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마주쳤다.
잘생긴 미남자가 경수를 보고 살풋 웃는다.
경수는 자신이 평소에 자주 듣던 가수 Taylor swift의 노래 한 구절처럼 정말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친 후 강한 스파크를 느꼈다. 이게 민석이 형이 말하던 간질간질한 연애의 시작일까? 아니겠지. 아닐 거야. 저 사람은 남자잖아. 우리는 인연이 될 수 없어. 하며 경수가 어벙하게 그 남자를 쳐다보고 있자 경수와 눈이 마주친 그 남자는 경수에게 한 발짝 다가오며 더 해사하게 웃는다.
“새로 인사발령 나신 도 경수 씨인가요?”
“.......”
“경수 씨? 경수 씨 어디 아파요?”
“아 안녕하세요! 외교부 북미2과 서울지부에서 근무하던 26살 도경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반가워요 경수 씨. 몬트리올 영사관에 들어온 걸 환영해요. 나는 이 영사관에 참사 관직을 맡고 있는 27살 변백현입니다. 앞으로 백참사관님으로 불러주셨으면 좋겠네요. 뭐 경수 씨 편한 대로 불러도 상관없고요. 백현이 형도 괜찮네."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는 백현의 모습에 경수는 그 자리에 얼음이 된 듯 멈춰있었다. 자신을 여러 번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경수는 백현과 인사를 나누고 앞으로 근무할 사무실로 이동하며 백현에게 주 몬트리올 영사관에서 해야 할 일들과 캐나다로 처음 이사 오며 생기는 자잘한 실수담을 들으며 오후에 할 일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그렇게 백현에게 자리를 배정받은 경수는 외교부에선 볼 수 없었던 자신의 앞에 펼쳐진 드넓은 책상을 보며 아. 여긴 참 좋은 곳이구나. 앞으로 열심히 해야지 하는 다짐을 수도 없이 되새겼다. 응? 근데 이 책상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게……. 아 맞다 민석이 형! 민석이 형이 책상만큼은 좋은 거 써야 한다고 우겨서 교수실에 대형 책상 가져다 놓은 거 생각난다. 민석이 형 생각하니까 풋풋했던 내 대학생활……. 물론 과제에 치여 살았던 때이기도 하고…….
***
“경수야!”
“어! 형 지금 비교정치론 시간 아니세요?”
“지겨워서 수아랑 그냥 나왔어. 너는 발표수업 준비하니?”
지겹다는 듯 수아를 옆에 두고 한숨을 쉬는 민석에게 경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내일 조별 과제 발표수업이 있는데 보시다시피 다들 놀러 갔어요하며 대답한다. 으으 이래서 조별 과제가 싫다니까……. 어쩌다 학과 내에서 아싸가 되어버린 경수는 2년 전 자신이 새터에 나왔을 때 자신과 닮았다며 경수를 자세히 살피던 민석이 경수와 특유의 친화력으로 대화를 건네면서 어려움 없이 그와 형 동생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지금 민석과 수아와 함께 있는 이유도 그 이유이고…….
사실 경수는 처음부터 정치외교학과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가족과 행복한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수가 18살일 때 자신의 가족과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앞에 오던 졸음운전 트럭과 그대로 부딪혀 그의 가족들은 그 짧은 순간마저 경수만은 살리려 발버둥 쳤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뉴스에도 크게 보도된 그 악몽 같은 사건 속에서 경수만이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그 이후로 경수는 아무 꿈 없이 공부만 하기 시작했고 성적에 맞춰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또한 동창들이 면허를 따고 자신만의 차를 가질 때 그는 그날의 악몽으로 대중교통만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 이유로 외교부 서울지부에서 근무할 땐 항상 준혁의 차를 얻어 탔던 것이고…….
