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연애
04
바람이 불 때엔
(2)
"다시 한 번만 더 갈게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프리 프로덕션 기간을 별 문제 없이 잘 보내고 본 촬영 마지막 씬까지 숨가쁘게 달려왔다. 김태형도 여자 배우도 다른 스탭들도 잘 따라와줘서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다들 마지막까지 힘내자는 분위기로 으쌰으쌰하고 있었다. 세트 안에서의 촬영에다가 김태형의 첫 연기까지 더해져 최대한 일일촬영표를 스토리 진행 순서대로 맞춰 마지막 씬은 김태형의 감정이 고조되는 장면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오랜 기간 친구로 지내온 여자에게 수줍은 고백을 하고 여자의 승낙에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여자를 끌어안고 빙글빙글 도는 그런 장면이었는데 첫번째 미팅에서 나에게 장난스레 건넸던 연기처럼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때문에 마스터 컷이 계속해서 NG가 나는 상황이었다.
"태형씨 이리 와볼래?"
"네.."
계속 되는 NG에 김태형은 스탭들에게 죄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꾸벅꾸벅이며 내 자리로 왔다. 뒷목을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 김태형 앞에 일어서서 어깨를 다독여줬다. 그때처럼만 하면 금방 끝낼 수 있다고. 기죽지말고 연기해보라고. 뭔가 마땅치 못한 표정의 김태형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여보였고 나는 다시 슛에 들어가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또 다시 만족스러운 장면이 나오지 않았고 스탭들의 탄식에 나는 잠시만 쉬자고 조연출에게 말했다. 메이크업을 수정한 김태형은 눈치껏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고 나는 김태형에게 옆에 있던 마실 것을 건네며 물었다.
"태형아, 왜그래? 여태까지 잘 했잖아."
"아...그게.."
"괜찮아, 말해봐봐."
"몰입이 안돼요."
"...아?"
"전까지는 짝사랑 하는거.. 그거 잘 됐거든요. 해보기도, 아니 하는 중이기도 하니까 그 사람 생각하면서 열심히 했는데 이건 이뤄진거잖아요. 제 짝사랑은 아직 안이뤄졌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도 모르겠고.. 그냥 잘 모르겠어요. 만약에 그 사람이 절 받아줬다고 상상하면 그렇게 좋아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고. 그냥 실감이 안가서 아무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 한참을 멍하니 서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니까.."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감정이라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네.."
귀여운 김태형의 대답에 나는 한참을 웃다가 민망해하는 그 아이의 어깨를 툭툭치며 그냥 네가 살면서 제일 좋았던 순간을 생각해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라 했다. 물론 그 감정을 이미 아는 사람이라면 더 능숙하게 연기 했을테지만 김태형의 그 어색함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나는 더 귀엽게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렸을때 가장 갖고 싶었던 로보트 인형을 엄마가 사줬을때, 그 인형을 품에 안게 되었을 때의 감정이라도 떠올려보라면서 김태형을 달랬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나름 괜찮은 컷이 나왔고 그 기세를 몰아 촬영은 훈훈한 분위기에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뒤풀이는 늦은 시간까지 운영하는 서울 한복판의 큰 고깃집에서 열렸다. 대부분의 스탭들이 뒤풀이에 참석했지만 민윤기는 보이지 않았다. 촬영 스탭에 포함되지 않아서 본인은 가기도 민망하다며 꽁무니를 내뺐고 나는 나름 수긍이 가는 변명에 알겠다고, 내일 보자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자리로 돌아갔을때는 이미 자리가 정해져있었고 내 자리는 민망하게도 한가운데, 김태형의 옆자리였다. 우리 젊고 이쁜 연출님 돌아오셨다며 박수갈채를 유도하는 조연출의 호들갑에 등짝 스매싱을 한 대 먹여주고 민망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고 김태형은 평소처럼 활짝 웃으며 내 어깨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와~ 우리 이쁜 연출님 오셨으니까 빨리 짠해요 짠!"
"적당히 놀려줄래.. 충분히 괴롭거든."
"놀리는거 아닌데? 그쵸 여러분?!"
"당연하지~ 우리 연출이 얼마나 이쁜데."
