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움길 1 열아홉의 겨울에서 스물둘의 늦가을까지, 자그마치 3년이었다. 그 사이 우린 대학을 갔고, 넌 군대를 갔다. 그리고 그 무렵 나도 휴학을 신청했다. 홀로 두 번째 가을을 견딜 때 즈음 넌 돌아왔고 또 뭔가 변해있었다. 다정했던 눈빛이, 말투가 더 이상 날 좋아하지 않는 듯 차가웠다. 내가 사랑하던 김태형의 모습은 흐려지고 있었다. 널 또렷이 담으려 눈을 꼭 감았다 떠도 그대로였다. 그 순간에서야 난 인정했다. 우리는 헤어지는 중이고, 날 그토록 사랑해 주던 김태형은 이제 없다.
뭐라 보내야 하나.. 키패드를 누르다 말기를 반복했다. 보낼 수 있는 말이라곤, 그래, 잘 자. 밖에 없는걸 알면서도 손이 계속 멈칫거렸다. 애써 괜찮은 척 답장을 보낸 후 깊게 한숨을 쉬며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요즘 속이 답답해서인지 부쩍 한숨이 늘어갔다. 혹시나 하여 기다려도 1은 없어지지 않은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익숙해지지 않는 무심함에 가슴이 저려와 화면을 아무렇게나 끄고 누웠다. 날 지나쳐 넌 어디로 사라지려는 걸까. 갈 곳 잃은 마음들은 늦가을 찬바람에 나뒹구는 낙엽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흩어지면서도 그것들이 너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랐다. 악몽에 뒤척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깼다. 침대맡에 놓인 시계를 보니 네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소식이 없는 핸드폰을 습관처럼 찾았다. 자주 밤을 새는 나를 위해 새벽녘에도 전화를 받아주던 김태형이었다. 오고 가는 대화에 금세 뜨거워지던 핸드폰이었는데, 지금은 그때가 무색하리만큼 차가웠다. 자꾸 떠오르는 옛 생각을 지우려 인스타그램을 눌렀다. 그런데 내가 너무 방심했던 모양이다. 애써 피하려 들어간 그곳도 김태형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분명 잔다 했는데.. 아니었나 보네. 힘없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미처 끄지 못한 화면 속엔 친구들과 웃고 있는 네가 있었다. 2
아침에 밝자마자 연락을 하고선 곧바로 카페로 향했다. 같은 대학교를 다니던 우리가 학교와 가깝단 이유로 자주 가던 곳이었다. 그래서 고작 음료 하나에도 우리가 묻어났다. 넌 딸기 스무디, 난 아메리카노. 네가 커피에 슬쩍 입을 대보다 표정을 찌푸리며 웃으면 그걸 보고 따라 웃던 나, 뭐 그런 거. 앞에 놓인 커피잔을 매만지며 회상하다 왠지 다신 그럴 수 없을 거 같아 그만뒀다. 이제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와버린 걸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넌 모습을 드러냈다. 모자를 푹 눌러쓴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술을 많이 마셨는지 술 냄새가 잔뜩 풍겼다. 만나지 못했던 몇 주 사이 수척해 보이기까지 했다. 얼마 만에 보는 거지. 어디 아픈가. 분명 만나면 따져보려 했는데, 그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온통 네 걱정뿐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김태형의 눈치를 살폈다. 이름 한번 부르는데도 목소리가 떨렸다.
에움길 1 열아홉의 겨울에서 스물둘의 늦가을까지, 자그마치 3년이었다. 그 사이 우린 대학을 갔고, 넌 군대를 갔다. 그리고 그 무렵 나도 휴학을 신청했다. 홀로 두 번째 가을을 견딜 때 즈음 넌 돌아왔고 또 뭔가 변해있었다. 다정했던 눈빛이, 말투가 더 이상 날 좋아하지 않는 듯 차가웠다. 내가 사랑하던 김태형의 모습은 흐려지고 있었다. 널 또렷이 담으려 눈을 꼭 감았다 떠도 그대로였다. 그 순간에서야 난 인정했다. 우리는 헤어지는 중이고, 날 그토록 사랑해 주던 김태형은 이제 없다.