자신과 친해지며 그 사실들을 알게 된 민석은 경수에게 내가 너의 가족이 되어줄 게라며 경수의 형을 자처했다. 경수는 이형이 나에게 왜 이러나……. 이형도 역시 내가 불쌍해서 그러는 거겠지? 그래서 과한 친절이라 여기고 잠시 민석을 피했지만 민석은 진심이었고 결국 경수는 민석을 친형이자 자신의 부모님이라 생각하고 민석을 따르기 시작했다. 경수가 민석과 한층 관계가 발전한 후로 경수와 민석, 그의 여자친구 수아는 언제나 어디서든 함께 다녔다. 경수는 커플의 데이트에 끼어든 방해꾼이 된 것처럼 어색해하기 일쑤였지만 민석과 수아는 경수가 더 이상 세상에 홀로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민석과 수아 커플의 꽃놀이에도 같이 가서 사진을 찍고 수아가 알아본 맛집을 함께 다니며 추억을 쌓고 항상 발표수업이 이루어지는 정치외교학 수업의 준비도 하며 경수는 부모님이 떠난 이후로 처음 느끼는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수아가 마음이 변하기까지는…….
시작은 조용했다. 문화와 정치를 다루는 학과 특성에 맞게 매 학기마다 외국에서 교환학생이 오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수아가 맡게 된 중국에서 온 장이씽까지. 한국의 문화를 처음 경험하는 장이씽은 그 당시 경수와 민석, 수아 사이에 스스럼없이 파고들었고 어느 순간 다 같이 웃고 즐거운 캠퍼스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눈치 없던 경수가 보기에도 그때의 민석과 수아 사이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여전히 빛나고 아름다운 커플만이 존재할 뿐……. 사람의 감정은 사람 간의 감각적인 터치와 만남으로 증진된다. 장이씽이 레이로 별명이 정해지던 그즈음엔 민석이 졸업과 동시에 조교임을 시작하느라 가장 정신없고 바빴었다. 민석이 경수를 챙기지 못 했을 만큼……. 정치외교학과 학생들 사이에선 민석이 수아는 챙기지 않아도 아들인 경수는 챙기는 경수 맘이라고 불렸는데 경수를 챙기지 못 했을 만큼 바빴던 민석은 수아에게도 많은 관심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사건은 거기서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어느 날씨가 화창하던 봄날, 대중교통이 가장 북적이던 그 시간에 경수는 수아와 민석과의 약속으로 만나기로 한 장소에 늦어 뛰어가고 있었다. 어휴 요즘 따라 지하철이 왜 이렇게 자주 고장이 나지? 나도 면허를 따야 하나……. 아니야. 나는 아직. 못하겠어.라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도착한 만남 장소엔 민석밖에 도착해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평소엔 자신에게 가장 커 보이던 등이 세상의 모든 시련을 지고 있는 거처럼 쓰러질 듯 위태로운 등을 가진 민석이……. 평소와 다른 민석의 모습에 경수는 깜짝 놀라 민석에게 다가갔다.
“형! 형! 정신 좀 차려 봐요. 무슨 일 있어요?”
“경수야…….”
“네. 형 말해보세요”
“형……. 수아랑 끝났다? 수아랑 정리했어. 나 이제 어떡하지?”
“네. 네? 뭐라고요? 수아 누나가 뭐라고요?"
평소에도 큰 눈을 민석의 말을 듣고 놀란 경수는 자신이 뜰 수 있는 눈의 크기를 재 보려는 듯 점점 눈의 크기를 키워가며 민석의 앞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수아 누나가 왜? 민석 형이랑 싸웠나?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가 보기엔 아직도 아름다운 커플인데……. 아. 설마……. 레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침착해 도경수. 네가 흥분하면 더 무너지는 건 민석 형이야 침착하자 도경수.
“형. 혹시…. 레이.”
“맞아……. 그렇다네. 내가 바쁜 동안 수아가 많이 외로웠나 봐. 같이 동북아 국제관계론 수업 작업하면서 친해졌대. 그동안 내가 너무 수아를 외롭게 했지.”
