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아키모토 에이타라고 했다. 쇼는 그 이름을 다시 한번 되뇌이고는 히죽 웃어보였다.
아키모토 에이타, 아키모토 에이타. 선이 여자 아이처럼 고왔던 아이. 목소리도, 손도 따뜻했던 아이.
쇼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기뻐 날아갈 것만 같았다.
방으로 돌아온 쇼는 곧바로 들고 있던 꽃을 서랍 위 꽃병에 넣어 놓았다. 그리곤 이리저리 꽃의 위치를 바꾸며 보기 좋은 모양새를 유지했다.
쇼는 천천히 교복을 벗고 침대 위에 가지런히 개어 놓았던 잠옷으로 갈아입으며 자신의 몸을 다시한번 살폈다.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 홀쭉한 배, 종잇장처럼 하얀 피부. 뼈마디가 다 드러나는 팔과 다리. 왜 항상 음식을 먹어도 살로 가지 않는 것인지 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자신과 같은 방을 쓰는 윤기. 코타로우였다. 쇼는 윤기와 같은 방을 쓰는 것을 싫어했다.
아니, 그냥 윤기를 싫어했다. 윤기에게는 표정이 없었다. 말도 없었고 분위기가 무거웠다.
아무리 꽃을 꽃병에 꽂아놓아도 윤기가 오면 방은 화사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쇼는 윤기를 싫어했다.
"꽃 바뀌었네."
"……."
"화단에서 구해온 거야?"
평소의 윤기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힘이 없고 나른한 모습이었다. 윤기는 매번 말수가 적은 쇼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쇼는 그런 윤기가 귀찮았지만 상대방의 말을 무시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배웠기에 짧게라도 대답하는 편이었다.
자신은 그저 예의를 차리는 건데, 윤기는 그런 자신을 착하다고 말해주었다.
"졸리면 자. 불 꺼줄테니까."
퉁명스럽게 말하는 쇼의 모습에 윤기가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넌 즐거워보이네."
"티나?"
"입이 빨랫줄처럼 늘어나 있는데?"
"오늘 친구가 생겼거든."
"친구?"
"전학 온 애래. 아키모토 에이타. 제 一 반! 그러고 보니 너랑 같은 반이네?"
그러게, 윤기의 표정이 굳어졌다. 잊고 있던 교장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의 아비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왠지 모르게 뒤가 찝찝하더구나.'
전부터 교장의 직감은 무서울정도로 예리해서 쉽게 지나치면 안되는 말들이 여럿 있었다.
소문으로 코묘 남학교에 꿍꿍이를 가진 집단이 생겨났다는 말을 들었는데. 윤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착한 애야. 잘해줘야 해?"
"그 애가 규칙을 어기지 않는다면."
또 그 소리, 쇼는 입을 비죽거리며 책상 위에 올려 놓은 세면 도구들을 챙겼다.
"씻어. 나 씻고 나서 바로 불 끌거니까."
"그래."
방을 나간 쇼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윤기를 보며 혀를 찼다.
저 정신으로 어떻게 선도부 부장 자리를 맡게 되었을까.
겨울이 되면 홀로 집에 있을 여동생 걱정에 밤잠을 설치던 아이다.
주변 학우들은 그의 이름과 그의 기백에 늘 기가 눌려 눈을 밑으로 내려 다니는데 쇼는 그 부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런 맹한 아이가 뭐가 무섭다고. 저 아이의 무서운 점은 전혀 다른 것인데.
악착같이 버텨내는 끈기.
***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제정신을 차린 석진이 급하게 찬물을 찾아 마시고 숨을 토해냈다.
그의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남준과 태형은 쯧쯧, 혀를 차며 안심하듯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태형은 들고 온 하루키의 셔츠를 석진에게 던지듯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낸 석진은 새 것처럼 보이는 셔츠를 들어보이며 웃어재꼈다.
"재주도 좋다, 완전 새거네? 네것이냐?"
"예전에 나랑 같은 방 썼던 하루키가 두고 간 거야."
"하루키? 아, 그 빡빡머리?"
"몰라, 나도."
"그래. 네가 뭘 알겠냐. 그 애는 뭘로 놀래켰냐."
의미없는 대화에 남준은 도저히 듣지 못하겠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태연하게 웃고있는 석진을 바라보며 덜컥 화를 내었다.
"네가 민윤기한테 말했냐? 죽어도 혼자는 못 죽지."
"나 아니다. 그날 밤 목격자가 있었던 모양이야."
"이제 어떻게 할거야. 넌 원래 주요대상이었으니까 상관 없지만, 난 이제 의심 받게 생겼다고."
"나도 네가 끌려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
"이제 우리가 알아낸 탈출구는 전부 봉쇄되었을 거야. 새로운 구멍을 찾아야해. 그래야 탈출할 수 있어."
"어이, 김태형.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냐. 방법이라도 있냐?"
석진과 남준이 자연스레 태형을 바라보았다. 태형은 석진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계속 한 생각만 돌리는 중이었다.
아까 전, 기숙사에서 아리카와 나누었던 대화. 아리카의 무뚝뚝했던 표정, 붉은빛 입술.
"닮았다."
"뭐가."
"유키."
유키? 유키가 누구야. 석진이 남준을 바라보자, 남준은 자신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곤 책꽂이에 꽂혀있는 아무 시집 하나를 골라냈다.
"아, 맞다. 오늘 태형이 네 방에 전학생 하나 들어왔다면서."
"어? 그래."
"그 애 이름이 뭐니. 또 뭘로 놀래켰어?"
"목 매달았어. 근데 별로 놀라지도 않고 밧줄을 꽁꽁 숨겨버리는 거 있지? 그 밧줄 어디에 있는지 찾지도 못했어."
"당돌하네. 다음에는 뭘로 놀래키려고?"
석진이 궁금하다는 듯 여러번을 캐묻자 시집으로 시선을 돌렸던 남준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 애는 쉽게 놀라는 애가 아니야."
남준이 말하자 태형도 미소를 지었다.
"맞아. 다른 애야."
"그게 뭔 소리야."
"있다, 그런 애가."
"너희끼리 비밀 친구 놀이 하냐? 그니까 그 애 이름이 뭐냐고."
"아키모토 아리카."
태형의 말에 이번엔 석진의 표정이 굳었다.
"뭐?"
"아키모토 아리카. 조선인이다."
학교의 탈출구를 찾느라 오늘 전학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석진은 어설프게 미소를 지으며 태형이 건네준 셔츠를 조심스럽게 껴입었다.
상처가 옷자락에 쓸려 살짝살짝 미간이 찌푸려 졌다.
하지만 석진은 그런 작은 아픔 따위를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 아이를 만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