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옹(Leon) 2015 : The Professional
“남은 평생 편안히 잠들 수 없을 지도 몰라.”
“그런 건 두렵지 않아요.”
“사랑 아니면
죽음이에요.
그게 전부에요.”
01: 난 뭘보게 될까
검은 눈동자 속 내 얼굴이 비춰졌고 그 눈동자 속에 가득한 칠흑같은 어둠에 나도 모르게 눈을 피해 고갤 다시 돌렸다. 내가 시선을 피했음에도 나를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 뒷통수에 그대로 전해졌다. 사실 대충은 알고 있다. 저 여자애가 얼마나 비참한 상황인지. 낡은 빌라라 그런지 집이 바로 붙어있는 것도 아닌데 방음이 아예 되질 않다보니 싸우는 소리, 신음소리, 술병이 깨지는 소리 등 갖가지 폭력적인 소리가 우리 집에서도 종종 들리곤 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저 여자애 아버지로 생각된다. 매일 술을 처마시곤 복도에서부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게 하루 일과다. 새벽마다 시끄럽게 굴자 다른 호수에 사는 사람이 한 번 경고를 주었으나 불같은 성격 탓에 이젠 아무도 건들지 않는다. 어디 가서 시비라도 붙고 오면 더 지랄이다. 누군가 나에게 의뢰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길 정도로 나도 무척이나 싫어하지만 김남준을 거쳐 받지 않는 의뢰는 행하지 않는다. 나름의 사업 규칙이랄까. 어쨌든 저 여자를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들었지만 그 일가족과 엮이긴 싫었다. 귀찮아 질게 뻔하니까. 잠겨있는 문의 열쇠를 열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 애의 눈동자를 보면 귀찮아 질지도 모르는 일을 내 손으로 저지를 것 같아서.
“들어가. 춥다”
“.....”
대답이 없자 고갤 돌려 그녀를 쳐다보니 어느 새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결국 집에는 들어가지 않은 채로. 그녀가 잠깐 이나마 서있던 복도에는 다시 차가운 공기만이 맴돌았다. 나도 차가운 문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여자애를 무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김남준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이상하게도.
**
눈을 떴다. 살아 숨쉬고 있는 지금,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자기 전 늘 생각한다.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신이 있다면 불쌍한 내가 죽을 때만큼이라도 고통스럽지 않게 죽게 만들어 달라고 늘 기도했다. 아직까지 들어주시진 않아 이렇게 숨쉬고 있지만. 누워있는 몸을 일으켜 고갤 돌리니 옆엔 작은 소년이 잠들어 있었다. 은수, 하나뿐인 내 동생. 앞이라곤 보이지 않는 삶에서 유일한 희망이자 낙인 우리 은수. 잠든 은수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는데 은수 몸 곳곳의 멍자국을 하나 둘 세다보니 눈물이 뚝뚝 흘러 뺨을 적셨다. 은수야.. 신은 정말 있는 걸까?
아버지란 작자는 이 동네에서 유명한 알콜 중독자다. 매일 돈이 어디서 생기는 건지 술을 퍼마시곤 집에 들어와 우리 남매를 무자비하게 때린다. 은수를 감싸 안으면 더 세게 내 머리를 갈겼다. 그나마 멀쩡했던 계모는 어디서 일을 하는 건지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가끔 얼굴을 내비치면 우릴 향해 당장 꺼지라며 욕지거릴 날리지만 차라리 그게 훨씬 낫다. 아침 7시 은수와 내가 그녀석이 잠에서 깨지 않았을 때 몰래 학교로 향한다. 아직 은수가 어린 탓에 학교를 일찍 마치고 집으로 가기 때문에 나도 수업을 끝까지 들어본 적은 없다. 늘 등굣길도 교실에서도 하굣길도 나 혼자다. 같은 교복인데 같은 학생인데 하늘과 땅처럼 비슷해질 수 없는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 사람들이다. 외롭다고 느끼기도 이젠 지친다. 사랑이라는 거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게 맞는 걸까
오늘도 어김없이 6교시 수업 후 미리 집에 가있는 은수가 걱정되는 마음에 어젯밤 계모의 지갑에서 훔친 만원으로 은수가 좋아하는 라면과 과자를 사들고 빌라에 도착했다. 근데 왠일인지 집 앞 빌라에는 검은 승용차가 여러대 주차되어 있었다. 갑자기 불길해졌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비닐봉지를 겨우 꼭 붙잡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집의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씨발새끼야 내가 오늘까지라고 했지?”
“제.. 제발 한 번만 봐주쇼. 내일.. 내일 갚을게”
“어따대고 반말을 지껄여!"
“야 이 새끼 죽여”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집 안에 은수가..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듣기만 해도 두려운 대화가 이어지다 죽여라는 말과 함께 비명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제발.. 제발 우리 은수.. 덜덜 떨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계단 난간에 기대 겨우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아냐 은수, 은수를 구해야해. 결국 손에 쥐고 있던 봉지를 놓고 집 안으로 달려가려던 찰나 누군가 뒤에서 내 입을 막고 손목을 붙잡았다. 역시 신은 없는 걸까.
