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엾어라. 지나가는 사람들은 종종 손가락을 들어 날 가리키고 그렇게 말했다. 가엾기도 하지. 딱해라. 동정 어린 시선과 목소리. 허나 누구 하나 멈춰 서는 이 없다. 나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일 뿐이다. 다시 올게. 금방 올게. 약속해. 익숙하고도 부드러운 그 음성이 귓가에 맴돌다 사라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한참이나 살피고서야 깨달았다. 현실에서 들려온 소리가 아니었다. 내가 만든 환청. 내 머릿속에 울려퍼진 목소리였다. 동시에 거리의 온도는 무겁게 내려앉았다. 깡마른 어깨를 잔뜩 움츠렸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라벤더 향 옅게 벤 베이지 색 니트. 너는 항상 겨울이 되면 라벤더 차를 마셨고, 그렇게 혼자만의 티타임을 가질 때면 도톰한 니트를 입었다. 포근한 겨울에, 따뜻한 벽난로에, 여유로운 티타임에 잘 어울리는. 그 중에서도 네가 가장 아끼던 베이지 색 니트. 언제나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베어 있던, 빛 바랜 베이지 색 니트. 마음 한 구석이 쓰라렸다. 너를 떠올리면 그랬다. 상처에 소독약을 붓는 느낌. 막 생긴 상처 말고, 이미 보기싫게 흉지고, 굳고, 식어버린 옛 상처에 짓궂게 소독약을 들이붓는 그런 느낌. 바보같게도 나는 한참이나 지난 옛날 기억을 바로 어제 찍어낸 것 처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바보같게도. 정말 처절하게도. 사람들은 여전히 분주했다. 늘 그랬다. 붉은 하늘이 찾아오면 더욱 그랬다. 하늘의 색은 붉은 빛을 지나 까만 빛에 다다르고, 조금 더 어둡게 변했고, 그 아래의 도시는 더욱 바쁘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그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아무도. 자정을 알리는 시계탑 종 소리가 청량하게.... 아니, 그렇지 않다. 아주 무겁게, 둔탁하게 울려퍼졌다. 차들이 굴러가는 소리며, 사람들의 걸음 소리, 시끄러운 도시의 소리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얼마 안 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카펫이 깔린 따뜻한 바닥. 나는 잠시 너를 포함해 가장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였던 그것을 떠올렸다. 해가 지자 바람은 더욱 날을 세웠다. 나는 아득한 기억속 그 때로 돌아가려 발버둥이라도 치듯 몸을 더 웅크렸다. 타지에 온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보다 먼 타국에. 분명 내가 몸을 뉘인 이 곳은, 내가 이제껏 살아 온, 나의 땅, 나의 집, 나의, 아니.... 너와 나의 장소였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가 애처롭게도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내 집이 아닌 곳. 아주 낯선 곳에 와 있는 기분. 이름도 뭣도 모를, 아주 낯선 곳에 와 있는 기분. 파도치는 바다 한 가운데에 떨어진듯한 고통. 살을 에는 매서운 바람은 칼심을 품은 듯 날렵하고 잔인했다. 겨울의 밤. 그 밤의 바람. 그것은 생각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날이 갈 수록 더욱 그랬다. 여지껏 잘 벼텨왔다고, 그러니 잘 버텨 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겨울은 강인했다. 나약하게 꺼져가는 작은 불씨와는 비교 자체를 거부할 정도로 포악하고 악독했다. 뒤를 돌아 몇 걸음만 가면 될 터였다. 고작 몇 걸음. 그리 하면 낡고 오래 된 나와 너의 터전이, 이 작은, 초라하게 식어가는 몸뚱이를 반겨주진 않아도 잠시 품어줄 수 있을테지.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직 네가 오지 않았다. 금방 오겠다고 한 네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금방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모르는 천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모르는 척 조금 더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너는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되면 내가 반겨주길 바랬고, 내가 반갑게 맞아 줄 때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웃음을 보였다. 나는 보고싶었다. 그 아름다운 미소를. 아니, 아니야. 그보다 더 너를. 네 하얀 얼굴을. 네 하얀 손을. 오롯이 나를 향한, 네 다정한 눈길을. 그래. 나는 네가 보고싶었다. 아주 많이. 그리고 간절하게. 하필이면 이런 날씨에.. 낡고 허름한,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인 버려진 주택 정문 앞, 웬일인지 바쁜 걸음을 멈춰 서 군중을 이룬 사람들 중, 가장 주름이 자자한 얼굴에 보랏 빛 스카프를 두른 키 작은 노인이 입을 열었다. 주인은 어디 가고. 한참 전 부터 여길 지키고 서 있는걸 내가 봤는데, 쯧쯧. 그러자 혀를 차며 못마땅한 얼굴을 한 그녀의 맞은편에 서 있던 한 중년 남자가 덩달아 입을 열었다. 모르셨어요? 이 집 주인, 죽을 병에 걸려서 치료해야 한다고 외국으로 나갔다가 그만.... 남자는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꼬리를 흐렸다. 그와 동시에 늙은 여인 또한 입을 다물었고, 주위엔 온통 숙연함이 감돌았다. 묻어줘야 할까요? 한 청년이 용기내 물었다. 딱히 듣는 이를 지정해 묻는 말은 아니었지만, 군중을 이룬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부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는 하겠지. 얍실한 눈매를 가진 중년 여성의 말을 끝으로, 숲처럼 빽빽하게 모여있던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각자의 세상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다 낡고 녹슬어 내린 철문 앞에 무리지어 있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 존재했던 적이 단 1초라도 있었냐는 듯, 한 톨의 흔적도 없이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홀로 남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오로지 차갑고도 딱딱하게 식어버린 한 마리의 늙은 개 뿐이었다. 꺼져가던 불씨를 애써 지키려 이를 악물었던, 작고 초라한, 마음만은 예전 따뜻했던 그 때의 것을 간직하고 있었던, 애처로운 어린 영혼. 오롯이 그 하나.
이런 글은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