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황상준 - 월야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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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내 주위의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현세에서는 차갑고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던 민석만이 기억이 나지만, 내 기억과는 정반대로 날 보며 수줍은 듯이 밝게 웃는 민석을 보니 가슴 한 구석에 아릿하면서도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보고 싶었다. 아니, 내가 꼭 봐야 하는 사람이였다. 날 이 곳에서 꺼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멍해지는 머리에 너무 갑작스러워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어 날 천진난만하게 보고 있는 민석에게 말을 걸으려 했다.
" 아, 저기···! "
"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 순간 내 몸이 누군가가 막고 있는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 이 목소리는···. 내게 처음 말을 걸었던, 붉은 피가 한껏 묻은 채로 나를 노려보았던 민석의 목소리였다. 그는 보이지는 않지만, 서서히 나를 감싸 안듯이 포근하게 다가와 다시금 내 귓가에 속삭였다.
" 아직 저 아이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
" 때를 기다리세요. 제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모두, 보셔야 합니다. "
그의 목소리가 떠나고,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나를 감싸던 포근한 느낌은 사라져버리고, 대신 내 앞에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민석이 내 앞에 있었다. 내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민석은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 이거 큰일입니다. "
" 예···? "
내 얼굴을 살피던 민석은 얼굴에 홍조를 띄우고 씁쓸한 듯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 부인께서는 곧 백년가약을 약속할 제가 탐탁치 않은 것 같으니, 큰일이 아닐수가 없습니다. "
아,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가고 혼돈의 폭풍은 모든 것을 잘못된 길로 인도해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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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그랑, 쥐 죽은듯이 고요한 김 대감의 저택에 날카로운 도자기 조각의 소리가 들린다. 깨진 술병을 잡고 있는 손에는 이미 피가 흥건하다. 깔끔하고 좋은 향기가 나던 처소에는 이미 피비린내와 깨져버린 도자기 조각으로 가득해져, 그 누구도 바른 사내로 알려진 준면의 처소라고는 생각치 못하리라. 집에서도 늘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있던 평소와는 다르게 그는 한없이 망가져 있었다. 온 몸에 도자기에 베인 상처가 있음에도,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지 그저 이불 위에 널브러져 누워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준면은 입술 사이로 다 갈라진 신음소리만을 겨우 내었다.
" 아···. 아···! "
너무나도 괴로운 듯, 자신의 가슴을 쥐어잡고 한참을 눈물과 함께 신음소리를 쏟아 내었다. 숨도 못 쉬고 괴로운 울음만을 쏟아내던 준면은 결국에는 힘에 부치는 모양인지 힘 없이 축 늘어져 안타까운 눈물만을 흘려보냈다.
" 아가, 아가야···. "
작은 나비의 날갯짓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 혼돈의 폭풍을 몰고왔다.
민석의 방문은 내게 꽤 큰 충격이였다. 그저 이 나라에 어딘가에 있을 민석을 찾아 원래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일이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것만 같다. 나는 현세에서 만난 민석이 보여줄 모든 기억을 봐야만 하고, 그 과정에서 나는 등 떠밀리듯이 세자빈의 자리에 앉았지만, 세자임에 동시에 내 남편이 될 사람이 민석이라니. 머리가 아파온다.
"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
거기다가 지금의 민석은 내가 기억하는 민석이 절대 아니다. 나에 대한 기억, 원한 따위는 전혀 없이 호의만 느껴지는 사람이였다. 하지만 내가 아는 민석은 날 원망한다. 공사장 철근을 떨어뜨리고 날 이 곳까지 데려와 자신의 과거를 보여주고 싶어할 만큼 날 원망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전생의 내가 과거에 민석에게 원망을 살 행동을 했다는 것.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 머저리같은 전생의 나와 같이 행동하지 않으면 되는거야. "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선은 공식 세자빈이 되어 민석이 내게 원한을 가진 그 시점 이후까지 아무 일 없이 그의 옆에 있으면 된다. 떠날 때 미련이 없게 감정은 최대한 주지 않으면서. 간단하다. 고3 수능 공부할 때보다도 더 굳건한 의지가 생겨난다. 그래 조금만 있으면, 내가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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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약 2주일의 시간이 지났다. 그릇을 이고 빈궁전 한 바퀴 돌기? 궁중 내부도 외우기? 관리 계급과 주요 관리 이름 외우기? 문제 없다. 의지가 한 번 생기니 오히려 너무 쉬워서 코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리고 오늘 밤은, 나와 민석의 혼인식 전날의 밤이다. 이제 내일, 그리고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길지 않은 시간만 지내면, 문제 없이 내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나에게 특별한 손님이 조심스레 찾아왔다.
" 부인, 주무십니까. "
2주 동안 민석은 아주 가끔씩 이 곳에 들러 나와 대화를 나누다 근위병이 지나가는 소리가 나면, 큰일이라며 호들갑 떠는 모습을 보여 내게 가끔 웃음을 주었다. 그 덕에, 멘붕에다가 서먹했던 첫 만남과는 달리 조금은, 편해지고 친해진 것 같다.
" 저하, 어째서 오실 때마다 들어오시지 않고 창을 통해 부르십니까? "
농담조가 섞인 내 말에 민석은 보기 좋은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참 대단하고 자랑스럽다는 듯, 하지만 수줍은 느낌은 지닌 채 입을 열었다.
" 그야, 은밀히 만나야 더 즐거운 법이지 않습니까. "
그러다, 살짝 얼굴을 붉혀 조금 뜸을 들이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 부인은,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을 만큼 제게 귀중한 여인입니다. "
순간 심장이 내려앉아 단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가슴 속의 간질함이 느껴졌다. 적어도 민석의 눈빛은 진실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이지만, 현세로 돌아가지 않고 민석과 계속 같이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민석은 창 가까이로 다가와 손을 내밀어, 내가 평생토록 잊지 못할 말을 듣게 해준 경험의 시작을 건네왔다.
" 부인과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
문이 아닌 창을 통해 밖으로 나와 민석의 손에 이끌려 근위병이 없는 곳으로 지나왔더니, 도착한 곳에는 크고 꽃잎이 가득한 호수 가운데 웅장하고 기품있는 두 그루의 나무가 서로 붙어 있었다. 마치 원래 한 그루였던 나무같이···.
〈sub>〈/sub>〈sup>〈/sup>민석은 그 나무를 한참을 쳐다보더니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뒤돌아 내 장옷을 조금 내려 어깨에 걸쳐주었다.
" 우리 수국을 이어받을 왕족에게는,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
그의 숨결은 한껏 떨렸다.
" 이 나무는, 저희 태조때부터 있던 연리지라는 나무입니다. "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내 손을 잡고, 그의 눈은 곧바로 나를 향하고 있었다.
" 이 연리지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백년가약을 약속한다면,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
그의 손은 내 손을 떠나 내 뺨에 얹었다. 따뜻한 온기가 내 뺨을 향해 느껴져 왔다.
" 저는 부인과 한 평생을 같이하고 싶습니다. "
바람을 타고 호수의 꽃잎이 날아와 그와 나에게로 흩뿌려지고, 작게 울어대던 모든 만물의 소리가 멈추었다.
" 제 연리지가 되어주시겠습니까, 부인. "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감싸고 우리의 그림자가 연리지에 드리워져 이 호수를 감싸고있는 듯한 모습이 되었다.
그렇게도 다짐을 하였건만, 결국에는 그를 받아들였다. 현세로 돌아가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