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DEN 01
W. 오알
못 보던 손님이 왔다.
6개월마다 정기적으로 찾아와 사장실에서 봉투와 묵직한 가방을 맞바꿔가는, 검은색 마스크를 쓴 남자를 제외하고는 실로 오랜만의 발걸음이었다.
티끌 하나 묻어있지 않을 것 같은 깔끔한 정장차림에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 그는 양 옆에 경호원들을 거느린 채, 날선 눈빛으로 건물 안을 훑어봤다. 이윽고 그는 느릿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려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차분히 그의 동선을 지켜보던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정중하게 물었다.
" 사장님께 안내해드릴까요?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기다리고있던 한 씨가 한걸음에 달려나와 그를 맞았다.
한 씨와 가볍게 악수를 나눈 그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곧장 사장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그의 능청스럽고 당돌한 태도에 한 씨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큰 소리로 터뜨리며 그의 뒤를 쫓았다. 사장실 문이 철컥, 하고 닫히자마자 그를 엄호하던 경호원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지더니 복도와 사장실 문 앞을 철통같이 지켰다.
" 오오. "
좀처럼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삼엄한 경비와 긴장감이 도는 무거운 분위기에 숨이 턱 막혀왔지만서도, 감탄사를 내뱉으며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곳에서 개인비서라는 직분으로 잔심부름만 도맡아하길 수년째, 사장실 앞 데스크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일은 매우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재미난 구경거리라니, 웬 일이지.
따분한데다, 어마어마한 근무시간에 비해 월급은 턱도 없이 적고, 하루일과가 끝나면 비서실에 딸린 좁은 방에서 잠이 들어야하는 내 일은 상당히 고달픈 편이었다. 보통사람이라면 일주일만에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이다. 게다가 틈만 나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곤 하는 한 씨때문에라도 당장 이 일을 때려치고싶었다.
하지만 이 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었다. 선택도 없고 여지도 없다.
어린 나이엔 감당하기 어려웠던 부모의 죽음. 고아원만큼은 죽어도 가기싫어, 숙식을 제공하는 일자리를 얻으려 일찌감치 안 해본 게 없었다.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결국 돌고 돌아온 게 이 곳이었다. 당시 한 씨는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이 건물에 발을 들이게 해줬었다. 사무용 책상에 걸터앉아 밖을 내려다보며 몇 시간이고 사람구경하길 좋아하던 그때의 나에게 한 씨는 불쌍한 고아인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눈 감고도 이 곳을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이 곳에 익숙해졌건만, 아직도 한 씨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른다. 나를 제외하고 그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좀처럼 눈에 띄지않았다. 게다가 그의 일은 전부 다 사장실 안에서 이루어졌었고, 사장실은 내가 들어설 수 없는 금지된 공간이었다.
내가 점점 자라나 성인이 되고, 최근에 들어서서 나를 보는 그의 시선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애초부터 날 불순한 의도로 받아준 게 아닐까에 대한 생각에 점점 확신이 서기 시작했을 때, 이 곳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었다. 금지된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자유롭지도 않은 여기에서 우물 안 개구리로 남기도 싫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헛쓰지않고 돈을 모았다.
그래도 날 거둬준 한 씨에게 할 도리는 다 하고 나가자는 생각에 악착같이 돈을 모았고, 그 결과 이 곳을 나갈 계획은 아직도 현재진행중이다.
내게 주어지는 쥐꼬리만한 월급은 턱 없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돈을 모으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나간다고 해도 내가 내밀 수 있는 것은 고등학교 자퇴서뿐. 그걸로 뭘 할 수 있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과거회상에서 그 생각까지 미치자, 기분이 우울해진 나는 맥없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정자세로 꼿꼿이 경비를 서고있는 경호원들을 보며 '도대체 무슨 일일까?' 하고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한 씨의 비굴하면서도 어딘가 불안해보이는 모습과 시종일관 거만한 태도로 한 씨를 대하던, 더이상 깔끔할 수 없는 정장차림의 남자.
그 남자가 이 곳에 찾아온 목적이 뭘까, 들어서자마자 왜 그런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을까. 물음표들은 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때였다. 인기척 하나 없던 복도가 별안간 소란스러워졌다.
