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y Café
비 오는 날의 카페
내가 자주 가는 카페가 있었다. 학교 옆 작은 길을 걷다 옆으로 틀면 나오는 아담한 카페였는데, 하루는 친구를 만나러, 하루는 비가 와서 잠시 피하러, 또 하루는 그냥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가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큰 체인의 카페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 편이었다. 왜냐고? 나도 확답을 줄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냥 그 아담하고 작은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좋았다. 문을 열면 코 끝으로 확 전해지는 커피 냄새가 있었는데, 그 카페만의 향기가 났다. 다른 카페에서는 찾아보지 못 한 그런, 특이한 커피 향. 또, 작은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은 날 뭔가 센치해지게 만든달까. 하여튼, 난 그 자그마한 카페가 좋았다.
그곳엔 약간 토끼 같은 외모를 가진 알바생이 있었는데, 내가 갈 때마다 항상 있었다. 나는 내가 이 카페의 단골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사람 얼굴 잘 못 외우는 나도 이 알바생의 얼굴은 똑똑히 기억하는데, 이 알바생이 날 기억 못 할 리는 없다. 단골손님에게 한 번쯤은 웃어주거나 아는척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알바생은 특이하게도 내게 아는 척을 한 번 안 해준다. 그냥, 되게 무뚝뚝하다라는 단어 하나로 이 사람을 수식할수 있을 정도랄까. 내가 커피를 주문하면 네,라는 대답과 함께 주문 확인과 금액 확인만 한 번 더 했다. 그게 우리 대화의 끝이었다. 아니, 대화랄 것도 없는, 그냥 형식적인 절차라고 하는 게 맞겠다.
나는 나름 특이하다면 특이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엔 따뜻한 바닐라 라떼를 마시고, 비가 오는 날엔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남들은 그런 날 보고 비 오는 날에 전 남친한테 아이스 아메리카노 받고 차인 사연이라도 있어서 그러는 거냐,라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난 그런 사람들의 말에 그저 허허 웃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러는 이유가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끝에는 나만의 작은 룰이라고 나 자신에게 핑계같은 이유를 붙여버렸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날도 그 카페를 들렀다. 교수님이 내 주신 산더미 같은 과제와 전공 책을 함께 가져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문에 힘을 조금 실어서 열자, 문 위쪽에 달린 작은 종이 딸랑거리며 소리를 냈다. 동시에, 내 코를 부드럽게 감싸는 특유의 커피 향과 왠지 모르게 따뜻한 음악소리가 날 반긴다. 내게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는 알바생에게 나도 인사를 했다. 네, 안녕하세요. 물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이다. 무뚝뚝한 표정 때문인지, 쉽사리 다가가지를 못 하겠다.
“따뜻한 바닐라 라떼 미디엄 사이즈로 하나 주세요.”
“네, 바닐라 라떼 따뜻하게, 미디엄 사이즈. 삼천 이백원입니다.”
나는 토끼 같은 그 얼굴을 슬쩍 보고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그의 손에 넘겨주었다. 그러다 그의 손바닥을 타고 백 원짜리 동전이 하나 굴러떨어졌다. 바닥에 안착한 동전을 집어 들어 그의 손에 다시 넘겨주자, 아니나 다를까, 감사합니다,라는 짤막한 인사만 하고는 다시 그 과묵한 입을 닫는 알바생이었다. 토끼 같은 외모와는 달리, 무뚝뚝한 성격에 의외라는 생각이 이따금 들었다. 아마도 전생에 도도하고 차가운 성격의 토끼가 아니었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속으로 하고는 영수증을 받아들었다.
진동벨도 마저 받아들고는 창가 자리로 가서 앉았다. 창가 자리는 거의 내 지정석이라고 할 만큼 이 카페에 올 때면 여기에만 앉았다. 손님도 한두 명 있거나 아예 없는 편이라 항상 이곳에 자리를 잡곤 했다. 그러고 보니 나 되게 일관성 있다,라는 생각을 뒤로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뭐야, 토끼잖아?”
휴대폰을 켜자마자 친구 놈이 보낸 카톡이 떴는데, 이번에 새로 산 토끼라며 제 애완 토끼의 사진을 찍어 보낸 것이다. 화면 가득 채워진 복슬복슬한 흰 털의 토끼를 보자 나도 모르게 푸스스 웃었다. 쫑긋 세워진 귀와 앞으로 나온 귀여운 앞니가 내가 아는 누군가와 많이 닮아서 무의식중에 웃었던 것 같다.
“토끼는 여기에도 있는데.”
턱을 괴고선 저쪽 카운터의 알바생을 한 번 흘깃 쳐다보았다. 마치 옛날 옛적 김도령이 예쁘다고 소문난 옆집 순이를 돌담 너머 훔쳐보듯이 말이다.
