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생의 클리셰 04
(부제: 모라요)
난 원래 지각이라는 걸 하지 않는 사람이다. 머리를 못 감는 한이 있어도 지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
이유는 벌청소가 떡진 머리보다 싫기 때문이었다. 담임쌤을 세상에서 가장 만만히 여기는 우리반 애들은 정재현을 빼고는 청소 당번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냥 눈치를 보면서 대충 내가 맡은 구역을 쓸거나 닦다가 조용히 귀가하는 정도였고.
그런데 벌청소는 쨀 수가 없다. 생기부에 무단 지각이라고 표기해 놓겠다는 쌤의 협박에 다들 일찍 학교에 온다.
나는 깔끔과 거리가 다소 먼 사람이다. 엄마가 난 예술가로 태어났었어야 했다고 매번 말한다.
내 방 자체가 예술이다. 사람 사는 방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내 눈에는 꽤 깨끗한 것 같다.
그렇기에 난 청소에 소질이 없다. 선생님한테 단 한번도 말끔히 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번 오기가 생겨서 열심히 윤을 내고 먼지를 쓸었지만 그 날 화분을 깨트려서 혼났었던 것 같다.
"너 미쳤니?"
"......몇 신데요?"
"지금 여덟시 삼십분이다."
거짓말하지 마요. 눈을 비비며 핸드폰을 보자 정말 경악할 노릇이었다.
정말 여덟시 삼십분이었다. 오.... 오십분까지 안 들어가면 청손데....
버스를 타면 10분정도 걸리는데 준비하는 시간이 있으니 아홉시에나 도착할 것 같았다.
아.... 망했다. 나 어떡하냐. 급히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교복을 입는 둥 마는 둥 입은 뒤 집에서 뛰쳐 나왔다.
이럴 때만 늘 신발끈이 풀리더라.... 신발끈을 밟고 넘어질 뻔했다. 아무도 못 봤겠지?
'잔액이 부족합니다.'
"어? 어.... 이럴 리가 없는데...."
"뭐야, 학생! 지금 뒤에 기다리는 거 안 보여? 그것도 확인을 안 해?"
"죄송합니다.... 어떡하지."
"내가 학생을 봐주면 뒤에 학생들도 다 봐줘야 해. 그래서 안 돼. 현금 없어?"
"현금 없어요.... 죄송합니다."
진짜 정말 망했다. 머피의 법칙이라더니 버스비까지 없었다.
이제 난 정말.... 망했구나. 아홉시까지도 못 가게 생겼네. 안절부절 못하며 대열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자, 뒤에서 힘 있는 한 마디가 들렸다.
학생 두 명이요. 익숙한 목소리에 저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너란 말이지.
"고맙지?"
"......."
아니, 정말 하나도 고맙지 않다. 자연스레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에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만원 버스라 자리가 없었다. 그냥 이어폰이라도 꽂아야 하나 싶어, 버스가 출발할 때 즈음 주머니를 뒤져 보았지만 이어폰은 나오지 않았다.
옆에 딱 붙어 있는 사람이 김동영이라는 사실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주머니를 뒤지던 와중에 버스가 갑자기 멈췄고, 자연스레 내 몸은 뒤로 쏠렸다.
김동영이 내 팔을 잡아 주었다. 환장하겠네. 덤덤한 얼굴로 고맙다고 말했다.
"기분 안 좋아?"
"아니."
"그럼 왜 그래."
"원래 그래."
"원래 안 그러잖아. 나한테."
그 말이 왜 그렇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학교 앞에 도착하니 45분이었다. 교실이 2층이니 천천히 가도 되겠다 싶었지만, 김동영 때문에 속도를 높였다.
다리가 긴 건지, 내가 빨리 걸어도 김동영한테는 금방 따라잡혔다.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하면 알아서 지 갈길 가겠지, 라는 생각에 정말 앞만 보고 걸었다.
대답도 없는 나에게 쉴 새 없이 말을 붙이는 김동영이 짜증났다. 여기서 내가 화를 내면 지는 거라 차마 화를 낼 순 없었다. 입술을 앙 깨물었다.
"너 요새 정재현이랑 친하다며?"
"......별 게 다 소문이 나나 보네."
"걔랑 뭐야?"
"시끄러우니까 그만 좀 물어봐.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너가 뭔데 그렇게 이것저것 오지랖인지 모르겠네. 주제 넘다는 생각이 안 드나? 싶어 언성을 높였다.
일말의 미동도 없이 계속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정재현도 맨날 살풋 웃어서 얄밉다고 생각했었는데,
김동영에 비하면 정재현은 그냥 사람 좋다는 생각이 드는 정도였음을 깨달았다.
"질투나서."
"옘병하네. 정재현이 싫은 거겠지. 아니야?"
"너한테 붙어 있어서 싫은 건데."
저 새끼 봐라.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교실에 들어갈 생각도 안 하고 그동안의 김동영의 행적을 다 떠벌리고 싶었지만,
상대할 가치도 없겠다 싶어 입을 다물었다. 난 저 새끼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 진짜 저질이야. 욕밖에 안 나온다.
