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또 언제 내 방을 뒤지고 있었던 건지, 의아한 표정을 한 녀석의 손에는 몇장의 사진이 들려있었다. 별 생각 없이 침대 위에 늘어져 있던 나는 그 사진이 무엇임을 알게 된 찰나의 순간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야 최민호, 이 사진 뭐냐? 하고 얼떨떨하게 묻는 녀석의 손에서 단숨에 사진을 낚아챈 나는 적잖이 당황한 마음을 능숙히 감추며 대답했다.
“너잖아, 병신아.”
“아니, 그러니까. 내 사진이 왜 니 책 정중앙에 곱게 들어있으시냐고.”
것도 나 초딩 때 홀딱 벗고있는 사진을 말이야. 엉? 어유, 이 게이새끼.
무신경한 척 하지만 실은 엄청 궁금해 하고 있는게 다 티나는 녀석의 목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무시하며 나는 사진을 다시 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이번엔 좀 더 위로 숨겨야겠다. 녀석의 팔이 닿지 못하게.
꼭 사랑은 아니어도 괜찮아
민호x종현
녀석, 그러니까 김종현과 나는 아주 오래 묵은 친구였다. (녀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태친구’) 저 녀석과 나는 같은 산부인과, 같은 병실,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약 20년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분리된 적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녀석의 왼쪽 쇄골 아래 쪽에 위치한 작은 점과 무릎 밑 약 5센티에 자리잡은 흉터와 같은, 그러니까 녀석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녀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함정이었지만.
“야, 최민호. 좀 들어봐. 지영이가 먼저 나한테 뽀뽀를 했다니까? 어? 존나 대박사건 아니냐?”
침대에 걸터앉은 녀석이 누워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박수까지 짝짝 쳐대던 녀석은 심드렁한 내 반응에 이미 도가 텄다는 듯 신경도 쓰지 않는 듯이 보였다. 차라리 그 쪽이 나에게도 편했다.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냐며, 혹시 자신에게 질투하냐며 꼬치꼬치 캐물을 때면(추가로 게이새끼라는 욕까지) 나는 정말 입이 꽉 막혀버리기 때문이었다. 질투가 맞다고, 네가 다른 사람이랑 연애질 하는게 질투가 나 죽겠다고 솔직히 대답 할 수가 없는 질문이니까.
녀석을 향한 내 마음이 짝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중학교3학년 때였다. 녀석은 그맘때에 첫 여자친구를 사귀었었다. 여지껏 최민호와 김종현 관계에선 찾아볼래야 볼 수가 없던 새로운 존재의 난입에 나는 적잖이 방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감정은 단순히 녀석이 나보다 먼저 이성친구를 사귀었다는 사실에 기인한 질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 질투의 화살은 녀석의 예쁜 여자친구를 겨냥하고 있었다. 나는 틈만 나면 녀석에게 은근슬쩍 그 여자친구의 흉을 늘어놓았었다. 처음엔 초치지 말라며 펄쩍 뛰던 녀석도 끊임없는 내 험담에 흔들렸는지 어느 날 갑자기 헤어졌다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었다.
그 후로도 이 패턴은 쭈욱 이어져오고 있었다. 녀석은 오래 지나지 않아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들었고, 나는 열심히 흉을 봤다. 그걸로 부족하면 아예 녀석이 데이트에 나가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다던지, 뭐 그런 치졸한 수법도 가리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녀석의 팔을 잡고 버티면 녀석은 미치고 팔짝 뛰며 제발 좀 놓아달라고 이리저리 몸부림을 쳤다. 나는 녀석이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그 날의 약속을 취소하기 전까지는 절대 그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녀석의 빈번한 외도(?)로 속이 썩어 문드러져도 내가 녀석의 옆에서 꿋꿋히 버틸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은 가끔 김종현이 폭탄처럼 내뱉는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녀석이 내게 정말 큰 잘못을 했다거나, 술을 먹었을 때, 기분이 아주 좋을 때 건조하게 한번씩 툭툭 던지는 말이었음에도 나는 그 한 단어에 뛰는 심장을 뒤로 감추기가 어려웠다. 정작 녀석을 애닳게 좋아하는 나는 사랑의 ‘사’자도 써내지 못하는데 녀석은 저리도 쉽다는게 약이 오르면서도. 그 말에 진심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만큼 쉽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힘들어질 때면 부러 녀석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도록 유도하곤 했다. 듣고 난 후, 그 텅빈 말을 곱씹으며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말이다.
