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아르(noir)
w 려안
: 검은. 음산한. 어두운.
증오는 검다.
증오는 강하다.
증오는 누아르의 원동력이다.
" 전정국.... "
" .... "
" 괜찮..아..? "
기대도 안했지만, 역시나 전정국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사실 쓰러지지않고 서있는게 감사 할 정도로, 전정국은 위태로워보였다. 항상 든든하고 기대야할 것 같던 전정국을 처음으로 감싸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지금은 그에게 내가 필요한 것 처럼 보였다. 사람으로 인한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된다고 한다. 상처받은 마음은 계속해서 보듬어주어야한다. 당연하지만 어려운 일들. 전정국은 자신 보다 한참이나 작은 나의 어깨에 천천히 이마를 묻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팔을 들어올려 그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그렇게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문득 들었던 생각은, 과연 이 아이는 우는 법을 알기나 할까. 맘놓고 울어본적은 있을까. 누아르라는 것이 전정국의 감정까지 메마르게 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정국아 "
" ... "
" 자는거지? 나 나갈게..쉬어.. "
" .... "
나는 전정국을 숙소로 데리고 들어온 뒤 그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것을 확인한 다음 말했다. 전정국은 한쪽 손을 이마 위에 올려둔 채,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불을 마저 덮어준 뒤 방을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지만 전정국이 빠르게 내 손목을 낚아채는 탓에 그대로 그의 힘에 이끌려 원래 서있던 곳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예상치못한 그의 행동에 놀란 내가 전정국을 내려다보았지만 전정국은 여전히 잠에 든 사람 처럼 눈을 감은 채 누워있었다. 곧 전정국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 가지마 "
" ... "
" 가지마.. "
" .... "
" ..... "
" 안갈게 "
결국 나는 전정국이 잠이 들 때 까지 그의 옆을 지켜야 했다. 눈을 곤히 감고 잠들어있는 전정국의 얼굴을 보니, 평소에는 까칠하고 차갑게 행동하는 탓에 보이지 않던 십대의 귀여움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긴. 여전히 그는 어렸고 철없는 고등학생이었다. 차라리 전정국이 힘들면 힘들다고 말이라도 하는 성격이었다면, 싫을 때는 투정 같은 것도 부릴 줄 아는 성격이었다면 이렇게 까지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게 전정국에 대한 생각에 빠져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일을 나갔던 멤버들이 들어오는 듯,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전정국이 깨지않도록 소리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 잘 다녀 왔어? "
그들을 반기는 나의 목소리에 정호석, 김남준, 김석진, 민윤기, 박지민, 김태형. 여섯명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꽂혔다.
" 누나 배고파요 "
그 중에서도 박지민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배를 두드리며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06. 친구
" 마침 장보러 가려 했는데, 같이 갈 사람? "
정호석은 내가 전정국의 방에서 나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않는 듯,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지만 다행히 내게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아무튼. 첫 임무 끝 낸 기념으로 맛있는거 해주려고, 장 좀 봐야될 거 같아. 나의 말에 더운 듯 입고있던 반팔티를 펄럭거리던 김석진의 시선이 가장 먼저 나를 향했다. 박지민과 김태형은 아까 부터 초롱초롱한 눈빛을 유지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신발을 벗으며 넥타이를 풀러내던 민윤기도 힐끔 나를 흘겨보았다. 데려다줄까? 김남준이 무거워 보이는 까만 색 가방을 쇼파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지만 그의 말은 가장 빨랐던 정호석의 대답에 먹혀들어갔다.
