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DEN 11
W. 오알
" 한 씨는 본부로 넘겼고 현재 조사 중에 있습니다. "
윤기가 보스에게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보스는 의자 팔걸이에 팔을 올려놓고 턱을 괸 채, 윤기가 건넨 서류철을 집어들었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겨 모든 내용이 똑바로 되어있는지 확인했다. 아주 느릿하고 더없이 깐깐하게 서류를 훑어보고서야 그가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꽤 흡족해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 그래, 수고했다. "
그의 말에 윤기가 고개를 짧게 숙였다가 들어올렸다.
" 당분간 일은 없을 거다. 쉬어라. "
그가 일렬로 서 있는 우리를 향해 말을 덧붙였다. 우리는 씩 웃으면서 눈길을 주고받았다. 다들 당장이라도 방에서 나가 휴식을 즐기고 싶어서 안달이 난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그들처럼 대놓고 기뻐할 수가 없었다. 아직 나를 향한 보스의 말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언급조차 하지 않는 그에 점점 나는 초조해지고 있었다.
" 아, 그리고. "
보스가 나를 가리키는 순간 나는 떨리는 시선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지금 딱 내 심정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 이번 한 씨 건, 그 쪽이 핵심적으로 잘 해줬네. 이번 사건이 잘 해결되면 내가 아가씨에게 꽤 좋은 대우를 약속한다고 했었지. 그런 의미로, 선택권을 주겠네. "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웃음이 흐릿하게 묻어나오는 그의 표정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아무것도 읽히지가 않았다. 나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두어번 끄덕거렸다. 보스가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 먼저 첫 번째, 아가씨가 상상도 못했던 어마어마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걸세. 돈과 명예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쪽이 필요한 것이라면 전부 다 가질 수 있다고. 다만 한 씨 밑에서 개인비서 일을 했었고 우리 조직과 잠깐 일을 했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되네. 모든 것을 지원받는 대신에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없는 셈 치는 거지. 이해하겠나? 아가씨가 무덤까지 그 일을 비밀로 부치지 못한다면 그 후의 일은 나도 장담하지 못해. "
윤기가 흘낏 나를 쳐다보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보스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
" 그 다음 두 번째, 이 조직에서 일하게 되는 것. 다만 사회생활은 할 수 없고, 앞으로 그 쪽의 인생은 꽤 위험해질지도 모르네. 그 쪽은 전문적으로 일을 배우고 네 옆에 있는 이들처럼 사는 거야. 어때, 이제 선택권은 다 주어졌어. 아가씨는 전자를 택하겠나, 후자를 택하겠나? "
나는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당연한 질문들 사이에서 고르고 있는 시간조차도 아까웠다.
" 당연히, 후자죠. "
전자를 선택했을 때 내 옆의 이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고 더 이상 추억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었다. 이미 이 일이 위험하다는 것은 처음부터 익히 잘 알고 있었고, 이 일에 점점 익숙해지는 중인데 무서울 게 뭐가 있으랴.
내 대답에 보스가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물었다.
" 지금까지 보여줬던 일처리 방식과 재능을 따져봤을 때 이쪽 팀 소속이 되어도 충분할 거라 믿네. 모두 동의하나? "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다고 시원스레 대답했다.
윤기가 정자세에서 고개만 틀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자주 볼 수 없을 것 같아 눈 속에 꼭꼭 담아두었던 그 웃음, 그 웃음이 보이자 마음이 놓이면서 벅찬 감정이 밀려왔다.
생각만 해도 험난하고 고생 많을 미래가 눈 앞에 그려졌다.
하지만 그 출발선이 너무나 기분 좋아서, 함께 달려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기분 좋은 사람들이라서, 그 길이 아무리 고통스럽대도 좋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신입, 식사 준비 좀 돕지? "
석진이 앞치마를 두른 채 식탁에 기대서서 나를 부른다.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팔짱을 낀 채 느릿하게 나를 부르는 모습이, 이번엔 내게 칼질이 아닌 주방 잡일을 시켜보겠다는 야심찬 생각이 가득해보인다.
