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가씨 줄거리에 기반한 빙의글이기에 영화를 볼 예정이신 분들은 주의해주세요*
아
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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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알리는 동영의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질때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아가씨께서 아침식사를 위해 나타나신다. 나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아가씨를 바라보곤 한다. 아가씨는 그녀처럼 눈이 부신 하얀색을 좋아한다. 오늘도 하얀색 레이스의 카라가 돋보이는 블라우스에 빨간 꽃무늬가 얹어진 치마를 입은 아가씨는 눈이 부시도록 예쁘다. 나도 모르게 한참을 아가씨를 넋놓고 바라보고 있었는지 내 옆으로 온 복희가 ‘ 아가씨 닳겠다. ’ 라며 나의 팔을 툭 쳤다. 복희의 말에 놀라 입을 꾹 다물고 자세를 바로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아가씨를 힐끗 보려다 그만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놀란 나머지 티나게 고개를 숙였다. 귀까지 달아오르는 기분이다.
“ 부인은 몇 시에 오지 복희야? ”
“ 오후 2시에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
“ 그래.. ”
어딘지 아쉬움이 묻어나는 아가씨의 목소리에 옆에 있는 복희를 보니 복희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드르륵- 의자가 밀리는 소리와 함께 아가씨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대로 내 앞을 지나가다 발길을 멈췄다. 눈 앞에 보이는 다홍색의 단화에 천천히 고개를 들자 아가씨의 분홍색 입술이 떨어지며 말을 걸어왔다.
“ 산책하기 이른 시간일까? ”
아가씨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 해가 밝으니 모자를 쓰신다면 괜찮을 것 같아요. ’ 나의 대답에 아가씨는 웃으며 복희에게 모자를 준비해오라고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 시 낭독을 즐기신 후에 산책을 가는 것에 비하면 오늘은 이른 시간임이 분명했다. 문 앞에서 복희가 가져다준 모자를 쓰고 끈을 묶는 아가씨의 뒷모습은 무엇인가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아가씨를 따라 간이의자를 집어들고 밖을 나섰다.
문밖을 나와 동영의 목례를 받은 아가씨는 정원의 한 가운데 웅장함을 드리우는 나무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나무 밑에 도착하자 선선한 바람이 불며 아가씨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아가씨는 내가 들고온 간이 의자를 발견하곤 살포시 웃으며 물었다.
“ 내 맘을 어찌 알았니? ”
“ 오늘은 차를 챙기지 않으셔서요. 아가씨가 많이 걸을 것 같아서.. ”
내 대답을 들은 아가씨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의자에 앉은 아가씨는 여느때처럼 눈 앞에 펼쳐진 많은 것들 중 무언가를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그런 아가씨의 옆에서 모자 속에 가려진 아가씨의 옆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가씨는 여전히 앞을 바라보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 오늘은 이 시간이 아니면 산책을 못 나올 것 같았어. ”
이유를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나는 차마 묻지 못했다. 아가씨의 말투가 오늘따라 힘이 없어보인 탓인걸까.
민석이 형에게 거두어져 아가씨의 옆에서 지낸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아가씨에게 말 한 번 붙여보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였다. 나는 갑자기 몰려오는 아쉬운 마음과 답답함에 아가씨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예기치 못하게 뒤를 돌아 나를 올려다보는 아가씨에 당황했다.
“ 다리 안 아파? ”
“ ..ㄴ, 네? ”
“ 손수건 깔아줄테니까 앉아, 여기 ”
아가씨가 손수건을 펼쳐들기 전에 나는 괜찮다며 무릎을 굽혀 어정쩡하게 아가씨 옆에 앉았다. ‘ 그게 뭐하는 거니. ’ 아가씨는 내 모양새가 웃기신가보다. 나도 아가씨를 따라 웃어보았다.
“ 넌 정말 재미있어. ”
“ 저... 아가씨. ”
“ 왜? ”
“ 뭐 하나만 여쭤볼 수 있을까요? ”
나의 물음에 아가씨는 물어보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 왜 오늘은 지금이 아니면 산책을 못 하시나요? ’ 끝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뱉은 나의 물음에 아가씨는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잘못된것 같은 기분에 후회가 밀려온다. 그냥 복희한테 물어볼걸. 나는 머리를 조아리며 아가씨 몰래 자책했다.
“ 그게 궁금했구나. ”
“ 죄송해요 아가씨, 제가 주제 넘은 질문을- ”
“ 괜찮아. ”
아가씨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아가씨의 눈을 오랫동안 마주볼 수 있는건 오늘이 처음이다. ‘ 부인이 오시잖아. ’ 긴 기다림 끝에 얻은 답은 사실 나에게 큰 해답이 되지 못했다. 부인은 딱히 산책을 말리지 않으신걸로 기억이 나는데, 대체 뭘까. 아가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아가씨를 따라 일어나며 의자를 챙겼다.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시던 아가씨는 자리에 멈춰섰다.
“ 오늘 자정에 부인이 잠들면 내 방으로 건너와. ”
아가씨는 그 말을 남긴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집으로 걸어갔다.