김태형과 조연출의 짜증나는 쿵짝에 꿀밤을 맥일까 하다가 다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나까지 기분이 좋아져 그냥 김태형이 따라준 잔을 들어 오글거리는 건배사를 외쳤다. 대박을 운운하는 시시한 건배사에도 다들 즐거워하며 본격적인 술자리를 시작했고 소소한 장기자랑부터 촬영 한풀이까지 다들 난리가 아니었다. 보나마나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계속될 것 같아 처음에만 적당히 비위맞춰주며 잔을 비웠고 고조되는 분위기에 끝자리로 자리를 조용히 옮겨 앉았다.
한참 흥이 오른 중앙 테이블은 어린 김태형의 애교에 여자 스탭들만 죽어나갔다. 작품 준비기간에 김태형과 어찌나 붙어있었는지 (뭐 솔직히 말하면 김태형이 작품 핑계대고 나를 따라다닌거지만.) 이제는 친한 누나 동생사이가 되었다. 그래도 꼴에 연예인이라고 얼굴도 조막만하고 키도 크고 잘생긴게 끼부리니 귀엽고 이뻐보였다. 하지만 그게 다였지 그 이상의 감정은 절대로 단 일퍼센트도 없었다. 그런데 김태형은 감정 표현에 서툴렀던건지 아니면 내가 알아주길 바랐던건지 나에게 적극적으로 애정공세를 했다. 자꾸만 누나동생으로 선을 긋는 나에게 서운함을 표현하고 이뻐해달라며 새끼 강아지마냥 얼굴을 들이내밀기가 일쑤였다.
"아~ 진짜 여기서도 제가 노래를 부르면 무슨 재미입니까!"
"노래해~ 노래해~"
"어..음.. 아! 누..아니 감독님!! 우리 감독님 노래 한번 들어야죠!"
자신이 노래를 불러야 하는 상황에 몰려있었던건지 김태형은 재미없다며 나에게 권한을 떠밀었다. 덕분에 새벽중에 고깃집에서 숟가락을 들고 얼굴을 붉히며 노래를 불러야했고 김태형은 어유 이쁘다 하며 내 등허리를 토닥였다. 어린놈의 자식이.. 하는 눈빛으로 째려봐도 김태형은 그저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회식자리는 예상대로 아침해가 뜨고 나서야 끝이 났고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계산을 위해 카운터에 서서 지갑에서 카드를 찾는데 내 앞으로 카드가 하나 건네졌고 직원은 그 카드를 기계에 긁어버렸다. 이게 뭔가해서 뒤돌아보니 김태형이 웃으며 감사합니다 하고는 직원에게서 카드를 받았다.
"너 뭐해?! 저기 그거 취소해주시고 이걸로 해주세요."
"씁, 누나 저 잘나가요! 돈 많다고요."
"너 혼날래? 누가 너 잘나가는거 몰라? 그거 물러주세요."
"누나!"
"너 진짜 혼나. 이거 아니야. 네네 이걸로 다시 긁어주세요."
"아! 그럼 반이라도, 반이라도 제가 내게 해줘요."
"안된다고 했지."
우리 둘의 말다툼에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 직원에게 긁어달라고 하려니 김태형이 카드를 건네려는 내 손을 확 휘어잡더니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이게 미쳤나 보는 눈이 몇갠데.. 자기가 반 내게 안하면 어떻게 할지 모른다는 김태형에 못이길듯 싶어 알았다고 수긍했다. 꽤 큰 금액을 반으로 나누니 나름 부담이 덜 했다. 김태형은 그제서야 만족한듯 자기 카드를 지갑에 넣더니 내 어깨를 감싸안고 가게 밖으로 나섰다. 푸르스름한 하늘빛에 내일은 꽤 늦은 시간까지 자겠다 싶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데 김태형이 그새 택시를 잡아 뒷좌석에 나를 태우고 내 옆에 아무렇지도 않게 탔다.
"너 뭐해?"
"누나 들여보내고 가야죠."
"너 매니저는?"
"아직 끝난줄 몰라요. 누나네로 데리러 오라하면 되니까.."
"태형아."
"네?"
