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삶이 힘들다는 생각이 학연의 머릿속을 꽉꽉 채워버렸다. 지금까지 목숨줄을 붙잡고 살아오면서 이번 해 만큼 행복한 적도, 죽고싶은 적도 처음이였다. 원망할 만큼 원망해보았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재환도, 홍빈도, 원식도, 하다못해 어머니까지도. 하지만 결국 되돌아오는건 아직도 죽지않고 살아있는 자신에 대한 원망이였다. 차라리 이렇게 죽어버린다면, 나하나 죽어 모든 이가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다면. 언제든 죽을 준비가 돼 있었다. 븕은빛을 뿜어내며 타오르는 아침의 태양. 이젠 그 태양을 볼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있다. 어서 노을을 보고싶다. 어서 해가 져버렸으면 좋겠다. 선잠을 자고 일어난 뒤에도 학연이 어김없이 하는 일은 같다. 배게 대신 쌓아둔 짚 밑에 몰래 빼내온 솜과 천으로 고이 감싸두었던 돌을 확인하는 일이였다. 얼마나 많이 보다듬었는지, 둥그런 돌의 가장자리에서 햇빛에 반사 된 광이 비추었다. 그걸 보면, 손에 쥐고 있으면, 또다시 재환이 보고싶어진다. 정말 굳게 다짐했건만, 결국 또 다시 보고싶어진다. 연아 하고 낮게 자신을 부르던 그 목소리를 다시 제 귀에 담아두고 싶다. 자신을 보며 눈이 휘이도록 웃어주던 그 해사한 눈매를 다시 마음에 담아두고 싶다. 미치도록 보고싶었다. " 원식이 저 놈은 무조건 이곳에 남고, 음 …. 저년은 아무곳이나 필요한 곳에 보내버려라. 상혁이도 일단은 여기에 남고, 나머지는 전부 다 조대감님 댁에 …. 아, 학연이 저 아이는 남겨라. 긴히 쓸모가 있을 것이다. " 열심히 장부에 노비문서를 적고 있는 늙은 영감은 학연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분명 저놈 하나 나가봤자 이 큰집엔 다시 수십명의 노비들이 들어올텐데, 여리여리해서 쓸모도 없어보이는게 무슨 쓸모가 있다는건지 참 양반들 속사정도 신기한게 많다고 그 영감이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동안, 끼익 하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홍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재환은 또 아플테니 이번 해에도 노비들 관리는 제 몫이였다. 재환이 관리를 하면 항상 그런 식이였다. 재환이 마음이 좀 약한 것도 아니고, 보낼 놈 남겨둘 놈 구분도 못하고 그 뻔한 연민에 계속 집에 남겨놓았다가 결국 제 아버지에게 호되게 혼이 나기 일쑤였다. " 다 끝났어? " " 형님, 바람이 차갑습니다. 어찌 이리 나오시는 것입니까. " " 본래 내 일을 네가 대신 해주는 것인데, 고맙다는 인사는 표해야지. 안그러하느냐? " 지랄하네. 홍빈이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누가 봐도 학연이 끌려 가나 안가나를 보러 나온 것이면서, 보는 눈이 많으니 특유의 언변으로 또 나만 나쁜 놈 만드는 것이면서. " 그럼 들어가서 차나 한잔 하시지요. 형님이 좋아하시는 걸로 준비하라하겠습니다. " " 그래. " 홍빈과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도 재환의 눈은 슬금 슬금 학연을 바라보았다. 그리 오랫동안 못본 것도 아닌데 얼굴은 수척해져 있었고, 팔목은 더 가늘어진듯 했고, 분명 지난번 자신과 놀러갔을때만 해도 붉은 빛을 띄우던 입술이 어느새 핏기 하나 없는 마른 입술이 되어있었다. 둘이 방으로 들어가자 여인네 하나가 주전자와 잔을 가져왔다. " 다 우려진 것이니 그냥 드셔도 괜찮다하옵니다. " " 그래. 나가보거라. " 홍빈이 조심스레 재환의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보이차였다. 재환이 가장 좋아하던. 아직 홍빈의 기억속엔 재환이 무엇을 제일 좋아하는지, 또 싫어하는지가 남아있는 듯 했다. " 학연이는, 보내지 않았습니다. " " 나더러 무얼 어찌하라는 것이냐. " " 저는 형님이 가장 아끼는 것까지 뺏는 그런 놈은 아닙니다. " " 이미 뺏은 것 같은데. " 이미 뺏지않았느냐. 부모님의 관심은. 나에게로 쏠리던 그 모든 기대 그리고 학연이의 몸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는 홍빈이 애꿎은 빈 잔만 손으로 문질러댔다. " … 하지만 그거 하나는 알아두세요 형님. " " 무얼 말이냐. " " 형이 저 아이와 무얼 하던 이제 제가 간섭할 연유는 없으나, " " 새어나가는 순간, 저 아이의 인생은 저렇게 끝인 것입니다. " 홍빈이 불쾌하단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 도리가 아닌 줄 아니오나 속이 조금 불편하여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쉬십시오. " 아직 뜨거운 보이차를 잔에 따라놓은 재환이 작게, 그리고 낮게. 잔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 연아, 내가 너를 지킬 수 …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