뭐라 보내야 하나.. 키패드를 누르다 말기를 반복했다. 보낼 수 있는 말이라곤, 그래, 잘 자. 밖에 없는걸 알면서도 손이 계속 멈칫거렸다. 애써 괜찮은 척 답장을 보낸 후 깊게 한숨을 쉬며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요즘 속이 답답해서인지 부쩍 한숨이 늘어갔다. 혹시나 하여 기다려도 1은 없어지지 않은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익숙해지지 않는 무심함에 가슴이 저려와 화면을 아무렇게나 끄고 누웠다. 날 지나쳐 넌 어디로 사라지려는 걸까. 갈 곳 잃은 마음들은 늦가을 찬바람에 나뒹구는 낙엽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흩어지면서도 그것들이 너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랐다. 악몽에 뒤척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깼다. 침대맡에 놓인 시계를 보니 네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소식이 없는 핸드폰을 습관처럼 찾았다. 자주 밤을 새는 나를 위해 새벽녘에도 전화를 받아주던 김태형이었다. 오고 가는 대화에 금세 뜨거워지던 핸드폰이었는데, 지금은 그때가 무색하리만큼 차가웠다. 자꾸 떠오르는 옛 생각을 지우려 인스타그램을 눌렀다. 그런데 내가 너무 방심했던 모양이다. 애써 피하려 들어간 그곳도 김태형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분명 잔다 했는데.. 아니었나 보네. 힘없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미처 끄지 못한 화면 속엔 친구들과 웃고 있는 네가 있었다. 2
아침에 밝자마자 연락을 하고선 곧바로 카페로 향했다. 같은 대학교를 다니던 우리가 학교와 가깝단 이유로 자주 가던 곳이었다. 그래서 고작 음료 하나에도 우리가 묻어났다. 넌 딸기 스무디, 난 아메리카노. 네가 커피에 슬쩍 입을 대보다 표정을 찌푸리며 웃으면 그걸 보고 따라 웃던 나, 뭐 그런 거. 앞에 놓인 커피잔을 매만지며 회상하다 왠지 다신 그럴 수 없을 거 같아 그만뒀다. 이제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와버린 걸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넌 모습을 드러냈다. 모자를 푹 눌러쓴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술을 많이 마셨는지 술 냄새가 잔뜩 풍겼다. 만나지 못했던 몇 주 사이 수척해 보이기까지 했다. 얼마 만에 보는 거지. 어디 아픈가. 분명 만나면 따져보려 했는데, 그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온통 네 걱정뿐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김태형의 눈치를 살폈다. 이름 한번 부르는데도 목소리가 떨렸다.
에움길 1 열아홉의 겨울에서 스물둘의 늦가을까지, 자그마치 3년이었다. 그 사이 우린 대학을 갔고, 넌 군대를 갔다. 그리고 그 무렵 나도 휴학을 신청했다. 홀로 두 번째 가을을 견딜 때 즈음 넌 돌아왔고 또 뭔가 변해있었다. 다정했던 눈빛이, 말투가 더 이상 날 좋아하지 않는 듯 차가웠다. 내가 사랑하던 김태형의 모습은 흐려지고 있었다. 널 또렷이 담으려 눈을 꼭 감았다 떠도 그대로였다. 그 순간에서야 난 인정했다. 우리는 헤어지는 중이고, 날 그토록 사랑해 주던 김태형은 이제 없다.
