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ss Copperman- Holdin On and Letting Go
그들이 사는 세상
#고백
“와인은 화이트? 레드?”
“화이트요.”
“뭐 곁들일까.”
“아무거나.”
박지민은 그럼 리코타, 중얼거리며 냉장고를 열었다. 상사가 안주거리 준비를 위해 달그락거리고 비서가 그것을 보고만 있는 것은 참으로 눈치가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몸이라도 편하게 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남자는 별 생각이 없어 보인다만 나는 밀폐된 공간에서 남녀 둘이 와인을 마신다는 게 엄청 불편하거든. 그는 아일랜드 테이블 위에 볼을 내려놓고는 능숙하게 와인 병의 코르크를 빼내어 내 잔에 와인을 따랐다.
“무슨 생각해?”
“불편하단 생각이요.”
“솔직해가지고. 안 잡아먹어요.”
“방금 그 말 때문에 더 불편해질 것 같은데요.”
“한 마디를 안 지네.”
내가 조용해지자 그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게 싫다는 건 아니야, 덧붙인 그가 내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와인잔의 스템을 쥐고 살짝 흔드는 그의 손가락이 라운지에서 그와 다시 만났던 날을 떠오르게 했고 나는 와인잔을 돌리지도 않은 채 한 모금을 들이켰다.
“나한테 물어봐줘.”
“뭘요?”
“궁금한 거 아무거나.”
“긴 얘기 해줄 거라면서요.”
“나 혼자 얘기하는 건 재미없잖아.”
아 맞다. 재미 찾는 도련님이었지. 나는 부엌 천장에 매달린 고급 후드에 시선을 고정시키곤 눈을 깜빡였다. 박지민의 눈을 계속 보고 있자니 어떻게 대표님과 사모님 사이에서 너 같은 사람이 태어났냐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세상에서 가장 자신 없는 분야가 돌려 말하기인 나는 머리를 연신 굴려댔다. 갑자기 전정국이 떠올랐다. 박지민과 전정국의 얘기가 궁금해졌고, 자연스레 그 둘을 함께 키웠다던 큰 사모님이란 분이 궁금해졌다.
“큰 사모님 얘기 해주세요.”
“왜 궁금한데?”
“박 변호사님이 그분 손에 자라셨으니까요.”
“그거 내가 궁금한 거 맞지?”
박지민이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나는 그에 무슨 헛소리에요, 라고 대꾸하려다 문득 내가 정말 박지민이 궁금한 것이 맞나 싶어 무어라 답해야할지 고민하던 와중에, 그는 어느샌가 텅 빈 제 잔에 와인을 따랐다. 이 남자 아까부터 와인을 무슨 소주처럼 마시네. 좀 전에 잘못한 만큼 마시겠다더니 설마 그건가. 내가 한마디 하려 입을 떼는데 그가 팔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두 손을 깍지 끼며 입을 열었다.
“나 아홉 살 때, 할머니가 날 미국으로 데려가서 키우겠다고 선포했대. 집안 사람들은 엄청 반대했고.”
“......”
반대할 만도 하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최상류층 부모가 그러하듯, 박지민의 부모님 역시 갓 태어난 아들을 최고 베테랑 보모의 손에 맡기면서 사립유치원, 사립초중고, 최고 수준의 대학이라는 엘리트 라이프를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들의 자산인 학연, 인맥을 위해서라도 해외로 아주 나가 사는 일은 드물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 P로펌의 아들이 미국에서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는 스토리가 처음부터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할머니가 강수를 두셨지. 평생을 집안과 로펌에 헌신한 당신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그래서 전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더라.”
“할머님께서 그렇게까지 미국에 가신 이유 물어봐도 돼요?”
“나도 그게 되게 궁금했단 말이야. 그런데 나 머리 크고 나서 이유를 말 해주시더라고.”
“뭔데요?”
“내가 아버지처럼 괴물로 자랄까봐 두려우셨대.”
그는 마치 내게 하는 얘기가 아닌 듯 낮게 중얼거렸고 그의 눈이 잔 안에서 울렁이는 와인을 좇았다. 괴물. 자신의 아버지가 괴물이라는 말을 듣는 기분은, 그를 낳은 어머니에게 듣는 기분은 어떨까. 당신의 기분은 어땠었고 또 지금은 어떨까. 박지민이 고개를 들고는 내 미간을 쿡 눌렀다. 그런 표정 짓지 마, 하면서. 내가 어떤 표정이었지?
“...할머니는 따뜻하고 좋은 분이셨어. 나는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넘치게 받으며 자랐지. 그 때 누군가 나한테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으면, 나라고 대답했을 걸.”
동그란 입 꼬리가 올라가는 그를 보며 나도 덩달아 웃었다. 박지민은 당당하고 건실하며 추진력이 거침없는지라, 가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지만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어느 부분에서나 넘치는 사랑과 따뜻함을 받으며 자란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낯설게 느꼈고 되레 얄밉기도 했었지. 도무지 저 사람이 속한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여서.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완전 결핍 그 자체.”
“...그렇게 안 보여요.”
“이유 물어봐줄래?”
“......이유가 뭔데요?”
그가 잔 끝을 입에 가져다대며 한 모금 머금었다. 천천히 마셔라는 말을 하고 싶은데 타이밍이 자꾸만 어긋났다.
“너 때문이지.”
그가 턱을 괴며 말했다. 그 말에 치즈라도 떠먹어라 작은 스푼을 건네려던 내 팔이 눈에 띄게 멈칫하자 박지민이 나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적잖이 충격적이었던 얘기를 또 들어버릴 것 같은 그런 예감.
“네가 미국에서 나한테 그랬잖아? 다 알면서도 부당하게 누리고 산다고.”
