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우유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다. 복잡한 아이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논하는 게 아니고 체감이 그렇다는 거다.
재미있으면 빛의 속도로 지나가지만 조금이라도 지루해지면 답답할 정도로 가지 않는 게 시간이다. 나는 오늘 그 원리를 철저하게 복습하고 있었다. 선생의 수업을 자장가로 듣고 책상에 누워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박경이… 아니라 텅 빈 책상이 쓸쓸하게 혼자 햇빛에 젖어있었다. 평소라면 있어야 할 자리주인이 없는 그 자리는 너무나 허전하고 무료하다. 가끔 졸릴 때마다 꾸벅꾸벅 책상과 맞닿을 듯 꺾어지는 고개도, 피곤할 때 몰래 두 손으로 가리고 하는 하품도,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꼬물꼬물 노트에 필기하는 하얀 손도 오늘은 아무것도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 박경에게 너무 의지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도 눈에 들어오는 게 없다. 햇살은 창백하고 나는 심심하다.
단지 학교에 한 사람만 없을 뿐인데 이렇게 하루가 재미없을 수도 있구나. 흐아암. 일분 간격으로 하품을 하고 십초 간격으로 시계만 들여다보고 있다. 점심시간까지 10분이나 남았다.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 걸까, 죽겠다.
짜증을 부리며 책상에 이마를 쿵 찧는데 문득 김유권이 아침에 준 쪽지가 떠올랐다. 수업 끝나고 보자고 했지? 귀찮은데 그냥 토낄까. 아, 갈등된다. 박경이 없는 학교는 내게 별로 의미가 없다. 빨리 집에나 가서 취미생활이나 즐기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다. 역겨운 사과우유라도 좋으니 지금은 제발 먹어보고 싶었다. 사과우유를 먹는 나를 뚫어져라 관찰하면서 내 얼굴의 눈동자, 입모양, 구김살하나 놓치지 않고 샅샅이 살피는 경이를 보는 재미는 꽤 쏠쏠하다. 사과우유를 먹고 얼굴을 찌푸리면 울상이, 나름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주면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환하게 웃는 박경. 경이를 떠올리자 덜 조인 나사처럼 입가가 스륵 풀어졌다. 때로는 알 수 없는 4차원 같은 경이지만 그래도 귀엽다. 아아, 박경이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든 자리는 잘 몰라도 난 자리는 잘 안다더니 내가 딱 그런 격이다.
딩동댕동 드디어 4교시가 끝났다. 종례고 나발이고 감옥 같은 학교를 뜨기 위해 가방을 메고 막 반을 빠져나가려는데 누군가에 의해서 내 손목이 딱 잡혔다.
“우지호, 어디가?”
“…아, 김유권.”
좇됐다. 그냥 집에 가려고 했는데 김유권한테 정면으로 걸리고 말았다. 귀신같은 새끼. 유권은 하아, 하고 얇은 입술로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녀석의 귀에 걸린 피어싱이 햇빛을 받고 반짝반짝 빛났다.
“지금 집에 갈 거면 그 전에 나랑 얘기 좀 해.”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나를 질질 끌고 학교 뒷뜰로 데려갔다.
“야 일단 손 놔봐, 손.”
남자끼리 무슨 손을 잡고 그러냐. 나는 징그러워서 도착하자마자 쓱 손을 뺐다. 별로 오래 잡지도 않았는데 날이 덥다보니까 김유권에게 잡힌 손목이 촉촉하니 땀에 젖어있었다. 정말 불쾌하다. 나는 교복바지에 쓱쓱 땀을 닦았다.
“너 욕해봐.”
……? 이건 또 무슨 상황. 나무 그늘아래 서있는 탓에 군데군데 얼굴에 그림자가 내려 있어 더 음험해 보이는 김유권. 그런 김유권이 뜬금없이 나보고 욕을 하란다. 이유를 물으니 내가 욕을 할 때 얼굴을 찡그리는데, 그게 너무 섹시한 것이 완전 자기 취향이라는 거다. 기껏 불러와서 하는 소리가 겨우 그거냐? 지 때문에 집에도 못가고 이러고 있는데 뭐 저딴, 어우 이걸 확 한 대 팰 수도 없고. 어이없는 걸 넘어서 짜증까지 난다. 맴맴맴- 저 멀리 어디선가 매미 소리가 어렴풋이 울린다.
“돌았냐?”
“아니.”
김유권이 아주 진지하게 나를 보며 대답했다. 미친놈, 내가 중얼거리자 김유권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빤히 나를 보았다. 할짝. 혀로 입술을 천천히 훑어 내리며 무슨 나를 맛있는 음식 보듯이 하는데 순간 온몸에 개미가 기어다니는 줄 알았다. 지, 징그러워! 나는 얼굴을 구기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린 것 같다.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고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고 얼른 도망쳐야할 것 같다.
“더 할 말 없으면 나는 이만 가본다.”
“지호야.”
으윽! 또다. 제발 이름 좀 평범하게 불러줄 수 없을까? 설명하긴 어렵지만 뭔가… 굉장히 찐득찐득한 발음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데 한여름에 때 아닌 닭살이 돋는다. 김유권. 뭐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히 심상치 않은 놈인 건 분명하다. 나는 주춤주춤 물러섰다.
“너 남자친구 있어?”
내가 물러나는 것만큼 김유권은 다가온다. 김유권은 잔뜩 경직되어서 얼음처럼 땡땡 굳어있는 나를 보더니 뭐가 좋은지 킥킥 웃는다. 나는 녀석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철컹. 뒤로 물러나다가 결국 철장에 몸이 부딪히고 말았다. 이제는 물러날 곳도 없다, 젠장.
