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한테 할 말 있어?”
밥 먹고, 영화 보고, 노래방에서 신나게 놀다보니 별이 총총 올라오고 하늘은 짙은 남색 빛으로 변신했다. 막차를 겨우겨우 탄 지호와 박경은 피곤함에 지친 몸을 이끌고 눈에 띄는 빈 좌석에 앉았다. 그냥 앉은 것도 아니고 정자세로. 피곤한 와중에도 얼마나 똑바로 앉았는지 서로의 다리도 스치지 않을 정도였다.
“없는데.”
그렇게 말하는 박경의 얼굴에는 나 불만이오, 라고 한가득 쓰여 있었다. 거짓말하는 게 눈에 뻔히 보일 정도였지만 지호는 눈이 까무룩 감길 정도로 졸린 상태라서 그러냐? 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하품을 했다. 박경은 잠에 심취한 지호의 얼굴을 정말이지, 한 대 갈겨주고 싶었다. 눈에서 불길이 일어날 만큼 활활 타올라서 지호를 노려보지만 지호에게 자신은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원래 악플보다 무플이 더 무서운 법이다. 관심 하나 없어 보이는 지호의 태도에 박경은 마음 한 구석이 찡-하게 지끈지끈거렸다.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커먼 피멍이 보일지도 몰랐다.
차창 너머로 빠르게 스쳐가는 도시의 야경이 제법 그럴듯하다. 자동차 헤드라인과 건물에서 세어 나오는 빨갛고 노란 불빛이 별똥별처럼 길게 꼬리가 져서 늘어지고 곳곳에 걸린 간판과 네온사인과 가로등이 밤을 아침처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박경은 창문에 이마를 기대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님이 바로 옆에 있는데 왜 나는 이렇게 외로운 걸까요.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박경은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에 한껏 감성에 젖어 저도 모르는 사이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4개월 전, 우지호와 자신이 사귀던 그때로 말이다. 매미가 찌르르르 울고 푸른 녹음이 무성한 아주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박경은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공연히 입가가 풀어지고 눈이 반달로 접혔다. 실은 아직도 잘 믿겨지지 않았다. 여자를 그렇게도 밝히는 우지호와 자신이 사귀다니…… 그야말로 꿈만 같았고 천국으로 이사 온 듯 행복의 연속이었다. 10년 동안 홀로 외사랑하던 첫사랑과 사귀게 될 확률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박경은 차가운 창문을 손끝으로 훑으면서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도 없다. 기쁨은 찰나다.
어느새 곤히 골아 떨어져 꾸벅꾸벅 인사하고 있는 지호를 보며 박경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다가 우울해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의자 밑으로 길게 뻗은 둘의 다리는 닿을 듯, 닿을 듯 하면서도 닿지 않고 있었다.
반팔티를 입고 에어컨을 쐬어도 덥다고 지랄해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긴팔을 입고 코트를 두르고 목도리로 꽁꽁 싸매도 한없이 추운 겨울이 찾아왔다.
마음까지도 꽁꽁 얼려버리는 매서운 혹한이.
***
“너는 어떻게 생각해?”
“아… 그러니까 플락토닉 사랑에 대해서 말이죠?”
표지훈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자신의 집에 쳐들어와서 플라토닉 사랑과 에로스적 사랑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여놓는 박경을 보며 난처한듯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흠… 지훈은 커피를 타서 박경에게 내어 준 다음 의자에 앉았다.
“아무래도 둘 다 필요하지 않을까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박경이 손을 짝 치며 기뻐했다. 바로 그거야!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니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자리에 박차고 일어나서 동동 발을 구르는 박경을 보며 지훈은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선배는 여전히 밝고 명랑하고 기운이 넘쳤다.
“지호형이 너무 금욕적인가 보네요.”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이었는데 박경이 침울해져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묵묵히 자리에 앉았다. 어? 진짜? 지훈은 우지호를 속에서 그려보다가 말도 안 된다 싶어 휙휙 고개를 저었다. 엄청 밝히게 생겼는데? 기상천외 할 정도로 의외여서 지훈은 떨떠름한 얼굴로 박경을 응시했다. 주눅들어있는 박경을 보니 그의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다.
“궁금해서 하는 말이니까 부담갖지 말고 말해주세요.”
“응…….”
“진도, 어디까지 가보셨어요?”
표지훈은 내심, 섹스는 몰라도 적어도 그 비슷한 단계까지는 가보았을 거라고 추측했다. 10년 동안 친구로 있다가 애인이 된 사이기 때문에 스킨십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더 관대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보기만 해도 측은함이 절로 묻어나는 얼굴로 박경은 눈까지 글썽거려서 대답했다.
“포옹…….”
“…….”
으잉?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박경이 진짜야, 하면서 탄식 아닌 탄식을 하고 지훈이 타온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저, 과자도 같이 드세요. 지훈은 박경에게 티타임용 쿠키가 담긴 접시를 밀었다.
“어어, 그러니까 둘이 사귄지 8월, 9월, 10월…….”
“횟수만 따지면 5개월이야. 8월 말에 사귀었으니깐.”
“100일 지났어요?”
“응.”
소개팅으로 만나 일주일도 못가고 깨지는 커플이 부지기수인데 100일 정도면 그래도 꽤 오래된 편애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지훈은 설마 싶어서 박경에게 물었다.
