하라는 제스쳐를 취하는 민윤기를 보다가 몸을 돌렸다. 존나게도 눈물 겨운 우정이다. 미적지근하기만 했던 나에게 심지까지 불태워 보내준 것이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여친이랑 화해 잘해라. 문자를 보내고 창 밖을 쳐다보았다. 언제쯤 도착하려나.
생각보다 금방 도착했다. 멍을 때리며 바깥 풍경을 구경하다 내리라는 기사 아저씨의 말에 조용히 요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눈 앞에 보이는 편의점, 은근히 가슴 속에 기대가 서렸다. 숙취해소 음료수를 사야겠다. 딸랑, 몇 번이나 들었다고 벌써 익숙해진 종소리가 나를 반겼다. 문을 밀고 들어가 카운터를 쳐다보자 원래의 알바생이 아닌 다른 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주말이라 오늘은 안 오나. 아쉬운 마음으로 카운터를 끈질기게 응시하다 코너로 향했다. 이름, 물어봐야하는데.
음료수를 고르기 위해 진열대를 보고 있자 손에 들고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웅, 울렸다. 안 봐도 민윤기이겠거니 하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 잘 갔냐. 무뚝뚝한 말투가 당연히 민윤기다. 어. 짧게 대답을 하자 바로 알바생의 안부를 물어온다. 주말이라서 없나봐. 애써 덤덤히 말을 하고 음료수를 집었다. 아, 그러냐. 민윤기의 말 끝에서도 왠지 모를 아쉬움이 묻어났다. 여자친구와 화해는 했냐며 물어보고 카운터로 걸음을 옮겼다. 딸랑, 방금 전 들었던 종소리가 다시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쳐다보자, 어... 그 알바생이다.
"누나!"
- 뭔데, 왜 대답 안 해.
"저 기다렸어요?"
- 야. 잠들었냐?
홀린 듯 알바생을 쳐다보다 들려오는 민윤기의 목소리에 급히 나중에 전화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건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인지 알바생의 생각을 하자마자 알바생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와 이런 내게 환히 웃으며 다가오는 알바생. 정말로 영화 같은 장면이었기에 말도 못하고 어버버거리며 서 있자 신경질이 가득 섞인 목소리가 철썩 따귀를 때렸다. 아, 나 계산하려고 했지. 그제야 음료를 카운터에 내려놓으려는데, 내게 낸 짜증이 아닌 모양이다. 왜냐면 알바생이 사람 좋은 웃음으로 카운터에 서 있는 남자를 달래고 있었으니까.
"미안, 미안. 과제가 밀려가지구."
"야, 너만 밀렸냐? 나도 밀렸거든?"
"에헤이, 처음이니까 좀 봐줘."
"처음은 무슨, 지랄하네. 한 번만 더 이러면 그땐 진짜 뒤져. 알았어?"
"아아, 알았다니까."
여전히 어딘가 불편한 표정을 제 얼굴에서 지우지 못한 남자가 조끼를 벗어 알바생에게 건넸다. 카운터에서 나온 남자는 그대로 몸을 돌리려다 나를 발견하고선 언제 그랬냐는 듯 멍한 얼굴을 한다. 아, 계산. 내게 미안한 듯 쭈뼛거리며 내 눈치를 슬슬 보았다. 나랑 친한 누나니까 상관 없어. 그러다 들려온 알바생의 말에 그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 알바생과 나를 번갈아보았다. 빨리 가기나 해, 김태형. 이 남자의 이름이 김태형인가보네. 어르고 어르며 길 때는 언제고, 주객전도가 되어 남자를 보내려고 하는 알바생이다.
"이 분이 그, 느에!"
"쫌, 빨리 가라고."
"브으, 으어으!"
"누나, 얘 신경 쓰지 마요."
"어? 어."
"아씨, 뭐하는거야!"
"그러게 놓으라고 했잖아."
무어라 말을 하려는 김태형의 입을 막고 놓아주지 않던 알바생이 소리를 지르며 손을 뗐다. 뻔뻔한 표정으로 빠져나온 김태형은 어린 아이처럼 흥미가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다다다 쏟아붓기 시작했다. 박지민한테 누나니까 저한테도 누나겠네요,라는 문장으로 시작된 말은 랩을 하듯 빠르게 쏟아졌다. 말이 워낙 빠른 탓에 학창시절 수업시간에도 하지 않았던 집중을 하며 들었다. 알바생 이름은 박지민이고, 예전부터 나를 좋아했다더라. 허나 남자친구가 있다며 포기한다더니 언젠가부터 오지 않는 나를 목 빠지게 기다렸단다.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며칠 전부터 다시 오기 시작한 나를 보며 그렇게 좋아했다고. 대충 요약하자면 이랬다.
