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주피디님"
"......"
"피디님도 번호 주셔야죠"
김여주라는 이름이 나 말고 더 있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다들 자기들끼리 먹고 떠들기에 바빠 보였다. 설마 설마 하면서 뒤를 돌아보니 생긋 웃으며 나에게 휴대폰을 건네는 김민규가 눈에 들어왔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입 안에 있는 쌈을 오물거리며 김민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얼라리요? 이에 질세라 나를 더욱 뚫어져라 쳐다보는 녀석이다.
"둘이 뭐하는거야, 무슨 연애편지 찍어요? 아님 천생연분? 눈빛교환 그만 하시고 번호교환이나 하세요들"
석민이의 말에 헛기침을 한 번 하고 김민규의 폰을 받아들어 내 번호를 입력했다. 얘랑 헤어지고 번호까지 바꿨는데 이런 식으로 다시 내 번호를 주게 될 줄이야.
"누나라 불러도 돼죠? 편하게"
"그러시던가요"
도대체 무슨 생각인건지는 모르겠지만 생글생글 웃는 김민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진짜 무슨 생각인거야 쟤는.. 김민규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지만 옆에서 톱스타에게 번호를 따였네 어쩠네, 오늘부터 둘이 러브라인이네 어쩌네 라며 깐족거리는 이석민 때문에 밥맛이 뚝 떨어졌다. 절대 먹을만큼 먹었기 때문은 아니다. 정말 정말 아니다, 하하.
회식이 끝나가고 하나 둘 씩 사람들이 일어날 때 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갈까 했지만 가면서 술이나 좀 깰까 하는 마음에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최피디님을 비롯해 윤작가님이나 석민이도 혼자 걸어가도 괜찮냐고 걱정했지만 나는야 무쇠 팔 무쇠 다리. 워낙에 겁도 없는 성격이라 괜찮다는 말을 남기고 식당을 도망치 듯 빠져 나왔다. 크, 밤이라 햇빛도 없고 그렇다고 춥지도 않고 살랑살랑 선선한 밤바람이 부는 좋은 날씨에 덩달아 기분까지 좋아지는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 내 걸음에 맞춘 속도로 나를 따라오고 있는 이 자동차를 보기전까지는 말이다.
"뭐야, 왜 따라와.."
내가 빨리 걸으면 빨리 걷는대로 나를 따라왔고 또 내가 느리게 걸으면 느리게 걷는대로 나를 따라왔다. 내가 자리에서 멈추자 따라오던 차 또한 자리에 멈춰섰다. 안되겠다 싶어 차 창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저기요, 누구신데 자꾸 따라오세요? 아무리 겁이 없는 성격이라지만 지금 내가 저지른 이 행동은 술기운이 있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그 때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면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또 김민규다.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 창문을 막 두드려요?"
"...웃기시네"
"네?"
"지는 나쁜 사람 아닌 줄 알아"
평소보다 꼬인 발음으로 말을 하자 김민규가 피식 웃었다. 진짜 웃긴 새끼.. 어쩐지 아까 그렇게 술을 마시라고 해도 안 마시더니 매니저 보내고 나 따라오려고 그런거였구만? 이 길이 차가 많이 안 다닌다는게 이렇게 불편하게 작용될 줄이야. 뒤에서 누가 빵빵거려야 이 놈이 가버리던 할텐데. 그냥 타라는 김민규의 권유에도 끝까지 거절한 나는 결국 한 40분 정도를 걸어 집 앞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김민규는 내 집이 보이자 혼자 쌩 가버리더니 집 앞에 대충 차를 세워놓고 차에서 나와 내 앞으로 다가왔다. 헤어진지 약 2년이 지난 지금, 김민규는 2년만에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기분이 묘했다.
"아, 뭐 궁금한거 있으신가? 다음 촬영은 스튜디오에서 하니까 10시까지 방송국으로 오시면 됩니다. 이제 됐죠? 저 들어가고 싶은데"
"김피디님 너무 일만 하신다. 여기 직장 아닌데"
"그런 이유 아니면 저 따라올 이유 없잖아요"
"진짜 없다 생각해요?"
오늘 봐왔던 표정과는 사뭇 달랐다. 벤에서 나와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같이 놀라던 표정도 아니었고, 나에게 전화번호를 요구할 때 같이 생긋 웃고 있는 표정은 더더욱 아니었다. 가로등에 비친 녀석의 얼굴은 방금 지었던 장난스러운 표정과 상반되게 진지함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나 불편해하지마요"
"....."
"미간 좀 피고"
진지함이 사라지고 다시 장난스러운 표정을 한 채 미소 짓던 김민규는 쭉 뻗은 검지손가락으로 나도 모르게 찌푸리고 있던 내 미간을 슥슥 문질렀다. 이 상황에서 빌어먹게도 김민규는 더렵게 잘생겼다. 정말 할 말이 그 뿐이였는지 말을 끝낸 녀석은 한 걸음씩 나에게서 물러났다.
"좀만 더 하면 물겠네, 아주. 진짜 이 말 하러 왔어요"
"....."
"식당에서 하고 싶었는데 누가 들을까봐"
"....."
"김피디님 다음주에 봐요 그럼"
"......"
