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집 홍일점 VI
#1
부엌에서 자몽 워터가 줄어드는 게 아까워 방울방울 마시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식탁에 앉아 작업하던 민윤기와 눈이 마주쳤다. 가위 바위 보. 나는 보자기고 민윤기는 주먹이다. 민윤기는 한숨을 쉬며 거실로 간다.
"누구세요?"
-택배요.
"너 택배 시켰,"
"안 돼!"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다. 다른 사람이 인터셉트하면 안 된단 말이다. 택배 아저씨의 말을 따라 사인도 하고, 상자도 받아들고 뒤를 돌아보니까, 어디서 나온 건지 민윤기와 김태형, 전정국에 김남준까지 인간 병풍을 만들고 서 있다.
"... 너네 왜 그러고 서 있냐."
"너 또 이상한 거 시켰지."
누가 보면 내가 이상한 것만 사 오는 사람인 줄 알겠다. 나는 상자를 꼭 끌어안는다. 아니거든. 하지만 전정국도 물러서지 않고 그럼 까 보라고 한다. 자기들이 보는 앞에서. 이상한 것도 아니라면서 왜 망설이냐고도 묻는다.
"... 이거 속옷이야."
"너 속옷 직접 입어보는 거 아니면 못 사겠다며."
"......."
저런 걸 왜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말없이 민윤기를 째려보니까 김태형이 와서 상자를 들던 내 팔을 풀었다. 김남준도 와서 박스를 들고 거실로 가고, 전정국이 방에서 칼을 들고 왔다. 이럴때만 속전속결이다. 치킨 먹을 때나 이러면 얼마나 좋아. 민윤기는 내 옆에 서서 팔짱 끼고 구경한다. 박스는 열린다.
"... 이게 뭐냐? 토끼 옷?"
전정국 앞으로 가 옷을 낚아챘다. 동물 잠옷이다. 지난주에 내가 발견하자마자 1초의 고민도 없이 질러버린 아이들이다. 내 소중한 아이들을 이딴 식으로 대우하다니. 전정국은 기본이 안 되어있다. 김태형은 이미 다람쥐 잠옷을 머리에 쓰고는 잘 어울리냐며 거실을 돌아다닌다.
"이거 입고 자려고? 안 불편하겠냐?"
"그럼 전시해놓으려고 샀겠냐."
"대체 몇 개를 산 거야. 일주일에 하나씩 입으려고?"
"다섯 개. 너구리, 하늘다람쥐, 토끼, 고양이, 강아지."
"많이도 샀네. 주말에는 뭐 입을 건데? 호랑이? 기린?"
"아니, 사자. 야, 김태형! 벗어! 벗으라고!"
묻는 말에 하나하나 대답해주면서 김태형을 쫓아다녔다. 김태형은 다리만 길어서 요리조리 피해 다닌다. 전정국은 고양이 꼬리를 쥐고 머리를 찾고, 김남준은 진지한 얼굴로 뽁뽁이를 터트린다. 민윤기가 상자 안에서 너구리 옷을 꺼내 자신의 몸 위로 대본다. 야, 이거 네가 입기에는 좀 커 보이는데. 거실 바닥에 주저앉으니까 김태형은 흡족한 얼굴로 식탁에 걸터앉는다. 나는 해탈한 얼굴로 고백하기로 한다.
"어. 그거 너네 옷이야."
순간 거실이 조용해지고 김남준이 뽁뽁이를 누르는 소리만 들린다. 전정국이 신경질적으로 김남준 손에서 뽁뽁이를 낚아챈다. 그리고 태형이 네가 입고 있는 건 사실 전정국 옷. 김태형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다람쥐 얼굴이 있는 모자를 벗는다. 원래 독수리 잠옷으로 다섯 개 사려고 했는데, 그건 없어서 못 샀다. 아쉬울 따름이다.
#2
아침부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 비비며 나가면, 전정국이 화장실 문을 주먹으로 치고 있다. 안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외치는 사람은 김태형이겠지. 매일 모닝똥을 하는 게 김태형 습관인데, 요즘 몸이 안 좋은 건지 자꾸 늦게 나와서 아침마다 바쁜 나랑 전정국이 고생하고 있다.
"안 나오는 걸 어떡해!"
"그럼 그냥 나오라고!"
"안 돼. 아직 쑥스러워서 그런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나올 거야."