쉴새없이 움직이는 김태형의 입을 막으려다 그가 너무도 많은 말을 해버린 탓에 해탈한 듯한 박지민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 앉아있었다. 이따금씩 박지민을 쳐다보며 웃을 때면 나와 김태형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민윤기 말대로 관심이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내가 미쳤지, 4살이나 어린 애를. 장황한 설명이 끝나고, 뒷수습은 알아서들 하라며 홀랑 떠나버린 김태형이 조금 야속하기도 했다. 이렇게 어색한데, 대체 무슨 말을 해야되냐고. 가시방석 같은 분위기 속에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박지민이었다.
"술 마셨어요?"
"아, 응. 조금."
"누구랑요, 남자?"
"어어, 남자. 근데 정말 별 사이 아냐. 걔 여자친구도 있고,"
"누나."
"응?"
"왜 나한테 그렇게 변명하듯이 말해요?"
"뭐가..."
"우리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아니, 궁금한 것 같길래."
궁금한 게 맞긴 한데. 뭔데 이렇게 상황역전이 빨라. 내게 제 속마음을 들켜 안절부절 못하던 것이 불과 몇분 전인데, 어느새 다시 제 원래 모습대로 능글맞아진 박지민이 여유롭게 내게 말했다. 그런 박지민에게 나는 을이었다. 분명 내가 얘보다 밥을 천 끼는 더 넘게 먹었는데. 얘는 왜이렇게 오빠 같고, 그러냐고. 멀뚱히 눈만 깜빡거리다 대뜸 말을 내뱉었다. 이거 계산이나 해줘, 나 가게. 그냥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갑일 때는 마냥 재밌던 상황이 을이 되어버리자 숨이 턱 막혀온다. 계산 안 해줄건데요. 짖궂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 영 예감이 좋지 않다.
"이름이 뭐예요, 누나?"
"김... 김탄소."
"이름도 예쁘네."
"...?"
"아까 들었죠. 김태형한테."
"뭘."
"내가 누나 좋아하는 거."
"드, 들었지."
"그것도 엄청."
"......"
"탄소 누나."
"어?"
"좋아해요, 제가."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사이다처럼 청량한 웃음을 지은 채 말하면 어느 누가 그걸 거부할 수 있겠냐 말이다. 뚱한 표정을 짓고서 얄미운 박지민을 바라보고있자 손을 뻗고는 그대로 내 볼을 살짝 꼬집는다. 귀여워요, 누나. 스물 여섯이란 게 안 믿겨지게. 자기는 무슨 망개떡처럼 생긴 주제에, 나보고 귀엽다며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보낸다. 그 눈빛에 나는 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계산해줄게요, 이리 줘요. 선심 쓰듯 말하더니 내 손에서 음료수를 낚아챈 박지민이 바코드를 찍고는 제 지갑에서 돈을 꺼내 계산했다. 어어. 멍청한 소리를 내며 울상을 짓자 박지민이 내 손에 다시 음료수를 꼭꼭 쥐어주었다.
"이건 제가 사는 거예요. 누나한테 잘 보이려고."
"안 그래도 되는데..."
"씁, 맘 편히 받아요."
"... ..."
"집에 가서 푹 자고."
"... 응."
"편의점, 앞으로 계속 와요. 기다릴게."
제 말을 마친 박지민이 한껏 오빠 같은 웃음을 지어보이곤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덕분에 잔뜩 멍해진 상태로 박지민에게 인사를 하고 편의점를 나왔다. 내가 인사를 제대로 한 건 맞나 싶다. 박지민 때문에 술이 다 깬 것 같은데, 내 손에 들린 음료수를 바라보다 웃어버렸다. 내일도, 그 다음날도, 앞으로 계속 와야겠다. 저렇게 편의점 안에서도 나를 끈질기게 보고있는 박지민을 만나려면. 입꼬리에 여전히 호선을 그린 채로 손을 방방 흔들었다. 이럴 때 보면 민윤기는 완전 도사라니까. 술김에 밝혀진 내 감정이 낯설기도 했지만, 아까 민윤기에게 들었던대로 무언가 세상이 새로워보이긴 했다. 새벽인데도 날이 더 환해진 것 같고. 망개떡 같은 박지민 때문에라도 잠들었던 연애세포를 다시 깨워야 할 것 같다.
더보기 |
제가 와써요! 방학을 해씀다! 아주 신나네여ㅎㅅㅎ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으윽 남주니 글도 드디어 완성을 했는데여! 일단 지민이를 조금 앓으시고 며칠 뒤에 남준이를 만나보세요 호홍 남준이 글까지 마무리 짓고 나면 드디어 연재물을 연재할 거예여ㅠㅠㅠㅠ 또 올게여 그럼! |
암호닉 |
설날 침침 은하수 카누 눈부신 민윤기 호독 윤기야 나랑 살자 암호닉은 항상 받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