항상 든든하던 민석형의 자신을 잃은 모습을 보며 경수는 자신이 형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닫고 절망했다. 형은 나를 위해 가족도 만들어주고 내 앞길을 다져주었는데……. 나는 형을 위해할 수 있는 게 위로밖에 없구나……. 너무 무능력한 도경수……. 도경수. 넌 지금 무얼 위해 공부하고 있니?
인연을 잃은 민석은 그 이후로 교수를 취득하기 위해 그전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물론 경수를 챙기는 것 또한 잊지 않고. 그날 이후로 민석은 항상 웃던 얼굴을 버렸다. 사랑이란 건 믿을 수 없는 것이기에……. 헤어진 후 바뀐 민석을 지켜보던 경수는 민석을 보며 아무것도 못하고 안타까워하는 일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아싸인 자신이 어찌어찌 끌어온 소개팅도 거절하고 선 자리도 거부하는 민석을 보며 자신에게 사랑을 보여준 민석에게 좋은 인연이 다시 다가오길 빌 뿐이었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한 후 민석의 외조로 공부하던 2번의 외무고시를 낙방하고 3번째의 외무고시에서 당당하게 외교부를 입사하게 되었다. 외무고시 합격자 발표를 하던 그날 민석이 진심으로 자신을 부둥켜안고 웃던 그 미소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주위 사람을 마음 따뜻하게 하는 해사한 형의 미소……. 백현도 그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외무고시에 합격한 후 외교부에 입사해 외교부에서 보내주는 해외연수와 사회 초년생으로서의 눈치전쟁을 벌이며 경수는 자연스레 민석과의 만남이 줄어들었다. 언제나 민석을 생각하고 있어도 세계는 일초 아니면 그보다 더 작은 단위의 시간으로 바뀌니 정시 퇴근의 꿈의 직업이라던 공무원, 즉 외교관은 정시퇴근은 무슨 해 뜨기 전에 퇴근하면 다행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햇살 좋은 날 경수는 오랜만의 휴가를 받고 가장 먼저 보고 싶던 민석을 만나러 자신이 졸업한 대학을 다시 찾았다. 대학 교문을 들어서며 민석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을까……. 아직도 사랑에 부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 어쩌지? 민석을 향한 수많은 걱정들을 하며 민석이 근무하는 교수실의 문을 연 순간 경수의 오래된 걱정들은 하나둘씩 해결되었다. 문을 열고 민석을 보며 웃은 경수를 본 민석은 뛰어나와 꼭 안아주었고 자신의 조교 루한을 소개하였다.
“경수야 오랜만이다. 몸은 건강하지?”
“그럼 당연하지. 형은 아직도 그래?”
“그 이야기는 나중에 술 마시면서 할까? 인사해 경수야. 작년에 중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왔다가 한국에 눌러앉아 내 조교가 된 루한이야. 나랑 동갑이니까 너에겐 형이겠다. 루한도 인사해.”
“안녕하세요. 루한 형. 잘 부탁드려요. 물론 우리 민석이 형도요”
“안녕하세요. 경수 씨. 우리 민석이한텐 항상 잘하고 있죠.”
한국말이 능숙한 루한을 보며 깜짝 놀란 경수는 자신이 문을 열었을 때 느꼈던 풋풋함의 근원지를 찾을 수 있었다. 이거……. 민석이 형 분위기가 풀어진 게 다 이유가 있었네. 아마 루한 형이랑 민석이 형이랑 잘 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제 한시름 놓아도 되겠다! 눈을 도르륵 굴리며 마음을 한시름 놓은 경수는 민석이 안내하는 소파에 엉덩이를 안착시켰다. 민석이 형은 책상도 좋은 것을 사야 한다 했으면서 소파도 완전 좋아. 이거 천연 소가죽 아니야? 완전 비싸겠네. 민석이 차를 준비한다며 잠시 나가자 머뭇거리던 경수가 루한에게 경고 비스름한 한마디를 남겼다.