"개소리 말고 너나 나와!"
아침부터 미치려고 하는 전정국에게 가서 아침부터 먹으라고 부엌으로 보냈다. 전정국은 머리를 한 번 털더니 부엌으로 사라졌다. 나는 화장실 문을 노크한다. 태형아.
"그, 다리랑 배랑 닿게 하면 잘 나온대."
"... 안 나오는데."
"배를 숙이면 안 되고, 다리를 들어."
"싸고 있는데 어떻게 들어?"
"... 발꿈치를 들면,"
"어어! 조금씩 나온다!"
아니 씨발 그걸 생중계 할 필요는 없는데...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전정국이 사라진 부엌으로 갔다. 전정국이 기다렸다는 듯이 빵을 내민다.
"넌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
"어젯밤에 구글에다,"
"야! 나오다가 끊기면 어떡해? 어? 나 지금 나오다 끊겼는데 어떡하냐고!"
전정국은 씹던 빵을 싱크대에 그대로 뱉었다. 나도 따라 뱉는다. 퉤. 전정국은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3
"아, 깜짝이야!"
"내가 더 깜짝 놀랐잖아! 그걸 왜 던지는데!"
"넌 그걸 왜 쓰고 있는데!"
김남준이 부엌에 들어오더니 나를 향해 숟가락을 던졌다. 다행히 맞지는 않았지만, 난 지금 칼을 들고 있었다고. 잘못해서 손에 칼이라도 베였으면 어쩌려고! 내 소중한 칼인데! 김남준을 째려봤지만 아마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을 거다. 지금 난 수경을 쓰고 있다. 나는 마저 김남준에게 화를 낸다.
"숟가락? 장난하냐? 네가 숟가락 살인마야?"
"그러니까... 넌 대체 왜 그걸 집에서 쓰고 있냐고...."
집에서 수경 쓸 일이 양파 썰 때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나는 말없이 양파를 가리킨다. 오늘은 내가 자처해서 저녁 준비를 했다. 메뉴는 무려 월남쌈. 냉장고에 든 야채들을 몽땅 썰어야 하는데, 양파 썰기가 너무 힘든 거다. 나는 방을 뒤져 어린이 스포츠단 때 썼던 수경을 찾았다. 무슨 일이냐며 부엌에 들어온 전정국은 내 모습을 보고 말을 잃었다. 나도 안다. 내가 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비주얼이긴 하다.
"......."
"양파 때문이래."
김남준은 얼빠진 얼굴로 서 있는 전정국의 어깨를 두 번 툭툭 치고는 부엌을 나갔다. 나도 등을 돌려 양파를 계속 써는데, 전정국이 나가는 소리가 안 들린다. 나는 다시 뒤를 돌아 인상을 쓰며 전정국에게 위협을 한다. 꺼지라는 거다.
"나도 나 귀여운 거 아니까 그만 쳐다볼래?"
"...이걸 걔가 봐야 하는데."
"내 깜찍함이 세상에 널리 알릴 만하긴 하지."
내 별명이 홍익인간이다. 널리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얼굴이 빨개서가 아니라. 나는 다시 양파를 마저 썰기로 한다. 전정국은 뒤에서 자꾸 궁시렁댄다.
"그래야 박지민도 소개시켜달라는 말이 쏙 들어갈텐데."
"뭐라고?"
"... 너 새삼 깨물어 주고 싶다고."
"다시 말해 봐."
"그만큼 귀엽다고."
쟤는 저걸 이제 알았나보다. 전정국은 참 망실이다.
#4
"그만 찍어라."
나는 민윤기의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민윤기 주위를 돌며 사진을 찍는다. 남는 게 사진이야. 셔터 소리는 끊기지 않는다.
"강아지?"
"......."
"멍멍해야지! 애교도 좀 부리고!"
민윤기는 내 말에 인상을 찌푸린다. 그래도 고마운 건 그나마 가만히 서 있는다는 거다. 포즈도 취해줬으면 참 좋겠지만, 민윤기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세상이 아는 거니까.
이번 주 월요일부터 토요일에 시간 빼놓으라고 누누이 말했었다. 냉장고에 '토요일 오전은 다 비워둘 것'이라고 쓴 포스트잇도 붙여놓고, 아침마다 입이 닳도록 얘기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이유는 비밀이라는 이유로 함구하다, 어제 모두 거실에 불러놓고 고백했다.