" 선배, 그런건 당연히 나랑 가야되는 거 아닌가? "
" 음..김남준...그럼 나 호석이랑 갈게! "
당연하다는 듯 차 키를 챙겨드는 정호석에 나는 김남준에게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김남준은 별 상관없다며 가방에서 핸드폰과 이어폰을 꺼낸 뒤 방으로 들어갔다. 다른 멤버들도 모두 각자의 방으로 향했고 정호석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얼굴에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었다. 잘다녀오라는 박지민의 우렁찬 목소리를 뒤로하고 정호석은 일층 실내 주차장에 세워둔 빨간 승용차로 나를 데려갔다. 이거 너 차야? 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다. 형사 일을 할 때는 그가 운전하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정호석이 문을 열어준 차에 올라타며 물었다. 언제 부터 운전했어? 그가 시동을 켜고 백밀러를 매만지며 말했다.
" 누아르 했을 때 부터니까, 한 삼년 됐나? "
" 그렇구나..근데 삼년 전 부터라면..너는 초창기 멤버였던거야? "
" 김남준 녀석 따라 된거니까, 그럴 수 밖에요. "
김남준을 따라서? 내가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호석을 바라보자 정호석이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김남준이랑은 거의 초등학생 때 부터 친구였어요. 남준이 아버지 돌아가신 뒤로 녀석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어느 날 부터 모습도 잘 보이지 않길래 걱정되는 마음에 김남준 녀석 뒤를 따라다니다가, 뭐 어쩌다보니. 정호석이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는 아닌지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 둘이 전 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는 건 처음 알게된 사실이라 나는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호석아. 내가 나름 진지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안전벨트를 채우던 정호석이 힐끔 나를 바라본다.
너는 후회안해? 누아르 들어온거.
내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지만, 정호석의 반응은 예상과는 달랐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 후회라..., 솔직히 전에는 몇번 하기도 했는데 "
" ..근데? "
" 근데, 뭐. 작년 부터는 그런 생각도 안해본거 같아요. "
정호석은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생각났는지 동그란 광대를 뽐내며 웃어보였다. 기분 좋아보이는 그의 표정에 덩달아 신이난 내가 궁금하다는 듯 정호석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물었다. 왜? 작년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긴거야? 정호석은 왼 손으로만 핸들을 잡은 채 놀고있던 오른 손은 나의 머리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진짜 모르겠어? 잘 생각해봐요. 내가 모르겠다는 듯 아무런 대답도 하지않자 정호석이 답답하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여튼 공부 못 했던거 티내는 것도 아니고. 그의 말에 내가 버럭하자 정호석이 다시 예쁜 웃음을 지어보였다. 눈치가 그렇게 없어서 무슨 형사를 한다고, 그냥 내가 말해줘야지.
" 누아르 안했으면, 김여주 못 만났을 테니까 "
" ,,, "
" 그게 다인데. "
정호석은 벙찐 나를 쳐다보며 여전히 보기 좋은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다.
목숨걸고 하는 일 치고는 이유가 너무 단순한거 아니냐? 하여튼 단순 무식하다니까.
어색한 분위기를 싫어하는 내가 너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너를 만나게 돼서 기뻐.
그에게 직접 말하지는 못 했지만, 나는 마음 속으로나마 답했다.
***
" 아~ 진짜 하지말라고 "
" 어쭈 이제 은근히 말놓는다? "
" 요.. "
우연히 장난감 코너를 지나가던 중 눈에 띄는 토끼 머리띠를 집어다 정호석의 머리에 냉큼 씌웠더니 저 난리이다. 얼마 전 부터 조금씩 느꼈던거지만, 이제 선배도 아니라 이건가? 어느 순간 정호석은 내게 말을 놓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너 보다 나이 많거든? 내가 이를 꽉 물고 그의 등에 힘을 주어 주먹을 꽂았지만 정호석은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는지 반응이 없다. 내가 씩씩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가자 정호석이 카트를 밀며 금세 내 옆으로 다가왔다.
