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날씨는 정말 변덕이 죽 끓듯 한다. 비가 오고 바람불다가, 밤꽃이 피고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나무 그늘에서 휴일을 즐기기도 했지만 불행스럽게도 그와 만나기로 한 이번 주는 몹시 추웠다. '그'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는 파리 한복판에서 꽃집을 연다. 아침마다 바게트를 품에 안고 가게로 들어가 레코드판을 턴테이블 위어 얹혀 재즈를 튼 후, 바게트를 잘게 뜯어 가게 앞에 흩뿌렸다. 그러면 새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빵을 쪼아먹는다. 나는 남는 빵을 먹으며 꽃을 정리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문틈 사이로 누구인지 모를 남자가 편지를 넣기 시작했다. 석탄으로 내 모습을 그려주기도 했다. 내용은 ‘오늘도 당신은 빵을 뿌려서 새들에게 주겠죠. 너무 귀여워요.’ ‘아침마다 지나가며 당신을 봅니다.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당신의 고양이가 되어 같이 낮잠이 들고 싶어요’ 따위의 작업멘트였다. 나는 그 편지들을 읽으며 오랜만에 웃었다. 낯뜨거워서 목 주위가 간질거렸기 때문이다.
1월부터 그 편지가 왔고 만나자는 말이 나온 건 3월 무렵이었다. ‘당신도 내가 좋다면 다음날은 문앞에 장미꽃 한 다발을 놓아주세요.’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가게 문을 잠그며 문앞에 빨간 장미꽃 한 다발을 놓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 장미꽃은 편지와 바꿔치기라도 한 듯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마음의 준비가 되는 날. 1년이든 2년이든 좋으니 그때 몽마르트 언덕으로 오세요. 빨간 장미꽃을 들고 있는 남자를 찾아서.’ 그 뒤로 편지는 오지 않았다. 나 또한 몽마르트로 가지 않았고 나와 그사이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내가 마음을 확신하게 된 것은 4월, 날씨가 매우 춥던 때였다. 밖에 걸어둔 꽃들을 다 거두고 집에서 고양이를 안은 채 수프를 먹고 있을 때, 틀어둔 레코드판에서 은은한 재즈가 들렸다. “이 파리의 4월과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누구 곁으로 달려갈까요. 그대는 내 마음에 무엇을 주었던 것일까요.” 노래를 흥얼거리며 고양이를 쓰다듬다가 이 구절이 나오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멍청하게 머릿속엔 편지를 주던 의문의 남자로 가득 찼다. 나는 다음날 곧바로 옷을 차려입고 밖에 나왔다. 나의 고양이와 함께. 늘 그렇듯 한쪽 품엔 바게트를 가득 품고 말이다. 막상 나오고 나서야 걱정이 들었다 만나기로 한 몽마르트 언덕에는 집시들이 많았다. 그들은 유랑민족이라 볼품없는 차림새로 골목에 누워있다. 몽마르트로 가려면 그 구불구불한 골목을 지나야 하는데 괜히 미친 사람이 달려들어 나를 해코지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과 다르게 나는 바람에 날리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몽마르트를 향했다. 내 등에 매듭을 지어 묶은 트렌치코트의 리본이 팔랑거렸다. 고양이는 추위 때문에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한참을 걸어서, 거지들이 들끓는 골목에 들어서자, 빵모자를 쓴 꼬마들이 몰려와 내가 들고 있는 바게트를 보며 give! give! 하고 외쳤다. 나는 온화한 미소를 띠며 기다란 빵을 꺼내 아이들에게 건네주고 빠르게 골목을 뛰어갔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벗어나자 광장에는 이젤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과 거리 한쪽에서 공연하며 돈을 받는 재즈밴드도 있었다. 몽마르트르는 자유분방함을 즐기는 예술가들의 아지트이기 때문일까, 시끄럽게 들리는 말소리와 차 경적 소리 한때 어울린 소음조차 아름답게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감상할 새도 없이 빨간 장미를 든 남잘 찾기 시작했다. 그는 분명 내가 준 장미를 가지고 있겠지. 심장이 두근거린다.
“Watch out !’
그때, 조심해! 하고 누가 불렀다. 나는 소리를 지른 남자를 바라봤다. 이젤을 든 남자… 한쪽 손엔 석탄을 쥐고 다른 손엔 가시가 다듬어져 노끈으로 묶인 붉은 장미 다발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그 남자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들고 있는 장미는 내가 문밖에 내놨던 그 장미였다. 조금 시들긴 했지만, 물병에 꽂아뒀는지 붉은 색깔을 잃지 않았다. 그가 조심하라고 소리친 것은 잊어버리고, 남자를 찾았다는 것에 기뻐서 환하게 웃으며 한 발짝 내디뎠다. 그런데 그만, 광장 바닥에 고꾸라져서 쓰러지고 말았다. 커다란 총성과 함께. 어릴 적 죽은 형에게 들었던 말이 순식간에 귓가를 강렬히 파고들었다. ‘내가 사랑했던 여자는 몽마르트의 광장에서 갑자기 달려든 정신병자에게 죽었어. 난 이제 삶의 의미가 없어’ 그 말을 유언 삼아 형은 당일 목을 매달고 죽었다. 아 그럼 내가 지금 그런 상황인가?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붉은 장미를 들고 검은 정장에 중절모를 쓴 남자가 쓰러진 내 앞으로 달려와 날 끌어안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가 무척이나 아프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재즈밴드는 계속 노래를 불렀는데 익숙한 멜로디가 들렸다. “이 파리의 4월과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누구 곁으로 달려갈까요. 그대는 내 마음에 무엇을 주었던 것일까요.” 나는 미미하게 웃었다. 나의 고양이가 불안한 듯 내 볼을 핥았다. 남자는 급기야 울기 시작했다. 가무잡잡한 손 때문에 내 손에도 석탄이 묻었다. 그가 그려줬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가게 앞에서 새에게 빵가루를 뿌리는 내 모습을 그린 그림. 그 생각을 하니 목이 간질거렸다.
“아아. 죽지 마요. 이름은 알려줘요. 그대의 이름은 뭔가요?”
“도경수. 다들 도, 하고 부르죠.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죠? 정말 나를 사랑했나요?”
“내 이름은 백현입니다. 사람들에겐 B라고 부르게 해요. 난 내 이름이 싫거든요. 그런데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그만큼 당신을 사랑해요”
“저도 사랑해요. 백현을요.”
몽마르트 언덕 위에 있는 성 샤크레 쾨르 성당에서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나는 그 종소리를 듣고 눈을 감았다. 고양이의 울음소리와 백현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말소리.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백현은 경수의 축 처진 몸을 안고 장미 다발을 소중히 품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성당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경수의 고양이도 백현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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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은 1930년대의 파리
글에 나오는 “이 파리의 4월과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누구 곁으로 달려갈까요. 그대는 내 마음에 무엇을 주었던 것일까요.” 라는 노래 가사는 브금노래의 실제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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