뭐라 보내야 하나.. 키패드를 누르다 말기를 반복했다. 보낼 수 있는 말이라곤, 그래, 잘 자. 밖에 없는걸 알면서도 손이 계속 멈칫거렸다. 애써 괜찮은 척 답장을 보낸 후 깊게 한숨을 쉬며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요즘 속이 답답해서인지 부쩍 한숨이 늘어갔다. 혹시나 하여 기다려도 1은 없어지지 않은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익숙해지지 않는 무심함에 가슴이 저려와 화면을 아무렇게나 끄고 누웠다. 날 지나쳐 넌 어디로 사라지려는 걸까. 갈 곳 잃은 마음들은 늦가을 찬바람에 나뒹구는 낙엽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흩어지면서도 그것들이 너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랐다. 악몽에 뒤척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깼다. 침대맡에 놓인 시계를 보니 네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소식이 없는 핸드폰을 습관처럼 찾았다. 자주 밤을 새는 나를 위해 새벽녘에도 전화를 받아주던 김태형이었다. 오고 가는 대화에 금세 뜨거워지던 핸드폰이었는데, 지금은 그때가 무색하리만큼 차가웠다. 자꾸 떠오르는 옛 생각을 지우려 인스타그램을 눌렀다. 그런데 내가 너무 방심했던 모양이다. 애써 피하려 들어간 그곳도 김태형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분명 잔다 했는데.. 아니었나 보네. 힘없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미처 끄지 못한 화면 속엔 친구들과 웃고 있는 네가 있었다. 2
아침에 밝자마자 연락을 하고선 곧바로 카페로 향했다. 같은 대학교를 다니던 우리가 학교와 가깝단 이유로 자주 가던 곳이었다. 그래서 고작 음료 하나에도 우리가 묻어났다. 넌 딸기 스무디, 난 아메리카노. 네가 커피에 슬쩍 입을 대보다 표정을 찌푸리며 웃으면 그걸 보고 따라 웃던 나, 뭐 그런 거. 앞에 놓인 커피잔을 매만지며 회상하다 왠지 다신 그럴 수 없을 거 같아 그만뒀다. 이제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와버린 걸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넌 모습을 드러냈다. 모자를 푹 눌러쓴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술을 많이 마셨는지 술 냄새가 잔뜩 풍겼다. 만나지 못했던 몇 주 사이 수척해 보이기까지 했다. 얼마 만에 보는 거지. 어디 아픈가. 분명 만나면 따져보려 했는데, 그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온통 네 걱정뿐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김태형의 눈치를 살폈다. 이름 한번 부르는데도 목소리가 떨렸다.
비디오 태그를 지원하지 않는 브라우저입니다
사진 터치 후 저장하세요
"춥다, 여주야." "..." "손잡을래?" 그런 나에게 희고도 곧은 손이 내려왔다. 낮은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웅웅거렸다. 특유의 비누 향 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민윤기였다. 잠시 망설이다 손을 마주 잡아 일어섰다. 어깨를 털어주고 얼른 우산을 든 윤기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내 작업실로 가자. 란 말을 끝으로 이끌 뿐이었다. 그 배려가 민윤기다워서 따뜻했다. "들어와. 아, 이 작업실은 처음인가?" "응, 그런 듯? 으.. 추워. 얼른 들어갈래." 일부러 너스레를 떨며 작업실에 들어섰다. 작업실은 온통 검은색이었지만 민윤기의 향이 배어서인지 포근했다. 윤기도 가까운 대학교 작곡과에 진학하며 작업실을 옮겨왔었다. 가까운데 살면서 작업실도 처음 와보네.. 오랜만에 보는 꼴이 이렇다니 쪽팔렸다. 작업실을 이리저리 구경하는 사이 윤기가 차와 담요를 내왔다. 몇 달 만에 보는 민윤기는 여전했다. "수건이 없네. 너 감기 걸리겠어." "괜찮아. 마르기만 하면 돼. 나 이래 봬도 튼튼하다!"