“남자친구 말고 여자 친구라면…… 없어.”
존나 강제 솔로 인증을 당하다니. 뭐 니는 여자친구 있냐? 그래서 솔로의 마음을 짓밟고 우월 의식이라고 느끼고 싶은 거냐? 으르렁대며 김유권을 응시하자 녀석은 생글생글 웃더니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는 내게 다가와 넥타이를 만지작거린다.
“너, 나랑 사귀자.”
데엥- 데엥-
갑자기 머릿속에서 종이 쳤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더니 김유권의 얼굴 형체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주춤. 균형 감각이 사라지고 이내 눈앞이 깜깜해진다. 뭔가 엄청 뜨거운 것이 내 입을 덮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정오의 뜨거운 열기도 느껴지지 않았고 시공간 개념이 사라졌다. 마치 내가 서있는 자리만 조각내서 우주 밖으로 튕겨나간 듯 했다. 입 안으로 무언가 폭포수처럼 밀려 들어왔다.
“응…….”
말랑하고 끈적거리고 미끄덩거리는, 이른바 소세지 같은 것. 그것이 내 입안에서 물 만난 물고기 마냥 팔딱팔딱 신이 나서 헤엄치고 다녔다. 뜨거웠다. 굉장히 뜨거웠다. 이 열기를 도대체 어떻게 다스려야할지 머리가 꽉 막혀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촉각을 제외한 모든 오감이 증발해버렸다.
철컹
뒤로 밀려난 몸이 철장에 부딪혔고 그 순간 사라졌던 모든 감각이 돌아왔다. 번쩍. 나는 눈을 떴다. 김유권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리고…….
“지, 지호 형?”
눈만 굴려 오른쪽으로 보니 표지훈이 경악한 채 우리를 보고 있었다.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멘탈붕괴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까. 나는 영혼이 나가서 멍하니 지훈이를 보았다. 츄웁, 하더니 내 입안에 있던 열기가 빠져나갔다.
“의외로 저항 안하네?”
김유권이 침으로 뒤범벅이 된 입술을 혀로 할짝할짝 핥으며 베시시 웃었지만 나는 그런 김유권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지? 뭐지? 대체 이게 뭐지? 표지훈은 충격 받은 얼굴로 나와 김유권을 보더니 이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선 뭐라고 욕을 중얼거리다가 어딘가로 급히 뛰어갔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서 입술을 매만졌다. 촉촉한 걸 넘어서 매우 끈적거렸다. 손가락에 이상한 점액질의 액체가 길게 늘어져서 묻어났다.
“오늘부터 일일이다.”
피식, 하고 김유권이 웃으며 내 가슴을 자신의 손으로 노골적일 정도로 쓱쓱 매만지더니 (게다가 더 소름끼치는 건 유두가 있는 자리 같았다) 이내 씽긋 윙크를 하고 먼저 자리를 빠져나갔다. 나는 아직도 철창에 기대서, 그동안 오던 정체 모를 편지의 주인공이 김유권이였나, 의외로 편지와 실제는 어울리지 않는 구나 등등을 생각하다가 한참 후가 되어서야 김유권이 나에게 키스를 했음을 깨달았다.
18년 모태 쏠로 인생, 첫 키스를 남자에게 빼앗긴 것이다.
***
정신이 나가서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도 모른 채 아침을 먹고 팬티바람으로 등교할 뻔한 걸 엄마가 주걱으로 등짝을 후갈겨 준 덕분에 겨우 정신 차리고 바지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어제 집에 돌아와서 내내 멘붕 상태였다. 남자한테 키스를… 남자한테 키스를… 남자한테 키스를……. 그야말로 충격의 도가니였다. 그거 생각한다고 어제 밤 한숨도 자지 못해서 턱 끝까지 다크써클이 내려와 있었다. 터벅, 하고 땅에 발을 딛자마자 골이 딩딩 하고 울렸다. 땅이 파도처럼 넘실넘실 거리고 하늘색은 노랗다. 어지럽다.
“지호형. 실망이에요.”
교문을 들어서는데 누군가가 나를 어깨로 막았다. 지하 천오백 미터의 동굴 목소리를 듣자하니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표지훈이다. 니가 실망하건 말건 지금 나 기분 지금 매우 안 좋거든? 평소라면 어디 감히 후배가 하늘같은 선배를 앞길로 가로 막냐며 친절하게 훈계를 해주겠지만, 지금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기에 간신히 표지훈의 어깨를 밀치는 정도로 끝냈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털썩 쓰러질 것 같았다.
“경이 형이… 경이 형이 불쌍하지도 않아요!?”
힘겹게 걸음을 떼고 있는 나를 향해 뒤에서 표지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골 흔들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거기서 경이는 또 왜 나오는가 싶어 무시한 채로 반으로 향했다. 무언가 마음을 정화해 줄 게 필요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박경이 너무 그리웠다. 녀석의 강아지 같은 환한 웃음을 보면 실타래처럼 엉망진창으로 엉킨 기분이 날아갈듯 좋아질 것 같다. 상상만 해도 벅차다. 나는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힘차게 문을 열고 경이가 있는 자리를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박경은 오늘도 오지 않았다.
개막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독자님들 죄송해요.. 나름 스토리를 짠다고 했는데 왜 자꾸 이렇게 되는건지 모르겠thㅓ요.. 후후 이놈의 고자손 ^_T 뭐를해도 병맛이 되는군요 다음화가 아마도 완결일듯합니다! 끝까지 달려주세요 S2
코너킥 / 마가레뜨 / 바나나 / 망가리 새주 / 쮸 / 요플레 / 바지
님 감사합니다!!! ♥♥♥ ㅅrㄹ6ㅎH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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