* * *
자정이 지나고 1층에서 동영과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시계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를 가냐는 동영의 말에 대충 얼버무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몇 번이고 제자리에 멈춰 고민했다. 정말 이 시간에 아가씨를 뵈러 가도 되는건지. 하지만 나의 두 발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덧 아가씨의 방이 있는 3층에 다다르고, 또 어제처럼 문 앞에서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혹시나 기다리실 생각에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방 문이 아니였다.
“ 코스케? ”
“ 아... ”
나는 나쁜짓을 하다 걸린 사람마냥 문을 열려는 손을 급히 숨기고 인사를 했다. ‘ 거기서 뭐하는건가요? ’ 부드럽지만 날카롭게 들려오는 질문에 나는 입술만 달싹였다.
“ 뭐, 마침 잘 됐네요. 잠시 나 좀 볼까요? ”
손에 땀이 베이기 시작했다. 아가씨의 방 문을 한 번 바라보곤 나는 요오카이 부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잠에 드신줄로 알았는데 아니였나보다. 탁자위엔 방금까지 독서를 한듯 책과 초가 놓여있었다. 자리에 앉은 내게 부인은 쓰고있던 안경을 내려놓으며 어제 하루동안 아가씨에 대해 물어왔다.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다는 나의 얘기가 끝나자 부인은 말없이 웃으셨다.
“ 코스케가 고생이 많았어요. ”
“ 아닙니다. 저는 한게 없는걸요. ”
“ 후후.. 그런 말을, 민석이에 비하면 코스케군은 아주 잘 하고 있는걸요. ”
부인의 말에 당분간 먼 곳을 다녀와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남긴체 사라져버린 민석이형이 떠올랐다. 나는 말없이 탁자 위 작게 타오르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부인은 이만 가보라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뒤를 돌아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와 문을 닫으며 방 안을 슬쩍 보니 부인은 초를 끄고있었다. 자정이 훌쩍 넘긴 시간에 주무시는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조심스레 문을 닫자마자 긴 한숨을 쉬었다. 긴장이 풀리길 기다리며 시간을 확인하니 이미 새벽 1시가 지나있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게 맞겠지, 하며 계단을 향하는데 아가씨의 방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나는 숨을 죽여 아가씨의 방 문 틈새로 눈을 가까이 대보았다.
“ 왜이리 늦었어? ”
“ 헙-! ”
아가씨는 놀라 큰 소리를 낼 뻔한 내 입을 손으로 막고 반대쪽 손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 왜 이제서야 오는거야. ”
“ 죄송해요 아가씨. 오다가 부인을 만나서 그만,, ”
“ 요오카이 부인을 만났다고? ”
순간 날카롭게 나를 쏘아부치려던 아가씨는 문 앞에서 이야기를 하기 싫으셨는지 내 손을 놓지않고 그대로 침대로 가 걸터앉고 나에게 의자를 내어주셨다. 부인을 만났던 나의 이야기가 끝나고 아가씨는 잠시 말이 없으셨다. 생각을 하는건지 창밖을 바라보셨고 나는 달빛에 비추어진 아가씨를 보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먼저 아가씨께 말을 건넸다.
“ 책.. 읽어드릴까요? ”
“ 그럴래? ”
나는 어젯밤 그대로 놓인 책을 펼쳤다. 어제는 분명 없었는데 오늘은 햇빛에 말린 꽃이 박힌 예쁜 꽃갈피가 꽂혀있었다. ‘ 아가씨가 만드셨나요? ’ 내 물음에 아가씨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오늘은 아가씨가 눕질 않는다. 아가씨의 눈치를 살피다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아가씨는 다리를 흔들다, 멈추다를 반복하며 그렇게 내 이야기를 들으셨다.
책을 읽어가던 나는 잠시 읽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아가씨를 보았다. 아가씨는 고개를 갸웃한체 나를 보았다.
“ 아가씨 내일 아침에 동양화 수업이 있으신데, 이제 주무셔야할 시간 아닌가요? ”
“ 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
“ 마저 읽어드릴게요. 이제 그만 누우셔야죠. ”
“ 너는 졸리지 않니? 나 때문에 못 자는거지? ”
“ 저는 괜찮아요 아가씨. ”
나는 아가씨께 웃어보이며 말했다. 아가씨는 내가 앉은 방향으로 몸을 틀어 누웠다. 나는 눈만 꿈뻑거리다 황급히 책으로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부스스- 아가씨가 움직일때마다 이불과 아가씨의 옷이 마찰하며 들리는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 너랑 있으면 왜이리 시간이 빨리 갈까. ”
아가씨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는 입가에 미소를 띄운체 눈을 감고 있었다. 저도 그래요 아가씨. 나는 목으로 금방이라도 넘어올 것 같은 답을 삼켜내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오늘도 아가씨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서야 마음을 놓고 나올 수가 있었다. 오늘따라 둥글게 떠오른 달이 아가씨를 닮아 고와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