'우리 동물 잠옷 입고 피크닉 가자.'
'정신 병원 알아봐 줄게.'
'미칠 거면 제발 좀 곱게 미쳐.'
물론 대차게 거절당했다. 내 피 같은 자몽 워터를 바쳐서라도 가자고 하려 했지만 무슨 말을 해도 안 먹힐 것 같아서 계획을 바꿨다.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불쌍한 얼굴을 하고,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거다. 내 유일한 소원이었는데... 하고. 여기서 포인트는 혼잣말을 빙의해 모두가 듣게 말하는 거다.
넷은 내 방문 앞에서 자기들끼리 토론을 벌이다가 결국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그래, 가자. 김남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웃으며 준비했던 잠옷을 각자 손에 쥐여줬다. 내 행동에 김태형이 당했다고 욕을 했지만 이미 늦었으니 넘기기로 한다.
"윤기야, 강아지?"
"......."
"오늘 밥 굶고 싶어?"
"...멍멍."
"우리 슈가, 손!"
슈가는 민윤기의 예명이다. 민윤기는 그럴 때 부르라고 만든 이름이 아니라고 툴툴대면서도 내 손에 자신의 손을 올린다. 개같네, 진짜. 그 모습을 본 전정국은 고개를 젓는다. 확실히 다 큰 남자들이 단체로 동물 옷을 입고 공원에 나가니까 여간 주목받는 게 아니다. 나는 다 너네가 잘생겨서 보는 거라고 했지만, 아무도 내 말을 믿는 것 같지는 않다.
"지금쯤이면 집에서 야동이나 보고 있었을 텐데."
"여기 여자도 있다는 거 잊지 말아줄래?"
"여자같은 소리 하네. 차라리 김태형이 쾌변한다 그래라."
요 며칠간 춥더니 오늘은 날씨가 좋다. 돗자리에 누워 있으면 비치는 햇살이 따뜻하다. 이런 날에 집에만 처박혀 있는 건 죄다. 하지만 김남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야동이 뭐냐, 야동이. 나는 김남준의 팔을 꼬집는다.
"제일 많이 보는 게 성질이야."
"야! 내가 언제!"
"언제? 언제인지 다 말해줘?"
나는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켠다. 우리 같이 셀카 찍자! 곤란한 주제에는 말 돌리기가 최고다. 돗자리 위에 고쳐앉아 핸드폰을 들고 팔을 쭉 뻗는다.
"입 다물고 누워."
"웅."
아, 안 먹히네, 이거. 나는 입을 꼭 깨물고 누워서 몇 초간 눈치를 살피다가 조용히 핸드폰을 다시 켠다. 조용히 팔을 뻗었다. 핸드폰 화면에 민윤기 얼굴이 보인다.
"내놔."
"......."
나는 다시 한 번 입술을 꼭 깨물고 핸드폰을 꺼서 민윤기 손 위에 올려뒀다. 아, 진짜 안 먹히네 이거.
#5
나에게 타임머신이 있다면 10분 전으로 돌아가서 10분 전의 나를 죽였을 거다. 그때 내가 본 건 하하 호호 웃으며 2인용 자전거를 타는 커플이었다. 나는 독수리 형제들에게 나도 저게 타고 싶다고 졸라댔고, 내 말에 못 이긴 넷은 가위 바위 보에서 진 사람이 나와 함께하는 행운을 갖기로 했다. 그리고 혼자만 주먹을 낸 전정국이 행운의 주인공이다.
"어어... 어!"
"어떻게 1미터도 못 가냐. 네 다리는 다리가 아니라 나무 막대기냐?"
"자전거가 후져서 그래!"
자전거를 타는 건지, 자전거를 다리에 끼고 걷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본 건 분명 바람에 머리를 휘날리며 쌩쌩 다니는 모습이었는데, 왜 이런 건지 모르겠다. 존나 이 공원 위의 무법자처럼 내달릴 거였단 말이다. 그래서 굳이 앞에 앉겠다고 바락바락 우겼건만.
"왼발, 오른발, 왼발... 그렇지."
전정국이 뒤에서 불러주는 말에 발을 맞추니까 조금씩 굴러간다. 이제 페달을 밟는다는 느낌이 든다. 머리칼 사이로 찬 가을 바람이 분다. 그래, 이거지. 자전거와 하나가 되어 달리던 나는 어느 순간 브레이크를 꽉 쥔다.
