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디] 늑대소년
03
w.마카
데구르르. 진한 4B 연필이 책상 위를 굴렀다. 말없이 턱을 괴고 앉아 경수는 한참을 그 위에서 연필을 굴렸다. 그러다, 순간 연필을 굴리던 손을 멈추자 길을 어긋난 연필이 바닥으로 툭하고 떨어졌다. 책상 모서리에 부딪힌 연필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경수는 그것을 눈으로 쫓지 않고 떨어진 데로 내버려둔 채 턱을 괸 자세 그대로였다. 초점 없는 눈길이 허공을 맴돌았다.
"..."
그러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자, 소년이 열린 방문 밖에 서 자신의 발께에 닿은 연필을 집어들고 있었다. 경수는 순간, 들켜선 안되는 사실을 들켜버린 어린애마냥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경수가 빠른 걸음으로 소년에게 다가갔다.
"뭐야, 또."
애써 당황한 마음은 감춘 채 경수는 괜히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소년은 말없이 연필을 들고 경수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경수 역시 그 눈을 피하지 않고 아니꼬운듯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그거 필요 없으니까 너 가지던지, 버리던지 알아서 해."
이내 연필을 든 소년의 손을 밀어낸 경수는 더 이상 볼 일 없단 듯 방문을 쾅 닫아버렸다. 방문에 기대선 경수는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아직도 방 한구석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자 끝에 한참을 경수의 시선이 머물렀다.
자꾸만 또 울적해지려했다. 우지끈, 안에서 누군가 자신을 구겨잡듯 따끔거렸다. 아직도 가슴 위에 올려져 있던 손으로 답답한 가슴을 팍팍 내리치던 경수는 이내 답답한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방을 나섰다.
두꺼운 가디건을 걸치고 잠시 바깥 바람이라도 쐴 요량으로 계단을 내려오던 경수는, 계단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새 거실로 내려온 소년이 거실 한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경수의 눈길이 소년의 손에 들린 연필에 멈췄다. 스윽 스윽, 제대로 연필을 잡지도 못하는 듯 투박하게 연필을 움켜잡은 소년이 방바닥 위에 줄을 긋고 있었다.
경수는 알 수 없는 눈길로 계단 위에 멈춰선 채 소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 경수의 시선을 느낀 소년이 순간 연필짓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경수와 눈을 맞췄다. 그제서야 팟 정신이 든 경수는 소년의 눈을 먼저 피해버리곤 빠른 걸음으로 현관으로 향했다. 경수의 발 끝에 소년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현관을 나선 경수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떨려오는 다리에, 애써 다리를 끌어 그네 쪽으로 걸어갔다. 털썩 그네의자 위에 앉아 경수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앉아 있던 경수는, 바깥바람에 차가워진 볼 위로 닿아오는 손에 멍했던 정신이 돌아 왔다. 고개를 들자 외출복 차림의 경수의 엄마가 경수의 앞에 서 있었다.
"아들,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바깥에 추운데 들어가 있지."
"...어디 가?"
"서에 좀 갔다 오려고. 혹시라도 실종 신고 들어와 있는 거 있나 확인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없으면 나중에 또 한번 서에 데려가 봐야지 뭐."
아. 짧게 대답한 경수가 다시 고개를 숙이자, 경수의 엄마가 살풋 웃으며 경수의 머리 위를 쓰다듬었다.
"근데, 애가 약간 이상한 것 같아."
"...뭐?"
"갇혀있었던 것 때문에 그런가, 애가 말을 아예 못하는 것 같더라고. 그렇다고 말을 알아듣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아예 처음부터 말하는 걸 모르는 애 같아."
말을...못해? 경수는 속으로 그 말을 뇌까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있긴 했던 것 같다. 다가오지 말라고 그렇게 소리를 치는데도 못 알아들었던 것, 아까도 자신이 하는 말을 무엇인지 모르겠단 듯 멀뚱히 서있기만 했던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 애도 갇혀있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 어두운 창고 안에서 며칠을 있었는지도 모르잖니. 아마 엄청 무서웠을거야."