“루한 형. 편히 말할게요. 민석이 형이랑 잘 되어가는 중이에요?"
“아니라곤 할 수 없지. 나의 일방적인 구애라고 해야 하나?”
“민석이 형, 사랑 때문에 고생 많이 한 형이에요. 저에겐 가족 같아서 더 마음이 쓰이는 것도 있고. 늦게 나타나서 이런 말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장난으로 시작한 거면 정리해주세요.”
“장난 아니야 경수야. 나는 민석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민석이 항상 나와 같이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안심이 되네요. 앞으로 우리 민석이 형 잘 부탁드려요!”
“경수도 나 잘 부탁해!”
민석이 차를 들고 들어오며 루한과 경수를 향해 너희가 언제부터 친했다고 손을 잡고 있냐? 나 질투 나려고 해하자 루한이 일어나 차를 받아들며 나한텐 너밖에 없어 민석 한다. 그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미소를 지은 경수는 안 비밀
그나저나 루한 형하고 민석이 형은 안 본 지 오래됐는데 잘 지내려나? 오늘 인수인계 업무 끝나면 연락해봐야겠다. 캐나다하고 한국하고 시차가 얼마지? 음……. 형 자려나? 깨우면 안 되는데……. 톡톡. 톡톡? 응? 이게 무슨 소리지? 경수가 궁금함이 가득한 눈을 들어 소리의 근원지를 찾자 백현이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경수 씨 눈 굴리는 거 귀엽네요. 오늘 업무 거의 끝났으니까 퇴근하시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아 한국 오기 전에 못한 연락이랑 옛날 생각 좀 했네요. 참사관님은 어디 사세요?”
“저는 Fielding Ave에 있는 렌트 하우스 B313이에요. 경수 씨는요?”
“아 참 말 편히 하세요. 급하게 구한 집인데 저랑 참사관님이랑 같은 곳에 살게 됐네요? 완전 우연이다! 저는 D112에요!”
“경수 그럼 출퇴근 대중교통으로 하겠네? 그럼 나랑 차같이 타고 다니자. 가자”
앗, 참사관님 감사합니다!! 가뜩이나 추운 몬트리올 지방에서 대중교통을 기다리며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 자신을 상상하던 경수는 백현이 자신과 함께 하자는 그 한마디가 신의 손길과 다름없었다. 아 이젠 안 기다려도 되는구나! 감격의 눈물이 나네. 속으로 방방 뛰던 경수는 백현이 얼른 옆자리에 타라는 소리에 쪼르르 달려가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백현과 퇴근을 하며 차안에서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경수는 백현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아. 참사관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어릴 때부터 어학특기자에 대학 조기졸업에……. 나는 꿈도 못 꿀 외무고시 최연소 합격자라니……. 게다가 27세의 나이인데 고위공직자야 대단해……. 백현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수는 백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엄에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그렇게 감탄하며 이야기를 하던 중 둘의 숙소에 도착했고 내일 만남을 약속한 뒤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경수가 주 몬트리올 영사관에 발령받은 지 근 1주일이 흘렀다. 그동안 옆자리에 앉은 수정이랑도 친해졌고 출퇴근도 백참사관님이랑 하니 걱정도 없다. 근데 수정이가 누구냐고? 경수의 기억을 되돌려 가보자.
첫 출근 다음날 시차 적응 문제로 아침부터 늦잠을 잔 경수는 눈을 뜨자마자 밖에서 기다리는 백현이 보낸 카톡들에 정신이 없었다. 분명 잔다고 잠을 잔 거 같은데 한밤중인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아니 이게 아니지. 지금 백참사관님이 밖에서 기다리시잖아. 도경수 얼른 뭐부터 해야 하지? 씻는 거? 옷은 어제 걸어놓은 거 아무거나 입고 일단 머리만 대충 감고 출근하자. 머릿속으로 생각을 마친 경수는 허겁지겁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경수는 급한 준비를 마치고 집 앞에 대기해있던 백현의 차에 올라탔다. 시차적응을 걱정하는 백현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흘린 건 안 비밀
“경수 밤에 잠 잘못 잤어?”