"왜 멈춰! 잘 가고 있었는데! 앞에 다람쥐라도 지나가냐고!"
다람쥐 잠옷을 입은 놈이 저 말을 하니까 존나 웃기다. 인상을 쓰는데 하나도 안 무섭다. 나는 전정국을 무시한 채 자전거 주위를 빙 돈다. 빡친 얼굴로 내 행동을 보던 전정국은 두 바퀴를 돌 때서야 물었다. 방귀 꼈냐? 나는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인다. 전정국은 한숨을 쉬고는 앞자리에 올라탄다. 넌 뒤에 타. 나도 눈치는 있다. 지금은 그냥 닥치고 타야 한다.
"내가 다 밟을 테니까 넌 발만 올리든지, 발도 떼든지 해."
"웅."
"다시 이거 타자고 해봐. 죽인다."
"웅."
집에 가서 전정국의 보물 1호인 쿠키의 옷을 빨아주겠다고 생각한다. 얼마 안 가 전정국은 브레이크를 밟더니 고개를 돌려 날 째려봤다.
"페달 밟지 말라고."
...쿠키 샤워도 시켜줘야겠다.
#6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 만났다. 민윤기랑 전정국 말고, 여자 친구들. 내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가 민윤기랑 전정국 밖에 없었으면 그건 좀 슬펐을 것 같다. 그러니까, 난 얘들을 안 만났더라면 어떻게 학교를 다녔을까 싶을 만큼 얘들이 좋다는 거다.
"...너 너무 마신 것 같은데."
"응! 나도 사랑해! 이리 와, 언니가 뽀뽀해줄게."
"맛이 갔네, 갔어."
나는 내 옆에 있던 수정이도 껴안으며 볼에 뽀뽀를 퍼붓는다. 수정아, 내가 너 엄청 좋아하는 거 알지. 정수정은 단호하게 내 팔을 치우고는 손을 내민다. 응? 정수정 손에 내 손을 얹으니까 정수정은 말고, 하더니 핸드폰을 달란다. 난 말 잘 듣는 어린이니까 고분고분 핸드폰을 꺼내 정수정의 손에 올려놓는다.
"배터리 나갔네."
"수정아, 나 입 짱 크다!"
정수정이 자꾸 인상을 쓴다. 그래서 나는 수정이의 비타민이 되기로 한다. 뭘로? 내 큰 입으로. 나는 개그우먼에 빙의해 내 앞에 있던 뻥튀기를 입에 들이붓는다. 코도 크다! 이번에는 뻥튀기를 내 코에 넣으려는데, 박경리가 내 손에 든 걸 다 뺏어간다.
"뭐야! 너도 먹고 싶었어? 진작 말하지! 다 줬을텐뎅!"
"......."
뻥튀기 따위가 우리를 가를 수는 없어! 나는 테이블에 있는 뻥튀기를 다 부순다. 양손으로 내 손목을 잡은 수정이는 인상을 쓰고 묻는다. 인상 쓰면 예쁜 얼굴에 자국 남는데.
"너 집 비밀번호는 기억 나?"
"웅! 내 생일인뎅!!!"
정수정은 한숨을 쉰다. 아마 안주 때문일 거다. 여기가 술은 괜찮은데 안주가 별로다. 그러게 내가 다른 데 가자고 할 때 말 좀 듣지, 정수정은 말 안 듣는 어린이다. 이번에는 박경리가 묻는다. 집에 갈 수는 있겠어? 하고.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웅! 하지만 박경리는 말없이 나를 째려본다. 못마땅하다는 얼굴이다.
"......."
"아닝..."
나는 쫄아서 대답하다가 아! 하고 테이블을 내려친다. 윤기한테 전화하면 다 알려줄 거야! 내 말에 정수정과 박경리가 동시에 나를 쳐다본다. 내가 아무리 좋아도 이런 갑작스러운 집중은 조금 쑥스럽다.
"민윤기? 그 하얀 애?"
"웅! 요즘은 갈수록 더 하얘진다! 신기하지!"
"요즘도 만나?"
"어! 맨날 봐! 같이 살거든! 전정국도 같이 산당!"