* * * * *
“이 옷이 더 낫나? 아님 이거?”
“아무거나 입고 나가. 데이트 한두번 하는 것도 아니잖아.”
“야. 지영이는 여태까지 여자애들이랑 진짜 다르다니까?”
무슨 추석에 데이트를 하겠다고 저러는지, 녀석은 아침부터 안달이 나 있었다. 별 차이가 없어보이는 두 옷을 놓고 고민을 시작한지 어느덧 한시간째에 접어들었을 때가 되서야 녀석은 옷을 다 갖춰입었다. 데이트에 나가는 것이 저렇게 설레는 일일까. 싱글벙글 웃고있는 녀석을 보고 있으니 슬슬 가슴 한 켠이 불편해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지난번에 니가 하고 싶다던 게임 받아놨는데.”
“아, 진짜? 그럼 있다 밤에 하자.”
“난 지금 하고 싶은데.”
“넌 그 게임 별로 관심도 없다고 했었잖아, 븅신아. 있다가 형이 배틀 떠줄게.”
“여자가 다 거기서 거기지. 나랑 게임 하자니까.”
“어유. 이 게이새끼 또 게이본능 나오네. 오늘 방해하면 너 진짜 뒤진다?”
주먹으로 내게 꿀밤 먹이는 시늉을 한 녀석이 늦었다며 급하게 집을 나섰다. 시끌시끌하던 집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사실 그 게임, 네가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전에 이미 마스터 해놨었는데. 낮게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가 한없이 볼품없었다.
이번 여자친구는 정말 뭔가 다른 것일까. 혹시 녀석이 진짜 사랑에 빠져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으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내가 녀석에게 이 마음을 고백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혹시라도 녀석이 내 마음을 받아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까? 아니. 그건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나 하나로 족했다. 마음과 함께 비례해서 커지는 이 죄책감을 녀석도 느끼게 할 수는 없다. 어느덧 삼년차에 들어선 이 끝없이 반복되는 질문의 대답은, 언제나 같다.
* * * * *
결국 그날 밤 녀석은 돌아오지 않았다. 녀석이 떠난 후부터 계속 켜져있는 모니터에는 오늘 같이 하자고 약속했던 게임의 창이 떠있었는데도.
새벽 세시가 조금 넘은 시간, 술을 마셨는지 비틀대며 집으로 돌아온 녀석은 아직 잠들지 않은 나를 보더니 베실베실 웃었다. 지영이랑 술 좀 마셨다아.. 웃음이 섞인 녀석의 목소리가 오늘의 데이트가 꽤 성공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부축해주려 다가간 내 품에 와락 안긴 녀석은 볼을 부비적거리며 주정을 늘어놓았다.
“게임…내일은 꼬옥 하자…….”
“됐으니까 가서 자자.”
“우와. 역시 쿨가이 민호. 야, 최미노야. 내가 이래서 널 사랑한다니까…. 넌 지인짜 최고의 친구라구, 알지?”
알지? 알지?
잔뜩 취해선 혀까지 꼬여버린 녀석의 발음에 나는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김종현이 술에 취해 헤롱거리는 모습은 평소의 모습보다 딱 열배 더 귀여웠다. 내가 대답 없이 웃기만 하자 녀석은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를 보며 아냐구 모르냐구…. 하고 중얼거렸다. 그래, 잘 알지. 난 김종현의 최고의 친구라는 거.
“게이 같이 굴지마, 김종현.”
“어? 어어? 그거 내 대사 표절인데여, 최미노씨.”
장난스레 받아친 말에 이어진 녀석의 말에, 우리는 아주 경쾌하게 웃었다. 내 품에 안겨 원없이 웃고있는 녀석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래.
꼭 사랑은 아니어도 괜찮아.
내가 보고싶다는 댓글에 너무 감동받은 나머지 급하게 망글 쪘네여..
사랑합니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