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좁은거야, 니가 대단한거야?"
전정국에 안겨있던 나와 잠시동안 눈을 맞추던 김태형은 기대 섰던 몸을 일으켜 우리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다소 장난스럽기까지한 목소리는 오히려 자신의 화를 감추기 위함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머리가 나쁜건지, 일말의 양심은 있는건지. 내가 묻고싶다 김태형."
안고있던 나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운 전정국은 김태형 쪽으로 몸을 돌리며 내 손을 잡아 끌었다.
그 모습을 본 김태형은 어이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손 놓지."
"너나 꺼져."
이런 진부한 상황에서 나는 어떤 행동을 해야하나.
영화나 드라마에서 참 지겹도록 나오는 클리셰였다. 나는 그것들을 보며 항상 뜨뜨미지근한 여자 주인공의 행동을 욕했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가면 되지, 뭐가 문제야! 저거 그냥 재는거잖아. 마음 결정 하나 못하는 멍청한 년인거지.
"......"
실컷 기 싸움을 해대는 두 남자 사이에서, 드라마 속 여주인공 보다 훨씬 더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을 나는 이제껏 드라마들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하나만 묻자. 무슨 낯짝으로 여기 찾아온거냐?"
전학은 또 뭔데 대체. 너도 자퇴 했었냐?
한껏 비웃음을 흘리는 김태형의 말에 내 손을 잡고 있던 전정국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가만히 그런 전정국을 올려다봤다. 앞머리가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 그러고나서 학교를 계속 다녔다고 생각했어 너는?"
"너라면 할 수도 있을거라 생각했지. 돈 있고 빽 있는데."
"그러는 너도 돈 있고 빽 있으면서 왜 자퇴 했는데?"
"지금 니가 뺏어간 애, 평생 지키려고."
"뭐?"
"그러니까 손 놔라. 말로 할 때."
덤덤한 목소리를 한 김태형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김태형이 그래서 나와 함께 자퇴를 했을 줄은 전혀 몰랐다.
그냥 그 일과 연루 되어 있었고, 그것만으로 그도 쇼크가 컸을 것이기에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생각없이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던 나는 전정국과 맞잡은 손과 김태형을 번갈아 봤다.
"평생 지킨다 어쩐다 이런 못 지킬 말 함부로 뱉지마라."
"못 지킬 지 말 지는 니가 판단할 문제 아니고."
탄소 넌 이리와 빨리.
김태형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전정국과 말을 하는 와중에도 끝없이 그와 내가 잡은 손을 힐끔거리며 불편한 티를 내던 김태형은 드디어 나를 올곧게 바라봤다. 그럼에도 멍청하게 서있는 내가 답답한 듯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또 너 불편하게 만들어야겠어?"
"...."
"제은이 생각 하는데도 지금 니가 그러고 있어??"
툭. 머리 속에서 필라멘트가 끊어지듯 빛이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전정국으로 인해 오랜만에 밝혀졌던 빛은, 이렇게 금세 꺼져버렸다. 그래... 나는. 좀 전에 전정국을 반에서 마주 했을때만 해도 그를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정국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순간부터 아예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치 못했다. 아니, 생각하지 않았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괴로워야 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어리석은 우발적 행동들이었다.
"김탄소.."
가차없이 전정국의 손을 놓은 나는 입술을 깨물며 그의 앞에 마주보고 섰다.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게 많았어. 수없이. 그것들을 정리하는 데만 몇달이 걸렸었다.
"왜... 왜 그랬어?"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게 전부였다. 명료하고 조리있게 따지고 싶었는데, 겨우 이게 다였다. 그의 눈빛은 단박에 무너졌다. 김태형이 내 옆에 섰다.
"어차피 쟨 말 못해."
"..."
"우습게도, 제은이랑 너를 동시에 사랑했거든 저 새낀."
어릴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김태형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는 건데도 사람의 마음을 지독스럽게 후벼판다. 그것이 아픈 사실이든 뭐든 중요치 않았다. 김태형은 내가 전정국을 좋아하는 기색만 보이면 저런식의 화살을 날리곤 했었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아주 오랜만에 직접 듣는 기분에 나는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그래, 전정국은 그랬지.
"일부다처제도 아니고, 저 미친새끼가 너희 둘다 좋아하다가 한명 병신 만들고, 한명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고."
"김태형."
전정국의 입이 열렸다. 김태형을 불렀음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내려다 보고있었다. 그 눈은 보는 내가 울고 싶을 정도로 애처로워 보였다. 그리고 그 눈은 이상스럽게도 무언가 단 한가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해라."
"니가 지금 여기서 사라지면. 우리 눈 앞에서 영영 사라져주면."
둔하기 짝이 없는 나는 그의 의중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그저 점점 날카로워 지는 김태형의 칼날이 조금만 무뎌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 김태형의 칼날에 이리저리 베이면서도, 전정국은 단 한순간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하는 것 처럼 보였다.
"김탄소."
"..."