손뼉을 치며 대답하다 테이블 위로 드러눕는다. 얼굴에 뻥튀기 부스러기가 묻었지만, 나중에 털면 되니까 넘기기로 한다. 경리야, 나 너무 졸린데 여기서 자면 안 될까아... 눈에 빛을 내고 물었지만 박경리는 매정하게 나를 일으켜 세운다. 당장 일어나라며. 나는 입을 비죽이며 일어난다. 어어! 순간 휘청이는 몸을 수정이가 잡아준다. 역시 수정이는 내 생명의 은인.
"난 택시 부를 테니까 넌 얘 핸드폰에서 민윤기 번호 찾아."
"지금 찾고 있어. 얘는 대체,"
"수정아, 지금 몇 시야? 완전 깜깜하당!"
"...3시."
"아이씨, 융기한테 혼나겠네... 늦게 들어오면 혼난다고 했는뎅..."
나는 머리를 쥐어뜯는다. 얼른 집에 가야겠는 걸...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눈꺼풀은 지구를 올려놓은 듯이 무겁다. 그리고 내 얼굴은 바닥으로 하강한다.
#7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 뒤질 것 같다. 씨발...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고 꾹꾹 눌렀다. 주말이라고 신나서 부어라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침대에서 일어나 물이라도 마시러 나갔다.
"...너네 뭐 하냐."
"앉아."
아침부터 식탁에 다 모여있다. 그것도 전부 다 심각한 얼굴이다. 나도 따라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의자에 앉았다. 혼자 사장님 자리에 앉아서 넷을 보니까 좀 징그럽다. 민윤기가 꿀물을 내밀었다. 윤기야, 너밖에 없다. 감동받은 얼굴로 받아들고 마시는데,
"어제 3시 넘어서 들어왔더라."
그대로 뿜을 뻔했다. 다행히 뱉지는 않았지만 잘못 삼켰다. 콜록콜록! 얼굴이 빨개져서 숨이 넘어가게 기침을 해도 누구 하나 움직이질 않는다. 가슴께를 주먹으로 광광 치다가 겨우 진정하고 팔을 식탁 아래로 내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김태형이 단호한 얼굴로 말한다. 그거 이제 안 먹혀. 아쉽다. 나는 입을 삐죽인다.
"적어도 1시는 넘기지 말랬잖아."
"전부터 생각한 건데, 너네는 내 아빠도 아니고 엄마도 아닌데 왜,"
"진짜 아버지께 연락드려줘?"
"... 아닝."
"핸드폰은 왜 꺼놨어."
"끈 적 없는데?"
"......."
"아, 배터리 나갔었다."
내 말에 넷이 동시에 한숨을 쉰다. 와, 텔레파시 장난 아니다. 민윤기가 머리를 쓸어넘긴다. 적어도 연락은 하라고 하지 않았냐는 민윤기의 타박에 그래서 했잖아, 하고 대답했다. 내 대꾸에 민윤기는 인상을 찌푸린다. 뭐, 10시에? 나는 입을 다문다.
"너 앞으로 통금 12시야."
"찬성."
"찬성."
"망실."
"대찬성."
어이가 없다. 오늘 단체로 맷돌 손잡이를 뽑았나 보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존나 대동단결이다.
"그리고 너 술도 마시지 마."
"찬성."
"찬성."
"뭐라고!"
"대찬성."
짜증 난다, 진짜. 전정국은 회식 자리에서 갈고 닦은 술을 물과 바꿔치기하는 법을 설명했고, 두 번의 폭탄 발언을 한 김태형은 옆에서 맞장구를 친다. 김남준은 집중하라며 전정국의 말 따마다 정리를 해줬고, 민윤기마저 내가 엎드릴 때마다 일으켜 세웠다. 아침부터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내가 뭐 술만 들어가면 이상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잠깐, 진짜 이상한 짓이라도 하는 건가? 정말 그래서?
"근데, 나 어제 뭐 실수했어?"
"......."
"......."
"......."
집이 이렇게 조용할 수도 있다는 걸 지금 처음 알았다. 눈만 굴리며 넷의 얼굴을 살피니, 진짜 맞나 보다. 나는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하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반성문 써 올게."
나는 의자에서 일어서자마자 거실로 달려가 A4 종이를 들고 냅다 방으로 들어간다.
"......."
너무 냅다 뛰었나. 화장실이다. 나는 다시 나와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넷의 눈치를 보며 내 방으로 뛰쳐들어간다. 반성문에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 거다.
