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매력 여왕 비극사 pro.
하나를 잃으면 둘을 갖고싶고, 둘을 잃으면 셋을 갖고싶은. 인간이란 참 욕심이 많은 동물이었다.
손 안에 있을 땐 관심조차 없던 것들이 사라지고 나서는 미친듯이 갈망하게 되는 욕구.
내가 가진 것들이 아닌 내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들만 바라보게되는 미련함.
부모님의 부도 후 내 이런 미련함을 채워주건 가족도 친구도 내 예상 속 그 누구도 아닌 그저 남준이었다.
파티에서 몇 번 얼굴만 마주친게 다인 그는 내가 힘들 때 찾아와 내 요구를 묵묵히 다 들어주었다.
돈을 달라면 돈을 주고 관심을 달라면 관심을 주던 그는 잊을만 하면 찾아와 선이 굵은 손으로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대신 넌 내 옆에 있어, 난 너에게 물직적인 만족을 줄테니 너는 내 나약함을 숨겨주는 존재가 되어 내 곁에 남아있어.
완벽한 주종관계였다. 나를 내려다보는 네 눈빛이 말했다. 너는 그냥 내 밑에서 좋은 사료를 먹으며 가르릉거리기만 하면 되는거라고.
그럼 나는 남준의 말대로 갸르릉거리며 오히려 더 그의 품에 파고들어 잔망을 부려댔다.
그와 나의 관계에서 내게 해가 되는 일은 없었으니까.
"오랜만에 만나서 이딴말이라니,
내 천성이 그렇긴 하지만 너무한 거 아니야?"
내 말에 미안하다며 얕게 웃어보인 남준이 앞 쇼파에 자리 잡고 앉았다.
오래토록 연락이 없던 네 덕분에 오랜만인 만남이 퍽 반가웠다. 만날 때마다 커지는 것만 같은 네 키가 내 어깨를 잡아 누르는 듯 했다.
예전과 달리 헐벗겨진 옷차림의 나와, 변함없이 각 잡힌 정장에 깨끗한 구두를 챙겨 신은 네 모습.
점점 아래로 떨어지는 것만 같은 나와, 점점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비상해 가는 것 같은 네 모습에 괜히 심술이 났다.
돈만으로도 만족되던 미련함이 점점 더 높은 곳을 탐하고 있었다.
"20퍼센트"
"뭐?
"이번 일 제대로 성공시키면 내 지분 20퍼센트 준다고"
"..."
"그 정도면 너도 포기할 수 없는 딜일텐데?
남자 몇명정도 꼬시는거야 너한테 일도 아닐거고, 그냥 거저먹기로 준다는 거랑 뭐가 달라"
"..."
"해 줄거지?"
명령만 내릴 줄 알았던 네가 어울리지 않는 표정으로 부탁해 오는 모습에 너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
천하의 김남준이 손해보는 장사를 하는 스타일은 아니고, 왜 저렇게 안달이 나셨을까.
빨라진 말투와 부산스러운 손가락을 보며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너도 아직 멀었구나 김남준.
주변에 방해되는 적들을 다 처리하겠다는 계획임이 뻔했다.
회사를 이어나갈 수 있는 후계자들을 다 처리하고 너 혼자 정상 위에 서 있겠다는,
욕심이 많은 너와 어울리는 참 이기적인 생각.
날 너무 쉽게 봤다. 아님 눈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급하거나.
"남준아"
"..."
"왜 이렇게 겁을 먹었어"
"..."
"나 네 부탁 거절 못한다는 거, 알잖아"
꼬았던 다리를 풀며 착한 척 웃어보였다. 아직까지 나는 네 편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아직까지.
거짓은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네 부탁을 거절할 마음이 없었으니까. 현재의 나에겐 저 20퍼센트의 지분보다 네 신뢰가 더 필요했다.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너를 넘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내 발밑에 고개를 조아린 그런 화려한 그림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너의 얼굴이 우스웠다.
그렇게 쉽게 감정을 내비춰서 어떻게 이까지 올라온건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정보는?
내가 아무리 용해도 적진 가는데 총은 챙겨줘야지"
관심 없는 척 붉게 칠해진 손톱을 만지작 거리며 속으로 날을 세웠다.
어쩌면 정말 좋은기회일지 몰랐다. 대기업 후계자 넷에 김남준.
짙게 바른 릭스틱 사이에서 높은 환호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잘만 굴려먹으면 일이 쉽게 풀릴 수 있겠다.
시선을 내게 고정시킨 채 서류를 뒤적거리던 네가 네 장의 사진을 꺼내들었다.
어느새 날카로워진 눈에 온 몸이 긴장한 듯 빳빳이 멈춰섰다. 일을 할 때의 김남준은 언제봐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민윤기, 23살. S그룹 1남 1녀 중 첫 째.
