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 화
* * * * *
남자는 일률적(一律的)으로 나열(羅列)된 도서대로 다가갔다. 그 행동이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자연스러웠고 조용한 도서실 분위기를 깨트리지 않을 만큼의 걸음 소리를 내었다. 타박타박 걷는 걸음 소리는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소음이어서 실내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그냥 '책 보러온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만 떠올릴 뿐, 남자쪽을 쳐다보지 않았으며 자기 할일에만 충실했다.
사락사락 책 페이지 넘기는 소리와 책을 고르려고 움직이는 사람들의 걸음 소리, 입구에 위치한 데스크에서 업무보는 사서들의 움직임 등 빠짐없이 관찰하면서 남자는 문학 관련 도서대 중에서 중간을 파고 들었다.
일부 중간중간 비어 있는 책꽂이를 제외하고 꽉 차있는 책들 중에서 책 하나를 끄집어 내어 펼쳤다. 책은 남자의 손가락을 타고 사각거리며 팔랑거렸다.
책을 열심히 보는 것 같은 남자의 시선이 어느새 책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도서대 근처에 있는 테이블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남성이었고 홀쭉한 뺨이 인상적인 신경질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마른 얼굴과 달리 몸은 단련한 모양인지 옷에 가려졌어도 두드러졌다.
손가락 마디가 불거져서 대체로 매끄럽지 못했지만 보기 좋았으며 목까지 채워진 셔츠 단추가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왼쪽 눈가에 눈물점이 있어 색기(色氣)가 은연중에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남성은 책을 거의 다 읽었는지 얼마 후 펼쳤던 책을 덮고 자리에 일어나 도서대로 걸어왔고 '남자'의 근처까지 다가왔다. 그가 들고 있는 책이 그 부분에 있는 모양이었는지 읽었던 책을 책꽂이에 끼워넣고 다른 책을 꺼내들었고 제목이 같은 것으로 보아 시리즈 책중의 다른 권수인 것 같았다.
그 남성의 옆에 서게 된 남자는 숨을 깊게 들이 쉬었고 잠시 눈을 감더니 무언가를 음미(吟味)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감겨진 남자의 눈꺼풀이 올라갔고 드러난 남자의 눈동자에는 만족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책을 고른 남성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앉는 것까지 본 남자는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크기로 중얼거렸다.
"괜찮군."
언제나 남자는 의중(意中)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고 몇시간 동안 신경질적인 외모의 남성을 관찰하였다. 그 사람이 다음 책도 다 읽고 일어나려는 모습까지 본 남자는 책을 빌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는지 펼쳤던 책을 접어 눈 앞에 있는 책꽂이에 꽂아 넣은 후 거기에서 벗어났다.
애초에 책을 빌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던 남자는 사람들이 책을 대여하려 줄줄이 서 있는 데스크마저 지나쳐 도서실을 나왔다.
다시 '거처'로 돌아갈 생각인지 도서관을 빠져나온 남자는 걸음을 옮기기 전에 안경테를 잡았다. 안경을 다시 벗어 케이스에 넣으려고 한 것이었고 목적한 바를 위해 바꾸었던 총기어린 눈빛은 죽은 생선의 눈알보다 못한 본래대로 돌아갔다.
"어이."
마침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남자의 눈빛은 순식간에 말갛게 변하며 반짝거렸으며 굳었다고 할 만큼 무딘 표정에 풍부한 감정이 깃들었다.
남자는 전혀 어색하지 않는 몸짓으로 뒤돌아서 자신을 부른 이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친구였고 친구는 반갑게 인사를 하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여긴 왠일이냐?"
"아, 책 빌리려고."
"그래?"
"넌?"
"난 근처 은행에 볼일 있어서 왔다가 익숙한 뒷통수가 보이잖아. 그래서 불렀는데 네가 맞더라."
"후후."
"그런데 왠 안경이냐? 너 안경 안쓰잖아?"
"아, 안경......가끔 써. 기분 전환용으로."
"그랬냐? 뭐, 썩 나쁘진 않다. 안경 안 쓴 모습만 보다가 보니까 좀 이상하다만."
"그래. 그런데 내가 좀 일이 있어서...나 이만 가볼게. 다음에 한 번 보자."
"알았다. 나도 바쁘니까. 마음 같아서 오랜만에 본 김에 술이나 한잔 하면 좋겠는데..."
아주 아쉬워하는 친구에게 남자는 웃어주었고 화기애애한 대화의 끝을 맺고 헤어졌다. 뒤돌아서 반듯한 인도를 걸어가는 친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본 후에 남자는 안경을 벗어 케이스에 넣고 품에 집어 넣었다. 말간 눈동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 줄기의 감정(感情)도 없이 탁하게 변해버렸다.
거처로 돌아온 남자는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던 여자의 모습이 자리를 비우기 전과 조금 달라졌음을 눈치 채었다. 분명 남자가 계산하기로는 아직까지 의식을 잃고 있어야 했는데 여자의 체질이 특이해서 남자의 조치한 약물이 100%로 들어먹지 않은 것 같았다.
