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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거리

                      w.앵






05

이 길이 아닌가봐.
나, 결국 길을 잃었나봐.
이 길이 맞다고, 아니더라도 맞다고 믿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뒤에서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쳐박혀 있는 이런 일상이 난 너무 힘들어.







06

종현은 헐레벌떡 집을 나와 거리를 달렸다. 이 근처라고 했는데- 열심히 좌우를 살피며 달리던 그의 눈에 곧 익숙한 차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손을 흔드는 지금 제 안주머니에 들어있는 명함의 주인도. 


"결국 왔네."
"네."


인사대신 짧게 대화를 나누고 조수석으로 올라탄다. 안전벨트를 메자마자 남자가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가 저 멀리 높은 건물을 향해 점차 가까워진다. 종현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거리를 멍하니 응시하며 긴장으로 굳은 손을 괜히 꼼지락 거렸다. 어쩌면, 내가 이 거리를 마음 놓고 다니지 못할 그런 날이 올 수도 있단 말이지. 생각만으로도 숨 쉬기가 힘들었다. 떨렸다.


"넌 나이도 좀 있고 기본적으로 뮤지컬을 하던 애니까 연습기간은 얼마 안될거야."
"어느 정도요?"
"글쎄.. 한 두달? 네 역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남자의 말에 종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약없는 기다림은 아니란 말이지. 죽어라 자신의 뒤를 쫓아오던 캐스팅 매니저는 진심으로 종현을 놓치기 싫었는지 정확히 열번의 연락을 취했었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던 종현은 결국 제 미래를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홀로 남아야 할 기범이 걱정됐지만 이제는 많이 극복하기도 했고, 일단은 내 인생을 좀 더 찬란하게 만들고 싶으니까. 상념에 빠진 종현의 잘생긴 얼굴을 슬쩍 쳐다 본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진짜 어디서 이런 훌륭한 원석이 나타났는지, 유명 기획사에서 캐스팅매니저로 수년을 지냈지만 이토록 완벽한 스타감은 없었다. 


"처음엔 지금 기획중인 아이돌 그룹에 넣으려고 했는데, 안되겠어."


너는 너무 화려해. 다른 멤버들이 다 묻힐 것 같아.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 종현이 멋쩍게 뒷목을 긁었다. 너무 좋은 소리만 하고 끈덕지게 저를 따라다녀 사기꾼은 아닐까 의심했었지만 결국 신분증과 명함, 그리고 포털사이트 인물검색 결과까지 확인하고야 종현은 그의 캐스팅 제의가 진심임을 알았다. 연예인. 비록 항상 꿈꾸던 뮤지컬 배우와는 약간 다르지만 그래도 무대위에서 관객의 환호성을 들으며 춤추고 노래한다는 큰 그림은 같지 않은가. 그래서 종현은 제 꿈을 향해 한발짝 더 다가간 것 같아 기뻤다. 사람 일이라는게 어떻게 될 지 모르니 주변에는 철저히 비밀로 하긴 했지만, 데뷔가 확정되면 아마 혼자 방방뛰며 온갖 사람들 다 붙잡고 자랑을 해댈지도 모르겠다. 종현은 굳어진 손을 몇번 쥐었다 폈다 하며 떨리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나, 잘 될 수 있겠죠? 물음에 화신에 찬 긍정의 답이 돌아왔다.


"내 눈은 절대 틀리지 않아. 날 믿어. 넌 곧 이 시대의 아이콘이 될 걸."







07

와, 역시 완전 좋았어.
진짜? 나 이상하지 않았어?
아니, 완벽 그 자체!


그 대답에 밝게 웃으며 품으로 파고든 기범의 뒷통수를 쓸어준다. 예뻐, 너어무 예뻐. 민호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던 기범이 곧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웃음으로 휘어진 눈꼬리가 서로를 향한다. 비싯비싯 새어나오는 행복에 겨운 웃음 소리. 서로를 보기만해도 좋아서 함께 있을 땐 절대 끊이지 않던 그 웃음 소리. 심지어 떨어져 있을 때도 서로의 생각을 하며 참지 못했던. 웃음 소리. 웃음… 소리.


진짜 신기한게 딱 하루 지났는데 너 어제보다 오늘 더 잘했어.
진짜?
응. 진짜. 이러다 매일매일 더 잘해서 스타되는거 아냐?


