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
〃대답 안 해?〃
………. 야, 야!! 별빛!!
넓은 거실, 긴 탁자를 중점으로 내 맞은 편에 있는 그 놈이 내 이름을 소리치며 불렀다. 집이 큰 편이라 그런지 소리가 쉽게 울렸다.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는데. 시끄러운 목소리가 기분 좋은 독서를 방해하는 느낌이 들어 얼굴을 찌푸렸다. 그 자식이 아무리 날 불러 제껴도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입을 다물고 꿋꿋이 침묵만을 유지시키며 고정된 자세를 풀고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아 앉았다. 오랫동안 앉아만 있었더니 허리에 무리가 가서 조금 눕는 듯한 자세를 취했고 머리를 소파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어 전부터 마음에 들어하던 소설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아니, 그를 무시해버리기 위해서 일부러 시선을 소설책에만 두어 읽는 척을 하였다. 내가 왜 이러한 행동을 하는지, 이에 대한 걸맞는 이유를 대라면 그야 물론 저 놈과는 절대 말을 섞기 섫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왜, 말을 한 줌이라도 섞는 걸 꺼려하는 이유는 딱 한가지였다. 다름아닌 나의 피붙이, 그것도 친오빠라는 그가 날 열렬히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인 즉슨 가족으로서의 사랑따위가 아니고, 오롯이 이성으로서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거북한 사랑으로도 모자라서 말도 안되는 집착까지 한다는 게 더 큰 문제지만.
〃너 저번에 그 새끼 뭐야.〃
말 좀 착하게 해.
〃존나 눈웃음치고 난리더라. 너 걔랑 한바탕 했냐?〃
………
〃시발 말 안 해? 내가 지금 할 말이 없어서 이 말 하는 줄 알아?〃
〃…〃
〃대답해.〃
입을 열려다가 말았다. 내가 말을 하면 지는 거다, 지는 것이다 하며 그의 말을 받아치고 싶은 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10분, 15분이 지나도 여전하게 대답을 하지 않는 나를 보고 답답했던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 반대편에 누가 봐도 건방지다고 말할 수 있을만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던 그는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탁자를 그대로 밟고 올라갔다. 그는 기다란 탁자를 따라서 한걸음 한걸음 발을 내딛더니 곧바로 내 앞에 서서 쭈그려 앉아 날 내려다보았다. 난 아까와도 같이 그를 무시하려고 애썼다. 그의 시선이 나를 꿰뚫을 듯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화가 난 건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책을 한장 넘겼다. 종이와 종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크다고 느낄 정도로 지금 여기는 무척 조용했다. 견디기 힘든 고요함이 날 내리누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다리에 무리가 갔는지 이내 탁자에 걸터앉아, 한쪽 다리를 굽혀 그 무릎에 턱을 괴었다. 한치의 미동도 보이지 않는 나를 아니꼬운 표정으로 쳐다보던 그는 특유의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말을 흘려보내었다.
〃사랑해.〃
………
〃사랑한다고.〃
………
〃넌 왜 사랑한다고 안 해줘?〃
〃……차학연.〃
말하지 않겠다면 잡아먹어 버릴 거라는 태세에 하는 수 없이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그러니 방금까지의 아니꼽다는 표정을 온데간데없고, 금세 생글생글 사람좋은 웃음을 지으며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치로 날 빤히 쳐다보았다. 주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강아지같은 그의 모습이란. 혀를 한번 차고 무미건조한 톤으로 그가 원하지 않는 약 만팔천구백가지의 대답들 중 몇가지를 내놓았다. 오늘 엄마가 말해준 거 안잊었지? 두시 사십분에 병원. 최대한 세시까지는 거기 가있으래. 반찬 엄마가 냉장고에 넣어 놓으셨대. 나 열두시쯤에 친구랑 약속 있으니까 점심은 알아서 챙겨. 엄마 아빠 또 출장 가셔서 일주일 후에 오실 거래. 그리고 좀 닥쳐. 능글맞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미처 부르기도 전에 속사포로 쏟아져 나오는 내 말 때문에 그의 얼굴은 다시 종이마냥 꾸깃꾸깃해졌지만, 뭐 별 상관은 없었다. 친누이를 사랑한다니…끔찍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역겹다고 인식되는 그런 사랑. 우리 남매에 대한 소문이 내가 다니는 학교에도 모자라서 근처에 있는 학교까지 소문이 쫙 퍼졌기에 사람들로부터 받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나 역시 일반 사람들과도 같은 사람일 뿐이라 그런 사랑 넘치도록 받아봤자 좋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오빠가 날 이만큼이나 아껴주는구나 하고 바보같이 기뻐했지만 그의 마음의 진실된 뜻을 알아버린 지금, 뭐든 신물이 났다.
〃넌 내가 정신병자로 보여?〃
〃그럼 아냐? 사람들이 너보고 정신 이상하다고 안하든? 그거 병이야. 고쳐야 해.〃
〃……야.〃
〃너만 모르는 거야.〃
〃…왜 너까지 그런 식으로 말해? 너…적어도 너만은, 내 편이여야 하잖아.〃
……
〃내 편이여야 하잖아!!〃
세살배기 어린애가 된 것처럼 떽떽대는 그가 귀찮았다. 시끄러웠다. 끝나지 않는 소음은 내 귀를 마구 찔렀다. 귀찮음을 뜻하는 한숨을 깊게 쉬었다. 나는 이 성가신 거머리를 언제까지고 상대해줄 수 없었다. 거의 한계점에 다다른 것 같다. 더는 아슬아슬했다. 정말 정신병원에 집어넣어버려야 좀 편해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딴 생각을 하는 내가 또 마음에 안든 건지 어쩐지 분간이 안가는 얼굴로 날 노려보며 차학연은 탁자에서 내려와 내 앞에 섰다. 그는 내 손에 잡혀있던 책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내 두 손목을 잡아 꼼짝 못하게 만든 후 자신의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크게 떴다. 책이 그의 등 너머 저 멀리에서 툭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내 마음도 같이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꽤 위험한 순간이었다. 일찍이 자리를 뜨지 않은 내가 한심했다.
입술이 닿을랑 말랑하는 아찔한 거리를 즐기며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기 싫었다. 그래서 내가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때면 그도 날 따라서 내 눈을 쫓았다. 금방이라도 키스를 퍼부어버릴듯한 상황이었다. 나는 불쾌한 두려움이 사무치는 걸 외면하고 안간힘을 써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날 쫓는 두 눈을 무시하고 눈을 반쯤 감은 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에 숨이 함께 섞여들어가 말을 한 건지 안한 건지 가까이서 듣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작았다.
〃그만…….〃
아차,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소름끼칠 정도로 즐거운 듯이 눈웃음을 지으며 이윽고 그는 입술을 맞추었다. 말캉한 혀가 잇새로 들어와 이곳 저곳을 건드리는 게 기분나빠 잡힌 손목에 힘을 주면, 똑같이 그도 힘을 주어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았던 그 용기를 동경했는데. 이제는 그 용기란 게 점점 지독하다고 느꼈다.
몇시간 같던 몇분이 지나고서야 입술을 뗀 그는 타액으로 촉촉해진 입술을 혀로 훑었다.
역겨웠다.
거친 숨을 쉬며 서러움이 북받쳐올라 울먹이는 날 보고서 그는 한마디를 내뱉을 뿐이었다.
〃사랑해.〃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난 고개를 숙여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새어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막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어긋난 건지 나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