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서서 무하는데, 망부석이가. 낡은 가죽 소파에 가로로 누워있던 정국이 출입문 쪽으로 둔 머리통을 내 허벅지에 장난스럽게 부딪혀왔다. 마 춥다 하고 잇달아 외치는 목소리는 그쪽으로 시선을 딱히 두지 않아도 동그랗게 번뜩이는 눈동자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하여간 사시사철 위아래가 없어요 요새끼 요요새끼. 무릎 위에 정국의 허벅지를 얹고서 휴대폰을 만지던 호석이 눈동자를 깜빡여 짧은 인사를 건넨 뒤 정국을 향해 요란히 잽을 날리는 체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방금 전과는 다르게 따끈하고 소란스러운 기운이 코 밑을 건조하게 스쳐 지났다. 새해가 되어도 동아리 방 안은 늘 저마다의 사정으로 분주하기만 했다.
“환기 좀 시키고 놀아라. 홀아비 냄새 나는 거 알고들은 있냐.”
“홀아비들한테서 홀아비 냄새 나는 게 뭔 문제당가?”
“김태형 나는 여친 있거든?”
“췌, 짜증나 빡지.”
바닥에 엎드려 커다란 종이 위에 붓질을 하는 지민과 지민의 등 위에 앉아 내 말꼬투리를 잡다 말고 화풀이를 하듯 엉덩방아를 찧어대는 태형을 지나쳐 어딘지 모르게 불퉁한 얼굴로 건반을 두드리는 윤기의 곁을 스친 시선이 휴대폰을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석진의 너른 등판 너머 창가로 떨어졌다.
창틀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길죽한 몸에 가려진 오후의 빛이 약한 분홍색으로 일렁였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의 틈 어딘가에서 나는 아득해졌다. 곧 시선이 마주 닿았다. 주먹을 조금 말아 쥐었다.
“어, 선배 왔네.”
그 애가 손을 다쳤다.
이미 알고 있었다. 쉴 틈 없이 밀려올라가는 단체 대화창에는 온통 그 이야기뿐이었다. 나는 휴대폰 액정을 물끄러미 내려다만 봤었다. 진짜 별거 아니라고 뜬 사진 속 그 애의 네 번째 손가락에 머리 집게 같은 것이 꽉 물려 있었다.
“나 이것 좀 따주세요.”
오늘처럼 손 전체를 붕대로 둘둘 감고 있지는 않았었다.
악보 위로 갑자기 들이밀어진 생수병 뚜껑을 돌려 땄다. 뚜껑은 너무나 쉽게 열렸다. 자 하며 건네었더니 무의식중에 붕대가 감긴 오른손을 뻗었다가 민망한 듯 푸스스 웃으며 반대손으로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덧붙이는 목소리가 쓸데없이 믿음직스러웠다. 사람들은 그 애가 있어 너희가 든든하겠다고 자주 말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그 애는 젠틀하게 웃어보이다가도 돌아서면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중요한 물건을 어딘가에 놓고 오거나 발을 헛디디거나 했다. 녀석들이 핀잔을 주면 아 뭐어 하고 말았다. 그 핀잔을 조금이라도 새겨들었다면 저렇게 불편해질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뭐야. 왜 형만? 나도 물병 뚜껑 따줘.”
“뭐? 나도!”
“나도 나도!”
득달같이 달려드는 녀석들에게 공간을 내어주고 물러난 그 애는 점차 멀어졌다. 잠을 설치면 그 스트레스를 온전히 음악에 쏟아 붓는 윤기가 벌써 몇 시간째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윤기의 곁을 서성이며 허밍을 흥얼대는 정국에게 그 애가 다가가 어깨동무를 걸었다. 기다란 오른팔의 끄트머리는 하얗고 뭉툭하고 답답해보였다. 나는 마지막 생수통의 뚜껑을 신경질적으로 돌려 딴다. 흘러넘친 물방울이 손바닥을 적신다. 꼴깍 꼴깍 물을 들이키는 김태형의 등판에 세게 문질러 닦다가 욕을 먹었다.
윤기의 손가락이 일정한 코드를 반복적으로 짚어낸다. 끼어들어 줄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신호였다. 정국이 가장 먼저 응답했다. 휴식시간을 틈타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사그라졌다. 녀석들은 저마다의 자리에 서거나 앉아 귀를 기울였다. 이 공간 안에서 노래란 당연히 예고 없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시작된 노래를 경청하는 것 역시 예고 따위 필요 없는 당연한 것이었다.
아름답고 바보 같은 노래.