나 막 버리고 가는거 아냐? 장난스런 민호의 물음에 기범이 에이, 하며 또 웃는다. 웃는 얼굴이 참 예쁘다. 민호는 슬쩍 기범의 손을 쥐고 입을 맞췄다. 갈수록 에뻐져서 큰일이야. 진짜 바람나겠네. 꽉 잡아야지- 너스레를 떠는 양이 퍽 마음에 들어 기범은 깔깔 소리내며 웃었다. 너 그럴때마다 좀 귀여운거 알아? 기범의 말에 또 볼을 부풀리고 귀여운 척을 해 보인다. 민호는 그런 남자였다. 제 연인의 말 하나하나까지 다 담아두고 노력하는. 누구에게나 다정하지만 연인에게는 더욱더 다정한. 큰 손이 따뜻해 기범은 마주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좋아. 네가 좋아. 이렇게 함께있을 수 있어서 좋아. 정말 좋았는데.

긴긴 상념의 끝은 결국 산산조각 난 자신의 연인이었고 이 모든 이야기의 끝은 비극이었다. 곁에 없는 너. 이 세상에 없는 너. 나는 대체 어디서 너를 찾아야 해? 기범은 아랫입술을 콱 깨물고 눈가를 대충 문질렀다. 보고싶어. 다른 거 다 필요없고, 네 얼굴이 보고싶어. 이 지옥같은 시간을 나 홀로 극보하기엔 네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너무 커서. 그래서 그래. 민호야. 보고싶어.






08

멍하니 앉아만 있으려니 괜히 옛 생각만 떠올라 기범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종현 형, 언제 와? 메신저로 말을 걸었으나 종현은 한참이 지나도록 확인하지 않았다. 기범은 직감적으로 소중한 사람을 다시 한 번 잃을 때가 오고 있음을 느꼈다. 


내 손이 닿는 곳에 있어 줘. 제발.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지만.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무게감에 기범은 짙은 한숨을 쉬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지워지지 않는 잔상은 아마 평생 그의 뒤를 따라다닐 것이다. 민호는 이런 거 바라지 않을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끝끝내 마음을 비워내지 못한다. 이 넓은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래도 너를 이토록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사람이 나 하나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겠니. 그토록 착하고 멋졌던 너를 나라도 끝까지 기억해야 하지 않겠니. 방 안의 차가운 공기가 쓰다. 종현 형, 빨리 와. 내가 또 가라앉으려 하잖아… 기댈 곳이 사라지는 건 싫어. 모든 걸 다 잃은 나를 두고 떠나가지 말아. 비록 사랑이 아닐지라도. 일말의 동정이라도 남아있다면, 나를 떠나지 말아. 왈칵 쏟아진 눈물이 흰 뺨을 적신다. 누구라도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혼자 버티기엔 빈자리가 너무 크다니까. 정말로. 오소소 소름이 돋아 기범은 제 팔을 슥슥 문질렀다. 속이 허하다. 사건 이후로 얻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오늘따라 그것이 그를 더욱 괴롭게 했다. 


왜 항상 안좋은 예감은 맞아 떨어질까. 


형, 지치게 해서 미안해. 나를 책임지지 않아도 좋아. 없는 사람처럼 있을테니까, 다시 나만 바라봐주면 안돼? 차마 직접 꺼내지 못한 말이 입 안을 멤돌다 결국 심장께를 쿡쿡 찔러온다. 나는 사람이 필요해. 사랑이 필요해. 절실하게. 아, 또 다시 눈 앞에 그 잘생긴 얼굴이 둥둥 떠다닌다. 곧 붉은색으로 물들어가는 그 얼굴을, 기범은 애써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제발."






09

그만!
수고하셨습니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생수만 벌컥벌컥 들이킨다. 힘들어 죽겠네! 땀 범벅이 된 티셔츠를 벗어 던지고 새 옷을 꺼내 양 팔을 꿰었다. 목을 쏙 집어넣고 옷 매무새를 가다듬자 팀원들이 몰려와 어깨를 두드린다.


진짜 잘했어. 역시 네가 연기는 최고다. 덕분에 우리팀 전체가 확 살아났어.
아니야, 내가 뭘 했다고.
넌 진짜 나중에 엄청 잘 될 거다. 미리 싸인이라도 받아 놔야겠다.