#8
똑똑. 침대에 누워 핸드폰만 보고 있던 나는 벌떡 일어났다. 방금 노크 소리 맞지? 얼마 만에 듣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기분좋게 쫄래쫄래 나갔더니 문 앞에는 김남준이 서있다. 어색함을 뿜뿜 발산하면서 말이다. 께름칙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니까 김남준은 눈을 굴리면서 머리카락 끝만 만진다.
"이 옷 어때?"
"그냥 그런데."
"...그냥 그래?"
"아리아나 그런데."
"......."
"미안."
"진지하게 구체적으로 좀 말해봐. 어때? 별로야?"
나는 김남준을 위아래로 훑는다. 내 행동이 마음에 안 드는지 김남준이 눈살을 찌푸린다. 지금이 밤 12시니까 입고 나갈 건 아닐 거고. 내일 입을 옷 같은데 머리까지 세우고 아주 쫙 빼입었다. 또 이렇게 긴장하는 김남준의 모습은 올해 들어 처음이다. 그러니까, 지금 김남준은, 흔히들 데이트 전에 겪는 '설치느라 잠도 못 자는' 상태인 거다.
"누구야?"
"뭐?"
"누구냐고."
"뭐가."
얘 오늘 진짜 이상하다. 왜 모르는 척이실까. 누구보다 제일 잘 알고 있을 거면서. 평소의 김남준은 나에게 자기 어떠냐고 절대 묻지 않는다. 지금 이렇게 떨면서 내 대답을 기다린다는 건, 데이트 상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엄청 마음에 든 거다. 김남준은 결국 한숨을 쉬며 여자의 이름을 털어놓는다.
"아... 그... 얼마전에 드라마 찍으신 분?"
"너 누군지 모르지."
"어. 존나 처음 들어."
난 연예인에 관심이 없단 말이다. 우리 방탄소년단 오빠들 - 난 양심이 없다. - 말고는. 김남준은 한숨을 쉬더니 인터넷에 여자의 이름을 검색해 보여준다. 아, 티비에서 본 적 있다. 소녀미 낭낭한 걸그룹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오래 살긴 오래 살았나 보다. 김남준이 이런 사람도 만나고. 김남준은 그동안 소나무 뺨치는 취향으로 존나 쎈 언니들만 데려와서는 내 모든 기를 죽이고 가곤 했었다.
"난 너 절대 못 잊을 거야. 넌 정말 좋은 친구였어."
"...넌 그닥 좋은 친구는 아니었어."
"저번에 네가 일본에서 산 녹차 초콜릿 먹은 거 사실 나야. 김태형이 아니라."
"지금 뭐 하는데."
"엄마도 안 하는 잔소리 해준 거 고마웠어. 그것도 못 잊을 거야."
"뭐하냐고."
"너 죽을 때가 된 것 같아서."
김남준은 뭐 씹은 얼굴로 내 눈앞에서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걱정을 해줘도 지랄이다. 김남준이 서 있던 방향으로 혼자 눈을 부라리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근데 그 초콜릿 너였냐?"
"......."
"또?"
"......."
난 씨발 입이 방정이다.
#9
오늘 퇴근길의 목적지는 우리 집이다. 하숙집 말고, 진짜 내가 살던 집. 아침에 엄마한테서 반찬을 했으니 가져가라는 문자를 받았기 때문이다. 저녁도 오랜만에 집밥다운 집밥을 먹고, 밤이 돼서야 양 손에 반찬통을 들고 늦게 집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민윤기에게 미리 문자도 잘 하고, 엄마랑 있는 사진도 독수리 오형제 단톡방에 올려놔서 저번처럼 혼나지는 않을 거다.
"...뭐 해?"
"보면 모르냐. 반성문 쓰고 있잖아."
그래서 오늘은 나 대신 전정국이 혼나는 건가. 집에 들어오니 전정국은 식탁에 앉아 끙끙대고, 나머지는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다. 티비에서 동물 농장이 나오는 걸 보면 티비를 켜긴 했어도, 아무도 제대로 보고있지 않는 것 같다.
"반성문 읽으면 죽인다."
"전혀 관심 없거든."
전정국이 무슨 짓을 했길래 저러나 싶어 반성문을 훔쳐보려다 철통같이 종이를 가리는 전정국에 실패했다. 아쉽다. 난 금세 관심없는 척, 레이디 가가에 빙의해 포 포포 포커 페이스를 하고 엄마한테 받은 반찬통을 하나씩 냉장고에 넣었다.
