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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험이 끝나고 다음 월요일. 어제 밤과 오늘 새벽, 총 두 번을 시달려 오늘은 암묵적인 면죄부를 받은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밥을 먹고 있었다. 시험이 끝났다는 해방감에 급식실은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서로 반찬을 뺏어먹고 욕을 먹는 흔한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내가 앉은 곳 주변은 변백현이 떠드는 소리로 밖에 차오르지 않았다. 역시 불편하다. 자리가 없던 탓에 일단 앉긴 했지만 암묵적으로 일진 취급을 받고 선생님들에게도 수많은 관심을 받는 그 녀석은 불편했다. 그 녀석이 불편하다기 보다도 그 녀석 주변에 있는 무리와 분위기, 관심이 불편했다. 나와 달리 변백현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크게 불편하진 않은 듯 옆에 아이들과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신명나게 떠들어댔다. 그 무리도 익숙했기에 낄낄거리며 장난을 받았고 그 때문에 이 테이블에서 조용한 건 나와 그 녀석, 그리고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은 김종인뿐이었다. 알게 모르게 오세훈의 관심을 받은 그 녀석은 오세훈의 계획된 접근에 의해 곧 무리에 끼게 되었지만 천성과는 맞지 않았던 건지 평소엔 잘 지내다가도 전교생의 시선이 쏠리는 급식실에서는 조용해지곤 했다.

 

"종인아, 이따 학교 끝나고 집 갈 때 같이 가. 엄마 가게 좀 들리자."

"."

 

이 무리의 알 수 없는 아우라로 인해 다른 착생들은 일정 선을 넘지 않으려 하는 게 보였지만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이 뉴페이스는 좀 달랐다. 주변 분위기에 전혀 휩쓸리지 않고 자신 고유의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김종인에게 말을 걸었다. 명찰을 보면 분명 빨간색, 3이었다. 김준면? 작년 학생회장인데? 거기다 3학년은 우리랑 밥 먹는 시간대가 다른데. 궁금함에 밥을 오물오물 씹으며 그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피하지 않는 나를 보고 그 사람은 살포시 웃더니 종인이의 어깨를 두드려주곤 자리를 떠났다. 뭐야, 저 사람. 학생지도를 왜 해? 이번 시험 때까지만 해도 안 보였었는데.

 

"김종인, 형이야?"

"."

"고삼 아냐?"

". 저번 주말에 대학특별시험 1차 붙었어."

", 천재다."

 

몇몇 아이들이 눈길을 돌려 그 형을 다시 쳐다봤다. 처음 다가올 때까지만 해도 이건 뭐냐 하는 눈빛들이었지만 지금은 존경의 눈빛들이 가득했다. 나도 학생지도에 충실한 형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옆에서 쿡쿡 찌르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그 녀석이다. 왜라는 눈빛으로 계속 쳐다봤지만 그 녀석은 몇 초간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다시 자기 밥 먹는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뭐야. 할 말이 있으면 하던가. 별일 아닐 거라 생각한 나도 식판에 고개를 파묻고 남은 밥을 입에 집어넣었다. 주변은 여전히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로 가득 찼지만 나와 그 녀석 사이만큼은 고요함이 맴돌았다.

 

 

--*-*-*--

 

 

 

"거기. 복장 불량."

 

 

, 젠장. 넥타이 안 맸네. 체육이 7교시인 탓에 그 녀석에게 호출로 불려갔었다. 사람이 올 수 없는, 그 녀석만 키를 가지고 있는 5층 화장실에서 일을 치룬 나는 한 시간 동안 시달리다 얼마 남지 않은 종례시간에 대충 옷을 가다듬고 튀어내려 왔었다. 단 삼일밖에 남지 않은 방학 때문에 해이해진 학생들이 많다는 이유로 단속 심해졌다더니. 저 형도 하는 건가. 내가 벌점이……. 젠장, 3점 더 있으면 화장실 청소네. 그놈의 복장 진짜.

 

"너 먼저 pc방 가 있어."

"오케이. 알았어."

 

어떻게든 벌점은 피해야한다는 생각에 변백현을 먼저 보내고 형의 옆에 섰다. 설마 꽉 막힌 사람은 아니겠지. 김종인 형인걸로 꼬투리 잡아봐야 하나.

 

"?"

"……. 제가 벌점 받을 상황이……."

"주지 말라고?"

"."

"알았어."

 

생각보다 화끈하게 대답하는 형에 슬며시 한 쪽 입 꼬리가 올라갔다. 뭐야, 쉽잖아. 일주일만 참으면 벌점리셋인데. 청소할 순 없지.

 

"대신 남아서 나 잡무 보는 거 좀 도와주고 갈래?"

"...."