남자는 한치의 감정도 담아내지 않았지만 약간 기분이 언짢았다. 완벽한 그의 계획이 살짝 비틀어진 것 같아서 철벽같은 남자의 감정을 살짝 건드리는 작용을 한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왔음을 알았을까. 먹잇감의 늘씬한 몸뚱이가 조금 경직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고 그것을 본 남자의 굳은 입매가 풀어지며 묘하게 비틀어진다.
"깨어났구나."
남자의 목소리에 그녀는 확연하게 눈에 띌 만큼 움찔거렸다.
* * * * *
"미인? 쩡아. 니 눈에는 이 여자가 미인으로 보이냐?"
다래의 말에 곱씹는 성용의 옆에서 다른 페이지를 보던 자철은 자신만의 애칭'쩡아'로 다래를 부르며 살짝 비판을 담아 말했다. 그런 자철을 멀뚱히 쳐다보며 다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되물었다. 분명 자신의 기준과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더라도 미인(美人)들이었기 때문이다.
"네. 미인이요. 여자 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예쁘고 잘생겼어요. 거기다 뚱뚱한 사람도 없고..."
"내가 보기에는 아닌데......"
"선배. 혹시 미인이라고 하면 연예인 김태희 정도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김태희는 대표적인 미녀고 여기의 실종자 리스트에 있는 사람들도 평균치 외모 넘거든요?"
"그건 다래 말이 맞아. 예쁘고 멋지네. 사진에 상체만 안보이지만 날씬한 것 같고...비만을 떠나 과체중으로 보이는 사람도 없어보이네."
청용의 지원사격으로 다래는 더욱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자철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자철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아닌데...여기 이 사람은 쩡아 너보다 못한걸? 내 눈에는 쩡아가 더 예뻐."
"씨발! 새끼야, 오글거리는 말 그만 못해!"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우리 쩡아가 더 예쁘잖아~"
"이 놈이!"
느물거리는 자철의 대사를 계속 듣던 성용은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고 결국 프린트물을 단단히 말아 그의 뒷통수를 자비없이 때렸다.
아주 속 시원할 정도로 비오는 날 개 패듯이 때리는데 비록 종이였지만 두께가 제법되어 많이 아팠다. 자철은 아픈 소리를 내지르며 뒷통수를 문질렀다.
"악! 아퍼! 이 식빵놈은 맨날 폭력이야. 폭력. 니가 깡패냐? 아니지. 깡패보다 더 해."
"이 씨발놈이! 니가 폭력을 부르는거야! 앙?"
또다시 티격태격하는 그들을 보면서 청용과 다래를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다양한 범죄사건들로 서내가 부산할 때도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시끄럽게 하는 것은 이 둘일 것이리라. 다래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는데 이런 선배들을 두고 일을 해야하는 자신이 안타까웠던 탓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투닥거리는 성용과 자철,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청용과 다래의 주변 책상 위에 실종자 리스트가 담긴 프린트 물이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었다. 프린트물 중 한장에는 갓 스물이 되어보이는 풋풋한 여성의 사진과 그 옆에 신상정보, 예상되는 실종 날짜 및 시간과 장소가 맨 상단에 기록되어 있었다.
* 이름 : 김소영
* 나이 : 21살(만20세)
* 생년월일 : 5월 19일
* 가족관계 :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 직업 : ㅇㅇ대학교 ㅇㅇㅇ과 2학년생.
* 생김새 : 예쁘장한 고운 외모와 날씬하며 긴 검은 생머리를 가졌음.
* 예상 실종 시점 : 6월 첫째주 금요일 저녁 8~10시 추정.
* 예상 실종 장소 : 번화한 거리. 실종 예상일에 하교 후 친구들과 놀다가 헤어짐.
친구들의 말로는 쇼핑할 것이 있어서 시내에 더 남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때 실종된 것으로 예상됨.
쑨양은 친하게 지내는 이웃과 오랜만에 밖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 샤워를 한 후 내일 출근 준비를 간단히 챙겼다. 별 다를 것은 없지만 잊어먹지 않도록 포장된 선물은 눈에 보이도록 챙겨두었다. 젖은 머리는 대충 말리고 얼굴에는 이번에 면세점에서 사온 화장품을 뜯어 발랐다.
기존에 있던 화장품은 거의 바닥난 상태였고 중국으로 가기 전에 쓰레기통에 버린 뒤였다. 새 화장품의 은은한 향을 맡으며 얼굴부터 목까지 바른 후에 젖은 수건은 빨래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안타깝게도 바구니 안으로 깔끔하게 골인되지 못한 수건은 어정쩡하게 바구니 걸려 밖으로 불거져 나왔다.
{하암~ 졸리다. 자야지. 아차...알람도 맞추고...} *{ }는 중국어 표기.