"어머님께 반찬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오냐."
티비랑 눈싸움 하냐고 물어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티비에 눈을 박고 있던 민윤기가 뜬금없이 감사하다고 전해드리란다. 나는 흔쾌히 좋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나는 이번엔 태연에 빙의해 정말 태연한 척 컵에 물을 따라 마신다. 그 다음에는 미션 임파서블의 톰 크루즈에 빙의해 발소리를 죽이고는 전정국의 뒤로 걸어간다.
나 전정국은, 어제 회식 자리에서 술기운에 토끼 번호를 박지민에게 넘겼습니다.
반성문 첫 문장이다. 겨우 육하원칙을 완성했다. 나는 문득 전정국이 어떻게 아직도 회사에서 안 짤리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저걸 반성문이라고 쓰고 있다니.
이건 세상이 멸망할 거라는 예고입니다. 저는 내일 토끼의 핸드폰에 박지민 번호를 스팸으로 돌릴 겁니다.
아니면 나는 혹시 전정국이 상사들에게 뇌물을 바친 건 아닌가 진심으로 고민한다. 아니고서야 어떻게 지금까지 안 짤리고 회사에 다닌단 말인가.
저는 박지민이 어제도 토끼 잠옷을 입고 잔 애가 뭐가 좋다는 건지 죽었다 깨도 모르겠습니다.
오... 어제 토끼 잠옷을 입고 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었나 보다. 그 사람은 뭘 좀 아는 사람이다. 빌고 빌어야 겨우 한번 입어주는 누구랑은 다르,
"...잠깐. 토끼가 나야?"
"아! 깜짝이야!"
전정국은 내 말에 기겁을 하며 쥐고 있던 펜을 던졌다. 인기척 좀 내고 다니라고 소리까지 지르면서. 지금 중요한 게 뭔데 겨우 그거 갖고 소리를 지르는지 모르겠다.
"박 팀장님이 내 번호 물어봤어?"
"이거 너 아니거든!"
"팀장님이 나 좋다고 그랬어?"
전정국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가 뒷목 잡혔다. 누구한테? 김태형한테. 그리고 난 그대로 거실로 끌려갔다. 김태형은 티비와 소파 사이에 나를 앉힌다. 김남준이 티비를 껐다. 민윤기는 이제 티비가 아닌 나랑 눈싸움을 한다.
"잘 들어."
"난 늘 잘 듣고 있어."
"나는 더 이상 내 주변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아."
"그 새끼 눈이 어디 달려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넌 안 돼."
얼빠진 표정으로 전정국을 쳐다봤다. 내가 입을 다물고 가만 있자, 김태형을 시작으로 하나씩 내 어깨를 툭툭치며 각자 방으로 들어간다. 마지막으로 소파에서 일어난 김남준은 내 어깨를 세 번이나 쳤다. 너무 상심하지는 마. 우리는 너한테서 어린 양을 구하려는 것 뿐이니까, 하면서. 어린 양? 나는 김남준의 배를 주먹으로 친다. 그럼 네가 희생해.
#10
이상하다. 분명 전정국이 박 팀장님께 내 번호를 알려줬다면서 나에게는 아무 연락이 없다. 이건 불공평하다. 심지어 난 박 팀장님 번호를 모른다고. 이제 핸드폰만 쳐다보는 것도 지겨워 전정국에게 따지러 가기로 한다.
"눈 찢어진다. 그만 째려 봐."
"야, 너 내 번호 알려준 거 맞아?"
"그럼 내 번호를 줬겠냐."
나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쉰다. 근데 왜 연락이 없지. 내 혼잣말을 들은 전정국이 코웃음을 친다. 네가 싫어졌나 보지.
"그럴 리 없어."
"왜 없어."
"박 팀장님은 회사에서 아무 말도 없었어?"
"... 점심 같이 먹자고?"
나는 전정국의 침대 위에 누워있는 토끼 인형을 집어들었다. 전에 내가 샤워도 시켜준 쿠키다. 나 내일 너네 회사 갈래. 내 말에 전정국은 개소리 사절이요, 하면서 나를 향해 꺼지라는 식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 진짜 내가 싫어졌나. 하지만 난 한 게 없는 걸. 일단 문자든 카톡이든 전화든 뭐가 와야지. 나는 쿠키의 귀를 잡아당긴다.