"더 빨리 볼 수도 있고"
능글맞은 김민규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준 후 집으로 들어왔다. 씻고 자리에 눕자마자 녀석 생각이 나면서 갑자기 짜증이 확 났다. 헤어질 때만 해도 그렇게 냉정하게 돌아서던 놈이, 헤어지고 나서도 자냐는 그 흔해 빠진 카톡 한 번 보내본 적 없던 놈이, 나에게 손톱만큼의 미련조차 남아있지 않아보였던 그 놈이. 2년만에 다시 나를 찾아왔고, 불편해하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그것도 모잘라 한창 연애하던 시절 죽고 못살던 그 때 처럼 나에게 환하게 웃어주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나를 가지고 노는건지 싶은 생각에 짜증이 난 것 같다. 하지만 이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짜증나는 것은.
그 웃는 모습이 미친듯이 그리웠던, 그 웃음 한 번에 그 동안 녀석을 미워했던 마음이 눈 녹 듯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던, 호구같은 나다.
* * *
집 앞까지 따라올 때는 언제고, 다음 주에 보자할 땐 언제고. 막상 스튜디오로 오니 여기저기 누나 누나 거리면서 제작진들한테 끼부리기 바쁜 김민규가 보인다. 그래, 이게 다 이미지관리였다 이거지? 생각해보니 괘씸하고 쪽팔렸다. 이미지관리인지도 모르고 그거에 설레서 밤잠 설치는 꼴이라니. 쪽팔리다 쪽팔려. 그냥 지나가려는 나를 발견한건지 김민규가 환하게 웃으며 내 쪽으로 걸어온다.
"김피디님 안녕하세요"
아 예. 대놓고 콧방귀를 뀌어주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벗어났다. 내 태도에 오기라도 발동한건지 자꾸만 나를 찾아오는 김민규다.
"피디님 어디 가세요?"
"어디 갈 데가 있어서.. 김민규씨 한가하신가봐요"
"제가 원래 좀 잘 돌아다녀요"
"네, 그럼 계속 돌아다니세요"
안 그래도 아까 눈치백단이신 윤작가님께서 둘이 많이 친해졌나봐? 라고 물으시길래 표정관리 안 돼서 죽을 뻔 했다. 김민규가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최피디님이 시키신 심부름을 하러 가기 위해 전력질주를 했다. 다행히도 따라오는 것 같지는 않다. 장소섭외를 위해 예능국 국장실로 향했다. 국장실로 들어가니 신입시절 나를 어마무시하게 괴롭히던 안PD님이 보인다. 들어보니 안피디님도 장소섭외를 하러 온 것 같아 보였다. 드라마피디가 왜 예능국에서 장소 섭외를 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안 봐도 뻔했다. 드라마국 국장님한테 까이고 오는 길이었겠지.
"안녕하세요, 국장님. 김여주 피디입니다."
"아, 그래 김피디. 여긴 무슨 일로?"
"저희가 다음주에 예능국 사무실을 써야될 것 같은데 섭외 가능한가 싶어서요"
"하루면 되는건가?"
"네, 하루면 됩니다."
"그럼 시간 정해서 다시 말해줘"
"국장님! 제가 먼저 다음주에 섭외 가능하냐고 했잖아요!"
"말했잖아. 안피디는 드라마국 가서 섭외하라고"
안피디님은 성질을 한껏 부리고는 국장실을 빠져나갔다. 물론 나가기 전 나를 한 번 째려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저 사람 저거 성질머리 언제 고치나 몰라.. 국장님께 다시 찾아 뵙겠다는 인사를 드린 뒤 국장실을 빠져나왔다. 다시 복도로 나가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옆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설마 김민규인가 싶어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니 불행인지 다행인지 안피디님이 서있었다.
"어머, 넌 인사도 안하니?"
"네? 아까 국장실에서..."
"아아, 인사는 한 번만 하는구나. 그럼 넌 밥도 하루에 한 끼만 먹겠다?"
또 시작됐다. 안피디 전매특허, 되도 않는 소리로 꼬투리 잡기.
"능력이 안되면 싸가지라도 있던가. 너 그렇게 해서 언제 메인피디 될래?"
"....죄송합니다"
"왜 선배껄 뺏고 그러냐고. 생각이 있는 애니, 없는 애니?"
예능피디에서 드라마피디로 바꾸고 나서는 이제 안 시달리겠거니.. 했는데. 손가락으로 기분 나쁘게 내 머리를 툭툭 치던 안피디는 온갖 조롱의 말들을 나에게 뱉었다. 이 사람은 정말 변한게 없구나. 너무 그대로라 놀라울 정도다.
"이제 어떻게 할거야? 내 드라마 어쩔거냐고. 너 때문에 씬을 통채로 바꿔야 될 판이잖아!"
"......"
"야, 대답 안해? 어쩔거냐고"
최피디님이 짠 하고 나타나서 구해주면 좋으련만. 그럴리가 없었다. 제발 아무나 나타나서 나 좀 데려갔으면 좋겠다. 아, 김민규는 빼고. 이 굴욕적인 모습을 걔한텐 절대 보여줄 수...
"김여주피디님"
"어머, 민규씨?"
젠장, 드라마도 이런 우연은 없을텐데.
"민규씨 오랜만이야! 그 동안 잘 지냈어요?"
"죄송한데 저 김피디님 불렀는데"
"어?"
"좀 있으면 촬영 시작이에요. 가요."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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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댓 달아주신 분들 모두 넘나 감사드립니다...8ㅅ8
본격 밀당 시작하는 김밍구 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