"춥다, 여주야." "..." "손잡을래?" 그런 나에게 희고도 곧은 손이 내려왔다. 낮은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웅웅거렸다. 특유의 비누 향 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민윤기였다. 잠시 망설이다 손을 마주 잡아 일어섰다. 어깨를 털어주고 얼른 우산을 든 윤기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내 작업실로 가자. 란 말을 끝으로 이끌 뿐이었다. 그 배려가 민윤기다워서 따뜻했다. "들어와. 아, 이 작업실은 처음인가?" "응, 그런 듯? 으.. 추워. 얼른 들어갈래." 일부러 너스레를 떨며 작업실에 들어섰다. 작업실은 온통 검은색이었지만 민윤기의 향이 배어서인지 포근했다. 윤기도 가까운 대학교 작곡과에 진학하며 작업실을 옮겨왔었다. 가까운데 살면서 작업실도 처음 와보네.. 오랜만에 보는 꼴이 이렇다니 쪽팔렸다. 작업실을 이리저리 구경하는 사이 윤기가 차와 담요를 내왔다. 몇 달 만에 보는 민윤기는 여전했다. "수건이 없네. 너 감기 걸리겠어." "괜찮아. 마르기만 하면 돼. 나 이래 봬도 튼튼하다!"
"춥다, 여주야." "..." "손잡을래?" 그런 나에게 희고도 곧은 손이 내려왔다. 낮은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웅웅거렸다. 특유의 비누 향 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민윤기였다. 잠시 망설이다 손을 마주 잡아 일어섰다. 어깨를 털어주고 얼른 우산을 든 윤기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내 작업실로 가자. 란 말을 끝으로 이끌 뿐이었다. 그 배려가 민윤기다워서 따뜻했다. "들어와. 아, 이 작업실은 처음인가?" "응, 그런 듯? 으.. 추워. 얼른 들어갈래." 일부러 너스레를 떨며 작업실에 들어섰다. 작업실은 온통 검은색이었지만 민윤기의 향이 배어서인지 포근했다. 윤기도 가까운 대학교 작곡과에 진학하며 작업실을 옮겨왔었다. 가까운데 살면서 작업실도 처음 와보네.. 오랜만에 보는 꼴이 이렇다니 쪽팔렸다. 작업실을 이리저리 구경하는 사이 윤기가 차와 담요를 내왔다. 몇 달 만에 보는 민윤기는 여전했다. "수건이 없네. 너 감기 걸리겠어." "괜찮아. 마르기만 하면 돼. 나 이래 봬도 튼튼하다!"
비디오 태그를 지원하지 않는 브라우저입니다
사진 터치 후 저장하세요
"김여주 다쳐. 뛰지 마." "미안! 늦었지." 뛰지 말라는 다정한 핀잔도 듣기 좋았다. 윤기는 또래와, 그리고 나와 달랐다. 작업실 월세를 마련한다며 저녁엔 알바를, 새벽엔 작업을 하던 윤기였다. 그럼에도 항상 늦지 않았다. 단단했고 가볍지 않았으며, 꿈이 분명했다. 난 그런 윤기를 꽤 많이 부러워했다. 윤기는 흔들리지 않았다 "자, 손이 다 터서 그게 뭐야. 이거 발라." "뭔데?" "나밖에 없지?" 나보다 훌쩍 커버린 키가 낯설어진 열일곱의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매서운 바람에 다 터버린 윤기의 손이 안쓰러워 장난스레 핸드크림을 건넸던 날. 그날 이후로 민윤기에게선 항상 비누 향이 났다. 난 그 비누 향도 좋았다. 5 "일어났어?" "지금 몇 시야?" "8시." "헐.. 깨우지." 너무 곤히 자길래, 잘 자더라. 기지개를 펴며 일어나 보니 민윤기가 맞은편 작업실 의자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내 집처럼 너무 잘 잔거 같아 민망해졌다. 아까 히터를 세게 틀어서인지 옷과 머리가 다 말랐다.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또다시 김태형이 밀려와 띵 해졌다. 나쁜 느낌은 틀리지 않았는지 몇 시간 만에 든 핸드폰엔 문자가 와있었다. 김태형이었다.