“아 아직 시차 적응이 안돼서 큰일이네요.”
으하암 하며 큰 하품을 하는 경수를 보고 크게 웃은 백현은 차를 출발시켰다. 신호등 앞에 멈춘 차안에선 백현이 경수에게 이거 먹어. 경수 너 밥 못 먹었을 것 같아서 챙겨왔어하며 베이글을 건넸다. 경수는 어제 저녁부터 몬트리올의 지리를 몰라 텅 빈 냉장고를 바라보며 눈물 나는 저녁식사를 한 배에 드디어 뭔가를 채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백현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백현으로부터 건네받은 베이글을 냉큼 베어 물었다.
경수가 베이글에 정신이 팔린 사이 참사관 이상에게만 주어지는 백현의 아우디가 몬트리올 영사관 주차장에 매끄럽게 주차되었다. 백현은 경수가 베이글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하나를 다 먹었을 때쯤 경수에게 가죠. 도 경수 씨 영사관 식구들이 기다리겠네요하며 경수가 탄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배부른 아침식사를 마친 경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두 번째 보는 영사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백현을 처음 만난 인포메이션 데스크가 보이고 어제 새로 마련된 경수의 자리가 보인다. 경수는 백현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자리로 찾아들어갔다. 근데 옆에 앉은 여자 분은 누구지? 경수는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옆자리 여자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아. 말을 걸어볼까? 하는 도중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 용기를 내보자!
“저……. 안녕하세요! 어제 발령받은 도경수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어제 찬열 씨로부터 이야기 들었어요.”
저는 이수정이라고 해요. 나이는 92년생 22살이고 저는 프랑스어 특기자로 몬트리올 영사관에 들어왔어요. 오빠시니까 말 편하게 해주세요. 근데 몬트리올, 프랑스어 때문에 적응하기 힘드시죠? 프랑스어 어려운 거 있으면 항상 물어보세요! 이래봬도 아버지 따라 프랑스에서 살았었어요. 열심히 도와드릴게요. 수정이 웃으며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어제 찬열로부터 모두 들었다는데 영사관의 소식통은 찬열 씨인가 보다. 앞으로 찬열 씨 앞에선 말을 조심해야겠어……. 경수가 수정의 이야기를 들으며 찬열을 떠올렸다. 아……. 근데 몬트리올에서 진짜 프랑스어 몰라서 못 다니겠어……. 무슨 방법이 필요해. 언제까지 백참사관님한테 도움 받고 있을 거야……. 무슨 방법 없나? 수정과 이야기를 나누다 혼자 곰곰이 생각하던 경수는 수정에게 프랑스어 개인교습을 부탁했다.
“저기……. 수정아 혹시 나 프랑스어 개인교습 좀 해줄 수 있을까?”
“개인교습이요? 좋은 생각인 거 같아요! 도와드릴게요!”
여러 번 고민해서 건넨 말이었는데 돌아오는 수정의 대답이 호의적이라 경수는 한시름 놓았다. 그렇게 수정과 인사를 나누고 몬트리올에서 가봐야 하는 곳 추천을 받는 동안 영사관에 딸랑 하는 소리가 들리며 찬열이 인사를 하며 출근했다. 찬열이 출근하자마자 경수와 수정, 그리고 찬열은 라운지에 모여 수다에 빠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래서 어제 냉장고를 채우려고 했는데 한 블록 나가니까 다 프랑스어인 거야……. 나 영어랑 일본어, 중국어 밖에 못한단 말이야. 그래가지고 어제저녁 쫄쫄 굶었어.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야 수정이가 가르쳐준다고 하니까 진짜 한시름 놨다. 고마워 수정아!”