택시는 이미 출발했고, 나는 뒤늦게 백미러를 통해 익숙한 사람을 한 명 봤다. 김태형은 나의 부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 사람은 6년동안 내 옆자리에 서있던 민윤기였고 나는 김태형과 한 택시를 타고 자리를 떴다.
"아무것도 아니야."
* * *
[누나 잘 들어갔어요?]
[왜 답장이없지 ㅠㅠ]
[내일 일어나면 답장해주세요!!!(눈물)]
[아직도 안일어난거에요? 누나ㅏ아아아아아]
[아직도 자?]
오후 늦게 눈을 떴다. 오랜만에 느끼는 늦은 오후의 여유로움에 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뒹굴고 천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떠올라 홀드키를 누른 핸드폰에는 두 사람의 연락이 와있었다. 김태형과 민윤기였다. 글자마저 시끄러운 김태형은 이후로도 의미없는 글자들과 슬픔을 표현하는 이모티콘들을 무자비하게 보내놨다. 뒤로가기를 누르고 한 개의 메세지를 민윤기의 미리보기 기능엔 누가 아니랄까 정직한 글자가 쓰여있었다. 읽는 의미도 없다 싶어 전화를 걸었고 어제의 이야기와 오늘은 뭘 할지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엔 미묘하게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누구 하나 어제 마지막 마주침에 대한 언급을 먼저 하지 않았고, 하지 않는게 좋다는 걸 둘 다 속으로 알고 있었다.
"ㅇㅇㅇ."
"응?"
"보고싶다."
"....나도."
정말 싫게도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나도, 정말 나 자신도 모르게 나는 알 수 없는 새로운 기류에 휩쓸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민윤기는 알고 있었다.
"오늘 밤에 우리집 와서 잘래?"
"...피곤해."
"그래도."
"...."
"...."
"알았어."
나는 어차피 또 다시 민윤기의 품으로 돌아갈 몸이다. 이제는 떠나보내기도 아까운 그 긴 시간들과 추억들을 멀리하기엔 우리는 한치의 고민도 할 필요가 없었다. 바람에 흔들려 나부끼는 마음 한자락도 다 한 때일 뿐이라고. 어차피 우리는 끝이 우리일걸 알고 있기 때문에 쓸데없는 감정들은 무시해오고 있었다. 나는 김태형에게 흔들린게 아니다. 그 어린 남자 아이에게 내 마음이 흔들릴리가. 그랬다면 우리는 6년간 서로를 만날 수 조차 없었을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민윤기에게 지쳐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익숙함과 의무감 그리고 결혼에 대한 압박에 짓눌려 오로지 민윤기 하나만을 바라보며 오랜 연애로 내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번 쯤은 이 무거운 잡념들을 떨쳐버리고 가벼운 사랑에 눈 돌려보고 싶은 바보같은 변명거리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멍청하게도 나 밖에 모르는 민윤기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나는 정말 못 되먹은 사람이다. 내 잘못임을 알면서도 민윤기를 탓하는 6년의 연애와 3번의 헤어짐, 그리고 또 한 번의 헤어짐을 자꾸만 머리속으로 되새기고 있었다. 아직 그를 사랑하면서도 말이다.
주절주절 |
핵급전개에 폐기물급 필력..이지만 나름 변명을 하자면 이 두사람은 6년 동안 연애해온 커플이라는 점.. 그리고 여자의 30살, 한 풀 꺾이며 생각이 복잡해 질 나이랍니다. 여자의 마음을 헤아려 보아요. 그래도 여주 미오 ㅠㅠ 융기 부쨩해!!! ㅠㅠ
늘 이쁜 댓글들과 응원 감사합니다! 제가 8월 3-6일은 일이 있어서 바쁘답니다.. 아마 시간이 난다면 주말에 한번 더 오고 6일 이후에나 찾아올 것 같아요.. 그래도 기다려주실거죠 >_<? 하트하트
♥ 암호닉 ♥
뀨뀨님 나니꺼님 눈부신님 마끼님 윤기모찌님 하늘하늘해님 콜라님 라 현님 봄님 서른님 융기융기님 남융님 주지스님님 0324님 민트님 태태뿡뿡님 민슈가님 그렇게님 반딥님 소금님 디즈니님 데이터님 망개떡님 더블류님 공감님 호이호이님 말랑카우님 연꽃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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