" 화났어요? "
" 화는 무슨. "
" 에이~ 내가 선배 한 두번 보는 것도 아니고. 이정도도 모를까봐? "
" .... "
" 탈래? 아니, 탈래요? "
정호석이 한 쪽 눈썹을 꿈틀 거리며 턱으로 카트를 가리켰다. 그런 정호석의 행동에 내가 어이없다는 듯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야, 내가 나이가 몇인데. 됐거든? 정호석과 함께 있으면 화를 오래 낼 수가 없었다. 이런 것도 능력인지 그는 나를 항상 웃게 만들었다. 정호석은 오른 손으로 카트를 밀며 왼 쪽 팔은 내 어깨에 둘렀다. 왜이래, 팔 안빼? 내 말이 들리지 않는 지 정호석은 내 어깨에 두른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 나와 거리를 꽤나 가까이 하며 말했다.
"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
" ... "
" 신혼부부 같다 "
....뭐?
그치?
또 반말.
아니 그쵸?
혹시 김치 싸다구라고 알아? 마침 옆에 김치를 파네.
***
장을 보는 것이 꽤나 힘이 들었는지 정호석은 내가 요리를 하는 동안 쇼파에 누워 단잠에 빠져있었다. 박지민과 김태형은 거실 티비에 게임기를 연결해서 하고 있었고 그런 둘을 민윤기가 한심하다는 듯 보고있었다. 김석진은 넓은 거실에 놓인 운동기구를 하다가 간혹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내게 칭찬을 해주었다. 조직원으로 데리고 온 거지 가정부로 데리고 온 건 아니었는데. 라는 말을 하며 김남준이 어디서 구해온 건지 음식을 하는 나에게 앞치마를 건네주었다. 나도 가정부 하고싶은 생각은 없는데? 나는 능숙하게 김남준에게 답하며 앞치마를 건네받았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무채를 썰기 위해 칼을 뽑아드는데 머리 위로 쓱 하고 나타나는 의문의 팔에 고개를 올려보니 전정국이 컵을 꺼내기 위해 찻장을 열고 있었다.
" 어..일어났어? "
" ..응. "
" ...조금만 기다려! 내가 밥,.앗! "
전정국을 올려다보며 말을 하는 탓에 실수로 칼에 손을 베어버린 내가 칼을 놓치며 짧게 신음했다. 놀란 전정국의 두 눈이 순간 크게 떠졌고 빠르게 상처가 난 나의 손을 낚아채더니 피가나는 두번째 손가락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나의 피를 빠는 전정국에 더욱 놀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쳐다만 보는데 잠시후 전정국이 인상을 쓴 채로 내 손을 자신의 입 속에서 빼냈다. 피맛나. 전정국이 이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를 보며 말했다. 내가 정신이 나간 사람 처럼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서있기만 하는데 전정국이 그런 나를 밀쳐내며 말했다.
" 비켜 "
" ... "
" 내가 할게 "
" ... "
" 약바르고 와. "
할 줄 알아?
칼질이 다 거기서 거기지.
왜인지, 그의 대답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 그러게 칼 질 하는데 딴데를 왜 보냐. 바보야? "
민윤기가 구급상자를 건네주며 퉁명스럽게 뱉었다.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닌지라 내가 아무 말도 못 하는데 내 옆에 앉아있던 김남준이 그런 민윤기에게 말했다. 다른 거 하다가 다친 것도 아니고 우리 밥 해준다고 그런 애한테 너무 뭐라하지마요. 김남준의 말에도 민윤기는 마음에 안든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내 곁을 뜨지 못하고 맴도는 그의 행동에서 나를 걱정한다는 것 쯤은 읽어낼 수 있었다. 김남준은 민윤기가 가져다준 구급상자에서 반창고와 연고를 꺼낸 뒤 내게 손바닥을 펼쳐 내보였다. 응? 내가 뭐냐는 듯 김남준에게 묻자, 손 달라고. 김남준의 말에 나는 냉큼 그에게 다친 손을 내밀었다.
" 많이 아픈가보네 "
" 아니야 괜찮아.. "
" 완전 얼이 나간 표정이구만, 괜찮기는. "
그 이유는 아마 전정국이 내게 한 행동이 꽤나 충격적이었던 탓이다. 아직도 아까 그 장면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물론 내가 모태솔로라는 것도 부수적인 이유가 될 수 있다.