“어휴 고생 많으셨네요. 몬트리올이 캐나다 속 프랑스라고 불릴 정도로 프랑스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요. 앞으로 프랑스어 교습을 열심히 하셔야겠어요. 힘내요 오빠”
“아 맞다. 너희 노트르담 성당 가봤어? 나 어제 경수 데려다 주고 거기 지나가다 봤는데 거긴 여전히 멋있더라. 경수 너도 일 끝나면 한번 가봐!”
끝이 날 줄 모르는 수다는 거기서 뭐 하십니까? 각자 일하시죠. 하는 백현의 한마디에 해산되었다. 처음 보는 백현의 싸한 분위기에 겁먹은 경수는 백현의 옆에 서서 오늘 백현의 일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늘 일정은 오전 공관 근무하시고 성심 예배당에서 한인 부부 결혼 공증 참여하시면 마감이에요.”
“결혼 공증은 경수 씨랑 같이 가죠. 오전 근무 끝나고 대기해요.”
백현은 대기하라는 그 한마디와 경직된 경수를 남기고 참사관실로 들어갔다. 한참을 백현이 지나간 자리를 쳐다보던 경수는 옆자리 수정에게 일을 배우며 영사관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사실 영사관 업무라는 게 별거 없다. 캐나다에는 대사관 하나 영사관 세 개가 있어서 몬트리올 영사관을 찾는 한국인들도 별로 없고 영사관 업무라는 게 여권이나 공증, 호적 등 민원행정서비스나 재외국민을 보호하는 업무를 담당하는데 치안이 좋은 캐나다에서 재외국민보호서비스는 거의 찾는 사람도 없고 민원행정서비스도 간간이 있기 때문이다. 도심 한가운데 위치해있는 영사관답게 건물 밖으로 보이는 몬트리올의 모습에 경수는 내가 몬트리올에 있는 게 맞구나라는 생각에 잠겼다.
점심을 먹고 백현의 차를 이용해 결혼 공증을 할 노트르담 대성당 안쪽에 있는 Chapell du Sacre Coeur, 즉 성심 예배당으로 향했다. 점심 식사가 일찍 마무리되어 결혼식까지 여유가 있던 백현과 경수는 몬트리올을 처음 구경하는 경수를 위해 노트르담 봉스쿠르 교회를 구경하고 노트르담 성당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노트르담봉스쿠르교회는 성당 꼭대기에 세인트로렌스 강 쪽을 향해 두 팔을 벌린 마리아 상이 마치 사람들의 안전을 수호해주는 것처럼 느껴지듯이 경수는 입구에서부터 멈추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마리아 상을 쳐다보았다. 그저 조용히 경수를 지켜보던 백현은 마리아 상을 지나쳐 움직이기 시작하며 눈물을 닦는 경수에게 마리아 상을 보고 멈춘 이유를 조심스레 물어봤다.
“경수야 아까 왜 마리아 상 앞에서 멈췄어?”
“마리아 상이 엄마 같아 보였어요.”