가사 해석을 읽다가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걸 하고 중얼거리며 컴퓨터 전원을 꺼버리고 만 그 노래였다. 온갖 해괴한 표정을 지으며 웃긴 소릴 하다가도 노래만 시작하면 백팔십도 딴 사람이 되어버리는 정국의 목소리는 가늘지만 무게가 느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창가를 본다. 물때가 잔뜩 낀 창문 밖으로 앙상한 가지만 남은 커다란 나무를 본다. 자꾸만 흐트러지려는 시선을 애써 나뭇가지에 묶는다. 슬픈 노래에 마음이 움직거리는 건 애송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속으로 말한다.
그 애가 정국의 노래를 이어 받을 줄 꿈에도 모르고.
“선배. 선배?”
“……어, 왜.”
“이제 창문 닫아도 되지 않겠어요?…라고 다섯 번은 말한 것 같아요, 나”
“아.”
꿈에서 완벽히 벗어난 것처럼 눈앞이 선명해졌다. 주변은 고요했다. 어깨가 자꾸 움츠러들던 건 창문이 활짝 열려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돌아서서 맞물린 창문의 한쪽을 잡아당겼다. 웬일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구부린 손가락에 힘을 주고 한 번 더 잡아당기려는데 정면으로 불어 닥치는 찬바람 대신 성큼 다가온 온기에 몸이 굳어버렸다.
“창문을 닫아달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어.”
“이거 빡빡해서 잘못하면 손 다쳐요.”
나처럼.
나를 뒤로 물린 그 애가 능숙하게 창문을 닫았다. 놀람의 감탄사를 뱉고 싶었지만 억지로 집어삼키곤 바닥에 널린 청소도구들을 정리했다. 창문의 잠금 장치를 꼼꼼히 걸며 그 애가 혼자 중얼거렸다. 나야 원래 운이 없다지만 선배도 참. 석진이 형 표정 보면 답 딱 나오는데 그걸 바꿔줘요 왜.
“어쩌다보니.”
연습이 모두 끝나면 마무리 청소당번을 두 명씩 정했다. 어떤 날에는 가위 바위 보를, 어떤 날에는 투표로, 오늘은 제비뽑기를 했다. 얼굴 아래가 발그레하게 물든 석진이 애써 웃어 보이며 나에게 교환을 신청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동아리 방 안에 그 애와 나 단 둘 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몽롱한 상태였으므로 실은 어떻게 청소를 했는지도 잘 기억나질 않았다.
온통 맴도는 것은 그 애의 목소리였다. 낮고 생채기가 많아 다소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음성은 위태로운 가사를 읊기에 더할 나위가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살짝 치켜든 채 건반과 함께 어우러지던 그 애의 얼굴은,
그러나 더 이상 묘사한들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장판이었던 동아리 방 안이 그나마 발 디딜 만 해진 것을 다시 한 번 확인 한 뒤 나는 집어든 청소도구들을 도구함에 집어넣었다. 건반 위에 덮개를 씌운 그 애가 짐을 챙겼다. 검은 목티 위에 재킷을 걸치고 구석에 늘어져있던 가방과 목도리를 집어 들었다. 한 손이 불편하니 몇 번이나 목도리 한쪽 끝이 이상하게 흘러내리는 것을 가만 내버려 두었다. 결국 포기하고 구부정하게 움직이는 뒷모습은 여러 해 동안이나 봐왔기 때문에 익숙했다.
아니, 실은 단 한 번도 익숙한 적 없었다.
창 밖에 어스름이 급격히 깔렸다. 공기가 꾸물대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비든 눈이든 내릴 것이다. 소파에 던져둔 가방을 집어 들다 말고 나는 그만 울고 싶어져 그 애를 향해 겨우 입을 열었다.
“…손은,”
“…?”
“언제까지 그래야 된대.”
“이거, 좀 걸릴 것 같아요.”
답은 지체 없이 돌아온다. 나만 어려운 것이 억울하지 않다.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알고 있으니 나만 어려운 것이 당연하지. 모호한 문장들이 연달아 이어지고 있지만 나는 그것으로도 괜찮다, 라고 생각하며 짐을 챙겼다. 잠시 동안의 공백 끝에 그 애가 툭 던져왔다. 저는 괜찮아요. 그래, 하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머지않아 얼굴이 온통 얼룩지게 될 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떤 것도 고백할 용의가 없었다, 나는. 동아리 방 문을 열었다. 날선 외부 공기가 온 몸으로 끼쳐들었다.
“근데요 선배,”
그러나 나를 굳어지게 하는 것은,
“올해가 다 가기 전에는 나한테 말해줄 건가요?”
낮고, 생채기가 많아, 다소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아니면 그냥 내가 먼저 고백하려고요.”
나는 처음으로 그 애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 애의 더운 눈동자 속에 콕 박혀있는 내 빨개진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지저분한 창문 밖으로 진눈깨비가 날리기 시작했다.
그 애
그 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