경호원들은 총을 잽싸게 꺼내들어 사격 자세를 취했고, 한 씨가 '무슨일이야'하고 고함을 치며 사장실 문을 열어젖히며 나왔다. 사장실 앞 데스크에 턱을 괴고 앉아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여러 발의 총소리가 건물을 뒤흔들었고, 순식간에 복도를 장악한 침입자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경호원들을 제압했다. 사장실 앞 경호원들도 손 한 번 써볼 틈 없이 속수무책으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머릿속은 총소리로 윙윙 울렸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되더라. 데스크 밑으로 몸을 숨겨야하는데, 아니면 도망쳐야하는데.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누군가 나를 붙잡아둔 듯이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진동하는 화약냄새 속에서 나는 얼어붙은 듯이 그대로 멈춰서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어떻게든 파악해보려고 애썼지만 연이은 총성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혼란에 휩싸여 마구 흔들리던 내 시선의 끝은 한 씨였다. 그의 얼굴은 침입자들이 검은 마스크를 쓴 사내들임을 확인하자마자 창백하다 못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검정색 마스크를 쓴 남자들 중 왼쪽에 서 있던 한 명이 그런 한 씨를 발견하고는 마스크를 턱 밑으로 끌어내리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 한 씨, 어떻게 우리한테 한 마디 말도 없이 이런 독단적인 일을 벌여요? "
" ..... "
" 이렇게 나오면 우리는 너무 서운하잖아-. 안 그래요? "
침입자들 중 주황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천천히 복도에서 앞으로 걸어나왔다.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사장실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사장실에 앉아있던 정장차림의 그 남자는 좀 전의 오만하고 능청스런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느닷없이 자기 앞에 나타난 침입자를 올려다봤다.
" 아, 이 분은 왜 이렇게 안색이 안 좋으실까, 한 씨랑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길래."
주황머리를 한 남자의 말에 그는 입술만 달싹거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충 상황은 이해가죠? 앞으로 남의 밥그릇은 건들지 맙시다, 이건 진심을 담은 경고에요. " 주황머리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쎄한 표정을 지었다. " 근데 계속 거기 앉아있을거에요? 총소리에 이미 신고 들어가서 시간 끌어봤자 좋을 게 없을텐데. 뭐해요, 그쪽 사람들 데리고 얼른 튀어야죠. "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장실에 앉아있던 남자는 부리나케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빠져나갔다. 바닥에 나뒹굴던 경호원들 중 몇 명이 절뚝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주황색 머리칼의 남자는 키득거리며 도망치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사장실의 상황이 일단락되자, 마스크를 턱에 걸치고 있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자,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전해들은 거에 따르면, 한 씨는 우리와 거래한다는 명목 하에 우리쪽 기밀문서를 조용히 빼돌리고 저쪽 조직이랑 뒤에서 손잡으려고 했었던거죠? 나 참, 일이 뜻대로 술술 풀려서 기분이 아주 째지셨겠어요? "
조직? 거래? 이 무슨 현실성없는 대사들인지. 나는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한 씨가 거래를 하면서 저 검은 마스크 쓴 사람들의 기밀문서를 훔쳤고 아까 봤던 그 거만한 남자와 몰래 거래하려고 했었다는 건가? 나는 검은 마스크 사내들과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있는 한 씨를 얼빠진 표정으로 번갈아보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도무지 한 씨를 향한 총을 내릴 생각을 하지않는 침입자들 중 한 명은 낯익은 모습이었다. 사장실에 정기적으로 들러서 가방을 가지고가던 검은 마스크를 쓴 남자, 아무래도 이 쪽 소속이었나보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들이 검은색 마스크를 꼈던 빨간색 마스크를 꼈던 그게 뭐가 중요한가.
지금 내가 당장 죽을 수도 있는데. 한참 고민하던 나는 빨리 이 곳을 도망쳐야겠다고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절대 눈에 띄게 행동해서는 안된다. 나는 속으로 수없이 되뇌이며 천천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이 쪽으로 눈길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침 삼키는 소리까지도 들릴 것 같은 정적 속에 나는 조용히 움직여 복도로 나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
" 거기 아가씨는 위험하니까 우리 뒤에 있어요. "
누군가가 내 팔목을 잡고 뒤로 확 끌어냈다.
얼떨결에 악 소리를 내며 끌려가보니 순식간에 나는 한 사내 등 뒤에 밀착되어져 있었다. 그는 히, 하고 웃으며 코를 찡긋해보이고는 다시 자세를 고쳐잡았다.
머리가 지끈지끈하니 한숨이 나왔다. 산 넘어 산이었다. 소리 없이 도망치려고 했더니 이제는 총을 든 침입자들 편에 서 있게 되었다. 다리가 후들후들거리는게 이게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건 확실했다.
이 대치상황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거지? 침입자들의 단단한 어깨들 너머로 언뜻 보이는 한 씨는 계속되는 추궁과 압박에 아예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 때되면 돈 갖다주고, 직접 물건 가지러오고, 모든 일은 조용하게 처리되고. 우리는 한 씨와 나름 깔끔한 거래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거래가 끝나다니 아쉽네요. 그나저나 거래상 치고는 상당히 용감한 편이야, 우리 쪽 기밀문서 훔칠 생각을 다 하고. "
검정색 마스크를 걸친 사내는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한 씨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감탄을 연발했다.
