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는 조선시대 명문가의 자제.
예쁘고 참하기로 몇 동리 밖까지 소문이 자자할 지경이었어.
그러나 얼마전 일어난 반역 사건에 연루되어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말았어.
세상 어느 곳보다 안전할 것만 같았던 별이의 집에 수십의 포졸들이 밀려들어오고
존경하던 아버지의 서재,
우아하신 어머니가 하던 꽃꽂이,
언제나 듬직하던 오라버니가 사준 작은 경대
그 모든게 산산조각났어.
붉은 호승줄에 묶여 무릎 꿇리어진 채, 너의 자랑이었던 아버지가 포졸의 육각모에 맞아.
쓰러진 아버지를 감싸던 오라버니 앞에 포도대장의 길다란 칼이 내밀어 지고 억울하다며 울부짖던 어머니가 혼절하며 쓰러지는 사이, 포도대장의 칼이 머리 위로 높이 들려. 칼에 비친 빛이 잠깐 빛나더니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네 앞에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스르릉,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네 목앞에 내밀어진 칼이 턱을 들어올려.
"그나마 얼굴이 반반하구만. 이 년은 관기로 넘겨라."
그리고 관기가 된 너,
(1, 2, 3, 4 안이어져!)
5. 김원식 上
내일은 네 머리를 올리는 날이야.
[반반한, 글 좀 하는, 한때 양반이었던 계집.]
너를 단 한줄로 표현한 행수는 네 머리를 높은 값을 받고 올리려 했어.
이 동리에서 가장 존경 받던 가문의 여식이 한 순간에 추락한 모습은, 그리고 그 여식의 첫 화초를 올리는 일은 아주 달콤한 미끼라서 네 몸값은 끊임없이 올라가.
그리고 결국 네 머리를 올리게 된 사람은, 네 부모님이 살아있을 때부터 집에 자주 드나들었던 상인이였어. 동리에서 가장 부호인 상인.
오라버니는 그 자를 참 싫어했었어. 너를 보는 눈빛이 음험하다고.
늘 네게 말하곤 했지, 그가 왔구나. 방 안에서 나오지 말고 있거라. 하고.
그런 그가 네 머리를 올리게 된다는 소식을 전달받자마자 너는 도망을 결심해.
어차피 부모님도, 오라버니도 없는 삶.
아무것도 지킬 것이 없어진 너는 설사 도망을 치다 걸리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아.
관아로 끌려가 죽게 되더라도 어머님을, 아버님을, 오라버니를 만날 수 있을테니까.
손이 덜덜 떨려와. 모두가 곤히 잠든 새벽, 너는 살며시 방문을 나와.
끼익, 하는 문소리에도 너는 놀라서 두 손으로 네 입을 막아. 곧 문소리였다는 걸 깨닫고 잠시 한숨을 쉬어.
달빛이 평소와 달리 어두워. 다행이야. 밝은 달빛이라면 웅크리고 도망가는 네 모습을 더 환히 비출테니까.
행여 소리가 날까 신을 신지도 못한 채로 너는 기방을 나서려 해.
헤진 짚신을 품에 안고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낮에 봐둔 낮은 담벼락은 돌을 조금만 쌓으면 넘을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발에 생채기가 나는 것도 모르고 돌 위로 올라가. 먼저 짚신을 던지고 낮은 담벼락에 오르려는 찰나,
누가 네 손목을 잡아 당겨.
갸우뚱하던 몸이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하자 손목을 잡은 이가 거칠게 손목을 당겨 넘어지지 못하도록 해.
아, 너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와.
"뭐하는 거야."
"..."
"도망가려 했나."
바닥을 훑듯 낮은 목소리가 들려와. 기방의 일을 맡아보는 김원식.
뛰어난 무예 실력에 비해 천인의 신분이어서 겨우 기방을 봐주는 것 밖에 못한다던.
그래도 덕분에 기방에서 함부로 행동하는 사내는 없지 않냐고 다른 기생들이 들떠서 말하는 걸 종종 들은 적이 있지만, 이렇게 마주친 적은 처음이야.
몸이 덜덜떨려서 대답이 나오지 않아. 관아로 끌려갈까, 하는 두려움보다 이 사람 자체에 대한 두려움.
마주친 눈빛이 마치 범과 같아서.
"말해, 도망가려 했냐고."
결국 너는 아무 대답도 못해. 그는 너를 거칠게 끌어내, 방안으로 던져 넣어.
닫힌 문 밖으로 그의 그림자가 보여. 네 방문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아.
결국 이렇게 허무하게 잡히는 건가, 싶어. 진정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건가. 그 동안 참고 지냈던 모든 감정들이 울컥하고 치밀어 올라.
왜 나만 살아있는 건지, 왜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지, 아니 애초에 왜 우리 가문은 사라져야 했던 건지.
너는 쓰러졌던 몸을 일으켜. 더듬거리며 방 가장 안쪽에 숨겨두었던 어머니의 비녀를 꺼내.
폐허가 된 집에서 유일하게 건질 수 있었던 부모님의 유품.
너는 눈을 감아. 비녀를 손에 꽉 쥐고 비녀를 쥐지 않은 다른 손의 손목을 찔러.
몸이 점차 차가워져.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