“......”
“그 말이 날 괴롭히더라고. 법전 펼칠 때마다 생각났어.”
“......”
“법 배우면서 고고한 척 했는데 사실 눈 감고 귀 막고 누릴 거 누린 게 다 나였던 거야. 나 때문에 우리 할머니도 고생 참 많이 하셨지. 대학생이나 돼서 우리 집 왜 그 모양이냐, 너무 부끄럽다고 애먼 할머니한테 철없이 굴었거든.”
“......”
“그러다 결단한 거야. 그래, 내가 부당하게 당한 사람들에게 다시 돌려주면 되지. 그런데 돌려주려면 가진 게 있어야 하잖아. 그래서 당장 짐 싸서 한국 왔는데 할 줄 아는 게 공부밖에 없는 거야. 그래서 코피 터지게 공부해서 변호사 됐더니 뭐 지금도 똑같아.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
“이번 일도 그래. 몰래 돕는다고 도운 건데, 들키기나 해서 일 더 크게 만들고. 그렇게 간절하면 내부 고발이라도 하면 될텐데 그치? 그런데 그건 못하겠어. 그리고 있잖아. 나 지금 이 얘기 꺼낸 거 후회하고 있어. 되게 없어 보이네...”
“...자학하지 마세요.”
박지민은 마치 오랜 시간 그 말을 준비해온 것처럼 담담하게 얘기를 풀었다. 본의 아니게 박지민의 인생에서 느닷없는 터닝 포인트가 된 것에 대해서 나는 무척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 당장은 스스로를 갉아 먹는 박지민이 안쓰러웠다. 자학하지 마세요. 그 말을 하고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뭐라고 위로를 하지.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내가 생각에 잠겨있는데 톡톡, 손가락이 와인잔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느리게 옆으로 엎드리며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그렇게 보면 반칙이잖아요.
“...미안해요.”
“다른 말 해봐.”
“......”
“미안하단 말 빼고 아무 말이나. 너 평소에 잘 하는 말대답 있잖아. 그런 것도 좋고.”
“...박 변호사님은 참 잘 자란 것 같아요.”
내 말에 기가 막히다 듯 그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나 애 아니거든?”
“알아요. 애 치곤,”
너무 섹시 하다-는 말이 하마터면 그대로 튀어나올 뻔했다. 안도의 숨을 뱉으며 바싹 말라오는 입을 와인으로 적시는데 박지민의 눈과 마주쳤다. 순간 자꾸만 느껴지던 묘한 위화감의 원인을 알아차렸다. 와인 잔을 옆에 두고서 널브러진 박지민은 어른 남자가 틀림없는데, 은은한 조명에도 불구하고 눈과 뺨이 반짝이는 것이, 영락없는 어린 아이 같기도 했다. 혼이 나 풀이 잔뜩 죽은 아이. 다독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를 아이 어르는 듯 대했다.
“박 변호사님은 알면 알수록 따뜻하고 다정하세요.”
“......”
“정말 잘하고 계신 거에요.”
...미친 것이 틀림없다. 나도 모르게 박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길에 그가 눈을 지그시 감는 것을 보고서야 내가 미친 짓을 한 걸 깨달았다. 나는 손가락 사이로 그의 머리칼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손을 떼어내 곧장 하얀 치즈가 담긴 볼로 뻗었다. 당황하지 않는 박지민에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스푼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는데, 테이블 위로 떨어진 부스러기를 신경쓰느라 박지민의 손이 내게로 향하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
“......”
그 손은 내 뒷머리를 강하게 누르며 제게로 끌어당겼고 아래로부터 입을 맞춰왔다. 곧 이어 은은한 과일 그리고 산도의 향과 함께 낯선 감촉의 혀가 감겨 들어왔다. 와인의 강한 풍미가 밀려왔다. 그는 힘없이 제게로 끌려간 내 양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 쥔 채 상체를 일으켰고, 그의 몸에 치인 와인 잔들이 바닥 위로 나뒹구는 시끄러운 소리에도 내 입술을 끝까지 쫓아 물어왔다. 타액이 짙게 섞이고 입 안 가득 부드럽게 휘감는 감각에 정신을 놓을 뻔하다가, 숨이 가빠와 그의 어깨를 힘껏 밀어냈지만 그는 떨어지지 않았다. 자꾸만 밀리던 내 몸이 뒤로 넘어가기 직전, 내가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붙잡자 박지민이 나를 당겨 올리며 고개를 살짝 떼었다. 맞닿은 속눈썹도, 코도 간지러웠다.
“아까 그 말 취소할래.”
“안 잡아먹는다는 말.”
“미쳤지. 나 취했나봐.”
그리고 박지민이 묵직한 숨과 함께 말을 내뱉을 때 마다, 내 입술에 닿는 그의 입술이 간지러웠다. 그는 무어라 대꾸하려 벌어지는 내 입술을 핥았고 다시금 파고 들어왔다. 겨우 자음 하나 뱉은 내 말은 그대로 삼켜졌다. 나는 그에게 당신은 취하지 않았다고 알려주려 했다. 네가 마신 와인은 취하기에는 달작지근하며 산뜻하기 짝이 없다고. 지금 당신의혀처럼.
이쯤 되면 선키스 후연애는 제 취향인 거죠!!!!
참고로 고구마 럽라도 제 취향이에요!!!(해맑 커플을 쉽게 이어줄 수 없지!!!
바쁘다보니 자꾸 늦어져서 죄송해요8ㅅ8 분량도 소금이라 더 죄송하고8ㅁ8
그리고오 항상 같이 달려주시는 우리 독자분들 스릉흐그 금스흐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