김동영은 정재현을 싫어한다. 김동영 때문에 내가 정재현을 싫어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뒤가 구리고 차가운 애라며 어쩌구 저쩌구 별 욕을 다 하긴 했었다.
"걔 가까이 하지 마."
"너가 우리 엄마냐? 내가 네 딸이여? 자꾸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야."
"......."
"그리고 뭘 가지고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정재현 착하거든? 내가 살다살다 그렇게 우직한 애는 처음 보거든? 공부도 존나 열심히 하고 착하다니까?"
"......."
"또 내가 걔랑 뭐 사귀어? 뭔 사이는 참나...."
극한 분노에 더이상은 참을 수 없다고 느껴서 김동영이 말할 틈도 안 주고 마음껏 쏘아붙였다.
정재현도 별론데 너는 진짜 최악이야. 라는 말은 차마 못 하고 아무 말이나 줄줄줄 늘어놓자,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 나를 보는 김동영이었다.
아직 담임쌤이 안 들어와서 다행이다 싶었다.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뒤를 돌아 교실로 돌아가려는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칭찬이지?"
-
진심 아닌데. 아니, 진심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정재현 가만 보면 이상하다니까. 착하다는 말이 뭐가 좋은데. 웃기는 놈이네.
그냥 그 상황이 너무 웃기고 어이가 없어서 밥을 먹다가 혼자 피식피식 웃었다.
미쳤나봐. 애들이 내 등짝을 때렸다. 정신 차려. 각박한 세상 속에서.
"너 아까 김동영이랑 대판 싸웠다며?"
"존나 와전되네. 대판은 아니고 내가 뭐라뭐라 한 거야."
"걔도 존나 뻔뻔하다니까. 너한테 뭐 잘났다고 말을 시키고 그래?"
"그러게. 나만 이상한 애 만들고."
정말 김동영보다는 정재현이 1271271271271271172배는 나았다. 그건 정말 객관적인 나의 판단 결과다.
오늘 하루 종일 나만 보면 나도 내가 참 착한 것 같아, 하면서 허허 웃는 정재현도 정말 별로지만,
걔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별로다. 난 찌질하기 때문에 그 때의 일은 죽을 때까지 뼛속 깊이 각인해 놓을거라고 다짐 또 다짐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자리에 앉기 전 언제 와 있었는지 조용히 문제를 풀고 있는 정재현이 보였다.
자리에 앉기가 참 거시기하네. 오늘도 그 여자애가 오지 않을까 싶어 주위를 맴맴 돌았다.
어, 역시. 출첵하러 오셨구먼. 복도로 슬그머니 나가자 물을 마시고 있는 김동영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오.... 너무나 좆 같은 걸. 엿 먹어라. 자존감 도둑. 온갖 저주를 하다 눈이 마주쳤다. 씩 웃으며 손을 흔들기에 환장하겠단 표정을 짓곤 교실로 돌아왔다.
내가 들어오는 걸 봤는지, 그 여자앤 정재현이 따로 말도 안 했는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살짝 상기된 얼굴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왜인지 정재현도 얼굴이 좀 붉어져 있었다. 왜 저럴까. 별 생각 없이 교과서를 꺼내 자리에 앉았다.
정재현에게 살짝 고마운 점이 있다면, 왜 아까 김동영과 실랑이를 벌였는지 물어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얘기하기엔 너무 길다. 우리 담임이 너무 길다며 지갑 속 네잎클로버 썰을 안 풀어주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여전히 정재현과 나는 어색했고, 또 조용했다. 오늘은 하늘에 구름이 좀 끼어 있었다.
구름이 베시시 웃는 것 마냥 찢어져 있었다. 재현아, 잠깐 나와 봐. 선생님의 부름에 웃으며 자리를 나선 정재현이었다.
그냥, 계속 샤프를 쥐고 있던 정재현이 신경 쓰여서 덩그러니 펼쳐져 있는 공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뭐라 끼적인 것 같은데 그 위에다가 샤프로 마구 사선을 그려 놔서 뭐라고 써 있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냥 물음표가 좀 많다는 거 빼고.
-
꺄악 돌아왔어요. 동영이는 누굴까요... ?_?
힌트 : 지난 화들을 잘 복습하다 보면 알 수 있다.
별 심심찮은 글인데도 댓글 달아주시고 관심 가져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ㅠㅠ
앞으로 더 열일하겠습니다 헝헝... 고삼 화이팅....
진짜 엔씨티 없었으면 전 고삼 생활 할 수 없었을 거에요.....
뜬금없지만 여주 정말 부럽네요 전 태어나서 단 한번도 저런 남정네들과 학교를 다녀본 경험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없을 거라 생각해요. 왜 나 안 서공예.......(울컥)
아, 댓글에 간간히 암호닉 신청을 하시겠다는 분들이 계셔서요!!
암호닉 신청은 언제나 받고 있습니다 ㅎㅎ 신청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에요ㅠㅠ
늘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