성적 흥미에 빠져 살아. 아침에 눈 뜨고 눈 감는 순간까지 클럽 안에 죽치고 앉아있을 정도로 한심해.
근데 또 두뇌회전은 무지하게 빨라서 무시할 수 없는 것도 민윤기야.
맨날 노는 것 같은데도 중요한 순간엔 딱 치고 빠지는 타입. 한마디로 진짜 재수없는 타입이지.
여자라면 질릴정도로 만나봐서 그런지 웬만한 흥미거리 아니면 여자로 여겨주지도 않는다더라."
"음.."
"그리고 들리는 얘기들에 의하면 민윤기가 망가진 이유가 여동생이랑 연관이 있는 것 같아.
파티에서 분위기 메이커라 불리는 애가 여동생 얘기가 나오기만 하면 싹 굳어버리거든.
저번엔 욕까지 휘황찬란하게 내 뱉어주더라. 여동생이 그 일에 연관이 있든 없든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한 거 같아.
그렇게 심한 욕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다니까."
장난스레 웃는 남준을 마주 보며 나도 함께 웃어보였다.
사진 속 웃고 있는 하얀 얼굴이 그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다.
병실에 누워 하루하루 죽어갈 것 같이 병약하게 생겨서는, 성격 하나는 마음에 드네.
사이가 좋지 않은 오누이라. 그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내가 꼬실 남자를 동생이 채가는 일은 없을테니까.
클럽을 자주다니며 흥미를 추구하고, 여동생과 사이가 좋지 않다.
여자한테 데인 적이 있나? 아님 어머님이 좀 그런 쪽이라던가.
이런 케이스를 많이 본 편은 아니라 가늠하기 힘들었다.
"얘는 박지민, 21살. C그룹 2남 중 차남.
그냥 딱 한마디로 예술가야. 그림에 빠져 살아. 화실에 침대 갖다 놓고 하루종일 화실에 붙어산다고 하더라.
그리고 케이스가 분명해. 자기가 가진 게 하나도 없어. 부모님이 형한테 모든 기대를 쏟아 붇는 터라 혼자 찬밥신세야.
어쩌면 화실에서 생활하는 게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그런다는 소문도 있어.
예술에 죽고 예술에 살아서 그런지 인간관계도 엉망이야. 주위에 친구가 하나도 없어.
파티에 잘 나오지도 않아서 C그룹엔 아들이 한 명밖에 없다고 아는 사람들도 있어"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얘 형이 아닌 박지민을 경계하는 이유는.
형이 얘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개망나니거든. 어렸을 때 이 형이랑 친했어서 잘 알고있어.
강간에 폭력에 절도에, 뭐 하나 따지는 거 없이 골고루 해 쳐 잡수고 계셔.
어찌해서 잘 숨기고 다니기는 하는데. 분명 몇 년 안에 터질거고, 그럼 회사는 당연히 박지민한테 넘어갈거야.
박지민이 인간관계가 별로라해도 사고치고 다니는 편은 아니거든"
얼굴은 귀염상인데 사진 속에서도 굳어있는 표정을 보니 딱 성격이 드러났다.
오동통한 볼 사이에 있는 꾹 다물어진 입술과 노려보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
아, 이런 성격 힘든데. 이런 애들은 여자든 뭐든 사람한테 관심이 없단 말이지.
이런 타입은 미인계가 먹힐리도 없고, 뭐가 관심을 가져줘야 꼬시든 하지.
집안 쪽을 건들여볼까? 쟤 약점을 알면 그나마 시선 돌리기 쉬울텐데.
일단 만나기 전에 그림 공부 좀 하고 가야겠다.
관심사가 통하는 여자는 언제나 매력있는 법이니까.
"얜 김태형, 마찬가지로 21살. T그룹 외동.
이 중에서 제일 융통성이 없어. 돈에대한개념 없이 무조건 다 쓰고 나중에 생각하는 성격이랄까.
쓸데 없이 인형 수집에 빠져서 미친듯이 쏟아붓는데도 외동이라 그런지 부모님들이 끔찍이 아껴.
돈 떨어지면 채우고 또 채우고. 하는 일 없이도 수중에 있는 돈이 가장 많다고 할 수 있지.
김태형이 어렸을 때 부모님이 잘 못한 게 있어서 싸고 도는 거란 얘기도 있는데
뭐, 소문은 아니 땐 굴뚝에서도 나니까 너무 신경쓰진 마."
"..."
"그리고 얘 만나면 절대 얘 말에 거절하지마.
거절 당하는 순간 애가 싹 돈다고 하더라고.
기분 나빠도 무조건 숙이고 들어가서 하고 싶은 거 다 해줘.