" 신입! 신입! 이거 좀 도와줘어-! "
태형이 한 씨건 조사자료들을 정리해서 버린답시고 낑낑거리며 방 안에서 온갖 종이더미들을 껴안고 나왔다. 한 눈에 보기에도 무거워보이는 종이들이 그의 품 안에서 하나 둘씩 떨어지다가 결국 우르르 바닥으로 무너져 내린다. 태형이 투덜투덜 종이를 줍기 시작하더니 고개를 들어 내게 손짓했다.
" 적당히들 해라, 좀. "
윤기가 자신의 방 안에서 느른한 발걸음으로 걸어나오더니 어쩔 줄 몰라하고 서 있는 내 어깨에 턱, 손을 얹었다. 잠이 덜 깬 듯 눈을 비비면서 살짝 웃는다.
" 아, 형. 장난도 못 쳐요-. "
태형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 보자, 윤기가 금세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태형을 본다. 태형은 입술을 비죽이며 다시 종이 줍기에 열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기만은 좀 미안해서 종이 더미를 들어다주자, 태형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 윤기 형 저러는 거 처음 봐. 아으, 눈에서 꿀 떨어진다, 꿀 떨어져. "
태형은 이내 웃음 섞인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고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마저 주웠다.
석진의 식사준비를 도우려 주방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여태까지의 식사준비 중 가장 분주했고 화려했다. 석진이 손질해놓은 재료만 한가득이었다. 정성스럽게 접시를 놓으면서 석진이 나지막하게 콧노래를 불렀다.
그가 주방에서 큼직한 손으로 뭔가를 담아 올 때마다 어느새 먹음직한 음식들이 가득 늘어섰다.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풍성한 식탁이 차려졌다.
" 뭐야, 또 왜 이렇게 진수성찬이야? 이거 사진 찍어놔야 되는 거 아냐? "
" 오늘 잔치 벌인대? 왜, 동네 사람들 불러와? "
호석과 남준이 호들갑을 떨면서 자리에 앉았다.
지민과 정국도 진동하는 음식냄새에 부리나케 방에서 뛰쳐나와 식탁 앞에 착석했다. 종이 더미를 옮기느라 녹초가 된 태형 또한 터덜터덜 걸어와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 우리 팀 신입 환영회 아니냐, 주인공이 중간에 앉아야지. 안 그래? "
앞치마를 벗어 의자에 걸쳐놓으며, 능청스럽게 말하는 석진이었다. 석진은 나를 향해 눈썹을 찡긋거리며 식탁 가운데에 놓인 의자를 권했다. 석진의 말에 아아, 하고 동의하면서도 연신 키득거리는 그들 때문에 상당히 민망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중심에 앉았다.
" 어쨌건 축하와 환영의 의미로, "
태형이 나를 장난스럽게 쳐다보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아까 전의 그 피곤해보이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의 말에 모두들 하나둘씩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금세 주위가 시끌벅적해지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하여간 바람 잡는 데에는 타고난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모두들 서로 잔을 높게 들어올려 부딪혔다.
나도 옆자리의 윤기와 정국과 나란히 잔을 부딪힌 다음, 자연스럽게 입으로 가져갔다.
갑자기 윤기가 내 팔을 살짝 건드렸다. 그 바람에 잔에 들어있던 내용물이 약간 넘쳐흘렀다. 나는 당황해서 윤기를 쳐다보았다. 윤기가 안 돼, 하고 잽싸게 내 손에 들린 잔을 빼앗아 식탁 위에 탁 올려놓았다.
" 먹지 마. 쟤네 이상한 장난 많이 쳐. "
" 아-, 뭐야! "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는 야유에 나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고, 다들 한통속이었구나. 이제야 그들이 무슨 속셈을 갖고 있었는지 빤히 보였다. 다들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잔을 비웠다.
" 와, 형 진짜.. 처음에는 뭐 사적인 감정 전혀 없었다면서요. 순 거짓말. "
지민이 입을 뾰루퉁하게 내밀고 팔짱을 낀 채 말했다.