고등학생 따위 한테 설레이다니, 이거 범죄아닌가.
괜히 피식 웃음이 났다.
***
" 민윤기.....자? "
나를 포함한 여덟 명이 겨우 밥 먹기를 끝내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조용해졌을 무렵. 일찍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에 몸을 눕혔지만 잠이 오지않는 탓에 멀뚱멀뚱 천장만 바라보는데 갑자기 아까 마트에서 사온 맥주 생각이 났다. 맥주가 땡겨 주방으로가 냉장고에 있는 맥주 한 캔을 집어 들다가, 혼자 먹기는 아쉬워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전정국은 미성년자인데다가 둘이 술을 먹을 수 있을 만큼 친하다고 여겨지지 않았고, 왜인지 박지민과 김태형이 함께 쓰는 방은 들어가면 안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남준도 같이 술을 먹기에는 어색함이 맴돌거 같다는 생각에 정호석과 민윤기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가 민윤기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노크를 해도 아무런 대답이 없자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어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 ....뭐냐. "
" 안자네? "
" 왜 그렇게 있어. 들어와. "
그의 말에 나는 한 걸음에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민윤기에게로 달려갔다. 민윤기는 습관인 것 처럼 어김없이 인상을 썼고 내가 들고있는 맥주와 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맥주 마실래? 내가 웃으며 말하자 민윤기가 보란 듯이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에이, 아직 1시 밖에 안됐는데? 내가 말하자 민윤기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안먹을 거야? 그럼 나 정호석한테 간다. 내가 입술을 내밀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민윤기가 맥주 한 캔을 빠르게 뺏어 들었다. 가서 의자 가져와. 그의 말에 내가 어벙벙하게 서있기만 하자, 계속 그렇게 서있을거야? 그제서야 나는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 캬아, 얼마만에 마시는 술이야. "
" 여자가 술 좋아하면 별로야. "
내가 눈까지 질끔 감으며 목구멍을 타고내려가는 맥주 맛을 음미하는데 민윤기가 그런 내게 말했다. 너한테 잘 보일 생각 없거든? 내가 입술을 비죽이며 말하자 민윤기가 미소를 지어보인다. 나도 너 잘 봐줄 생각없는데? 민윤기의 말에 딱히 받아 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치, 말이라도 못하면. 내가 불만스럽다는 듯 그에게 말했다. 민윤기는 그런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 없이 맥주를 한모금 들이켰다.
" 근데 방금 뭐 보고 있던거야? 설마 야.. "
" 시끄러. 그때 너가 설치했던 카메라 화면 보고있던 거니까. "
" 아..그거 계속 돌려보고 있구나. 뭐 건진거라도 있어? "
" 아니, 아직. "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남은 한 모금을 마저 입안으로 탈탈 털어넣었다. 역시 한 캔으로는 부족한 거 같아. 내가 벌떡 일어서며 말하자 민윤기가 인상을 쓴 채로 나를 올려보며 말했다. 시끄럽고 그만 가서 자라. 나는 그의 말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냉장고에 남은 맥주를 몽땅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주름 생긴다. 여전히 인상을 쓰고있는 민윤기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책상 위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야 천천히 마셔, 그러다 취해. 한 캔을 따서 바로 입으로 가져가는 나에게 민윤기가 말했다. 나 안취하니까 걱정마.내가 자신있게 말하며 나를 말리는 민윤기의 손을 밀어냈다.
" 야. 야 김여주. "
" ...으,응... "
" 하.....진짜, 야. 니 방 가서 자라. "
" 나..방에 좀 데려다 줘.. "
내가 빨개진 얼굴을 바닥으로 떨구며 눈을 꿈뻑거리는데 민윤기가 나의 양쪽 어깨를 잡고 흔들어댔다. 우울하다가도 금세 기분이 좋아지고. 평소에도 그런 기미가 없지는 않았지만 술을 먹으면 유난히 조울증이 심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혼자 몸을 가누기 힘들어 방으로 데려다달라는 나의 말에 민윤기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아아~ 윤기님 부탁이에요. 술기운을 빌려 귀여운 척을 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싫어' 였다. 에이씨. 차마 대놓고 욕은 못하고 소심하게 신경질을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데 순간 몸이 휘청하며 기울어졌다. 곧 나를 받쳐준 민윤기 덕분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민윤기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부축하며 구석진 내 방으로 향했다.
