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호는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인 조그만 접시를 한 번 만져 보기도 했다. 깨끗하긴 깨끗하네. 지호는 야상을 벗어 소파에 아무렇게나 두고는 기대앉았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집주인이 없냐…. 미간을 좁히던 지호는 한동안 뒤척이다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옮겨 아까 구경하지 못한 방으로 들어간다. 아마 집주인 방이겠지. 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던 지호는 어느 한 곳에 시선이 머문다. 조그만 액자 사진이었다. 아, 이렇게 생겼구나. 열댓 명은 돼 보이는 친구들이랑 찍은 단체 사진인 것 같은데 박경에게 표지훈에 대해 지겹도록 들은 결과 이 열댓 명중에 누가 표지훈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액자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은 지호는 이번엔 액자 바로 옆에 있는 카메라를 건드렸다. 이거 좋은 건데. 지호는 괜한 장난심에 카메라를 침대 밑에 숨기고는 방에서 나와 다시 소파에 몸을 눕혔다. 띠리링 도어락 풀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이내 피곤함에 찌든 표정으로 들어오는 지훈에 지호는 얕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야. 안녕. "
지호를 발견하지 못하고 홱 지나가 방으로 들어가는 지훈에 지호는 당황했다. 재빨리 따라 들어가 어색하게 인사를 해 보이자 지훈은 옷을 벗으려던 손을 멈추고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지훈의 표정으론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지호를 위아래로 훑던 시선이 멈추더니 이내 자그막하게 잠시만 나가 있어, 라며 옷을 벗던 손을 다시 움직인다. 지훈의 말에 지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문을 닫았다. 키가 크고, 목소리는 존나 굵고. 박경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딱딱 맞았다. 그런데 싸가지가 없다는 말은 없었는데. 앞으로 여기 살면서 괜히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지호는 괜히 헛기침을 크게 내뱉었고 그 동시에 편하게 옷을 입은 지훈이 방에서 나온다.
" 이름이 뭔데? "
" 어…, 박경한테 안 들었어? 우지호. 지호. "
" 나이는? "
" 너보다 한 살 어린데. "
분명 박경한테 다 들었을 텐데 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질문을 그렇게 하는 것인지. 자기가 물어보고 심드렁하게 받더니 이내 마지막 지호의 대답에 그런데 왜 반말이야, 라며 짧게 내뱉는다. 아, 결국 이 말 하려고 물어본 건가. 골치 아파졌다. 사실 나이에 그렇게 연연하지는 않는 성격이라 예전부터 그냥 버릇처럼 한 살, 두 살 차이까지는 그냥 반말로 통했는데. 주위 사람들도 그런 나에 두 손 다 들었고, 괜히 그런 거에 익숙해진 나였기에 한 살 차이즈음엔 존댓말이 어색했다. 어차피 겨우 1년 일찍 태어난 걸로, 뭘….
" 반말 싫어해? "
" 어. "
지호의 질문에 당연하다 듯이 대답하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호를 보던 시선을 거둔다. 지금 지훈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느낀 지호는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그러다 이내 한 번 웃어 보인다. 첫날부터 괜히 이랬다가 자칫하면 이런 더러운 상황이 반복될 거라고 생각했다. 지훈은 지호를 향해 눈짓했다. 따라오라는 뜻이다. 지호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고 지훈이 자기 방 근처 다른 방을 향해 여기서 자, 라며 짧게 툭 내뱉는다. 방 안에 들어선 지호는 뜻밖에 깔끔한 방에 저절로 얼굴이 퍼졌다. 자신이 들고 온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방 안을 쭈욱 살펴보았다. 약간 어두운 감이 있어 불을 켜자 확 환해진 방에 지호는 만족스러웠다.
" 여기 안 쓰는 방이야? "
" 응. 예전에 썼다가. "
원래 말투가 무뚝뚝한 건가. 지호는 방에서 나와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야상을 집어 방으로 가져온다.
" 머리 염색하고. 피어싱도 빼고. "
" 어? "
지호는 샛노랗게 염색한 머리를 긁적였다. 왜…? 의문점이 가득 담긴 지호의 물음에 대답도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지훈에 곧게 닫힌 문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엄한 집 안에서 살았나…. 지호는 허, 속 빈 웃음을 터트리고는 신경질적으로 야상 주머니에 핸드폰을 꺼냈다. 저 말투가 존나 예쁜 새끼를 소개해준 박경이 죽도록 사랑스러웠다. 익숙한 번호를 꾹꾹 눌러 귀에 대니 경쾌한 컬러링이 들려온다. 그러다 이내 뚝 끊기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지호의 귀를 파고든다.
' 여보세요. '
" 씨발아. 표지훈인가 뭔가 성격 좆 구리잖아. "
' 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
" 여기서 못 지내겠다고. 성격이 그냥…. "
본격적으로 자신이 방금 겪은 일에 대해 열변을 토하려 하는데 갑자기 방문을 벌컥 여는 지훈에 지호는 급하게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숨긴다.
" 욕도 하지 말고. "
" ……. "
" 집에서 목소리 높이지 말고. "
" 아씨. 그럼 대체 뭐하라. "
" 반말도. "
고요…. 지호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말도 다 뚝뚝 끊어버리고 자기 할 말만 하는 지훈에 지호는 슬슬 기분이 나빠지려 했다. 내가 머리를 노랗게 하던 파랗게 하던 뭘 하던 자신에게 피해만 안 가면 그만인데. 욕도 하지 마라니. 목소리도 높이지 마라니. 반말하지 마라니. 왜 이렇게 따지는 게 많은 것인지. 지호는 머리가 아파지려고 한다. 이런 분위기를 기대했던 게 아니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 전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지호는 그저 멍하니 지훈을 바라보았다. 원래 그렇게 잘 따져요? 지호의 가시 박힌 물음에 지훈은 잔뜩 굳은 지호의 얼굴을 살폈다.
" 옷 편하게 입고 나와. "
지훈의 말은 여전히 짧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