“100일 날 뭐하셨어요?”
“영화 보고 밥 먹고 노래방 갔어. 아니 노래방 가고 영화 보고 밥 먹었나?”
“……설마.”
지훈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박경에게 물었다.
“만날 때마다 그러세요?”
“어. 순서만 바꿔서.”
헉! 놀랄 노자다. 지훈은 섹시하고 야하게 생겨서는 아주 엉큼한 짓도 서슴지 않을 것 같던 지호가 실은 완전히 쑥맥인데다가 감정표현에 엄청나게 무디다는 황당한 사실을 듣고 허허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경은 어깨가 축 쳐져서 계속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솔직히 우지호랑 안는 거 말고 뽀뽀도 하고 싶고 키스도 하고 싶고, 그…그…… 관계도 맺고 싶거든!?”
그럼요, 사랑하는 사이인데 당연하죠. 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쳐주자 박경은 용기를 내서 계속 속마음을 얘기했다.
“그런데 우지호 그 미친놈은 아닌가봐. 나 혼자만 몸이 달아서 전전긍긍 대는데 무관심한 우지호를 보면 내가 막 변태 같고……. 하아아, 우지호 고자 아냐? 어떻게 사귄지 백일이 넘었는데 키스는커녕 뽀뽀도 안하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건데, 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야? 존나 빡쳐!”
한이 맺힌 박경의 목소리에 지훈은 선배가 참 마음고생이 심했구나 싶었다. 착하고 밝고 긍정적인 경이 선배가 저 정도로 열에 뻗친 걸 보면 정말 지호 형이 보통 수준으로 무관심한 게 아닌가 싶었다. 오히려 지호보다 경이 형이 더 순수해 보이는데 말이지.
“형이 가만히 기다리지만 말고 먼저 대시 해보시지 그랬어요.”
지훈이 이렇게 묻자 박경은 뭐 그런 당연한 소리냐며 눈을 치켜떴다. 대시는 이미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하게 했지만 그럴 때마다 번번이 퇴짜 맞았다는 것이었다.
“하도 답답해서 내가 11월 11일 날, 바로 연인들의 날이라는 그 때 오죽하면…….”
박경이 부들부들 떨며 그 치욕스러웠던 날을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우지호는 애초에 11월 11일 전 날 빼빼 데이는 한낱 상술이라며 우리만큼은 그런 더러운 장사치들에게 놀아나지 말자고 단단히 박경에게 일러두었다는 것이다. 물론, 빼빼로 데이는 상술이 맞았다. 그나마 발렌타인데이는 명확한 기원이라도 있었지만 빼빼로는 기원조차도 아리송한 뿌리 없는 기념일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 다들 알면서도 속아주는 거다. 빼빼로 데이라는 형식적인 타이틀을 빌려 왔을 뿐, 자신의 연인에게 사랑을 베풀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바로 본질적인 의미다. 박경은 지호가 그런 기념적인 행사마저 온몸으로 거부하는 것 같아 씁쓸하고 서운하긴 했지만 굳이 그런 마음을 빼빼로를 통해 확인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지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지호 나 빼빼로 대신 다른 거 해줘.”
“어, 뭔데?”
“……키스.”
홧김에 나온 말이었기 때문에 박경은 말을 내뱉은 즉시 곧장 후회했다. 이런 무드라고는 눈꼽도 없는……! 목까지 빨갛게 달아올라서 어쩔 줄 몰라 박경이 낑낑대자 우지호가 푸핫, 웃었다. 아주 어이없다는 듯이.
“박경. 그딴 장난 재미없어.”
그리고는 아주 차갑게 일침을 가했다는 것이 박경의 설명이었다.
“이제 우지호가 날 좋아하는지도 어쩐지도 모르겠어.”
어느덧 커피를 전부 다 마셨다. 박경은 바닥이 보이는 빈 잔을 두 손으로 그러모으고 있다가 자조적인 미소를 띠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가 무겁다. 너무 불쑥 쳐들어와서 놀랐지? 미안. 박경은 지훈에게 뒤늦게 사과를 하고 가방을 멘 뒤 올 때처럼 예고 없이 밖으로 나갔다. 태풍이 몰아친 듯 모든 일이 너무나 뜬금없고 갑작스럽다.
표지훈은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박경의 커피 잔을 보다가 이내 경이가 나간 문을 멍하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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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 / 쮸 / 바나나 / 부스러기 / 마가레뜨 / 크림우유 / 설라 / 요플레 그 외에 사과우유를 봐주신 모든 분들 감사해요 ㅠ_ㅠ!!!
완결에 급급해서 너무 내용을 막전개했는데 다들 좋게 봐주셔서 너무너무 송구하긔 S2
그래서 이로케!! 에필로그를 들고 왔습니다 ㅋㅋㅋㅋㅋㅋ(빠르죠잉?) 상편만 보셔도 느껴지시나요... 뒤에 가면 갈수록 얼마나 오그리토그리가 될지..훗...ㅋ..ㅋ...
아, 그리고 사과우유 메일링합니다! 1화부터 다시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맞지 않는 문맥이나 오타를 고쳐서 텍스트파일로 묶었어요 ^~^ 그럴리는 없지만 혹시 필요하신분 있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봐아아로 메일 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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