그래야 그나마 위험한 순간은 피할 수 있을테니까"
사진 속 준수한 얼굴에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딱 내 타입인데, 성격이 좀 아쉽다.
남준이 신경쓰지 말라곤 했지만, 그의 애정결핍같은 증세가 부모님과 관계가 있는 게 분명했다.
거절을 싫어하고 인형수집을 좋아한다.
인형수집은 대체로 아주 어린 아이들이 가지는 취미다.
이런 취미를 21살이 되어서 가지고 있다는 건 어렸을 때 욕구가 제대로 충족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거절을 싫어한다는 건 아주 예전부터 많은 거절을 받아왔다는 건데.
어렸을 때 인형을 사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을 리도 없고,
대기업 외동 아들 말을 누가 그렇게 쉽게 거절할리도 없고.
분명 부모님 쪽에 문제가 있다.
조금 더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전정국, 20살. K그룹 3남 중 막내.
네가 제일 조심해야 할 애야. 내가 너한테 제일 기대를 거는 것도 이 부분이고.
K그룹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다음 상속이 당연히 전정국한테 갈 거라고 예상할만큼 애가 치밀하고 똑똑해.
눈치는 더럽게 빨라서 사람보면 그 날 아침에 뭘 먹었는지까지 다 아는 애고, 분위기 띄워주는 척 사람 갉아먹는 게 취미인 녀석이니까
안당하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
특징이라면, 하루종일 집 안에서 뭘 하는건지 집에서 나오는 일이 드물어. 물론 집 안에 초대된 사람도 지금까진 아무도 없었고.
집에 들어가기만 하면 무조건 성공이라고 볼 정도로 집이 베일에 싸여져 있어"
"..."
"그리고 이 건 내 예상인데, 전정국은 형들이랑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아.
파티에 나올 때마다 매일 친한 척 하기는 하는데, 뭔가 전정국 혼자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랄까.
형 둘은 같이 사는데 혼자 떨어져 사는 것도 이상하고,
한 달에 한번꼴로 형들이랑 만나서 놀기는 하던데 그 것도 너무 주기적이라 의심이 간달까.
뭔가 보여주기 위해서 만나는 것 같은 그런거"
사진 속 웃고있는 얼굴이 어색했다. 잘 숨기는 듯 했지만 자세히 보면 보였다.
피곤에 쩔은 듯한 얼굴에서 입과 눈만 인조적으로 웃고있었다.
이상하리만치 검은 머리와 검은 정장이 그의 성격을 대변하는 듯 했다.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에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김남준이 두려워하는 인물. 보통이 아님은 당연했다.
형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라. 김남준의 예감은 틀리는 적이 별로 없었고 그에 따르면 이건 거의 진실임이 분명했다.
그 두 형들이 전정국을 질투한건가? 상속이 그리 넘어갈 걸 예상해서?
아니, 그럴리 없었다. 그렇다면 전정국이 혼자 떨어져 살리 없다.
전정국을 경계했다면 더욱 자신들의 옆에 붙여놓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겠지.
왜지? 왜 전정국은 혼자 버림받게 된거지?
아니, 혹시 그 반대로 전정국이 그 둘을 버린건가?
"탄아"
사진 네 장을 지갑에 넣다말고 갑작스레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남준을 바라봤다.
짙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쇼파 등받이에서 등을 때고 그를 보며 들을 준비가 되었다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나 사이에 작은 바람이 일었다.
"돈 많은 사람들이 제일 억제하지 못하는 욕구가 뭔지 알아?"
"...음, 성욕?"
"아니"
"뭔데?"
"소유욕"
그의 말에 탄식을 내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돈을 가져본 사람들은 포기를 몰랐다.
한 없이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하고 또 추구했다. 지금의 나처럼.
예전보다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려 발버둥치는 내 모습이 눈 앞을 스쳤다.
꼴 사납다.
"어디서 구르고"
"..."
"어디서 다치든"
"..."
"끝은 내 옆자리라는 거"
"..."
"잊지마"
낮게 깔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네가 겨우 한모금 마신 차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달달한건 내 타입이 아니라니까. 깨끗이 비워진 내 찻잔을 바라본 네가 피식 웃었다.
아무렇지 않게 책상 쪽으로 걸어가 전화기를 집어 든 네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중요한 손님 나가시니까 신경써서 배웅해주세요'
웃음기 가득한 네 목소리에 잔뜩 긴장돼 있던 어깨가 풀렸다.
일종의 경고였다.
네가 나에게 중요한 존재일 때 잘하라고.
신경 써줄 때 알아서 잘 처신하라고.
어쩌면 너는 내 그림을 다 꿰뚫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껀 내가 챙겨야지"
역시 가장 위험한 건 김남준, 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