 

퉁쳐야지. 예상 못 한 것도 아니고, 학생 잡무래봤자겠지. 그럼 그렇지 하는 마음에 한 쪽 복도로 가 주저앉았다. 심심해서 학생지도가 끝날 때까지 지켜본 형은 범생이 일거란 내 생각과는 달리 의외로 호탕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바지통 줄인거나 브라운 계통의 염색정도는 쿨하게 주의 정도만 주고 보냈다. 도중에 몇 번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는 듯 했다. 약 이십 분정도를 흘려보내고 드디어 학생들이 전부 교문을 빠져나갔다.

 

"경수 맞지? 종인이랑 같이 다니는."

"가끔요. 그것 때문에 남기신 거예요?"

"아니? 복장불량 맞잖아."

 

미소를 잃지 않는 형의 뒤를 따라 졸졸 쫒아간 곳은 학생회실이 아닌 교무실이었다. 여길 왜...?

 

". 놀랐어? 내가 잉여인력이라는 이유로 좀 불려 다녀서 말야. 들어와."

 

교무실을 제 교실인 양 편하게 들어가는 형을 따라 쭈뼛거리며 들어갔다. 1교무실은 그 녀석과 친하다는 이유로 몇 번 불려간 적이 있던, 그다지 좋은 추억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교무실 안에 남아있던 몇몇 선생님들은 형을 보고 얼굴에 미소를 띄우시다가 뒤따라 들어서는 나를 보고는 살짝 얼굴이 굳어지셨다. 그래도 나 사고 친 적은 없었던 거 같은데...

 

"준면아, 다 했어?"

"."

"그래, 너는 애들 꼼꼼히 다 잡았겠지. 뒤에는?"

"동생이랑 친해서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그럼 뭐... 그리고 이거. 출석부 정리하는 거, 어떻게 하는 건지 알지?"

"."

"그거 하고 집 가면 돼."

 

형은 자신에게 출석부를 한 아름 떠넘기는 선생에게도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사람이 미련한 거야 뭐야. 뒤에서 도무지 캐릭터를 잡기 힘든 형을 쳐다보다가 나를 돌아보며 한 팔에 안지 못한 출석부를 가리키는 형에 군말 없이 출석부를 집어 들었다. 뒤돌아 먼저 교무실을 나서는 형을 따라 나도 교무실을 나섰다. 어느 한 교실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힘겹게 문을 연 형은 아무 책상에나 출석부를 던지듯이 내려놓고 나를 돌아봤다.

 

"출석부 체크 해 본 적 있어?"

"아뇨."

"그래? 그럼 먼저 가르쳐줘야겠네."

 

제일 맨 위에 있는 출석부를 집어든 형은 나에게 손짓해 자신의 옆자리에 앉게 했다. 안에 들어있던 파일 하나를 꺼낸 형이 나에게 곧장 뭘 해야 하는 건지 알려주고는 금세 자신 앞의 몫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왜 형한테 이걸 시켜요?"

"나야 모르지. 아마 작년 학생회장인 것도 한 몫 할 거고. 대학 합격해서 할 일 없는 것도 한 몫 할 거고."

"합격 확정이에요?"

". 오늘 아침에 결과 나왔어."

 

대단하구나. 저 사람은. 이 나이에 벌써 대학합격도 하고. 나는 속으로는 감탄의 찬사를 보냈지만 겉으로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앞의 일에 집중했다.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대화가 끊어지자 교실 안이 침묵으로 차올랐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애초에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반응이 없는 편이었고 형 역시 해야 할 일이 있을 땐 그 일에 집중하는 편인 것 같았다. 기계적으로 출석부와 파일을 정리하던 나는 마지막 남은 하나를 앞에 펴놓고 잠시 눈을 비볐다. 시험도 끝났는데 집중하려니 피곤했다.

 

"눈 아프지? 잠깐 쉬어."

"."

"음료라도 줄까?"

"."

"거절도 안 하네."

 

망설임도 없던 내 대답에 형은 하하 웃으며 교실 뒤편의 사물함으로 가 비타500을 꺼내왔다. 저 형은 무슨 사물함에 저런 걸 놔둬.

 

"이상하게 보지 마. 내꺼 아냐. 쌤들이 나눠주시는 거 잠깐 둔거야."

"……."

"...그리고 너 사람 좀 그렇게 빤히 보지 마. 어떻게 너랑은 볼 때마다 눈이 마주치는지."

 

순간 역시 알고 있었구나 싶었지만 그 몇 번이나 되는 상황들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건 형이라 생각하며 그냥 조용히 음료를 까고 홀짝거렸다. 형은 그런 나를 보고 피식 웃더니 의미 없이 출석부를 뒤적거렸다.

 

"...종인이하고 친해?"

"그냥저냥요."

"……. 세훈이는?"

"별로요."

"재밌는 애네. 찬열이는?"

"...10년 넘게 알고 지냈어요."

"친한 게 아니라?"

"...그러게요."

 

그 녀석이랑은 도통……. 분명 중학생 초반 때까진 친했는데.

 

"백현이는?"

"친해요."

"드디어 나왔네. 친하다는 말."

"……."