답장을 보내려다 지우고 아예 꺼버렸다. 머리가 복잡해져 아파왔다. 내일 만나면 우린 끝인 건가. 변하지 않겠다던 너였는데. 영원하자던 우리가 영원의 끝으로 나아가고 있다. 아무리 혼자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는 게 슬펐다. 애초에 한 명만 손을 놓으면 끝나는 관계였다. 어쩌면 영원히 없음을 너무 잘 알아서 더 바란 걸지도 모르겠다. 계속 외면하던 불편한 진실이 파도처럼 날 덮쳐왔다. 영원은 처음부터 없었다. "가려고?" "응." "데려다줄게." 생각에 잠겨있다 민윤기의 물음에 정신이 들었다. 내가 벌떡 일어나 겉옷을 입자, 윤기도 히터를 끄더니 나갈 채비를 했다. 아마 내가 말려도 따라 나올 윤기였기에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불을 끄고 나가려는데 내가 덮은 담요가 눈에 띄었다. "저건 내가 세탁해서 줄게." "됐어. 괜찮아." "나도 됐거든." 고집은.. 민윤기가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야, 너 내가 좀 봐줬더니 어? 그런 윤기를 한번 째려보다 담요를 챙기고 계단을 올랐다. 밖으로 나오니 밤인데도 가로등 불이 켜져 그림자가 졌다. 훅 감싸오는 추위에 떨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엔 언제 넣은 건지 열이 오른 핫팩이 있었다. 민윤기답다. 고개를 돌려 뒤따라 올라오는 윤기를 빤히 쳐다봤다.
"왜?" "나 여기 자주 와도 돼?" "얼마든지 와." "민윤기." "응?" 답하는 목소리엔 싫증이 없었다. 너는 왜 사람이 그렇게 한결같아? 라고 물으려다 삼켰다. 어차피 태형이를 향한 원망이었다. 마른 웃음을 짓다가 소주 콜? 하며 윙크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기가 다가와 머리를 헝클였다. 콜, 가자. 머리칼을 만지는 걸 싫어하는 나였지만 민윤기는 예외였다. 손길이 늘 조심스러워 아껴주는 것 같아 그냥 두었다. 머리칼을 다시 정리하곤 가까운 술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6 "뭐 먹을래? 오늘 밥은 먹었어?" "음.. 어. 이거 시키자." 사실 오늘 먹은 거라곤 커피 한 잔이 전부였다. 그래도 배고픔보단 술에 취하고 싶었다. 윤기가 말릴 틈도 없이 먼저 나온 소주를 까서 단숨에 원샷 했다. 오늘따라 달게 느껴져 곧바로 또 따라 마셨다. 연달아 네 잔을 마셨었나. 술기운이 올라 아무 주정이나 부렸다. 그러다 다섯 번째 잔을 마시려 들었을 때 윤기가 잔을 뺏어 마시곤 툭 내려놨다. "속 상해. 안주 나오면 같이 먹어." "윤기야." "응?" "윤기야." "왜 그래, 응?" 김태형이 날 안 좋아하나 봐. 등받이에 몸을 다 기대고 힘없이 말했다. 이때까지 한 번도 다른 친구들에게 말한 적 없었다.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오면 더 이상 내 가정이 아니라 진짜가 돼버리는 거 같아서. 나 어쩌지. 마지막 말만 입안에서 맴돌았다. 막막했다. 답이 나오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이고 애꿎은 손톱만 괴롭혔다. 팔짱을 끼고선 날 바라보는 윤기의 눈빛이 느껴졌다. 괜히 말했나 봐, 나. 내가 했던 말이 다시 귓가로 돌아와 날 아프게 찔렀다. 그냥 그렇다고. 정적이 이어지자 이미 마음 정리를 다 한 척 씩 웃었다. 다시 술병을 가져와 술을 따랐다. 잔을 들이키려는데 누군가 손을 내밀어 막았다. 민윤기가 아니었다. 그 손이 너무 익숙해서 한참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이 아니길 빌면서. 그런데 잔인하게도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 "김여주,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김태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