"믿지 못하겠지만, 아직도 날 믿지 못하겠지만, 여전히 김태형 말을 더 믿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나를 조금만 믿어줘."
"전정국."
김태형은 원래도 낮은 목소리를 더 낮게 깔며 으르렁 댔다. 나도 모르게 김태형의 팔을 붙들었다. 아니야. 태형아. 그러지마.
"김제은 좋아한 적 없어. 난, 그때도 지금도 널 좋아해. 널 사랑해."
"전정국!!!"
"니가 알 수 없었던 수많은 일들이 너를, 나를, 그리고 김제은을, 그리고..."
"너 진짜 죽고 싶냐?"
"..김태형을. 꼬이게 만든거야."
이미 자신의 화를 제어 할 수 없을만큼의 상황이 되어 버린 듯한 김태형은 목까지 벌개져있었다. 바락바락 소리치는 김태형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여전히 전정국은 나를 곧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대체 무슨소리 하는거야.
"그리고 또 하나, 내가 말하는 그 수많은 일들은 지금 니 옆에 있는 김태형과 김제은이.."
"닥쳐 이 새끼야!!!!!!!"
내가 막을 새 같은 건 전혀 없이, 김태형은 전정국에게 달려들었다.
"아무것도 안 묻네."
"묻는다고 대답해?"
한동안 치고 박고 하던 그들은 결국 학주에게 걸려 겨우 쌈질을 멈췄다.
나는 뭐 어릴 때 부터 봐 온 학습의 결과로, 그들이 싸우기 시작하면 절대로 말릴 수 없단 걸 잘 알고 있기에 연약한 여성 코스프레를 하며 멀찌감치 주저 앉아 있었다. 그 덕에 나는 학주에게 별다른 추궁도 받지 않고 귀찮은 일 없이 학교폭력의 목격자 정도로만 남게 되었다. 김태형과 전정국은 아주 귀찮아졌지만.
전정국은 전학온 지 불과 1시간도 안되어 사고를 치는 바람에 즉각 교무실에 끌려갔다. 김태형은 그동안 보건실에서 얼굴과 팔에 난 생채기들을 치료하다 전정국이 나오면 바톤 터치를 해야했다. 그리고 나는 보건실에 선생님이 안계셔서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겠다는 보기드문 김태형의 징징거림으로 그의 옆에 앉아있는 상황이고.
"전정국이 한 말 믿지마."
"뭔 말."
"그냥 다. 그냥 걔가 한 말 다."
김태형은 바쁘게 그의 손등 위에서 움직이던 내 손을 잡았다. 아, 약 바르는데!
"기억하라고 한 말, 취소할게."
"...뭐래는 거야."
"다 잊어버려. 그냥 다 잊자 우리."
"김태형."
김태형은 내 손을 꽉 붙들다 이내 깍지를 껴 잡았다. 생소한 김태형의 행동에 당황스러워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더 세게 힘을 줘 잡는 것에 잠자코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전학갈까?"
"너 진짜 왜그래?"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태형에 나는 그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만 지어보였다. 너네 정말 아까 그 대화 내가 하나하나 파고 들어야하는거야?
"전정국 싫어."
"그래, 넌 그 일 이후로 전정국 엄청,"
"근데 넌 안 싫어하잖아."
"...."
"정작 싫어해야 할 사람은 넌데. 안 싫어하잖아 너."
"...."
"내가 그렇게 싫어하라고, 나쁜 새끼라고 노래를 불렀는데도 지금 또 그새끼 좋아하려고 하잖아."
김태형과 전정국은 참 무서운 놈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한마디도 안해도 내 생각을 다 아니까. 마치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그들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리고 만다. 내 머리 속에서 돗자리를 깔고 앉은 그들에게 나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아무 말도 않고 있는 나를 온갖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바라보던 김태형은 한숨을 내쉬며 내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껴안았다.
"나 너 너무 좋아해."
"..김태형."
"니가 부담스러울까봐 그냥 말 안했었어. 오래전 부터."
"....야.."
"모른척 그만하고 이제 좀 똑바로 봐줘."
"...."
"널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김태형이 나를 좋아했단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듣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난 정말 모른척하고 있었던 건가? 아니. 난 정말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놀랍지가 않다. 이 상황에, 이 고백에, 평생의 친구라고 생각했던 김태형의 고백에도 놀랍지가 않다.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왤까.
"...너 예전에도 이런 적 있었어?"
너희 나한테 대체 뭘 숨기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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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주시는 분들 쪼끔이라도 있으니 쓸겁니다 연재 할거에요!!ㅋㅋㅋㅋ 비밀이 너무 많죠.. 제목땜시 좀 가벼운 내용이라고 생각하신 분들 많을것 같아요 하지만 니니~ 굉장히 무겁습니다. 그래도 재밌을거에요! 이게 또 비밀이 많은 글은 나중에 비밀이 전부 풀릴 때의 쾌감으로 보는 맛아니겠씀니꽈 빠르게 풀어나갈테니 재밌게 봐주쎄열 짤은 다친 태태와 예쁘고 잘생긴거에 환장하는 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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