 

뭐 하자는 거지. 다 먹은 병을 책상에 내려놓은 나는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뒤로한 채 마지막 남은 출석부를 집어 들었다. 전까지는 내가 계속 쳐다봤었는데 이번엔 반대인 상황이 계속되었다. 형은 내 옆에서 내가 일하는 모습 하나하나를 살펴봤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굳이 입을 열지 않은 채 일을 끝마쳤다. 적막한 시간이 지나가고 드디어 다가온 마지막 장을 재빨리 확인한 나는 출석부를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수고했어."

 

형은 기다렸다는 듯 나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미소와 함께 건넸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정도로 화답한 나는 가방을 한 쪽 어깨에 걸쳐 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근데 경수야."

"."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자리에 그대로 앉아 고개만 돌려 나를 보는 형의 표정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말 섞은 지 하루 만에 저 형은 대체 나한테 뭘 그리 궁금해 하는 걸까 싶어 대답 없이 긍정의 뜻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찬열이랑 친구 맞니?"

"아마도요."

"……. 내가 괜한 참견일지는 모르겠는데, 저번 시험 끝난 날에 뭘 좀 보게 되서 말이야."

 

내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형은 일부러 한마디마디를 늘여 말했다. , 아니겠지……. 그 녀석과 나는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는 편은 아니다. 나는 변백현 쪽 무리랑, 그 녀석은 그 녀석의 무리와 다녔다. 그도 그럴 것이 반도 다를뿐더러 나는 굳이 그 녀석을 먼저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그런 그 녀석과 나의 접점이라면……. 대부분은 한 가지 경우다. 호출.

 

"너 혹시 찬열이한테 약점 잡힌 거 있니?"

"아뇨."

 

그거 맞겠구나. 망설임 없이 나간 내 대답에 형은 살짝 당황한 듯 보였다. 남학교에서 섹스하고 돈 받는 걸 봤는데 피해자 쪽 같은 애가 당당하니…….

 

"...힘든 일 있으면 형한테 얘기해. 니가 상관없어 하는 것 같으니 관여는 하지 않겠지만……."

"."

"그래……. 오늘 수고했어. 그리고 이것도 인연인데, 말 놓는 건 어때? 다음에 볼 때 인사도 하고."

"알았어. 갈게."

 

이제 어느 정도 내 성격을 파악한 건지 형은 즉각 말을 놓는 나를 군말 없이 웃으며 배웅했다. 오지랖 한 번 참 넓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문을 나서려는 찰나, 그래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하나는 분명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뒤를 돌아 형을 쳐다봤다.

 

"돈을 목적으로 하는 건 아냐. 그냥 어느 날부터 그 녀석 말대로 해주는 게 당연했고 돈은 부가적인거야. 섹스할 때 빼곤 그냥 인간 대 인간이고."

"그래."

 

, 내가 먼저 말건 건 처음이려나. 내가 먼저 말을 걸어 놀란 건지 눈이 커졌던 형은 이내 씨익 웃어보였다. 역시 생긴 거와는 많이 다르다. 일부러 섹스라는 단어를 언급안한 건 순수해서가 아니라 나 때문인 것 같았다. 그 녀석한테는 사람 짜증나게 하는 타입이라고 싫어할만한 사람인 것 같지만. 시계를 확인하니 하교시간으로부터 이미 두어 시간이 지났을 때라 변백현은 벌써 집에 갔을 게 뻔헜다. 오늘은 집에 혼자가야 되겠네.

 

"도경수."

"...집 간 거 아니었어?"

"pc방 갔다가 너 학교에 있다 길래."

"..."

"집 들어가기 싫지? 외박할래?"

"."

 

느릿느릿 빠져나가던 운동장에서 들려온 건 그 녀석의 나긋한 목소리였다. 학교에선 눈인사만 하는 놈이 밖에서는 가끔 이렇게 챙겨주기까지 하니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는다. 뭐 어떻게 하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겠지만. 나란히 옆에 서서 걷는 건 오랜만이었다. 어제도 분명 그 녀석의 집에서 자고 오늘 아침까지 같이 있었지만 남의 시선 때문에 등교시간은 항상 십분 정도 차이가 났다. 옆에서 천천히 일부러 천천히 걸으며 내 보폭을 맞춰오는 그 녀석을 보자니 괜시리 우스웠다. 물론 방금 전 형과의 대화도 적지 않은 영향이 있었다. 평소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이렇게 그 녀석과 내 관계가 생각난다는 건. 분명 돈이 오가고 몸을 섞는 관계이지만, 무서울 정도로 그 순간만 비즈니스적인. 나머진 죽마고우였다가 그냥 아는 사이로 둔갑하는. 해질 녁 노들에 비친 우리 그림자가 앞으로 드리워졌다. 평범하다. 평소에 뭐인지는 상관없다는 듯 지금은 그저 가깝게 붙어 걷고 있는 두 남자의 그림자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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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경수 복장불량으로 걸렸네여.... 찬열이와의 관계가 남들에겐 죽마고우가되네여....
8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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