" 이제 지나치게 야망이 컸던 대가를 치러야죠. 한 씨 덕분에 우리 팀이 처리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에요. "
아까 내 팔목을 붙잡고 끌어내 뒤에 세웠던 남자가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가장 중앙에 서 있던 은발의 남자가 총을 집어넣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이러고 있어봐야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 같다, 한 씨 차에 태우고 건물 앞에 대기시켜놔. 난 남준이랑 5분 안에 둘러보고 내려갈 테니까. "
그의 말에 검정색 마스크를 쓴 남자들은 흩어졌다.
드디어 끝났다, 그 영원히 끝나지않을 것 같던 대치상황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다리가 풀려 가까스로 벽에 기대어 섰다. 둘러보고 내려간다던 은발의 남자는 무전기에 대고 무어라 말하고있었고, 키 큰 남자는 사장실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이내 사장실을 훑어보고 나온 키 큰 남자가 두 손으로 X자를 그려보였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 같았다.
은발의 남자는 그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다시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 ..현재 시각 4시 20분부로 상황 종료. "
대충 상황이 마무리되는 분위기였다. 은발의 남자가 큼직한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계단을 내려갔고, 키 큰 남자도 주위를 살피며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한 씨가 끌려갔으니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거지?
나는 앞뒤 생각하지않고 그들을 급히 뒤쫓았다.
" 저기요! "
" 예? "
난간을 붙잡고 대뜸 소리쳤다. 계단을 거의 다 내려가던 키 큰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대꾸했고, 그보다 앞에서 치직거리는 무전기를 끄며 내려가던 은발의 남자도 나를 흘낏 쳐다보았다.
" 저, 저는 어떡해요? "
" ..... "
은발의 남자는 아예 고개를 비틀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내 심정은 절박했다. 이미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거래상의, 그것도 사기까지 친 거래상의 개인비서가 되어있었다. 문제가 없을리가 없었다. 여기에 멍청하게 남아있다가는 무슨 죄를 뒤집어쓸지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갈 곳도 없고..
은발의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고요하고 변화 없는 표정에 나는 어딘가 빨려들어갈 것 같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내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 저도 데려가주세요. "
내가 말해놓고 미쳤구나 싶었다. 누굴 따라 어딜 가도 여기보단 나을 거라는 이상한 확신이 저 말을 불러일으켰나, 아니면 아무런 준비 없이 철저히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개념이 나를 두렵게 했나. 나는 방금 내가 한 말을 곱씹으며 그들을 간절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 형들, 뭐해요! 가야돼요! "
건물 앞에 세워진 차 안에서 검은색 마스크를 쓴 사람 하나가 큰 소리로 소리쳤다. 잠시 기다리라고 대꾸한 키 큰 남자가 한숨을 쉬면서 나에게 다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들의 표정이, 왠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할 것 같아서 심장이 요동쳤다.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 제가 정보가 될만한 걸 알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
내 말에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서 있던 키 큰 남자가 움찔하더니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대꾸했다.
" 당신이 상상도 하지 못할 아주 위험한 곳인데, 겁도 없네. "
" ..... "
이번엔 내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도대체 나는 무슨 일에 연루되어있던 걸까. 아무래도 판이 점점 커지는 것 같은 느낌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무거운 정적이 답답해질려고 할 때, 뒤에 있던 은발의 남자에 의해 정적이 깨졌다.
" 데려가. "
" 에? ..형! "
" 한 씨건 내가 총책임자잖아. 시키는대로 해. "
말을 마친 은발의 남자는 빠르게 걸어가 건물 앞의 차에 올라탔다. 키 큰 남자는 '와, 돌겠네' 하고 중얼거리고는 난간을 잡고있던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아 붙들고서 계단을 마저 내려가기 시작했다. 차 문을 열어젖힌 그는 빠르게 나를 태웠다.
" 분명히 나는 경고했어요, 위험하단 거. "
등 뒤에서 희미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차 문이 턱하고 닫혀버렸다.
점점 멀어져가는 사이렌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들에게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름 오래 준비했었던 글인데 이제야 풀게되네요^ㅁ^
사실은 윤기 조직물이 넘 보고싶어서 제가 직접 쓰게 된 거구요,, (사심가득)
아 그리구 현실 지민이 머리색은 어둡게 바뀌었지만 여기에선 여전히 주황머리라눈거..ㅎ
앞으로 자주자주 보도록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