휴대폰의 알람어플로 시간을 맞추고 이불 속으로 몸을 뉘었다. 많이 피곤한 탓에 약간의 뒤척임도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박력넘치는 알람소리에 깨어난 쑨양은 비몽사몽(非夢似夢)한 상태로 비틀비틀거리면서 욕실로 걸어갔다. 욕실로 가는 길에도 흔들리는 몸뚱이는 제대로 중심을 못잡아서 문과 벽에 부딪혔고 욕실에 들어가서도 선반에 한번 머리를 찧은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아파...}
부딪힌 이마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면서 치약튜브를 눌러 짜 칫솔에 묻힌 후 텁텁한 입안에 가져대었다. 양치를 하면서 거울에 비친 제모습을 보니 간밤에 잠들기 전 대충 말리고 잤던 머리칼이 조금 뻐쳐 있었다. 손으로 눌러보지만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하얀 거품을 세면대에 뱉고 흐르는 물에 헹구고 세수도 했다. 클렌징류도 쓰지 않고 물로만 고양이 세수하듯이 세수를 끝마친 쑨양은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수건걸이에 수건을 걸고 칫솔은 통에 꽂아넣은 다음 밖으로 나와 아침식사를 간단히 차렸는데 토스트오븐으로 살짝 구운 우유식빵과 흰우유, 잼과 버터, 베이컨과 스크램블드에그였다.
따끈한 빵에 버터를 바르고 그위에 잼을 발라 한입 베어 물었다. 우유도 마시면서 근처에 놓아둔 리모컨을 들어 TV를 켜서 아침 뉴스를 시청했다.
뉴스에서는 치정 살인부터 성폭행, 정치인 비리, 스포츠, 오늘과 내일, 주간 날씨를 알려주었고 그것을 보면서 식사를 했다. TV를 보면서 식사를 마친 쑨양은 식기를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었고 편안한 차림에서 말쑥한 차림으로 변한 그는 참 멋있었다.
하얀 와이셔츠와 진회색 슈트를 입은 쑨양은 선물을 담은 종이백과 메신저백을 챙겨 현관에서 구두까지 신고 집을 나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복도가 조용했고 쑨양의 구두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도착할 때까지 서서 손목에 찬 시계로 현재 시각을 보고 출근길을 가늠했다.
{이 시간이면 차가 막히지 않겠네.}
띵동 도착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 안으로 들어가서 지하 2층 버튼키를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은 곧 닫혀 목표층을 향해 움직였으며 이내 지하에 위치한 주차장에 내려온 쑨양은 자신의 차가 있는 지점으로 향했고 조금 먼지 쌓인 자동차가 보였다. 검은 색 차량이라 뿌연 먼지가 도드라져서 자동차 문을 열어 짐을 놓아두고 본네트와 그 주변을 걸레로 대충 먼지를 털어낸 후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고 약간의 예열시간을 둔 다음 출발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도로는 이미 많은 자동차들로 북적였다. 수많은 자동차들 속에 자신의 차도 끼워넣으며 직장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몇십분정도 운전해서 가자 직장 건물이 보였고 주차장에 주차를 한 다음 차밖으로 나와 가방에서 사원증을 꺼내 목에 패용(佩用)한 다음 건물로 들어섰다. 건물 초입에 있는 경비실(警備室)안에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해 보이는 경비원이 창문을 열며 쑨양에게 말을 건낸다.
"자네. 출근하는가?"
"안녕하세요. 아저씨."
"그 뭐더라...중국 간다고 했었지?"
"네. 맞아요. 오늘 다시 출근하고요. 아참, 그리고 이거 선물이에요."
쑨양은 종이백에서 포장한 초콜릿을 꺼내 경비원에게 건네주었다.
"아이구~ 이게 왠 선물이여?"
"중국 다녀온 선물이에요."
"중국인이 중국 갔다왔는데 뭔 선물이야. 그냥 빈손으로 와도 되제."
"그래도요. 후후."
"아무튼 고맙게 잘 먹을게. 어여 들어가봐."
"네. 수고하세요."
경비원에게 인사를 한 후 쑨양은 건물 내로 들어섰고 대리석으로 꾸며진 로비 한켠에 위치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총 여섯대의 엘리베이터 중에서 하나의 버튼을 눌렀고 곧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쑨양이 들어선 건물은 제약회사의 연구동으로써 약재(藥材)를 연구하는 곳이었으며 쑨양은 그곳에서 일하는 연구원(硏究員)이었다.
자신이 일하는 층에 도착한 쑨양은 닫힌 문앞에서 패용한 사원증을 리더기에 찍었고 보안을 위해 잠궈둔 문은 잠금 해제음과 함께 열렸다.
==============================================
히륜입니다.
어제는 하루종일 교육받느라 업무시간내에 못한 일을
처리하는 것 땜에 야근해서 글을 못올렸네요^^;
오늘 좀 분량 길게 썼는데 어떠신가요?
범인은 또다른 희생양을 물색하러 도서관에 간것이었어요...무서운 놈ㅠㅠ
이번 편에서 쑨양의 직업이 드러났습니다. 제약회사의 연구원...ㅋㅋ
아니...제약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따위 직업을 선택..ㅠㅠ
왜 전 일을 점점 벌리는 것일까요ㅋㅋㅋ아오ㅋㅋㅋ
그리고 오늘 비오는데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See you again *U_U*
※ 오타 지적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