“헙.”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 토끼 알바생이랑. 밤에 엄마 몰래 김치찌개에 고기만 쏙쏙 훔쳐 먹다가 걸린 것처럼 화들짝 놀라서는 0.1초 만에 시선을 피했다. 정말 거짓말 안 하고 0.1초다. 그만큼 놀랐다.
하 씨. 안 그래도 안 웃어서 무서운데 눈까지 마주쳤어. 아 설마 눈 피했다고 기분 나빠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솔직히 너무 저승사자 본 것처럼 눈 피했나, 아 다시 봐야 하나.
나는 이딴 자질구레한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풍선 떠오르듯이 떠올랐다. 나 정말 바보 같다. 이상한 생각도 모자라 심장까지 두근두근 뛰어대는 내가 한심해서 당장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러면 저 토끼 알바생이 더 이상하게 볼 것이란 걸 알았기 떄문에,그것까진 하지 않았다.
“나레기 죽어.”
난 또 혼잣말을 하며 눈알을 살살 굴려 그 알바생을 다시 보았다. 기분 나빠서 욕하고 있진 않겠지, 마음 졸이며 말이다. 그랬더니 웬걸, 우유를 부으며 살짝 웃는듯한 표정이 보인 건 내 착각일까. 막 엄청 환하게 웃는 것은 아니었지만, 입꼬리가 살짝 말려올라간 그런 웃음이었다.
뭐야, 토끼가 웃을 줄도 알아. 나는 속으로 신기해하며 그의 옆얼굴을 계속 쳐다보았다. 어딘가 사람을 홀리는듯한 얼굴이란 말이지. 무뚝뚝한 표정이었을 때도 잘생겼다고 느꼈는데, 웃는 건 더 잘생겼다. 잘생긴 사람만 보면 입을 헤벌쭉 벌리고 보는 나였다. 가만 보니 키도 크고, 꽤 훈훈한 전체적인 모습에 말 한 번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빠지는 나였다.
그때, 휴대폰에서 요란한 벨소리가 울려댔다. 그제야 난 알바생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저 편에서는 딸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왜 엄마.
“딸, 뭐 해.”
- 나 지금? 과제하려고 카페 와 있지.
엄마가 내게 전화를 하는 일은 대게 두 가지였다. 심부름을 시키거나, 내가 늦게 들어오면 어디냐고 꾸짖는듯한 전화가 다반사였다. 이번엔 무슨 심부름을 시킬까, 하며 카운터 쪽의 알바생을 다시 흘끔 쳐다보았다.
- 딸, 오늘 비 온다는데 우산 가져갔어?
우산? 비 온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아 그렇지, 나 늦잠 자서 일기예보 못 봤구나. 나는 또 우산을 까먹고 가져오지 않았다. 엄마가 덜렁댄다며 날 타이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까먹었다.”
멍청한 나를 자책하며 집에 어떻게 가나,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새 창문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은 하나둘 떨어지더니 점점 더 굵어지며 속도를 가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창문을 통해 빗줄기가 아스팔트 바닥을 적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 집에 어떻ㄱ…”
그때였다. 내 뒤에서 저기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남자의 목소리가.
“네…?”
나는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선 적지 않게 놀랐다. 그 남자는 깔끔한 남색톤의 유니폼을 입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알바생이었다. 그래, 그 토끼 알바생.
내 눈앞 예상외의 인물에 날 애타게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오는 휴대폰도 잊은 채 바보같이 입을 벌리고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일까, 왜 내게 말을 거는 걸까.
“저기, 비 오는데.”
그 남자는 창밖을 가리키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의 희고 긴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을 따라 내 고개도 창문 쪽으로 틀어졌다. 아 네… 난 또 바보같이 말 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잘생긴 남자 앞에서는 말을 제대로 못 하는 병에 걸렸나 보다.
“커피 바꿔드릴까요?”
“네?”
정말 예상을 비껴가는 남자다. 이 남자 뭘까. 궁금증이란 게 폭발해버렸다. 그렇게 무표정으로 날 아는 척도 안 하던 남자가, 내가 날씨마다 커피를 바꿔 먹는 것을 기억한다.
“비 오는 날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맞으시죠?”
그 말을 끝으로 작게 웃어 보인다. 반달 모양으로 접히는 그 눈이, 웃는 입술 사이로 살짝 보이는 토끼 같은 이가, 이토록 매력적일 줄은 몰랐다. 그 얼굴에 내 심장은 에스프레소라도 마신 듯 빠르게 뛰었고, 내 시선과 몸은 경직되듯 굳었다.
남자는 이런 내 상황을 다 꿰뚫고 있기라도 한 건지, 한 번 더 날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그에 나도 따라 웃었다.
그래,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평생 이 남자와 알바생과 손님의 관계밖에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가슴팍에 달린 그의 이름표를 슬쩍 보았다.
김동영. 그의 이름이었다.