" 앞으로 집에 술 사올 생각하지마 "
" ....싫어어 "
" 여자애가 이게 뭐냐. 완전 진상이네. "
민윤기는 나를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 너무해. 내가 그에게 말하자 민윤기가 역시나 인상을 쓰고 나를 내려본다. 또 인상쓰네, 그것 좀 고칠 수 없어? 나의 물음에도 민윤기는 내게 이불을 덮어주며 딴 소리를 한다. 얼른 자라. 그런 다음 방을 나가려는지 몸을 돌려 내게 등을 보였다. 그런 그에게 잘가라는 말을 하려는데 민윤기가 다시 나를 향해 몸을 틀었다. 그리고 침대에 취한 몸뚱이를 맡기고 멀뚱히 자신을 보고만 있는 나에게 말했다.
" 김여주 "
" 응..!? "
" 근데 왜 호석이 한테 안가고 나한테 온거냐. 술먹자고. "
예상치 못 한 질문에 나는 한참 뜸을 들였다. 내가 왜그랬지? 내가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는데 민윤기가 말하기 싫으면 됐다며 다시 문을 향해 몸을 돌렸고 그가 문고리에 손을 가져가자마자 내가 생각났다는 듯 높은 억양으로 말했다.
" 우리 친구잖아 "
" ...... "
" 민윤기, 우리 친구잖아. 그치? "
***
친구.
분명 친구라는 단어는 증오라는 단어 없이는 홀로 떠올릴 수 없는, 그런 말이었다.
공부하는 것이 힘들지 않냐며 항상 나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던 존재들. 전교 1등은 뭐든 용서가 된다며 나에게 온갖 아부를 떨었던 그런 존재들이 한때는 내가 친구라고 부르던 사람들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항상 같이 놀자는 말에 공부를 해야 된다며 거절을 했음에도 내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그들에게 나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했다. 저녁시간 마다 내 주위에 몰리는 친구들에게 나는 돌아가며 질문 받은 문제들을 가르쳐주었다. 물론 그런 나에게 공부 잘하는 것으로 유세를 부린다는 뒷담화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그런 것 하나하나에 신경을 쓸 만큼 여유롭지는 못했다.
그렇게 조용히 학교 생활을 하던 중, 모두들 예민할 시기인 3학년의 입시 기간이 다가왔다. 민윤기 너는 대학 어디 쓸거냐? 당연히 서울대인가? 아니, 외국으로 나갈 수도 있겠지. 정작 아무 말도 하지않는 내 주위로 몰려있는 아이들이 마치 아는 것이라도 있다는 듯 하나 둘씩 각자의 생각을 뱉어댔다. 야 근데, 그 소문 들었어? 한 아이의 말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왜, 심화반에 김재근이라는 애 있잖아. 그의 입에서 나온 '김재근'이라는 이름은 꽤나 의외였다. 그 아이는 존재감이 없을 정도로 조용한 편이라 애들 사이에서 거론되는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걔네 아버지가 사업 실패해서 대학 못 간다더라.. "
" 헐...완전 불쌍해. 걔도 공부 되게 잘하지 않았냐. "
" 그러니까. 아마 대학 말고 바로 취직할거 같다는데.. "
대체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듣고 오는건지, 또 그걸 왜 퍼트리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수능이 백일도 안남은게 사실이라면, 그렇게 남의 인생에 관심을 둘 시간에 자리에 앉아서 책을 피는 것이 맞았다. 윤기 너는 알고 있었어? 왜 반응이 없어? 말하던 친구가 나의 무미건조한 반응에 놀란 듯 물었다. 어? 아니..그런 건 아니고. 내가 말을 얼버무리는데 화제 거리의 주인공인 김재근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괜히 그에게로 시선이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걷는 김재근을 빤히 응시하는데 제 자리에 앉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혹시 김재근이 기분이 상하기라도 할까, 나는 급하게 시선을 돌려 억지로 친구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는 듯한 김재근의 시선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 윤기야 너는 저녁 안먹어? "