" 난 윤기 형이 굳이 안해도 되는 말 했을 때부터 삘이 왔었다니까. 내 촉 믿지, 믿지? "
남준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글쎄, 그의 촉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 야, 데려온 사람이 책임져야지. "
대화를 듣고 있던 윤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입가에 바로 그려지는 웃음을 감추려고 무던히도 애쓰면서 괜히 딴 곳을 보았다. 모두들 다시 얼굴을 장난스럽게 찡그려보였다.
그때 윤기가 식탁 위에 있던 내 잔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 그렇게 불만들이 많으면, "
그는 잔을 단숨에 비웠다.
" 이제 됐지. "
다들 놀라움이 담긴 표정으로 윤기를 보았다.
" 오, 센데. "
" 그거 독할텐데, 아무거나 막 넣고 휘저었는데.. "
태형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윤기를 관찰하며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윤기가 멀쩡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자 태형은 곧 반응이 올거라며, 신이 나 했다. 하지만 한참 후에도 윤기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계속했고 태형은 이내 시무룩해졌다.
" ..솔직히 속 쓰린 거 참고 있죠. "
나는 주변이 왁자지껄해진 틈을 타 슬쩍 윤기에게 몸을 기대어 물었다.
윤기가 흘끗 나를 쳐다보더니 젓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 어. "
" 당근주스 어때요, 쓰린 속을 달래줄 거에요. "
" ..... "
혀로 치열을 훑으며 나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는 윤기였다. 그의 눈에서 당근에 대한 극도의 거부반응이 느껴졌다. 나는 애써 웃음을 참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윤기가 하 참, 하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참 뒤에 다시 윤기에게 몸을 기댔다.
" 아, 근데 당근이 또 항암효과가 아-주 뛰어나다고.. "
" 야, "
윤기 또한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머리를 쓸어넘겼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마주보고 웃었다.
그런 우리 뒤로, 웃음 사이로 천천히 달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조직 소속으로써 새 사건을 맡게 된 첫 날이다.
첫 날부터 이제는 네가 우리의 히든카드라면서 잔뜩 부담을 주는 팀원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정국은 차 맨 앞자리에 앉아서 뒤를 돌아보고는, 늦은 밤에 출발하느라 퀭한 내 얼굴을 보고 킥킥거리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정국을 애써 무시하고 컴컴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휙휙 스쳐지나가는 어두운 건물들에 속삭이듯 생각한다.
잘해봐야지.
아직도 과분하게 느껴지는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떠올리고 반복하는 말이다. 잘해봐야지, 하고 내게 말할 때면 이 일에 대한 책임감을 단번에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이 일과 팀의 소속감은 내게 중요하게 여겨진다.
나는 지난 수십년간 히든카드라는 이름 아래에서 숨겨지고 감춰졌다가 드디어 빛을 낸다.
나는 이제야, 마침내 빛나기 시작한다, 이들 옆에서.
마지막 화입니다 여러분
히든이라는 글로 함께한지 거의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네요
완결까지 쉼없이 달려올 수 있었던 게, 미숙한 실력으로 완결까지 올 수 있었던 게,
모두 다 독자님들 덕분입니다ㅠㅠㅠㅠㅠㅠ
빠른 전개의 윤기 중심의 조직물 하나 만들어보자, 하는 가벼운 목표로 시작했던 글이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어느덧
제게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만큼이나 독자분들한테도 많은 의미를 가진 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____^
지금까지 정말 많이 감사했습니다, 다른 작품으로도 곧 찾아오도록 할게요!
모두들 안녕! (쪽쪽
[암호닉]
꾹꾸기 / 열렬히 / 삐삐까 / 현기증 / 호비 / 챠이잉 / 주222 / 입틀막 / 연서 / 태태요정 / 굥기야 / 무네큥 / CGV / 콧구멍 / 망개똥 / 솜지 / 먼데인 / 뀨기 / 여하 / 소청 / 뾰로롱♥ / 됼됼 / 민윤기바수니 / 흑설탕 / 민들레 / 자몽쥬스 / 지우개 / 꿀돼★ / 도도새 / ♥호떡♥ / 딸기빙수 / 꿍디 / Seeker / lotus / 러폽 / 복동 / 사랑둥이 / 소다
더이상 암호닉은 받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