"..."
"그니까 잘해줘. 너무 쌀쌀맞게만 대하지 말고."
그러고 보면 자신은 한 번도 소년이 무서워했을 거란, 두려워했을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이유 없이 소년을 미워했을 뿐, 정작 자신 역시 소년과 같은 상황을 겪어봤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힘든 기억인지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는 자신임에도 한 번도 소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알았지?' 라고 말한 경수의 엄마가 대문 밖을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그후에도 한참이나 경수는 그네 위에 앉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다시 집으로 들어와 현관에서 신발을 벗던 경수의 눈에 아직도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쪽을 살짝 힐끔거리더니 곧 다시 바닥 위에 연필을 긋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주방으로 들어선 경수는 거실 쪽을 힐끔 거리며 냉장고 안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어 들었다. 잠시 사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경수가, 이내 사과를 쥔 손을 꼭 말아쥐곤 소년에게로 향했다.
"..."
"..."
소년의 앞까지 다가가자 연필짓을 멈춘 소년이 고개를 들어 경수를 바라 보았다. 그 눈빛에 왠지 모르게 경계심은 담겨 있는 것 같지 않아 살짝 안심한 경수가 털썩 자리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경수를 바라보던 소년의 시선이 경수의 손에 들린 빨간 사과에 멈췄다. 사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몰라 속으로 말을 고르던 경수는 소년의 모습에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야."
"..."
"이거, 줄까."
경수가 소년을 부르자 다시 소년이 경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피식 웃은 경수가 소년의 입 앞으로 사과를 내밀었다.
"이거, 사과. 너 먹으라고."
그러나 계속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는 소년의 모습에 경수가 입을 앙 다무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알아들은 듯, 경수의 손에서 사과를 채간 소년이 이내 빠르게 사과를 먹어치웠다. 와삭거리는 사과 씹는 소리가 요란했다.
"씨까지 안남기고 먹네."
정말 순식간에 없어진 사과에 놀란 경수가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 또 다시 한번 허탈하게 웃었다.
"근데."
"..."
"...너 늑대야, 사람이야."
경수는 자신도 모르게 툭 생각하던 것을 내뱉었다. 그러나 곧 자신이 내뱉고도 무척이나 멍청한 질문이라 생각한 경수는 곧, '됐다.' 라며 말을 얼버무렸다. 소년이 늑대이건, 사람이건 소년은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을 거란 사실이 조금 허무하기도 했다. 경수는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쨌든."
"..."
"너 내 사과 받은 거다."
아, 이것도 못 알아들었으려나. 경수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이 사과 아닌 사과를 소년이 알아들었을까. 감정 표현이 어색한 경수 만의 표현 방식이었다.
나만 힘들다고 생각해서 미안해. 맘대로 널 미워해서 미안해.
속으로만 말하며 경수는 씨익 웃었다.소년의 시선이 경수의 웃음 위를 한참을 맴돌았다.
안녕하세요. 이번 주안에 올리기 위해, 연재텀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3편 지금에서야 데리고 왔습니다ㅠㅠ 이번편은 조금 짧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번편에서 경수가 종인이한테 마음을 여는 부분을 쓰고 싶었어요. 그다음부터 독자분들께서 원하시는 카디카디한 장면들이 나올 겁니다 ㅋㅋ 이번편은 전개가 좀... 빠른 듯한 느낌도 드네요. 2편 댓글들에 쟈가운 경수...를 보며 빨리 마음을 열어주고 싶었어요... 아이고 겨울감기 조심하세요. 저는 항상 겨울에 달고 사는 코감기 땜에 정신을 못차리겠네요...ㅜㅜ '늑대소년' 읽어주셔서 감쟈쪄요 하트~~ 암호닉 됴르륵, 똥주, 두비랍, 왕관, 동해, 고등어, 전주 비빔밥, 도도하디오, 향수, 김미자, 알찬열매 감사합니다 저의 사랑을 드릴게요ㅠㅠ 잡담+암호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