"근데 박지민 그 자식, 어차피 지금 하고 싶어도 못 할거야."
"못 해? 왜? 핸드폰 고장 났대? 해외 출장 갔어?"
놀라서 눈 크게 뜨고 묻는 나와 달리 전정국은 태평한 얼굴로 고개만 젓는다. 아니.
"네 주민번호 알려줬거든."
"......."
난 전정국을 향해 돌진한다. 전정국은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게 분명하다,
-
내 자몽이들♡ |
엔프라니 / 쿠쿠옹 / 단골 / 미자 / 바나나 / 낰낰 / 쓴다 / 코드마인 / 김까닥 / 정국오빠 애인 / 비비빅 / 내마음의전정쿠키 / 자몽에이드 / 스누피 / 호비 / 캔디 / 설 / 0121 / 코코팜 / 푸롱리 / 콧구멍 / 헹구리 / 착한공 / 너만보여 / 홍합 / 숙자 / 민윤기 / 밍구짱 / 잘자네아무것도모르고 / 뀰 / 빠밤 / 라면 / 라뜨아뚜이 / 꾹꾹 / 윤두 / 냠냠이 / 무네큥 / 프우푸우링 / 엘런 / 뮤즈 / 호석아 / 자몽자몽 / @자몽@ / 전아장 / 웃음망개짐니 / 황새 / 디즈니 / 두부 / 너만보여 / 옮 / 오리 / 책가방 / 청아 / 미니핀 / 구리구리 / 팥붕어빵 / 슙슈 / 핫초코 / 연꾹 / 꾸꾹 / 양갱 / 하지 / 애플릭 / 쥬르주스 / 윤기는슙슙 / 알빱 / 파슬리 / 봉봉 / EHEH / 흥흥 / 녹차 / 0331 / 새싹이 / 돌고돌아서 / 규밍밍 / 윤기이진 / 에리얼 / 뜌 / 룰루랄라 / 망개 / 스틴 / 흰색 / 망실 / 공룡잇진 / 액희 / 민천재 / 찌밍지민
|
암호닉은 당분간 받지 않겠습니다. 슬슬 저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느낌이라. TT
그래도 댓글들은 여전히 다 읽고 있으니 안 받는다고 도망가기 없기...!
오랜만입니다! 아닌가요? ㅎㅎ 일주일 넘게 안 온 건 이번이 처음 아닐까 싶습니다. 자몽이들 너무 보고 싶었어여!
쓰다보니 저번에 언급했던 지민이가 간접적으로만 나왔네요. 새로운 인물인 지민이에 대해 기대가 크셨었는데... 대장 자몽은 대장 자격을 박탈하기로 합니다... 그래도 걱정 마셔요! 우리에겐 다음 편이 있잖아요. 짐인이의 치명적인 매력은 차차 알아가는 걸로 합시다. 일단 오늘도 지민이는 등장도 안 했는데 선덕선덕 하잖아요? (뻔뻔) 자격을 박탈하기로 합니다 2
저번 편에서 사진을 하도 처넣으니까 글 로딩이 오래 걸리더라고요. TT 이번에는 나름 줄인다고 줄인건데, 그래도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신알신 보고 신나게 달려왔을텐데 (근거없음) 사진 때문에 기다리게 만드네요. 그래도 로딩 따위가 우리를 갈라 놓을 수는 업서! 그쵸? 얼른 그렇다고 하세요. ㅎㅎ 사실 제가 지금 새벽에 쓰는 중이라 제 정신이 제정신이 아닙니다. (언어유희) 보셨죠. 이렇게, 예.
본격적으로 날이 추워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날이 흐린 곳도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자몽이들은 이불 꼭 덮고 자세요. 저는 요즘 이불 속에 누워서 우리 자몽이들을 보며 잠드는 맛에 살고 있습니다. 이불 속이 짱이에요. 그리고 이불보다 우리 자몽이들이 더 짱입니다. 늘 사랑스럽고 고마운 존재에요.
오늘도 사랑합니다, 구빰 구빰!
BGM : Popular Song
참, 여주가 술 마시고 뭘 했는지는 60초 후에 공개됩니다. 넝담이구 나중에 공개됩니당. 조금만 기다리셔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