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냐. 하여간 맨날 뎌디다니까."
"아니야, 새끼야."
석진이 천천히 걸어오는 윤기에게 다가가 어깨 동무를 하자, 멀리서 그 둘을 지켜보고 있던 남준이 히죽 웃었다.
꼭 고양이랑 쥐새끼 같네. 남준이 작게 말하자 그 소리를 어느 틈에 들은 것인지 석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발끈하는 것이었다.
"누가 쥐냐."
"너는 등치가 산만하니까 고양이고. 그럼 윤기가 쥐겠지."
그렇지, 남준의 말에 석진이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서있던 윤기가 피식 미소를 흘렸다.
"덩치가 산만하면 둔한게지. 쥐는 얍삽하잖냐."
"뭐? 쥐새끼처럼 생긴 놈이."
둘이 또다시 주먹 다짐을 하려 서로를 마주보았을 때, 석진은 빠르게 윤기가 감추어둔 목덜미를 살폈다.
피부가 사내처럼 까무잡잡하면 멍자국도 들 보일텐데.
고뿔환자처럼 피부가 하얗게 질려서 아주 작은 상처도 도드라져 보인다.
석진은 옷 사이로 펼쳐져있을 보라빛 향연을 그저 눈뜨며 보고 있을 수 밖에는 없었다.
그런 석진의 끈질긴 시선이 느껴졌는지, 윤기는 서둘러 옷자락을 끄집어 목 부근을 가렸다.
그 행동에 결국 남준까지 눈치채고 말았다.
"너도 때리라니까."
결국 참다 못한 남준이 시큰둥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가 말하자 말할 기회가 생긴 듯 석진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아빠라고. 얌체같이 사람들 눈에 안 보이는 곳만 때렸잖아."
"너희는 맨날 지겹지도 않냐. 나 맞고 오는 일이 한 두번이야? 이제 참을만 하니까 괜찮다."
"보는 우리가 답답해서 그렇다."
늘 말 피하는 것도 저새끼지. 석진의 말처럼 윤기는 높은 가을 하늘만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윤기의 어머니가 원인모를 병으로 죽자, 아버지가 미쳐버렸다.
제사를 지낸 몇 달까지는 죽은 듯 방에 누워있었고 그 다음부터는 술을, 그 다음은 여자를 데리고 들어와 집안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윤기는 미쳐가는 아버지를 보고도 말릴 수가 없었다.
데려오는 여자들은 죄다 어머니를 빼다 박은 사람들이었고 술김에 부르는 노래 또한 어머니의 고향 노래였다.
윤기는 미친 아버지를 뒤로 하고 여동생을 데리고 매일 밤 이집 저집을 오고다녔다.
하루는 남준이네, 다른 하루는 옆집 아주머니 집. 석진이네는 광장 주변에 자리잡혀 있어서 밤에 도망가기에는 꽤 거리가 멀었다.
매일 만날 때마다 자신의 집에도 찾아오라며 애걸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다.
"동생은."
"옆집에."
"약은 다 떨어졌어?"
"어제 돈 받은 걸로 새거 샀다."
의사는 죽은 어머니의 병과 같은 병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걸 무어라 말하더라. 유전이라고 했나.
그 소리를 들은 윤기는 남준의 집에 찾아가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다른 집은 죽으면 돈이나 패물을 남긴다고 하던데, 우리 어머니는 아무도 못 고친 병을 남기고 갔다.
남준은 그저 윤기의 울분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제 아무리 멋진 말을 해도 윤기의 상처를 덮어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네 의사는 수술을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수술을 하기엔 기술과 실력이 부족해서 좀 더 큰 병원을 찾아가야 한다고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윤기는 매일 밤 통증으로 잠조차 자지 못하는 동생을 품에 안고 돌아다닐 수 밖에는 없었다.
구할 수 있는 약은 통증을 조금 억제시켜주는 진통제뿐. 윤기는 그 약값을 버는 것도 어려워 결국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가게에서 힘들게 안 하디?"
왜 안하겠니. 윤기는 뒷말을 삼키는 대신 고개를 내저어 주었다. 윤기가 들어간 곳은 일본 간부들이 자주 드나든다는 고급 기생집.
윤기는 결국엔 몸을 팔아야 하는 처녀들의 심부름을 도맡아 해주었고 온갖 잡일을 하러다녀야 했다.
하지만 모든 곳에서든 텃세라는 것, 자리싸움이란 것은 분명했다.
같은 잡일견 아이들은 자신을 예뻐하는 기생들,
혹은 지나다니는 간부들을 보면 질투심 때문인지 저의 밥에 흙을 뿌려 놓거나 신발을 감춰버리고 간부들에게 내갈 음식들을 숨겨놓기도 했다.
"힘들게 해도 욕만하고 만다."
"천하의 민윤기가 욕만하고 만다고? 네가 가만히만 있으니까 더 얕보는 거라고."
"내가 그걸 몰라서 그러겠니."
일자리가 끊길지도 모르는데.
해가 기울고 있었다. 윤기는 기우는 해를 보고는 옆에 있던 남준과 석진에게 애써 웃어보였다.
아, 또 잠깐 가본다는 말을 하겠지. 석진은 못내 아쉬운 티를 냈지만 남준은 잠자코 윤기만을 바라보았다.
"잠깐 가봐야겠다."
"넌 잠깐이 참 길더라."
"돌아오게되면 초인종 누를게."
"누구?"
"당연히 남준이네 집 초인종이지."
"야, 우리집도 초인종 있거든!"
"네 집은 너무 멀다."
윤기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아쉬움을 벗어버리려는 뜀박질이라,"
"그건 또 누구 말이냐."
"누구말이긴. 내 말이다."
남준은 점점 멀어져가는 윤기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루빨리 아버지라는 그늘에서, 더러운 기생집에서 벗어났으면 좋으련만.
나이도 어리면서 힘든 곳은 왔다갔다 거리고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