" 응. 한동안 계속 안먹을 거 같은데, 너네 끼리 먹어. "
수능이 코 앞에 다가온 시점. 나는 저녁 밥을 포기하면서 까지 공부에 몰두했다. 수시로 대학을 가는 아이들 또는 수능을 포기한 아이들로 넘쳐나는 학교는, 저녁시간이면 텅텅 비어있었다. 그렇게 간만에 평화가 찾아온 조용한 교실에 혼자 남아 아까 마무리를 하지 못한 수학책을 가방에서 꺼내들었다. 배가 고파서인지, 유난히 집중이 안되는 탓에 들고있던 샤프만 연신 돌려대며 골똘히 문제집에 시선을 집중시키는데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김재근이 뒷 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왔다. 김재근도 저녁을 먹지 않는지 터벅터벅 자신의 자리에 가서 자연스럽게 책상에 몸을 엎드렸다. 아마 소문이 사실이라면, 어려워진 가정형편 때문에 끼니를 거르는 것 같았다.
공부한다고 굶지말고, 밥은 꼭 사먹어.
아침에 교복 마이 주머니에 만원짜리 몇 장을 넣어주시며 하셨던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의미없이 돌리던 샤프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김재근이 무기력하게 엎드려있는 책상 앞에 다가갔다. 저기.., 내가 김재근의 어깨를 조금씩 흔들며 말하자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나를 올려보았다. 너 밥 먹었어? 김재근은 나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안먹었으면 가서 사먹고와. 나는 배가 안고파서. 내가 마이 주머니에서 만원 짜리 한장을 빼내며 그에게 내밀었다. 김재근은 한참이나 말없이 내 손에 들린 만원짜리를 보고있다가, 갑자기 기분 나쁜 웃음을 지어보였다.
" 아..내가 전교 1등 공부하는데 눈치없이 방해를 했나? "
" 뭐? "
" 돈 줄테니까 꺼져라 이거야? "
" 그게 무슨.. "
" 씨발, 그래도 넌 대학이라도 갈 수 있지! 나는, 나는.. "
김재근은 과격하게 몸을 일으키며 내 멱살을 잡아올렸다. 그의 행동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나는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한 채 나의 멱살을 잡고있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거 놔. 내가 그를 빤히 응시하며 말하자 김재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더욱 흥분을 잠재우지 못했다. 너가 그렇게 잘났어? 어디서 명령질이야. 그는 눈알이 빠질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곧 김재근은 온 힘을 다해 나의 목을 졸라왔다. 어차피 죽고싶었는데 잘됐네, 나 혼자 죽기는 억울하지. 김재근은 완전히 미친 사람 처럼 행동했고 더이상 참으면 안될 거 같다는 생각에 나는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 겨우 그를 떨어트려놓은 내가 다시 김재근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 .... "
나의 주먹에 맞은 김재근이 힘없이 날라갔고 그대로 큰 소음을 내며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안하는 그에게 다가갔지만, 머리에 출혈이 생겼는지 붉은 피가 흘러내리며 옆 책상에 걸려있던 가방의 밑단을 적시고 있었다. 김재근, 정신차려. 내가 그의 뺨을 쥐고 흔들어보았지만 그는 눈을 뒤집어 깐 채 완전히 죽은 사람 처럼 보였다. 심장이 쿵쿵 뛰어왔다. 죽지마, 김재근. 죽지마. 나는 출혈이 심한 김재근의 머리통을 감싸안았다. 덕분에 역겨운 피가 교복을 온통 적셨다. 김재근의 피가 멈추기를 바라며, 나는 한없이 정신이 나간 사람 처럼 움직일줄 몰랐다.