 칭찬 일색에 꺄르르 웃으며 기범은 가방을 챙겨들고 연습실을 나왔다. 제각기 흩어지며 손을 흔든다. 잘가, 잘가! 해맑게 인사를 나누고 씩씩한 걸음으로 익숙한 길을 걷는다. 워낙에 좋은 소리도 많이 들은 데다가 자기가 생가해도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 낸 것 같아서 콧노래마저 나왔다. 이 정도면 원하는 대학에 붙고도 남을 실기 실력이라는 생각까지 들자 그는 정말로 행복해졌다. 얼른 이 기분을 민호와 나누고 싶은데… 분명 연습이 끝날때면 항상 전화를 걸었었는데, 오늘은 바쁜가. 기범은 아무 연락도 없는 핸드폰을 빤히 내려다보다 저가 먼저 민호의 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민호는 신호음이 몇번을 가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왠지모를 불안감에 몸을 떤 기범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괜찮겠지. 별 일 아닐거야. 애써 자기최면을 걸며 학원 건물을 빠져나온다. 나, 오늘 칭찬 많이 들었는데. 적성에 완전 잘 맞는다고, 다들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었어. 그래도, 그래도 나는 네가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말해줘야 정말 잘 마쳤다는 기분이 드는데. 바쁜거지? 아니면, 자고 있다던지.


…왜 항상 안좋은 예감은 맞아 떨어지는 걸까. 


다음날 민호는 옥상에서 벌벌 떠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어떻게 손을 쓰기도 전에 그는 아래로 추락했고, 그 순간 기범은 모든 것을 잃었다. 네가 죽었는데 내가 어떻게 행복에 겨운 주인공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어. 네가 내 곁에 없는데 내가 어떻게 운명적인 사랑에 대해 노래하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대사를 뱉을 수 있겠어. 기범은 그 날 이후 춤을 출 수 없었고 노랠 부를 수도 없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렸다.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0

종현은 불이 꺼진 깜깜한 방 안에 다소곳히 잠든 기범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겉옷을 벗었다. 다행히 아무일도 없었나보다. 그는 긴장으로 굳어있던 몸을 슬슬 풀며 하루종일 나누었던 대화들을 다시 되새겼다. 다른 것 볼 필요없이 계약서부터 쓰자던 사장님, 그리고 뮤지컬 창법을 가요 창법으로 바꿔나가자며 연습 스케줄을 읊던 보컬 트레이너. 그리고 약간은 견제하는 듯한 다른 연습생들의 눈빛. 종현은 하루만에 실감하기에는 좀 큰 일들에 짧게 한숨을 쉬었다. 기범이한텐 어제 말해야 하지. 멍하니 생각하다 나중으로 미뤄버렸다. 죽은듯이 잠들어있는 흰 얼굴이 어째 더 안쓰러워 보인다. 그냥, 착각인가. 쩝 입맛을 다시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종현은 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잠을 청했다. 이번 하기만 마치면 휴학계를 내야지.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 흐물흐물해지고 그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제발, 제발 그만 해. 네가 이런다고 민호가 다시 살아나는 거 아니야.
알아. 그러니까 내가 죽겠다잖아.
민호가 너 이러는 걸 바랄 것 같아?
내가 바라. 내가 바란다고!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 줄 틈도 없이 기범은 자취를 감추었다. 아지랑이만 남아 춤을 추고 움켜진 주먹 사이로 허공만이 바스라진다. 눈물이 난다. 내가 지켜주지 못해서 네가 떠난걸까. 내가 너를 영원히 지키기로 약속해놓고 내 꿈만을 쫓아 저만치 멀리 달아나버려서, 그래서 네가 떠나버린 걸까. 


내가 바라지 않아.


이미 떠나버린 잔상만을 쥔 채 허무하게 뱉은 소리는 누구의 귀에도 닿지 않는다.


기범아, 내가 바라지 않는다고…








* * *

늦었습니다. 개강을 탓해주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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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콰지모도에요!!!!엉엉 앵님 보고싶었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너무 반가워서 댓글먼저 달았습니다 읽고올게요!!
10년 전
독자2
앵님 오랜만이에요ㅠㅠㅠㅠ!! 기범이까지 쥬그려하다니ㅠㅠㅠㅠㅠㅠ앙대ㅠㅠㅠㅜㅜ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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