눈을 떴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정신을 차리니 아까 세게 잡혔던 손목이 욱신거렸고 매일 아침 보던 풍경과는 다른 풍경에 놀라 누워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내려갔다. 그러고 보니 침대? 낯설었다. 평생 우리집엔 침대라곤 없었고 이불도 겨우 구해서 은수와 함께 덮었었는데.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방을 둘러보니 역시나 우리집이 아님을 알아채고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일어났네”
“아? 저 혹시.. 그날..”
“맞아. 그 날은 미안했다”
한동안 학교에 제대로 가지 못하고 있던 중 이 남자를 처음 만났다. 이웃인 건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보니 왕래는커녕 대화도 해본 적 없다. 늘 집 앞에서 멍청히 서 있던 나를 보고도 그냥 휙 지나치던 남자. 평소 같았으면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서서히 나도 지쳐만 갔다. 그녀석의 폭력에서 은수를 지켜야 했다. 쉽게 죽을 수도 없는 처지라 더 괴로웠고 나날이 약해져만 갔고 학교는 점점 더 먼 세상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웃긴건 이상하게 교복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학교를 제대로 다녀본 기억도 없으면서 친구 하나도 못 사귀어본 주제에 몇 번이고 찢겨졌던 교복을 늘 입었다. 왠지 그러고 있으면 평범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오늘도 어김없이 집 앞에서 시위하듯 서 있던 중 그 남자를 만났다. 일방적인 나의 시선을 피하듯 그가 쌩 지나치는데 나도 모르게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도와주세요. 나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에 놀라 입을 다물었는데 그가 한참을 망설이는 듯 하더니 결국 들어가라는 말과 함께 집 안으로 사라졌다. 역시나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구나.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그 날 그 기억은 트라우마처럼 나를 괴롭혔다. 아는 사이도 아닌데 배신을 당한 것도 아닌데 그녀석의 폭력보다 그 남자의 무시가 더 아프게 다가왔다. 우습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내 앞에서 서있었다. 마치 꿈처럼.
**
“우리 은수..”
여자애가 날 향해 절규하듯 내뱉은 말은 은수라는 이름이었다. 은수?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마 가족 중 한명이리라. 아까 복도가 시끄러워 현관문의 작은 구멍으로 살펴보니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여러명이 우르르 찾아와 잠겨있던 그 여자애 집의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걸 봤다. 그 집과 최대한 가까운 벽에 붙어 이야기를 들어보니 빚쟁이로 추정되는 사내인 듯 보였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은 생각에 잠깐 주저했지만 우선 그건 신경쓰지 않기로 하고 다시 귀를 기울였다. 곧 험한 욕지거리가 들리더니 이웃집 그 놈의 비명소리가 총소리에 묻혀버렸다. 다시 현관문의 구멍을 살펴보니 아직 검은 사내들은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은 듯 보였다. 그 때 덜덜 떨며 계단 난간에 기대 있는 그 여자애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지금 집으로 들어가면 백이면 백 죽음이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챈건지 여자애가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씨발,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현관문을 벌컥 열고 여자애의 입을 막고 집 안으로 데려왔다. 기절한 듯 보이는 여자애를 침대에 눕히고 입고 있던 후드를 덮어주었다. 왜 나서는 거야. 제기랄 많이 착해졌다 민윤기.
“은수가 누군진 모르지만.. 아마 죽었을 거다”
“아.. 안돼 은수야.. 우리 은수...”
늘 무표정한 얼굴만 보았던 여자애가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혹시 누가 들을세라 방문을 닫고 여자애에게 다가갔다. 특이하게도 이 여자애에겐 향기가 나지 않았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사람. 그래서 더 마음이 불편했다.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 예상 외로 손에 닿는 머리칼이 부드러웠다. 정신없이 울고 있는 이 아이를 달래주는데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불안하면서도 그녀를 위로하고 있는 손길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그 애가 체념한 듯 눈물을 멈추자 그제야 나도 쓰다듬던 손길을 멈췄다. 쓰다듬던 손길을 멈춘 손바닥의 느낌이 공허했다. 뭐라 말해줘야 할지 몰라 결국 겨우 건낸 말은 내가 들어도 참 한심했다.
“...이름이 뭐야”
눈물을 닦고 그 애가 고갤 들어 내 눈을 바라봤다. 그 눈이 아까 전보단 덜 슬퍼보였다면 단순히 내 착각일까.
“김.. 김탄소요”
“가족들 일은..”
“가족들 아니에요. 가족은 한 명 뿐이에요. 우리 은수”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너무 자책하지마라”
"....아저씨"
"오늘까지만 여기있다가 내일은 가"
"아저씨"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를 끌어안는 탄소 때문에 잠깐 숨이 멈췄고 그 짧은 순간, 난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현재 기계나 다름없는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일이 일어날 거란걸. 마치 그 날 그 때처럼. 속으로 작은 욕이 튀어나왔다. 제기랄. 서둘러 이 아이를 내보내야 한다. 두번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진 않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챈 듯 탄소가 날 껴안은 채 속삭였다.
"아저씨가 나 구해줬으니까"
"....."
"책임져요"
이 여자 위험해.
암호닉은 그냥 계속 신청받겠습니다! 원하시면 댓글로 써주세요
추천, 신알신, 댓글은 모두모두 대환영입니다! 그래야 제가 자꾸 글을 쓰고 싶어지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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