" 내가 민윤기 맨날 그렇게 공부만 하다가 언제 한번 미친다고 했잖아 "
" 머리 좋은 애들이 사이코일 가능성이 크다며. "
" 솔직히 그 새끼 존나 예민하잖아. 공부하는거 방해했다고 죽인거 아니야? "
" 미친 개오바다. 존나 소름돋아. 걔랑 친하게 안지내길 잘했네. "
" 와 나는 엄청 붙어다녔는데, 그동안 나도 죽을 뻔 한거야? "
친구. 그래, 내가 친구라고 불렀던 무리들. 그 무리들은 김재근이 죽은 이후 악날하게 나에 대한 거짓 소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김재근의 사망 원인은 뇌출혈이었다. 나무 장판이 아닌 단단한 돌로 이루어진 교실 바닥에 그대로 머리를 부딪히며 즉사했다고 했다. 재판이 이루어졌던 한달 동안, 나는 엄마의 눈물과 친구였던 놈들의 거짓말 속에서 지독한 하루하루를 보내야했다. 재판에서 무죄가 나온다고 해도, 이미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은 없었고 학교에는 내가 돌아갈 자리가 없었다. 나는 편지 한통을 남겨놓고, 그렇게 집을 나왔다. 내 안에 있는 증오들이 사라지면. 아니, 적어도 이것이 누구를 향한 증오인지만 알게 되면, 그때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편지를 남긴 채.
근데 이상하게도 방금 김여주의 입에서 나온 '친구'라는 말은 꽤나 듣기 좋았다.
방으로 돌아와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참이나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답을 구해낼 수 있었다.
그들은 친구라는 가면을 썼을 뿐, 나의 친구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는 친구들을 증오했던 것이 아니다.
다만, 가면 뒤에 숨은 괴물들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 것 뿐이었다.
정말 그것 뿐이다.
***
" 받아. "
아침 6시. 무작정 나를 끌고 나오는 김남준에게 이끌려 비몽사몽한 채로 거실로 나왔다. 이미 다른 멤버들이 쇼파나 바닥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자신의 옆에 앉힌 김남준이 대뜸 내게 까만 색 권총을 내던지며 말했다. 일단 받으래서 받긴 했는데, 갑자기 총은 왜주는거야? 내가 참지못한 하품을 하며 김남준에게 물었다. 초조한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김남준이 턱을 받친 채 답했다. 오늘 부터가 진짜야. 뭐가 진짜라는 거야? 아직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내가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김남준이 나를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 나도 이렇게 빨리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오늘 부터 진짜 암살 작전에 돌입한다. "
" ...암살? 그러면 뭐..사람도 죽이고 그러는거야? "
김남준은 대답 대신 바퀴가 달린 화이트보드 판을 끌고 오더니 초록색 판이 보이게 뒤집었다. 그 곳에는 총 네 명의 사진이 붙어있었고 그 중에는 대통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다시 한번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하는데 김남준이 가장 왼 쪽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 첫 번째 타켓이야. "
" 대체 무슨 소리.....진짜 사람 죽이는거야? "
" ..... "
" 뭐야..너네 사람 죽이는 일은 안한다고.. "
갑자기 정신이 번뜩 들은 내가 정색을 하며 김남준과 말이없는 멤버들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잠시 침묵이 돌았지만 곧 김남준의 저음이 그것을 깨고 나의 귓속에 박혀들어왔다.
" 목표물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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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많이 늦었죠..........ㅠ_ㅠ
일이 많아졌어요...요즘...전 처럼 짧은 연재 텀은 못 지킬거 같은 그런 예감이..
혹시라도 기다리셨던 분들, 정말 죄송합니다.
자주 오지 못하는 만큼 정성 쏟아서 글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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