사실 저는 모태신앙으로 천주교를 다녔어요. 부모님도 세례를 받으셨고 저도 곧 세례를 받으려고 교육을 받았죠. 근데 교육을 마치고 세례를 받기 며칠 전에 끔찍했던 그 사고가 났어요. 악몽 같았던 그 순간에 엄마가 저를 꼭 잡으면서 손에 뭘 쥐어주시더라고요. 병원에서 눈을 뜨고 확인해보니까 마리아가 크게 그려져있는 묵주였어요. 아마 엄마는 자신이 죽을 걸 알고 계셨던 것처럼……. 평소에 자신이 없으면 항상 마리아가 네 어머니다 생각하라 했는데 그 짧은 순간에 혼자 남겨질 제가 걱정되셨나 봐요. 그렇게 그 사건이 있은 후에 결국 혼자 세례를 받았는데 아버지가 정해주신 세례명을 라파엘로 바꿔버렸어요. 라파엘이 치유의 대천사인데 저도 그처럼 치유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아니 사실 치유 받고 싶어서 세례 받은 게 더 맞겠네요. 여하튼 그 이후로 마리아 상을 보면 잘 못 지나쳐요. 항상 엄마가 날 지켜보고 계신 것 같으니까……. 엄마 나 잘하고 있죠? 경수 엄마 말대로 열심히 살고 있어요. 넋을 놓은 듯 주절주절 앞만 보고 말을 하던 경수는 자신도 모른 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경수의 옛이야기를 들으며 능글거리고 장난기 있던 백현은 자신도 숙연해지는 분위기에 경수를 달래려 애를 썼다. 그렇게 경수를 추스르고 노트르담대성당 앞에 도착한 둘은 푸른빛이 감돌고 있는 화려하고도 신비한 느낌의 제단을 보고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천장 유리판 작은 판 하나하나도 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있었고 성당 내부의 목조 장식도 하나하나 다른 모양으로 조각되어있었다. 너무나도 섬세하고 정교한 성당의 내부를 둘러보며 시끄럽던 둘은 어느새 말을 잊은 채 내부를 둘러보는데 바빠졌다. 강하진 않지만 은은하게 퍼지는 촛불 향에 이끌려 간 곳엔 신자들이 촛불에 불을 붙이며 각자의 소원을 빌고 있었고 그를 발견한 백현과 경수는 자신들도 함께 기도하기로 마음먹었다. 백현은 초에 불을 붙이며 기도를 했고 경수는 백현이 기도하는 모습에 자꾸 눈이 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의 촛불에 불을 붙이며 백현에게 빠지지 않게 해주세요. 제 주위의 사람들 모두, 특히 백현과 민석, 루한이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라는 소원을 빌었다.
자신은 남자였고 백현도 남자였다. 게다가 그는 능력과 집안, 외모 모두 빠지는 게 없었다. 자신이 더 이상 백현에게 빠지게 된다면 백현은 곤란해진다. 라는 생각이 경수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래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어. 하며 생각을 마무리한 경수는 옆에서 기도하고 있는 백현을 일으켜 결혼 미사에 공증으로 참여하러 입장했다.
결혼 미사에 자주 사용되어 웨딩 채플(Wedding chapel)이라 불리는 성심 예배당은 경수와 백현을 환상 속에 빠뜨린 노트르담 대성당과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화려한 고딕 양식의 노트르담 성당과는 달리 성심 예배당은 황금색 목조로 따뜻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그 앞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신부를 사랑스럽게 보고 있는 신랑의 모습은 경수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경수의 시선을 따라 눈을 이동한 백현은 오늘의 주인공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공증인 자리에 경수를 이끌어 착석했다. 식은 금방 시작되었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신부와 신부를 끌어안으며 웃음을 터뜨리는 신랑을 보며 경수는 백현에게 말을 걸었다.
“참사관님은 어떤 결혼을 하고 싶으세요?”
“나는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어. 사실 관심이 없거든.”
“평화롭네요. 저는 나중에 제 반려, 연인을 만나게 된다면 꼭 성당에서 지인들의 축복을 받고 싶어요. 사실 결혼할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지만요. 그냥……. 그렇게 된다면 우리 엄마가 지켜보는 앞에서 축복을 받고 싶네요.”
백현의 말에 경수는 신부와 신랑을 쳐다보며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놨다. 백현은 햇빛에 비친 스테인드글라스 조명을 온몸에 받고 있는 경수를 보며 넋을 놓았다. 그런 경수를 지켜보며 백현은 처음으로 시간이 멈춘 기분을 느꼈다. 경수가 왜 이렇게 사랑스럽지? 내가 감싸주고 싶다. 경수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싶어. 설마 내가 경수를 좋아하는 걸까?
텍파작업하면서 왔어요.
다음화엔 루민이 나올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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